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 어둠의 시대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이 정약용이 정조와 인연을 맺으면서 관료로서 신하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던 시대를 그린 글이지만,2권은 정조 사후 정순왕후에 의한 천주교인들의 대대적인 탄압이 이어지면서 정약용 일가는 피의 숙청이 시작된다.정약용은 비의 숙청에서 가까스로 벗어나지만 가시밭길과 같은 유배의 형극을 맞게 되고 유배지에서 남긴 수많은 경세치용과 백성들을 위한 저작물들을 남겨 후대에 높은 명성을 떨치게 된다.

 

 

 

정조가 붕어하면서 정약용은 순망치한의 시대를 겪게 되는데,정조 없는 세상에 대한 그의 두려움을 여유당(與猶堂) 현판을 내걸게 된다.그 의미는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주저하면서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뜻이다.당시 정순왕후에 의한 순조의 수렴청정과 가혹한 천주인 탄압,세도정치의 회오리 바람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고 몸을 낮췄던 것으로 생각된다.

 

 

 

 

노론 벽파에 의한 천주교 탄압은 정약용의 형 정약종과 그의 매형 이승훈,소론의 좌장격인 이가환 등의 엄중한 추국과 숙청을 당했던 것이다.천주교 탄압은 당시 국체인 유교를 배반하고 조상을 섬기지 않은 대역죄로 몰렸던 것으로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황사영을 비롯하여 중국인 신부 주문모,천주 여성인 강완숙씨 등이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정약용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장기에서 다시 강진으로 유배를 가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는 바로 위 형인 정약전과 강진에서 헤어지면서 언제 풀릴 지 모르는 유배의 형극을 참고 기다려야 했다.정약용은 강진 유배 생활 속에서도 수많은 저서를 남기게 되고,정약전은 흑산에서 어부들과 어울리면서 민중들의 삶을 깊이 체험하면서 자산어보를 남기게 되며,정약용은 유배의 몸이지만 자식에 대한 바른 교육법을 편지로 또는 구두로 자상하게 알리기도 한다.특히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남긴 수많은 저서들은 후세에 길이 남을 저작물이고 현실 정치,경제,의학,주역 등의 다방면에서 유익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정약용과 정약전 두 형제는 강진과 흑산을 오갈 수는 없어도 편지를 통해 그 마음을 전하기도 하는 등 돈독한 우의를 다지기도 한다.형이 동생에게 보내고,동생이 형에게 보내는 서찰들은 사랑과 슬픔을 상징하며 결국 형인 정약전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정약용은 형이 있는 흑산을 향해 그 그리움과 슬픔의 한을 달래기도 하는데 우이(牛耳)라는 형제봉을 지었다고도 한다.애틋함이 쏴하게 밀려온다.

 

 

 

 

그는 18년 간의 유배생활에서 해배가 되면서 고향에 돌아와 <자찬묘지명>을 작성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경진년(1820년,59세) 봄에 배를 타고 산수(汕水)를 거슬러 올라가 춘천과 청평산 등지를 유람했다.가을에는 다시 용문산에 가사 유람하는 등 산과 시냇가를 산보하면서 인생을 마치기로 했다.

 

 

 

현세에서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체념하면서 인생을 정리했다.태어난 1762년부터 1822년까지의 삶의 가정을 되돌아 보면서 정밀하게 수신을 실천하고 하늘이 준 밝은 명을 살펴서 여생을 끝마치려 한다는 내용이다.

 

 

 

 

그가 태어나던 해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게 된 해이기도 하며,정조로부터 엄혹한 관료훈련을 받으며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기도 했던 정약용은 천주교의 대대적인 탄압과 정순왕후의 세도정치에 휘몰려 두 차례에 걸친 유배의 몸이 되었지만,국체와 사회를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의 몸을 낮추어 몸소 수신제가의 정신을 보여 주었던 인물이다.그는 관료,학자로서 '경세치용'의 정신을 백퍼센트 보여 주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