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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할망이 있었다 - 우리의 창세여신 설문대할망 이야기
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현대 인류문명은 과학과 기술문명을 주축으로 이성과 논리에 입각하여 획일적,정형적,물질적인 토양이 지배적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그것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더군다나 IT산업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는 이제 기계에 거의 의존하다시피하고 그것을 통해 소통과 교류,인적 네트워크망을 형성하고 있는 세태이다.무한경쟁의 시대이다 보니 일일이 사람을 만나 대화하고 타협하고 결론을 도출하던 시대를 벗어나 즉각적이고 즉자적인 결과들을 갈망하고 단편적인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한 번쯤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 속으로 깊게 빠져 오랜 세월 이어져 오고 있는 신화를 만나 보면서 그 세계의 원형을 비롯하여 인간세상에 던지고 있는 신화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산물을 살펴 보면서 모래알과 같이 흩어져 버린 인간세계가 신화의 원형이 추구했던 인간세계가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의식적인 현대사회의 모습을 잠시 접고 신화의 세계로 빠져 드는 즐거움과 흥미를 느끼게 되리라 생각한다.

한국에도 제주에 창세신화가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못 흥미롭고 그것이 인간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와 추구하는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미와 가치는 놀랍기만 하다.그것이 바로 창세여신의 주인공 '설문대할망'이다.설문대할망이 세상에 나와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인간세계를 어떻게 조종하고 가르침을 주었는가를 새롭게 인식하고 발견해 갈 수가 있었다.설문대할망이 제주를 대표하는 창세여신으로서 한라산을 베개로 삼고 다리는 제주 앞바다 관탈섬에 이르렀다고 한다.빨래를 할 때에는 양손을 한라산 꼭대기에 짚고 빨래감은 관탈섬에 놓고 빨래를 했다는 키도 크고 힘도 센 설문대할망은 신비로운 존재가 아닐 수가 없다.또한 치마폭에 흙을 날라오면서 바람에 날린 흙부스러기는 수많은 오름이 되고 나머지는 한라산을 만들었는데 한라산이 너무 높아 꼭대기 일부분을 꺾어 그 흙을 한쪽으로 던졌는데 그것이 산방산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설문대할망은 여신의 원형으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관장하고 지역과 지구 생태계 생명의 도래와 소멸,그리고 모든 유기체의 위대한 그물망이 조화롭도록 관장하는 '어머니이신 자연'으로 더 알려지고 있다.
설문대할망과 같은 창세여신이라는 신화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고 있는데 세계의 종교,문화,영성 안에 숨겨져 있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정령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것이다.만물의 영장이면서도 지극히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이러한 신화의 힘을 빌어 불완전한 느낌과 분리된 상처,불안을 완화하기 위해 이것을 마음의 의지처로 삼기도 한다.또한 설문대할망은 자신의 자녀,사람뿐 아닌 말 못하는 돌과 바람과 구름과 별 같은 뭇 생명에게 자신의 생명의 기운을 나누어준 천사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그래서인지 제주에는 여자,바람,돌이 많은 곳이라는 생각을 더해 주고 그곳은 평등과 평화가 뿌리 내린 땅이기도 하다.18,000 신이 있어 신들의 고향이라고 하며 500곳의 당과 300개의 신화가 남아 있는 땅이기도 하다.
"설문대 시절에......"라는 기원의 시간부터 존재했던 노래가 시대에 맞는 창세의 기운을 불러내는 주문이 되기를 바라며 옛날 옛적 선조들은 혼돈의 시기가 올 때마다 다양한 의례를 거행했다고 한다.설문대할망이 살아서 했던 무수히 많다.우주의 질서를 짜고,완성되지 않은 속옷과 다리,똥구멍으로 출산한 황금빛 오름,바다를 만든 오줌 홍수,다리가 셋 달린 솥덕(돌 따위로 솥전이 걸리도록 만든 것),자궁으로 낚은 고기,할망의 죽음과 잠자는 할망의 모습이 흥미진진하게 전해지고 있다.집단의 꿈이라고 일컫는 신화는 사람이 꾸는 꿈과 공통 문법을 생각하게 한다.그것은 기존 세상의 파국과 새로운 세상의 탄생,구 질서의 몰락과 새 질서의 도래,묵시와 창세의 우주적 드라마가 재현된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설문대할망의 자취가 발견되고 있는 제주의 자리들은 제주민들의 삶과 직접 연관이 있다고 한다.놓다 만 다리가 현재의 항구 자리이고,길쌈을 하려고 솔불을 켜던 자리가 해맞이를 하러 하는 자리이고,오줌 홍수로 탄생한 바다는 파랑(波浪)이 심해 어부들의 삶을 위협하는 곳이라고 한다.또한 제주 남해의 물결과 동해의 물결이 합류되는 섭지코지는 제주에서 가장 풍요로운 어장이라는 점도 단순한 사실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혼은 깊고 그늘진 골짜기에 거주한다.어두움 속에서 태어난 무겁게 늘어진 꽃들이 거기서 자란다.강물이 끈적끈적한 시럽(syrup)처럼 흐르고 이 강들은 거대한 영혼의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달라이라마-
물장오리에 빠져 죽었다는 설문대할망의 존재는 아직도 제주민들에게는 신령스럽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불안과 두려움을 완화하고 제거하기 위해 제주에는 수많은 무속(巫俗)신 외에도 조왕(俎王)신,문전신,칙신,성주신과 같은 가신들,그리고 조상신,마을신,잡신까지 있다.귀신,신의 노여움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했던 제주민들에게는 복잡한 인간의 삶을 모든 상황에서 두루 반추하기 위한 것이고 '비가시적인 존재들'이 잘 분화되어 발달한 곳이다.이성과 과학을 중시하는 현대사회는 상상의 산물을 신들을 축축하고 빛으로 어두움을 몰아 내면서 어두움의 존재마저 사라지니 이미지가 압살된 것이다.추상적인 개념이 사라지다 보 현대인의 삶은 풍요로운 경험과 아름다운 상상력으로부터 유리되어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