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아들, 조선시대 왕위 계승사 -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
한명기.신병주.강문식 지음 / 책과함께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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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 주던 왕조시대가 구한말까지 죽 이어졌다.특히 조선시대 27대 왕조의 역사를 읽어 가노라면 적장자 원칙하에 맏아들에게 왕위을 물려 주는 것이 관례이고 통념으로 여겨졌다.그런데 국왕이 맏이를 차기왕으로 낙점을 하더라고 왕비,친인척,당파,조정의 대신들의 입김에 의해 변수가 생기면서 애초 국왕의 의지대로 이행할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그런데 국왕이 점찍은 왕세자가 국왕이 바라는 대로 따라 주지를 않는다든지 시절을 잘못 만나 국왕의 판단력이 흐려 주위의 의견과 주장에 휩쓸리는 경우도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왕과 아들이 나라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기에 자연인이 아닌 만큼 국사의 제대로 이끌어 가면서 국리민복을 챙겨야 하는 막중한 자리이다 보니 국왕이 차기왕권을 이을 자식을 세상에 널리 반포했을지라도 시대의 흐름과 변화,분위기에 의해 국왕은 마음을 달리하여 다른 세손을 임금의 자리에 앉히게 하는 사례도 있었던 것이다.특히 조선은 개국초부터 국체를 성리학에 두고 유교를 국시로 내세우면서 모든 일처리가 경직되고 고집불통으로 보일 정도로 원만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도 조선이라는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왕위 계승을 놓고 갑론을박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피비린내 나는 소용돌이를 치기도 하는 등 왕위를 놓고 지리멸렬한 느낌마저 주기도 한다.이 글에 나오는 다섯 명의 왕위 계승 예정자들은 각각 자신의 위치와 입장,성격과 체질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원인도 있고,당시 조선은 명나라와 사대교린의 관계에 있었기에 인사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명의 허락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 상당히 고역스러웠을 것이다.게다가 명과 청이 전쟁을 치르고 청이 이기자 청은 때를 놓칠세라 조선에 조공의 압박을 해오고 몇 차례의 호란까지 일으키면서 왕위 계승에도 빨간불이 켜졌던 것이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이들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는 읽는 내내 흥미롭기도 하고 정치권력의 비정하기도 함을 새삼 발견할 수가 있었다.태종의 경우에는 도승지(都承旨)로 임명되는 등 정사를 거뜬하게 치를 수가 있다고 태조 이성계도 그에게 신임을 했지만 이방원이 정몽주 살해사건을 계기로 이성계는 이방원의 포학하고 비도덕적인 성향으로 그를 정치적 실권에서 배제했지만 이방원은 정권야욕에 눈이 먼 나머지 그의 친형제,이복동생 그리고 조선개국의 공신 정도전마저 정적으로 몰아 숙청하고 만다.태종은 왕위에 오르면서 그의 맏이인 양녕대군에게 모든 정사를 맡기려 하지만 그는 대신의 딸 여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아기까지 생기는 등 도덕적으로 치명타를 입게 된다.하지만 태종은 양녕대군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면서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당근과 채찍을 내리지만 결국 양녕대군은 폐위되고 충녕대군인 세종이 왕위를 물려 받게 된다.

 

다음에 나오는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의주까지 몽진을 가게 되고 한양.개경.평양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의주 행재소에서 선조를 국사를 맡고 광해군으로 하여금 한양 이남의 국사를 임시로 맡게 하는 등 그에 대한 선조의 신임을 두터웠지만 명은 적장자의 원칙에 의해 광해군을 임금으로 승인할 수 없다는 것이고 영의정 유영경은 광해군이 전섭하는 것이 싫은 나머지 상소를 올리면서 선조는 광해군에 대한 태도가 돌변하고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넘긴다고 유지를 남긴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면서 전쟁의 상처를 씻고 국가의 전열을 가다듬는데 치중하지만 토목공사에 집착을 하면서 사대부,민심 모두를 잃게 되고 명을 배신하고 후금과 가깝게 하고 폐모살제(廢母殺弟)까지 저지르고 만 광해군은 결국 폐위되고 만다.이것이 인조반정이다.

 

인조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맏이인 소현세자를 일찍이 차기 왕으로 지목하고 분조의 임무까지 맡겼다.그러는 가운데 이웃 후금은 태조 홍타이지 체제로 들어가면서 아민을 대장으로 조선을 침입하는 정묘호란이 발생하면서 인조와 소현세자는 남한산성을 물샐틈 없이 포위한 청군에 의해 인조는 수치스러운 삼배고구두례의 항복을 하고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봉림대군 등 수많은 사람들이 청으로 인질로 잡혀간다.인조는 소현세자가 인질로 잡혀가고 그의 귀에는 그가 청국에 입조할 것인가,아니면 퇴위할 것인가가 들려오면서 내심 불안감을 감추지를 못하는 한편 소현세자와의 관계는 악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소현세자는 인질로 잡혀간 지 8년 만에 귀국을 하여 아버지 인조에게 귀국인사를 하지만 쌀쌀하게 백안시한다.소현세자는 귀국하자마자 학질이라는 진단을 받고 3일 만에 세상을 뜨게 되는데 그의 죽음은 의문의 독살설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의 임금 중에서 최장수를 누린 영조(52년)는 마흔둘에 사도세자 낳게 되는데 열 살에 왕세자로 내정하여 대리청정까지 맡기는 등 사도세자에 대한 그의 신임은 두텁기만 하다.하지만 사도세자는 착하면서 내성적인 성향을 띤 나머지 영조의 눈에는 그의 대리청정이 미덥지가 않다.제왕이 되려면 정관정요를 읽어야 하고 조강,주강,석강,야대까지 받아야 하고 부왕 영조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못하면 호된 질타와 함께 그를 가르치는 사부,시강원 관료,환관까지 벌을 받아야 했기에 사도세자에겐 커다란 스트레스였을 것이다.이렇게 빡빡하고 다그치는 영조의 훈육에 사도세자는 온몸에 종기 내지 곪음이 도져 온양 온천을 다녀오라는 허락을 받아 간만에 외유를 한 셈이다.설상가상으로 사도세자는 관서지방을 외유하고 돌아온 것이 영조와의 격절된 관계가 되고 만 셈이다.게다가 사도세자와 정적이었던 노론세력(홍봉한)과 사도세자의 행실에 대한 나경언의 고변은 영조로 하여금 사도세자의 삶을 척결하는데 결정적 원인이 되고 결국 사도세자는 부왕 영조의 명령에 의해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짧으면서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정치권력은 비정하고 무상하기만 하다.지금이야 국민의 투표에 의해 정치지도자가 선택되고 결정되지만 왕권중심시대였던 조선에서는 성리학에 기반을 두고 왕위를 적장자에게 넘기게 되지만,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적장자임에도 불구하고 부왕의 눈과 귀,비위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차자에게 왕위를 물려 주기도 하고 피를 흘리는 혈육전쟁을 통해서라도 왕위를 차지하려고 했던 왕들도 있다.그들은 자신의 시각과 경험에 의해 자신과 똑같이 국사를 치뤄주기를 바라고 그러한 그릇이 되기만을 원해서인지 비운에 간 세자들은 가련하고 안타깝기만 하다.게다가 왕권중심의 사회였을지라도 왕위문제만큼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었을 만큼 주변세력들의 입김과 알력이 컸다.그리고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 등의 전란과 조.명의 사대교린에 의한 조공과 인사권 문제까지 명과 청의 승인을 얻어내야 했고,왕위문제까지 당파의 이해간계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었던 불투명하고 불안전한 시대였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그 와중에 왕위문제로 힘들었을 세자들의 말못할 고민과 갈등,번민은 행복보다 불행했던 시간이 더 많았으리라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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