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지음,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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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대학을 다니던 나는 잠깐 사회과학 서클에 가입한 적이 있다.주로 칼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에 관한 독서와 토론이 위주가 되었는데 내 의지와 열정이 '작심삼일'이었는지 오래가지는 못하고 범생이의 모습으로 돌아와 학업에만 전념을 했다.당시엔 사회주의는 국가 정책과 정권유지에 눈에 가시였기에 기득권층은 곱게 보지를 않았다.그리고 세월이 흘러 사회과학 분야는 누구나 탐독하고 연구하며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하고 창조하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특히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졌던 사회과학 및 인문분야가 관심있는 층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인식하는 것을 보니 생각과 사유,이성과 논리라는 측면에서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경제학 수고>를 읽은 적이 있는 내게 칼 마르크스의 생애와 시대를 알아보는 것은 그가 남긴 자본주의의 맹점과 사회주의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각인시키며 사회지배층이 아닌 소외된 계층들 즉 노동자의 삶과 가치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기에 현재처럼 돈과 물질이 지배가 되다시피한 시대에서 노동과 노동자가 살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칼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자본론>에서 잘 보여 주고 있다.

 

 1818년 독일에서 태어나 1883년 폐종양으로 사망하기까지 칼 마르크스는 가난과 이념과 정신적 탄압으로 마음 편하게 살 날이 없었으며 그는 고대,중세,근대를 넘나드는 정열적인 독서광이기도 했다.사회의 본질과 역사,법칙들에 정통하게 되면서 그는 헤겔의 변증법론을 비롯하여 수많은 당대 사상가들과 교류하게 되는데 그의 곁에는 늘 엥겔스가 있었다.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론적 문제들에 대한 경험적 용어를 명료하면서도 통일적인 대답을 제시했는데 그의 성격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그는 에둘러 말하는 것을 피하고 직선적이면서도 개혁적인 의지와 열정을 1867년 <자본론>에서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 계급이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를 궁극적으로 제시하고 노동자의 삶의 기준과 가치를 보다 구체적으로 고양시켰던 것이다.

 

 인간행동을 결정하는 요소 중 경제적 요소들이 차지하는 우위를 강조하는데 이는 경제사 연구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헤겔의 학설들이 역사 연구에 자극적이었으며 콩트 및 스펜서와 텐느가 논의하고 정리한 역사적,도덕적 문제들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을 정확하고 구체적인 연구로 만든 점이 그의 커다란 결과물이라고 생각된다.이러한 연구들은 1849년 파리를 떠나 영국 대영박물관 도서실을 이용하면서 그의 이념과 사상은 무르익어가고 그곳은 그의 이상적인 전략적 거점이자 무기고로 여겼을 정도이다.

 

 또한 그는 면방직 공장에서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시간을 제한하고 건강을 위한 규정과 구제기금을 마련하는 등의 실천적인 개혁을 하여 자기 이론이 옳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공장의 생산성을 높였고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놀랄 만큼 향상시켰다.이에 비하면 한국은 1970년대 봉제공장에서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규제,인간이하의 삶을 개선해 보고자 분신으로 삶을 마감한 전태열열사의 삶의 일지가 떠오르고 숱한 노동운동을 거쳐 그나마 삶의 조건이 나아져 가지 않았나 생각된다.물론 아직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규율을 만들어 동일노동 조건하에서도 차별 대우가 잔존하고 있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간극이 좁혀지기만을 바래본다.

 

 그는 프랑스의 사회주의적 작가들의 도덕적 취향을 선호했으며 논리와 경험적 관찰을 우선 순위로 생각하고 개인에게는 국가나 군주들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자신과 타인들의 행복을 확보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으며 열렬한 반교권적,반권위주의적인 인물이었다.이러한 사상은 사비니교수로부터 받은 역사적 논증과 역사 연구방법,하이네와 같은 친구의 인도주의적 급진주의자로부터의 영향도 몸에 배였을 것이다.즉,그는 비경험적이고 사변적인 직관이나 이성보다는 옳고 그름의 판단은 인간들의 진보적인 집단 활동으로서 역사 과정과 부합 여부와 역사의 발전 과정을 돕는지의 여부,생존 여부 등이 가치판단의 척도라고 보여진다.

 

 파리 코뮨에 바친 조사(弔辭)가 착취계급을 경악시키고 <신라인 신문>이 폐간되면서 반란 선동죄로 체포되는데 그는 이를 오히려 국내외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에 대한 자신의 상세한 분석을 해박한 지식을 동원해가며 일장 연설을 하는 기회로 이용하고 재판의 배심장은 그를 무죄 선고하게 된다.이는 그의 연설이 교훈적이고 흥미로웠던 강의가 재판정에 감동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달성해야만 한다로 시작되는 인터내셔널은 <공산당 선언>이후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데 이는 노동조합들이 임금 향상,노동 시간 단축,정치적 권리 확보 등을 위해 힘을 합쳐 투쟁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컸기 때문으로 보여진다.그는 죽기 전 최후의 바쿠닌과의 대결을 벌이는데 고타(Gotha)에서 회의를 열고 공동 강령을 발표했는데 목표는 정치적,경젝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이며 이는 노동자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희망과 연결되었던 것이기에 환영을 받았지만 리프트네히트와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오이겐 튀링의 글과 이를 지지하는 글들이 마르크스의 생각과 간격이 너무 컸던 것으로 보여진다. 

 

  자본론이 1~4권까지 나왔지만 1권만이 고전으로 보여지며 그는 독서광이자 맹렬한 비판가임에 틀림없다.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다른 사상가들의 글을 비교,검토하는 방식으로 19세기 경제학을 비롯하여 독일 고전 철학,고대사,프랑스의 혁명적 지하 운동 등에 관한 글도 썼다.모국인 독일에선 그가 내놓는 글과 사상이 이상하다 싶으면 심각하게 사회적 비판 대상에 오르기도 하기에 프랑스를 거쳐 죽을때까지 그는 대영박물관 도서실에서 역사와 자본론에 관해 꾸준한 연구와 저작에 몰입한다.그의 자본론은 러시아 혁명과 마오쩌뚱 사상에도 크게 자극을 주었으며 사회과학도들에겐 아직도 더없는 연구와 토론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그의 삶과 면모,이념과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어 무척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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