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 문명의 중심
프랜시스 우드 지음, 박세욱 옮김 / 연암서가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인류문화사의 발자취를 보면 유구하게 이어져 오는 경우보다는 실이 툭 끊어지는 것처럼 얼마간의 시간 속에서 번창하고 멸하여 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특히 산업혁명이 시작되기전 사람이 두 발로 걷고 낙타와 말이라는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경제활동을 했던 적이 있다.그 시대는 화폐로서 물건을 주고 받는 것보다는 물물교환이 주가 되었다.문화인류사에 족적을 남기고 문명의 광휘를 빛낸 것이 실크로드라고 생각한다.동서양의 문화가 시작되는 시발점이고 실크로드를 따라 카라반(대상인)들이 모래먼지 나는 사막 위를 걷고 고산지를 넘으면서 문물을 전파하고 교류를 했던 것이다.

 

동서양 문물의 교류가 러시아와 영국이 주도한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결과물과 돈황 석굴의 유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과 연구,호기심을 더욱 증폭해 나갔다.실크로드는 중국 한나라 수도 시안을 시발점으로 하여 중앙아시아를 거쳐 로마에 이르는 광대역의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기에 동서양의 문화,역사,소통과 상생의 측면에서 커다란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본다.

 

 

유럽에서 중국으로 오기도 하고 중국에서 중앙아시아,서남아시아,인도 등을 왕래하고 교류하는 사이에 오아시스 도시가 형성되기도 했으며 중국의 비단을 주로 사갔다.이러한 교역이 7~10세기 초반에 이루어졌다.특히 돈황은 오아시스 도시로서 4~10세까지 중국의 불교 중심지였으며 러시아와 영국의 탐험대에 의해 돈황석굴이 발견되면서 잊혀졌던 실크로드의 문물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일부는 제국에 의해 약탈을 당하기도 했다.중국이 자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한 소이였던 것이며 그 소중함을 깨닫고부터는 외세,외국인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여진다.

 

실크로드 문화의 중심지 돈황에서 중앙아시아,남부 인도를 가려면 만년설로 유명한 고지대 및 사막들이 산재되어 있는데 그 험난하고 위험한 지형을 극복하고 동서양의 문물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톈산산맥,쿤룬산맥,티베트 고원,파미르 고원(세계지붕이라고 일컬어짐)을 비롯하여 타클라마칸 사막,고비사막 등의 요새와 같은 험난한 지형들로 이루어져 있다.베일에 가려진 돈황석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잊혀지고 사라진 제국들을 비롯하여 문물의 교류가 매우 방대하고 다양한 교류라인에 또 한 번 경이롭기만 하다.혹독한 기후 특히 8개월간 혹한이 지속되는 중앙아시아와 오아시스의 도시들의 기후는 황량하고 맹렬하기만 하다.

 

비단의 원료인 명주실을 짜기 위해서는 뽕나무와 누에가 필요한데 비단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전설상의 황제 부인인 누조(嫘祖)이며 중국 비단이 지중해에 전해진 것은 기원전 2세기경이라고 한다.실로 비단의 교류가 유구하다는 것을 새롭게 알았으며,그리스.로마의 작가들은 비단을 쾌락과 퇴폐와 연관짓기도 했다.속칭 비단옷은 야시야시한 느낌이 없지 않다.명주실을 이용한 다양한 화집을 통해 중국의 공예기술,수준이 높다는 것도 말해 주고 있다.누에 및 뽕나무 산지는 중국 남서부부터 산동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에서 골고루 생산되지만 주로 양자강 삼각주 지역이 주산지이다.

 

 

중국의 비단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그리스.로마로 전래되고 중국은 서역에서 생산되는 참깨,완두콩,양파,고수풀,오이 등을 일찍이 한나라 시기에 유입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이렇게 물자 교역이 빈번하면서 중국은 교역과 이동을 통제하고 상품이 유입될 때 일종의 관세를 부과하며 밀수방지책도 마련했던 것으로 보여진다.육로를 통한 교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바닷길을 통한 교역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품목이 진주,별갑,상아,무소뿔 등이다.몇 명이 무리를 이룬 상인들이 있는가 하면 보따리 장수와 같은 사무역을 행하는 이들도 있었다.

 

 

동서양의 문물교역의 정점인 돈황석굴과 천불동은 불교문화가 융성하였음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그 주위는 황량하고 건조한 기후 탓인지 목화밭,양,염소들이 많다.돈황설굴 안에는 다채로운 불상과 불탑,문서,그림들이 수장(收藏)되어 있는데 불교자료들이 위주가 된다.놀라운 것은 다양한 언어가 발견되고 다양한 종교의 문헌도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서 돈황석굴은 실로 동서양의 문물교류의 보고(寶庫)가 아닐 수가 없다.이렇게 장구한 세월 동안 각종 문물과 문서들이 돈황석굴 안에 숨겨져 있었고 그 석굴을 폐쇄한 이유가 무엇일까.그것은 서하(西夏)왕국을 세운 탕구트족이 위협해 올 무렵,아니면 1000년에서 1010년 사이에 닫혔을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19세기 러시아 및 영국 탐험대에 의해 돈황석굴이 알려지면서 폐허가 되다시피한 그곳에서 다양한 문물과 문서,가치있는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왕의 폐허 별장,땅 속에서 건져 올린 부처 두상과 괴수상 등이 관심을 끌게 한다.중국역사 전문학자이면서 영국 국립도서관 중국문헌 큐레이터인 프랜시스 우드저자 의해 동서문물 교류의 역사와 문화,언어,그림과 문서,탐험일지를 비롯하여 중국에 종교전파를 위한 흔적의 일환으로 다양한 종교자료도 돈황석굴에서 발견되어 인류학,고고학,종교학적인 측면에서 커다란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꼼꼼하고 정교한 자료 및 해설이 이 글의 완성도를 높여 주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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