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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ㅣ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히포크라테스가 말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히포크라테스가 환자의 목숨은 짧은데 의술이 발전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린다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통상 예술하면 서예,그림,춤,조각 등과 같은 것을 떠올리기 마련이다.그런데 한국에서는 예술분야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밥벌이를 하고 작품과 명성을 날리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요즘에야 대중문화,예술이 발달하여 보편화되었지만 근.현대사에 있어 그림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큰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그 대표적인 예가 이중섭화백과 박수근화백이다.
그중에 이중섭화백에 대한 삶의 이력을 살펴 보기로 한다.일제강점기 평안도 평원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기전까지 그림을 죽 그려 왔고 평원에서 만난 일본여성 마사코와 혼인을 하게 되는데 한국전쟁으로 인해 가족이 모두 부산으로 피난을 오면서 그림 그리는 일보다는 생계를 위해 일용직도 마다하지 않는 등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다.한국전쟁이 끝나고 자식(태원,태성)들의 장래를 위해 아내와 자식들은 일본 도쿄로 넘어가고 이중섭화백은 홀로 남아 전전긍긍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충무 등지에서 기거하다 제주도 서귀포에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혼자가 된 그에게 따뜻한 인생의 동반자마저 멀리 두고 있기에 고독감과 상실감은 컸던 것으로 보여진다.그에게는 절친과 같은 구상시인이 곁에 있어 마음의 위로가 되었겠지만 그는 멀리 떠나보낸 아내(남덕)과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으로 가득차 있다.
가난과 고독을 술과 담배로 나날을 보내면서 몸과 마음은 병색이 짙어만 가고 식음을 전폐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향년 40세의 일기로 운명을 달리했다.그의 유골은 일부는 아내에게 보내고 일부는 한국에 묻혔다고 한다.생전 그렇게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아버지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이중섭화백은 결국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그는 한국전쟁 이후 두 차례(1954년 미협전과 1955년 잡지 신미술)에 출품 및 소개를 했다.그가 선보인 작품은 주로 동물이 위주였는데 소,닭,투우,황소,흰소,새들,투계가 세상에 빛을 발휘하고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당시 출품,소개된 작품이 현재로서는 한편도 볼 수가 없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이중섭화백은 아내 남덕 및 자식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내고 아내는 남편(아고리) 이중섭에게 답장을 보낸다.이중섭화백은 아내 남덕을 최고의 천사,최고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남덕(마사코)는 남편에게 함께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이중섭화백은 아내 및 자식들을 향한 그리움과 희망,사랑하는 마음을 실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만의 소중하고 소중하고 또 소중한,한없이 착한 오직 유일한 나의 빛,나의 별,나의 태양,나의 애정의 모든 주인인 나만의 천사,가장 사랑하는 현처 남덕 군,건강하게 기운을 내주오.아스파라거스 군이 춥지 않도록 두텁고 따뜻한 옷을 입혀주오.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아고리(이중섭 자신)가 화를 낼 거요.화를 내면 무서워요. - 본문 -
진실로 사랑했기에 거리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내에 대한 최고,최상의 표현을 아낌없이 표출했으며 하루라도 빨리 만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그에게 그림은 생의 전부이었을 것이다.다만 그의 성격이 유들유들할 만큼 사교적이지 못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고지식한 면이 다분했던지 홀로 생각하고 삼키면서 그림 그리기를 쉬지 않고 이어나갔던 것으로 보여진다.부부의 연이 오래도록 이어졌더라면 더할 나위 없었을텐데 안타깝게도 이중섭화백의 운명은 길지 못했던 것 같다.구상화백이 전하는 이중섭화백의 일화는 그의 성정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자신의 무능과 무력,불성실로 자신의 불행을 타인에게 돌리고 세상이나 사회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세상을 속였어! 그림을 그린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놀고 다니며 훗날 무엇이 될 것처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