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에 대한 평가는 살아있을 때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가 보다.특히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화가들의 삶은 기구하고 평탄하지 않았고 화가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사회적 분위기와 국가가 그들에 대한 예우나 배려가 특히 손을 놓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누구나 잘 아는 이중섭과 박수근 화백의 삶은 곤궁 그 자체였다.두 분의 공통점 역시 인생의 한창때 요절한 화백이고 그들이 남긴 작품들은 생전에는 빛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사후 그들을 아끼고 제대로 평가를 내리려 했던 전문 예술인과 문인들에 의해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지고 경매가도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흔히 소그림으로 잘 알려진 이중섭화백의 일생은 참으로 기구하기 짝이 없다.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에서 유학(文化學園)을 하고 일본인 마사코와 결혼을 하여 한국에서 가족의 정을 느끼며 살았지만 아내와 두 자식의 앞날을 위해 처자식을 일본으로 보내고 이중섭화백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삶이었지만 그림에 대한 의지와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그가 주로 소를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에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혼과 자주 의식등이 잘 서려 있고 기법은 야수성과 표현주의 감성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또한 아내 마사코를 그린 '소와 여인'에선 학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심성을 상징이라도 하듯 한 여인의 품에 안긴 하얀 학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잘 팔리지 않고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호탕하고 자상한 성격이 음울함으로 변하며 술로 연명을 하는등 그의 몸은 망가질대로 망가지면서 병원을 수도 없이 오가게 되고 결국 40대 초반에 영양실조와 간암으로 아무도 없는 병상에서 홀로 쓸쓸히 세상을 떠나게 된다.그는 화장(火葬)을 하여 유분은 하늘과 바다로 흩뿌려지고 대한의 독립과 아내를 비롯한 자식,부모 형제와 단란하게 살아갈 수 없었던 점을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평북 출신으로 민족의 독립을 상징하는 오산학교를 나왔으며 구상 시인,백석 시인의 교유와 영향을 많이 받았다.그의 그림 속에는 특히 백석의 시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그가 주로 그린 소그림은 그림의 구조가 다이아몬드꼴임을 발견하게 된다.특히 흰소의 꼬리는 뭉툭하고 힘찬 기상이 추사 김정희서체와 비슷하다고 한다.그가 한국 전쟁중 피란지로 제주 서귀포에서 부인 마사코,아들 둘과 11개월 살면서 추사 김정희의 흔적을 쫒고 흠모하지 않았나 싶다.
민족정서에 어울리는 소의 형상과 기백,가족과 떨어져 살아가야 하는 그의 심경이 그림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의 초창기 그림의 구도는 고려,조선의 도자기에서 아이디어를 구했으며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는 민족의 상징인 우직한 소그림과 가족과 헤어져 살아야만 하는 슬픈 현실과 애타는 심정을 그림으로나마 애달프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의 색상은 붉은색과 검정색,흰색등의 단색을 사용하고 선의 굵기등은 두껍고 힘찬데 유럽의 마티스,피카소,고흐등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중섭과 고흐가 죽기 직전 그린 그림이 각각 <달과 까마귀>와 <밀밭 위의 까마귀>인데 파란색과 노란색이 공교하게 일치하고 까마귀에 대한 정서가 길흉조와 길조이지만 자신들의 죽음을 예견한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본다.
이중섭이 만일 21세기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인물이라면 그가 그린 그림이 수많은 불로거 및 매체를 타고 그가 그린 그림이 '날개 돋힌 듯'이 팔려 나갔을 것이고 암울하고 기구한 삶과 가족과의 생이별을 겪지 않고 행복한 가정과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지 않았을까 가정해 본다.민족의 정서를 잘 대변하고 야수성과 표현주의의 심정을 살아있는 기백으로 예술가의 영혼을 순수함과 진정성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이중섭의 내면의 세계와 불후의 작품들이 오래도록 그림 애호가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기대해 본다.
*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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