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묵시록 - 상
신용우 지음 / 작가와비평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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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있듯 역사는 항상 힘과 권력의 우위에 있는 자가 살아 남게 되고 열세에 있는 자는 도태되기 마련이다.수많은 외침과 부침 속에서도 한국의 국력이 오늘에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끈질긴 생명력과 국가를 수호하려는 자주 정신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그 중에 왕조의 왕권이 흔들리고 외세에 무릎을 꿇는 등 수치스런 역사도 있었다.그것은 널리 알려진대로 청의 침입으로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의 청태종에게 삼전도에서의 삼배구고두례(三拜九皐頭禮)가 잘 말해주고 있으며,청은 그 댓가로 조선의 관료,사대부,그의 아들 소현세자,봉림대군,일반 백성들을 착출하여 볼모로 청으로 끌고 가 갖은 모욕과 수모를 겪게 했던 것이며 여기에서 화냥년이라는 말도 나왔다 한다.

 

 

요동묵시록,잃어버린 발해국의 비서(秘書)를 중심으로 정조와 박승지의 후손 박제가 발해의 역사를 사료를 통해 제대로 알고 국력의 중요성까지도 시사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세인들에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태백일사,조대기,고조선비사,요사,당서 등을 통해 대진국(발해)의 역사를 알 수가 있는데 역사소설로서는 학습이 가미가 되고 흥미롭기도 했다.

 

 

김자점 등에 의해 광해군이 물러나고 등극한 인조는 치세 내내 사색당쟁과 사회의 불안이 가중되다 보니 국력마저 악화의 일로를 걷고 마는데,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의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가면서 인조와 소현세자간의 보이지 않는 불화와 불신이 결국 소현세자를 의문의 죽음으로 몰아넣게 되고 이를 기화로 출세에 눈이 멀고 간신이었던 김자겸은 기세등등하게 되며 조선사회 분위기는 백성들의 도탄으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처지였다.

 

 

청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예친왕 구왕과 황보 장군의 깍듯한 예우로 불편하지 않은 이방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는 천리안의 시각을 갖은 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청이 중원제국을 차지하기 위해 명나라를 침공하는데 소현세자는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청군과 함께 적진에 뛰어 들어 국력의 소중함을 실감하고 자신이 장차 조선의 임금이 될 계승자라는 것을 보여 주며,당시 청에 들어 천주교리를 포교하던 선교사 아담 샬을 소개받아 서양의 선진문물과 과학 지식을 흡수하여 휘청거리는 조선을 다잡아 보고,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 영혼을 구원하고 사람이 선을 행함으로써 자신이 죽는 날 하느님의 부름을 받는다는 천주교의 전교(傳敎)의 취지를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조선에 남아 권력에 눈이 먼 김자점 일당은 소현세자의 이러한 동태를 조선의 국체와 이념을 약화시킨다는 것으로 인조에게 고하니 인조는 국체와 왕권을 전복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로 알고 소현세자의 장인 장례에도 참석을 못하게 하며 그가 8여년만에 나라에 돌아와도 환영식은 커녕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게 되지만 소현세자는 자식된 도리로서 매일 아침 아버지 인조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효성을 잊지 않는다.이미 인조의 눈에서 벗어난 소현세자는 앉는 자리가 가시방석이었을 것이지만 일체 내색을 하지 않고 보다 나은 조선의 미래를 구상하는데 전념을 하게 된다.하지만 하늘도 무심했던지 그는 학질에 걸리게 되고 의원 이형익이 조제한 약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불운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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