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 장수 문순득, 조선을 깨우다 - 조선 최초의 세계인 문순득 표류기
서미경 지음 / 북스토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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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는 19세기 순조가 즉위 하자마자 서학(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고 수많은 교인들이 처형 및 유배를 가게 되는데,당시 학문과 사상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정약용.약전 형제의 흑산도,강진 유배는 커다란 국가적 손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어부(홍어장수)인 문순득이라는 사람에 의해 그가 홍어잡이에 나서 알 수 없는 폭풍을 만나 추자도,류큐(오시마),여송(필리핀),마카오,안남(베트남),중국 대륙을 횡당 북경에 도착하여 조선의 사절단과 합류하여 그의 고향 우이도 지금의 소흑산도에 당착하기까지 38개월이라는 해상과 이국 땅에서 겪었을 마음 고생과 체험담은 당시 이국의 실정과 풍물,언어등을 간접적이나마 체득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아닐까 싶다.

 '사농공상'이라는 직업적 귀천을 규정지은 조선 후기 우이도에서 태어난 어부 문순득은 향년 25세가 되던해 사나운 폭풍을 맞아 앞이 보이지 않는 해상을 넘실넘실 흘러서 추자도 근처로 가게 되고 다시 일본의 복속하에 있었던 류큐의 오오시마(지금의 가고시마현 소속)에 머물다 또 다시 바다 위를 떠돌다 간 곳이 여송(필리핀)이었으며,해풍이 잔잔한 날을 선택하여 간곳이 마카오였다.

 문순득은 비록 배우지 못한 신분이었지만 총기는 밝았던지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전에겐 소상하게 구술로 전달하여 <표해시말>이라는 책자로 그의 표류 역정이 전해지고 되고,역자들 역시 그가 표류지로 밝힌 오오시마,필리핀 루손,마카오등지를 역사학자들과 함께 고증하는 모습도 읽으면서 문순득의 표류 생활이 생생하게 머리에 그려지게 되었다.

 조선의 표류 역사는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을 살펴보면 중국과 일본,류큐(오키나와:지형의 모습이 남북으로 가늘고 얇게 꼬아 놓은 새끼줄 같다고 하여 오키나와라고 명명함)등으로 표류한 일이 많고 역으로 제주도로 표류해 온 타국인이 꽤 된다.세종25년 강권두의 중국 표류를 선두로 1900년 허희일씨등이 일본에 표류될때까지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말과 글이 통하지 않은 이국땅에서 문순득은 불안감과 초조함 속에서 이국인들과의 생활담은 방대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문순득에 대한 대우와 관계등은 예상외로 따뜻한 배려와 인간적인 미로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역시 민간인의 신분이지만 함부로 대하지 않고 마음을 편하게 하고 그가 귀국하는 날까지 안정된 생활을 배려해 준 점에서 훈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가 남긴 구술담은 정약전의 <표해시말>로 완성되어 그의 후손이 간직하고 있는데,조선 후기의 표류와 관련하여 이국의 풍물,언어,생활상,정치적 상황까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아닌가 싶다.또한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는 정약전 사후 흑산도(우이도)로 건너가 문순득을 만나 외국 선박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묻고 대답한 것을 기초로 <운곡선설>을 내놓아 외국 선박 논문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유교사상이 뼈마디까지 깊숙히 침투한 조선 후기,탐관오리들의 학정과 탐욕,아집으로 어수선한 때에 천한 신분의 문순득은 바다위의 떠돌이가 되고 이국 땅에서 말못 할 고생을 하였지만,그가 귀국하여 남긴 구술담은 백면서생의 양반들과 비교해 보면 가히 모험가적인 정신과 용기를 갖은 선각자라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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