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원론과 실제가 있고 원론과 실제사이에 간극과 차이가 많이 보인다.원론이 아무리 좋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윤활유 작용을 한다해도 과정이 불미스럽고 온전치 못하다면 삶의 질은 떨어지고 인간답게 살아갈 의미를 상실할 수도 있다고 본다.이것은 비단 정치,경제 뿐만이 아닌 모든 영역을 아우르고 소수가 대다수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 및 권력층에게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어느 시대나 시대의 당위성과 역사성을 강조하여 그럴듯한 말로 대중을 현혹하지만 결과는 소수의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에게 돌아가고 대다수의 대중은 허탈감과 상실감만 씁쓸하게 맛보아야만 함을 많이 듣고 보면서 통감케 한다.나아가 국가와 국가 간에도 강대국이 약소국을 보호하는 척하지만 실제론 자국의 실리의 기조 위에서 모든 것이 실행되고 관철되며 약소국은 커다란 진보 및 발전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 과연 세상을 리드하는 지도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기대해야만 할 것인지 회의감이 든다.
2008년 다보스 포럼에서 빌게이츠가 기조연설의 핵심 키워드로 내세운 '창조적 자본주의'를 둘러싸고 그를 비롯한 42인의 경제석학들이 벌이는 대토론의 장은 찬성과반대,유보 등의 시각과 견해를 내세우고 있다.세계는 잘 사는 나라만 있는게 아니고 못 살고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약소국이 참으로 많다.또한 한 나라 안에도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하루살이가 어려워 신음으로 겨우 버티어 가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전세계의 인구상 10억 이상이 최저생활의 수준의 문턱에도 못미치는 가련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데,정부.기업.비영리단체가 협력하여 시장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확장하고 이익을 창출하여 사회적 인정을 받는 의미를 담고 있다.못먹고 못먹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와 혜택을 제공하여 세상의 불평등을 완화하자는 취지가 바로 '창조적 자본주의'인데 이는 기업이 이윤을 남겨 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사회적 책임론과 별반 다르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아프리카,아시아,남미 등의 저개발 국가에선 현재도 굶주림과 헐벗음,무지몽매,앵벌이,벌이를 위한 매춘,마약등으로 인간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인구가 너무도 많다.그들에게 자선단체 및 비영리단체에서 구호품을 보내지만 정작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거의 없다고 전해진다.이는 중간에서 착취하는 일부 권력과 관료계층에 문제가 있기에 그냥 구호품을 전달하고 자선행위가 끝났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를 직접 관찰하고 살펴서 중간에 새어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창조적 자본주의의 실천적 방안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난한 나라가 경제적으로 일어서고 그들이 동류로서 살아가는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삶을 꾸려가는데 필수적인 기술 이전 및 저개발 국가가 선진 자본시장에 진입하여 기술을 터득하고 지식을 공유하면서 거시적인 상생의 틀을 만들어 가야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정치,경제,군사적으로 강대국이 빌게이츠의 취지대로 실천할 의지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미국 역시 금융위기와 경제적 파행 등이 미국을 이끌어가는 소수의 실패로 인해 휘청거리고 있고,이는 법의 지배,사유재산권,부패 방지의 실패가 정부의 실패로 연결되면서 전통적 자본주의가 방해받고 있다고 보여진다.역사는 늘 인간이 살아가기에 혁신적인 문명화된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한 발 앞선 나라들이 과연 기업,국가,비영리단체가 나서서 뒤따라 오는 나라들에 팍팍 퍼줄까를 우선 회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빌게이츠의 취지는 언뜻 보면 신선하게 다가오지만 현재 돌아가는 정치,경제권을 쥐고 있는 자들이 그들만이 갖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성찰하고 창조적 자본주의의 방향으로 선회할 것인지,빌게이츠의 취지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 역시 사람답게 살아갈 방안을 보여준다면 그 취지는 빛나고 가치가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빌게이츠 자신만의 '박애주의'의 표현에 지나지 않을거 같기도 하다.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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