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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후예 1 - 비운의 패장
박찬두 지음 / 작가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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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나간 역사의 큰줄기 속에는 늘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그러나 불공평하고 안타깝지만 결과론만 내세워 패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승자만 버젓하게 후대에 면면이 이어지고 만다.현대사회에서도 그렇고 미래사회에서도 그럴 것이지만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한목숨 기꺼이 바치고 산화해 간 인물들에 대해서도 역사의 기록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을 든다.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들이 어디 한 두 명이겠냐마는 그 숭고한 뜻과 이념이 기리 기억할 만한 가치와 교훈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기억을 해야 하고 기록으로 남겨 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과 맞서 싸운 인물들 속에는 흔히 이순신,김시민,권율,곽재우,원균 등의 인물이 등장하고 내치와 행정관료 중에는 선조를 비롯하여 유성룡,이율곡 등의 인물을 상기하게 된다.주지하다시피 이순신장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이순신에 대해서는 한산도대첩을 비롯하여 그가 왜군과 맞서 남긴 승전보와 난중일기,인간성 등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 주고 있다.그가 해상에서 왜군과 맞서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기울어 가는 나라를 살려 보겠다는 일념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임진왜란 당시 내륙에서 왜군과 맞서 탁월한 공을 치뤄냈지만 패장으로 끝나 버린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황진(黃進)장군이다.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조선 내부는 정권다툼과 내치의 허술함,그리고 국방의 견고하지 못함에 있었다.당시 병조판서로 재직하고 있던 이율곡은 일란(一亂)의 시대로 진단한다.조선이 개국하고 법과 제도에 폐단이 생겨나고 인심이 해이해지기에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던 것이다.그것은 시무육조(時務六條)에 잘 나타나 있고 역사의 변동 단계를 창업,수성,경장으로 나눈다면 그 시대는 경장의 단게로 보고 있다.
이러한 틈을 타고 일본의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조선과 거짓 화친 요구,대마도주를 통한 통신사 파견요청을 하는데 그 일행에 황진도 포함되었다.도요토미히데요시를 접견한 통신사 일행은 그들의 말과 행동 등을 통해 그들이 장차 조선을 통해 명나라를 침범하려는 야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정사 황윤길,황진 등은 몇 년 안에 일본이 조선을 침범하리라는 것을 알고 당시 선조에게 장계를 올리지만 동인의 영수인 김성일의 안이한 보고만 믿고 방어대책을 소홀히 하고 말았던 것이다.결국 선조는 몽진을 가야 하고 치욕스러운 군주로 남게 되고 만 것이다.황진 역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일본의 계략을 올리려 했으나 후환을 두려워하는 종친들의 만류로 인해 애석케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황진장군은 호남의 전주성 등을 방어하기도 하면서 내륙에서의 혁혁한 공을 세운다.의병으로서는 김천일이 중심이 된다.한 편 일본은 명나라 심유경과 화친 교섭에 응하는 척하면서 호남 공략에 나서게 되는 전략을 세우게 되는데 호남 길목의 요충지가 진주였던 것이다.진주성을 사수하기 위해 김시민,최경희 장군 등과 황진장군은 합세하여 왜군에 맞서 저항을 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소총과 재래식 무기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결국 진주성은 왜군에 의해 함락이 되고 황진장군도 안타깝게 왜군에 의해 희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의병장으로 죽을 각오로 왜군에 맞서 싸웠던 황진장군은 <정충록(旌忠錄)>을 남기면서 그의 13대 후손 황의지에 의해 세상에 그의 이름과 업적이 발현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그는 비록 패장으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역사의 기록은 승자든 패자든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집필해서 후세들에게 그들의 면모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생각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