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 (반양장) 사계절 1318 문고 63
이경자 지음 / 사계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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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보다 먼저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어두워지고,읍보다 먼저 눈이 오고 추워지는 곳,눈이 내리면 오솔길까지 하얗게 파묻혀서 보이는 건 오로지 눈뿐인 곳,한밤중에 왕소나무 가지가 눈을 이기지 못하고 썩 갈라지면 공연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하는 곳,새와 나비와 풀과 나무,꽃과 버섯,이끼와 흙과 바위 냄새가 사람냄새보다 더 많이 나는 곳,사람 말소리가 그리워 마당 가에 서면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어 대고 개울물이 다글다글 흘러가는 곳,비락 내리면 개울이 넘쳐 다리가 떠내려가서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곳...P181인용

 한국전쟁 직후 강원도 양양의 산골 조그만 마을의 어느 가족의 올망졸망한 이야기가 그 시대의 상황와 더불어 ’순이’라는 여섯살 꼬맹이를 1953년 여름부터 다음해 국민학교에 입학하기까지의 과정을 서정적이고 치밀한 묘사로 읽는 내내 애틋하고 슬프고 지지리 궁상스럽지만 잘 살아보겠다는 굳은 의지를 알게 되었다.

 저 자신도 시골출생이라 이 글의 공간적 배경을 상상하면서 순이의 집이 본가의 모습이었다가 성당이 있는 곳에서는 학교 근처로,엄마가 있는 옷수선 가게는 버스 정류장이 있던 하꼬방으로 옮겨 이 글과 친밀도를 높이려 했다.

 마냥 할머니 품에 안겨 응석을 부리는 순이,완고하지만 사리가 깊은 할아버지,옷수선을 하면서 자본의 맛을 알게 된 어머니,애어른같이 철이 없고 성격이 조급하며 툭하면 화를 내지만 뒤늦게 친구와 사업하려다 돈만 날린 아버지,동생 철이가 한 집안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상사를 너무나도 완벽하게 강원도 사투리를 집어 넣어 살아있는 이야기를 전해 주려 했고,휴전회담 무렵의 사상.이념문제로 이웃간에 쉬쉬하면서 살기위한 침묵이 시대의 아픔을 들려 주었으며,마을에 성당이 있어 수녀님과 신부님으로 하여금 백성들의 무지몽매를 계몽하려 했던 점,철이 없는 순이는 할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멈춘듯 좋아했고,어머니는 약간 툭툭 내뱉는 육두문자가 못배운 사람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배워야 하고 가르쳐야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점이 핵심으로 다가온다.

 1953년의 한 여름날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던 순이는 할아버지,할머니가 산골에 오두막을 짓고 따로 살게 되면서 헤어지게 되는데,순이는 눈에 할머니가 밟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할머니는 오시지 않는다.헤어지고 처음에는 얼마나 마음이 쓰라리고 뒤쳐겼을까! 자애롭고 따뜻하고 사랑에 넘치던 할머니의 속깊은 마음을 순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얼마나 잊지 못할까!걸핏하면 욕지거리로 순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다짜고짜 손부터 앞서는 어머니는 순이가 입학하고 마음이 달라졌을까,아버지는 속을 차리고 가족을 위해 마음을 잡고 오손도손 잘 살아갈까 이 도서에서는 말이 없지만 그러리라고 나는 믿는다.왜냐하면 순이 어머니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못배우고 가난한 설움을 잘 배워 잘 살아보자는 짙은 심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하얀 광목치맛단에 대롱대롱 매달리며 응석받이로 각인되고 기억되는 순이는 학교에 다니며 배우고 또 새로운 친구가 생기며 학교라는 단체생활에 잘 적응하면서,강원도 양양의 조그마한 두메산골에서 자연과 흙과 바람,물과 함께 풍요로운 정서를 온몸에 가득 채우고 멋진 인생을 위해 힘차게 야무지게 당당한 어른의 ’순이’로 변했을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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