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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해상을 항해하던 화물선이 조난당하고 극적인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유일한 생존자 파이(본명 : 피신 몰리토 파텔)의 구명보트상에서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의 아찔하고 긴박한 죽음과 불안,공포 등의 순간 순간의 상황이 그토록 손에 땀을 흠뻑 적시게 하기에 집중과 몰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다른 말로 하면 숨죽여 읽어 나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헤밍 웨이의 <노인과 바다>역시 노인이 바다낚시로 삶을 꾸려 가면서 바다의 물고기들과의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그린 글이었다면 이 글은 모든 가족을 잃고 주인공 파이와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의 기묘한 공생이 아슬아슬하게 그려지고 있고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나이 어린 파이는 그가 믿는 신의 가호를 굳건히 놓치지 않아 살아 남을 수가 있었다는 점에서 경이감과 감동을 안겨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쓴 얀 마텔저자는 극한상황에 처해 있는 인간의 심리를 파이가 갖고 있는 '행동 지침서'와 함께 심리묘사를 정교하게 풀어 내고 있다.이것은 인간이 극한상황에서도 하나밖에 없는 삶을 가볍게 여기고 살아야겠다는 자신의 의지와 종교적 믿음을 버리지 않고 순간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공포,피말리는 한계상황을 어린이답지 않게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는 파이의 멋진 행동묘사가 압권이었다.리처드 파커 호랑이 또한 인간과는 물과 기름과 같은 관계로 비춰지지만 파이의 놀라운 연기력과 재치,호랑이를 적대시 하지 않는 순수한 공생의 의지가 아슬아슬한 찰나를 빗겨나게 해 주는 디딤돌 역할을 해 주었다.파이는 힌두교를 비롯하여 유대교,천주교,이슬람교와 같이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모국 인도를 떠나기 전 폰디체리에서 아버지가 동물원을 운영했기에 동물에 대한 특징과 습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 리처드 파커와의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살아있는 백과사전과 같이 단어,문장 모두가 살아 있다. 망망대해에 구명보트와 뗏목 사이에서 벌어지는 숨가쁜 나날을 지루하지 않게 묘사해 주고 있는 점이 찬탄을 금치 못할 정도이다. 화물선에 탔던 거의 모두가 폭풍우에 의해 침몰되고 선원,요리사,어머니가 구명보트 위에서 처참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는 광경을 지켜봐야만 하고 파이가 어머니를 죽인 선원을 정의와 울분으로 단칼에 죽이고 인육의 맛까지 본 파이,그리고 얼룩말,하이에나,호랑이들의 정글의 법칙에 의해 호랑이만 남게 되어 기묘하게 파이는 호랑이와 태평양 망망대해 위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행동지침서'와 비상식량 그리고 바다 낚시로 낚아 올린 새치,만새기,바다거북 등을 토막내어 리처드 파커의 허기를 채워 주면서 길고 긴 항해가 이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파이의 가족은 당시 간디총리와 정적 관계에 있었기에 혹시라도 모를 해코지라도 당할까봐 캐나다를 향해 일종의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지만 항해 도중에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어린 파이만이 살아 남지만 그는 호랑이의 밥이 되느냐 아니면 폭풍에 휩쓸려 물고기의 밥이 되느냐의 기로(岐路)에 놓이지만 그에게는 든든한 '행동 지침서'가 있고 마음으로 굳게 믿는 신앙이 있다.나이는 어리지만 어린이답지 않게 위기와 불안,공포를 슬기롭고 영민하게 순간을 대처해 나가려는 그의 삶에 대한 의지와 생명력은 경건하기만 하다.이렇게 구명보트와 뗏목은 하나의 끈이 되어 주어 태평양의 거센 파도를 하염없이 흘러 흘러서 파이와 같은 처지의 맹인도 만나면서 인간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교감하기도 한다.리처드 파커 호랑이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파이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파이에게 평온함과 목적의식을 알게 모르게 선사해 준다.
1977년 7월에 시작한 망명의 길이 1978년 2월에 종료되고 파이는 멕시코 자그마한 해안가에 도착한다.때론 지긋지긋하고 때론 홀가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파이는 화물선 '침춤 호'의 국적 일본 운수성 해양부 직원들에 의해 침춤 호가 조난당한 당시의 상황과 구명보트상에서 그가 겪었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식으로 녹음되어 가면서 그는 혼자만 알고 느꼈을 당시의 슬픔,아픔,고통,인내의 시련을 담담하게 들려 주고 있다.특히 리처드 파커는 멕시코 해안에 당도하면서 그의 본래의 야생적인 삶으로 돌아가지만 파이에게는 리처드 파커와의 227일간이 불안과 공포,흥분의 도가니였지만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끝까지 살아 남았다는 점에서 파이는 그 생명력과 신앙의 힘이 크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 있다.
"리처드 파커,다 끝났다.우리 살아남았어.믿을 수 있니? 네게 도저히 말로 표현 못 할 신세를 졌구나.네가 없었으면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정식으로 인사하고 싶다.리처드 파커,고맙다.내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이제 네가 가야 될 곳으로 가렴.(중략)나를 친구로 기억해주면 좋겠구나.난 널 잊지 않을거야.그건 분명해.너는 내 안에,내 마음 속에 언제나 있을 거야.(중략)잘 가,리처드 파커,안녕.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파이는 인간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의 관계가 불안과 상처,공포와 죽음이라는 극한상황이었지만 오히려 파이의 정신적 성숙과 삶의 지혜,슬기로움을 역으로 가르쳐 주었고,리처드 파커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동물이지만 파이가 보여준 지극한 정성과 동반자와 같은 행동이 리처드 파커에게 무언으로 전해져 갔으리라 생각한다.사람이든 동물이든 해코지 하지 않고 진심을 담아 대하고 행동을 보여 주면 시간은 걸릴지라도 점차 가까워지면서 묘한 상생의 관계를 이어갈 수가 있다는 것을 새삼 시사해 주고 있다.작가 또한 이 작품의 탄생을 위해 구상과 자료조사,현장답사,상상력과 예리한 통찰력을 섞어 균형과 조화를 최대한 보여 주고 있어서 뭉클한 감동을 안겨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