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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인권 변호사 조영래에 의해 쓰여진 '전태일 평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힘없는 자의 분노와 울분 그 자체였다.가난한 집안에서 2남 1녀로 태어난 전태일은 초등학교 3년이 학력의 전부이고 먹고 살기 위해 서울로 대구로 다시 서울로 이동하는 등 전태일의 유년 시절은 고난과 역경의 시기였다.아버지가 방직 일을 했지만 늘 근근하게 살아가는 상황이고 어머니마저 서울로 식모살이를 가고 어린 여동생과 함께 무작정 상경하여 어머니를 찾기도 하고 숙소가 없어 나무 판자대기로 대충 엮어 잠을 청하기도 하는 등 없는 자의 설움을 톡톡히 겪지만 태일은 장남으로서 내일의 한 가정을 생각하면서 책임감마저 느꼈던지 힘든 내색 하지 않고 꿋꿋히 살아가려 노력했던 건실한 청년이었다.
그는 남동생과 구두통을 메고 구두를 닦으면서 하루 하루를 버티어 나가다 우연히 동대문 평화시장 근처에서 '시다 구함'이라는 광고를 보면서 봉제 공장에 들어가게 되고 환기도 안되고 하루 14시간 중노동에 일당 50원을 받는 악조건의 환경에서 그보다는 갓 국민학교를 졸업한 여리디 여린 여공들이 하루 종일 미싱기 앞에 앉아서 밝지 않은 조명을 받아 가면서 옷을 누비고 뒤치닥거리를 하고 사장은 화장실에 가는 것도 아까워 시간을 정해 놓는다. 밥먹는 시간이 여공들에겐 짧고 후다닥 지나가는 시간이지만 그들끼리 행복한 수다를 떨 수 있는 시간이었던거 같다.1960년대 농촌에서 올라온 신출내기 여공들은 집안이 가난하여 식모살이,봉제 공장 등으로 취직하여 부모님께 용돈을 보내고 동생들의 학비를 보태주기도 하는 효녀였다.태일은이렇게 공기도 좋지 않고 일요일도 없는(한 달에 두 번 쉼) 힘든 중노동이지만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하여 시다에서 미싱보조,미싱사,재단보조,재단사의 기술 승진을 꿈꾼다.
그러한 환경에서 일하는 가운데 전태일은 '왜 밑바닥 인생들은 항상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되는가?,왜 고통받은 사람들은 항상 고통만 받고 있는가?'에 대해 불만과 회의를 품다 우연히 '근로 기준법'이라는 것을 접하면서 인간이 노동을 통해 인간답게 살아가고 인간답게 대우 받는 근로 기준법 조항을 발견하게 된다.그러면서 봉제 공장 여공들과 친한 동료들이 모여 '바보회'를 조직하게 되면서 그는 다짐한다.업주의 횡포한 부당한 근로 환경에서 벗어나고 노예의식을 벗어던지며 진정한 자유인으로 자신의 정당한 권익을 위해 주장하고 투쟁할 결의를 마음 속에 되뇌인다.
그러면서 1970년 8월 9일 일기에는 나는 돌아가야 한다.꼭 돌아가야 한다.부랑한 내 형제의 곁으로.내 마음의 고향으로.....(중략) 조금만 더 참고 견디어라.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P134
재단사가 되면서 그는 어린 시다들을 일찍 퇴근시키고 밤늦도록 혼자 작업장에 남아 시다가 할 일을 대신하면서 밤늦게 귀가하다 야간 통금에 걸려 경찰서에 붙들려 가고 날이 밝아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당시의 근로기준법 제42조는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하고 1일에 8시간,1주일에 48시간을 기준으로 한다.단,당사자간의 합의에 의하여 1주일에 60시간을 한도로 한다"는 규정하고 그외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의 유급휴일,여공에 대한 월 1일의 유급생리휴가,건강진단,재해보상,18세 미만 근로자에 관한 야간작업 금지 규정 등이 그에겐 신선하게 다가오고 약자들이 뭉치면 안될 것도 없다는 희망을 갖게 되지만 그 희망은 실천으로 옮기기엔 절차도 복잡하고 당시 한국 사회가 노동자들의 고충과 불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었고 두꺼운 벽이었다.그러나 그느 비인간적 노동현실에 대한 분노가 용솟음쳤고 바보회 회원들과의 모임을 통해 이러한 악조건의 근로환경을 어떻게 바꿔나갈건지를 고민을 거듭하게 되는데 '바보회'가 조직이 결성되면서 업주의 귀에 이러한 소문이 퍼지면서 그는 해고라는 시련을 또 겪게 된다.
그는 여기에서 좌절하지 않고 당시 동양방송국,서울시청 사회과 등을 방문하여 자신들의 열악하고 비인간적인 근로조건을 알리고 근로조건의 개선과 함께 인간답게 사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다.즉,체념과 침묵과 구롱의 얼음과도 같은 두터운 벽을 뚫고 근로개선 진정서 설문서를 비롯하여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근로감독관,노동청장 앞으로 편지를 쓰기도 하고 비록 발송은 못했지만 대통령에게도 인간,최소한의 요구서를 쓰기도 한다.그가 생각하고 고뇌하는 근로조건 개선의 핵심내용은 밑바닥 인간의 사상이고 각성된 밑바닥 인간의 사상이며 억압받는 한 인간이 저항과 투쟁의 길로 나서며 잘못된 현실을 개혁하려 하고 근본적인 개혁과 행동의 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그가 노동청장 앞으로 보낸 진정서 내용이 1970년 10월 7일 경향신문사에 '평호시장 기사특보'로 게재되면서 동대문 삼동의 노동자들은 술렁거리게 되고 업주들은 협박과 회유 속에 전태일은 들어간지 얼마 안된 공장에서 또 다시 해고를 당하게 된다.
근로기준법이 있어 근로자들의 참상이 더 악화되어 가는 현실에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던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삼동회 친목회 회원 및 노동자들이 보는 앞에서 '근로기준법'책을 가슴에 품고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절규와 함께 분신으로 자신의 뜻을 만방에 알리게 되며 그의 몸이 불에 타는 와중에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우리는 기계가 아니다!일요일은 쉬게 하라!","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고 알아듣지 못할 비명을 지르며 응급실에서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12일 아침 라면 한끼 먹는게 전부인데다 그는 탈진과 비협조적인 근로감독관(주사 1대당 15,000원짜리 두 대를 맞으면 화기가 가라앉는다고 하는데 전태일의 형편으론 돈을 댈 수가 없어 보증인이 있어야 주사를 맞을 수가 있었다고 함)이있어 그의 죽음은 너무도 안타깝고 가련하기만 하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안해온 궂은 일이 없을 정도로 악착같이 살아갔고 자신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사회 부조리를 개선하려 했고 그가 사회에 미친 영향은 근로자들에 대한 근로환경과 처우 개선으로 이어졌으며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노와 저항,참여 정신은 계속 이어지리라 생각한다.그는 천민의식보다는 근로자가 사회의 주인답게 제대로 대접을 받으며 자유스럽고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다 밝은 세상을 보지도 못한채 산화해 나갔던 것이다.전태일씨와 같은 의롭고 깨우친 노동자가 있기에 그의 뒤를 이어 가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가 삶의 조건과 삶의 혜택이 향상되지 않았나 싶다.또한 그의 마음 속에 늘 자리잡고 있었던 식지 않은 인간에 대한 고뇌와 사랑의 정신도 고귀하고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