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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평점 :

흑산도와 강진의 길이가 지금이야 버스와 배로 몇 시간이면 당도하고 만나고 구경할 수 있지만 조선후기의 상황에서는 말을 타고 돛단배를 타고 아니면 뚜벅뚜벅 걸어야 겨우 찾아가고 만날 수가 있는 아득히 머나 먼 길이다.이는 조선후기 신유(辛酉)박해로 천주교인들이 대거 탄압과 숙청이 되면서 정약전.약용 두 형제는 배교가서에 의해 죽음만은 면하고 언제 올지 모르는 유배의 땅,흑산과 강진으로 무심히 발을 내딛게 된 곳이다.서학과 서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던 정조가 서거하고 어린 순조는 수렴청정에 의해 정순대비가 안동김씨와 손잡고 세도정치를 구가하고 국체인 유교를 배척하고 나라의 기강을 문란케 한다는 명목으로 사학교인(邪學敎人)들의 주동자,배후자,공모자 등의 이념과 사상을 발본색원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둘째 형 정약전의 교리 전습에 따라 정약종.약용은 약전으로부터 전수받은 서교는 하늘의 선한 뜻은 권력의 작용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을 통해서 일상의 땅 위에 실현할 수 있으며,그 실천의 방법은 사랑이라는 교리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진보적인 사상과 이념이 아닐 수가 없다.성리학적인 사상에 바탕을 두고 봉건적인 국가운영에 신물이 났던 일부 선각자들에 의해 도입하고 아름아름 전파되었던 천주교 탄압은 이념과 사상,물질적 증거물을 모두 말살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형과 능지처참으로 공포에 떨게 하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은 연줄 연줄을 캐내고 질책하여 배후자와 공포자를 포졸에 의해 잡아들이고 장형으로 죄를 불게 하고 거의 실신하면 또 다시 장형으로 사지로 몰고 갔던 것이다.지금이야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당시 조선은 봉건적이고 수구적이며 권위적인 왕권 통치가 우선이었기에 천주교인들의 진보적인 사상과 이념은 결코 드러내 놓고 활동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약용의 큰 형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은 백서사건으로 유명한데 그는 일찍이 관료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었는데 18세기말(1794년) 청국에서 천주교의 교리와 야소(예수) 그림 등으로 교인의 세를 불려 나갔으며 조선국정에서 이미 소문이 나게 되고 주문모(周文謀)는 1순위 체포대상이 되었으며 그를 감싸고 돌보는 교인들에 의해 주문모는 동가숙 서가식의 아슬아슬한 나날을 보냈고 정약전에 의해 교리를 전수받은 정약종은 끝내 배교를 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서대문 형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으며,큰 조카 사위 황사영은 그의 몸을 옥죄어 옴을 통감하고 옹기장수 김개동의 제천 배론 토굴에서 은신처를 삼으며 천주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백서(白書)를 담담히 써내려 가지만 구베아 신부를 만나고 온 사행마부(使行馬夫) 마노리(馬路利)가 지니고 있던 청의 은과 야소(예수)의 그림이 그려진 화폭에 의해 황사영이 배후세력으로 밝혀지면서 황사영은 포졸군관에 의해 체포가 되고 망나니에 의해 처참하게 효수형에 처해진다.
이 글에선 정약용의 얘기보다는 그의 형 정약전의 얘기가 흑산도의 바람과 사람들의 얘기가 주가 되는데 약전은 언제 뭍으로 갈지 모르는 형극의 흑산유배 생활에 접어들게 되고 처녀 순매와 가깝게 되면서 아이까지 얻게 된다.흑산은 섬이기에 어족이 풍부하고 어부들의 삶의 애환도 자연스레 알게 되면서 그의 흑산 생활은 아득하면서도 꽤 적응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채득한 물고기의 종류와 특징 등을 엮은 자산(玆山)어보를 짓게 되며 그곳에서 선비의 모습도 아니고 어부의 모습이 아니지만 그는 흑산과 친숙해지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끝내 뭍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동생 정약용의 그리움만 안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 글을 읽고 나니 가슴 한 켠이 저려온다.종교의 자유가 없었던 조선후기의 사회상도 그렇지만 국체에 반한다는 잣대로 그들의 정신과 혼을 말살하고, 서교와 관련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국문하고 장형으로 다스리면서 제대로 된 증거나 재판절차도 없이 눈에 벗어난 사람들을 파리나 모기목숨보다도 낮게 생각하고 자신이 믿고 가려했던 서교의 길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간난의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주문모,황사영,정약종,강사녀,길갈녀,아리,마노리 등 등장인물들의 고귀한 희생에 의해 종교의 씨앗은 강인하게 지탱할 수가 있었다고 생각이 들며,자유로를 따라 절두산(切頭山) 천주교인 탄압의 형지를 지날 때면 신유사옥을 떠올리고 처참하게 희생되어야만 했던 그들을 생각하며 자아도취적이고 백성을 괴롭히는 정치는 언젠가는 민중에 의해 역으로 탄압을 받고 제대로 된 이념과 사상을 피워갈 수가 있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