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후예 3 - 지리산 뱀사골
박찬두 지음 / 작가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장군의 후예 2권에 이어 장군의 후예 3권은 황의지의 빨치산 운동 중에서 회문산 퇴각에서 시작된다.국군에 의해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위기를 모면하려 탈출을 시도하기도 한다.당시 금산,완주,진안당부에서 대원을 보강받고 활동지역은 주로 운장산,덕유산,장안산,성수로 일대로 정한다.한편 그는 사단장으로서 소련 볼셰비키 혁명당사와 사회발전사를 강의하면서 동족끼리 왜 피를 흘리면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해 강의를 한다.이러한 강의를 통해 의식적인 혁명투사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고 보인다.

 

황의지가 거느렸던 조직은 도당부를 비롯하여 인민위원회.농맹.여맹.직맹,신문사.연예대.통신대.당학교.후방부요원 등이 있다.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에서 넘어온 북한 인민군 일부도 빨치산에 합류를 하면서 민족민주 통일독립을 위해 국군,경찰과 대치하고 싸워 나간다.그런데 같은 빨치산 동지이라든지 우호적인 사람일지라도 방심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이들이 일종의 밀고자 일수도 있고 배신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사람들로 인해 온갖 고초와 희생을 치뤄야 했기 때문이다.

 

한.일합방 당시 일본에 나라를 팔아 먹은 5적들과 해방을 맞이하면서 친미를 등에 업은 친일세력들은 오늘날까지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점에 비춰어 본다면 빨치산의 숭고한 뜻은 잊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그들이 조국의 통일독립과 전체 인민의 참다운 해방을 원했지만 이승만정권은 모두 불순분자,공산주의자,빨갱이로 모두 하나로 치부하여 처단하려 했던 것이다.빨치산 운동을 했든 안했든 해방 직후부터 1955년경에 이르기까지 군경에 의해 희생된 양민의 수는 셀 수도 없다.반면 빨치산 유격대들을 처단하고 몰아냈던 이들에게는 혁혁한 공을 내세워 기념탑까지 세우는 등 이승만정권을 찬동한 세력끼리의 잔치만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불공정하고 불균형적인 처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아가 황의지는 빨치산 유격대에서 혼란스러운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사찰 유격대를 지원하면서 재생의 길을 걷고 전북 고위자로부터 공로상도 수상하게 된다.그러나 전두환군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황의지는 빨치산 유격대 전력으로 인해 '삼청교육대'에 끌려 가게 되면서 육신은 반병신이 되어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빨치산(Partisan) 유격대가 갖고 있는 취지는 매우 건설적이고 이상적이었지만 실질적인 정권을 쥔 자들에겐 눈에 가시이고 정권유지에 방해가 되었던 것이었기에 어쩌면 군경과 유격대가 싸우는 모양은 중과부적이었을 수도 있다.그들이 흘린 피가 언제가는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기를 나 또한 간절히 기원한다.

 

지금도 선거철만 되면 일부 세력들은 진보세력에 대해 빨갱이,좌빨 등의 용어를 서슴치 않는다.이념과 사상이 사라진 오늘날 교육수준,의식수준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들로 몽매한 유권자들을 현혹하고 이간질하려 든다.그들의 의식은 늘 갖은 자,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자에 빌붙어 살아 오고 있는 비양심적이고 비민족적인 사람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짙다.일제강점기로부터 권력의 그늘에 힘겹게 살아와야 했던 세력들이 주체적으로 통일독립을 원해 유격대를 조직하고 활동했던 그 뜻만은 제대로 인식하고 공감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이념과 사상의 대립보다는 타자의 사상과 이념을 포용하고 그 차이를 인정하려는 자세와 태도가 한국사회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황의지 가문에 황진장군,황희정승,황현의사가 있어 황의지는 고매한 인품과 나라를 위하는 우국충정이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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