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는 조선의 산하와 국체,정체,혼까지 모두 빼앗기고 나라의 분위기는 마치 폭격에 맞은 가옥들의 형해와 같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미친듯이 사위를 해매도는 형국과 같다.그 중에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에 광분한 나머지 만주사변,진주만 폭격,남양만 군도에 군수 물자 및 군 인력을 조달하기 위해 조선과 대만,중국의 젊은이들을 강제징용하고 전지에서의 처우는 하루 주먹밥 하나에 멀건 일본식 미소시루(된장국) 한 종발이 전부였으며,일본이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전쟁에서 이겨야만 한다는 조바심으로 소위 군인들은 가미가제(神風)식으로 군인들을 격전지에 몰아 넣었는지 모른다.나아가 군인들의 뒷바라지,성욕 해소를 위한 젊은 처녀들까지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었으니 조선의 몰골은 빠싹 마른 나뭇가지나 다름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서시,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참회록,자화상 등으로 시문학에 크게 영향을 끼친 윤동주시인의 후쿠오카 형무소 생활을 허구적이나마 처참하고도 가련하며 힘없는 지식인의 고뇌와 실낱같은 희망이 담긴 이야기를 읽어 가면서 당시 일본은 누구를 위해 전쟁을 일으켰는지 묻고 싶다.전쟁에서 승리하든 승리하지 못하든 그 후유증은 정신적,물질적으로 헤아리고 셈할 수 없는 천문학적임에 틀림없다.이것은 인간의 탈을 썼지만 정신은 거리를 미친듯이 휘젓고 다니는 광견이 하는 짓이나 별반 다름 없다고 생각된다.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젊은이들을 대부분 강제징용시키고 사상이나 이념적으로 거추장스럽다고 판단되는 자들은 모두 당시 일본 형법의 잣대에 맞춰 처벌을 내리곤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부끄러운 미소와 온유한 성품을 지녔던 윤동주(尹童舟)시인은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에 재학 중에 조선어로 시를 쓰고 사상적으로 불온하다고 하여 교토 형무소에 수감이 되지만 그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이첩된다.좁고 어두우며 불결한 환경,죽지 않을 만큼만 주는 식사,가혹한 감시와 폭행,폭언 등이 윤동주시인을 비롯한 사상범들에겐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미련도 없는 체념의 시간만 흘러갔을거 같다.후쿠오카 형무소에 수용된 조선인 수용범들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이기 때문에 탄압과 감시,멸시는 한층 더 증폭되어 갔기에 윤동주시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내적으로 강한 자존심과 조선 독립의 갈구는 윤동주시인에게는 강렬했다.창씨개명도 어쩔 수 없이 히라야마 도주로 했을 뿐 그의 가슴 속엔 윤동주일 뿐이다.자신이 좋아하는 부류의 도서를 읽고 시를 쓰고 하는 것은 그가 소학교 시절부터 싹이 텄고 연희전문대학 시절에는 시집을 내려다 담당 교수의 만류로 세상에 나올 수 없었기에 형무소 안에서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시로서 자신의 고독한 마음을 보이지 않는 미지의 우주,세상과 교유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시종일관 '나'라는 인물이 후쿠오카 형무소의 소장,간수,수인들의 언행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검열관이다.(와타나베유이치) 소련의 로몬한 전투에서 전설적인 영웅담을 갖고 있는 간수 스기야마,일본 우에노 공원에서 당시 일본 천왕 생일 축하행사에 폭탄을 투척하려다 실패한 최치수 등이 후쿠오카 형무소의 분위기를 잡아 나가고 있다.우락부락하면서 완력이 센 스기야마 간수는 윤동주시인의 문학적 소양에 강한 배척감을 갖은듯 하지만 그의 진실을 알고부터는 그에게 온유한 자세를 보여주고 반대로 최치수에겐 인정 사정없이 대한다.스기야마 도잔은 이미 시인이 되어 버렸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주먹과 몽둥이로 죄수들을 감시하고 체벌하던 그가 의문사로 남게 되는데 용의자는 최치수가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