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유신 쿠데타’ 편집국은 조용했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 7-2
 
 
한겨레  
 








 

»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중앙청 앞에 탱크와 장갑차들이 출동했다. 이른바 ‘10월유신’이라 하는 박정희 정권의 장기독재 서막이 오른 순간이었으나 당시 시민들의 표정은 무심해보인다. <보도사진연감>
 

조선일보사 안에서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선배가 없는 것이 못 견디게 답답했다. 저널리즘을 ‘지적 생산’이라 하면 격을 너무 높이는 것이고 ‘지식 노동’이라 부르면 ‘언론’이란 우리말의 어감으로부터 멀어진다. 자기비하라는 비난이 따르더라도 나는 후자(지식 노동)를 택하겠다. 일반적으로 지적 생산은 창조적 활동을 가리키지만 저널리즘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한 작업이다. 물리 현상으로는 종이에 잉크를 묻혀 나온 것이 신문인데 신문의 내용은 기자(논설기자 포함)의 지적 노동을 기초로 한 것이다. 하지만 기자의 취재와 기사(논설) 작성은 단순 반복노동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왜? 현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변화는 자연계의 유장한 진화나 퇴화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권력을 장악한 자와 권력을 쥐려는 자, 큰돈을 가진 자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확천금을 하겠다는 자들이 때로는 변화를 조성·촉진하고 때로는 변화를 가로막는다. 변화의 표피만을 전달하는 데 그치는 기자는 대서방의 서기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알찬 경험과 공부가 필요한데 그날그날 일에 쫓기는 기자로는 매우 힘든 부담이다. 이럴 때 부담을 덜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선배다.

 리영희는 한양대학 교수로 이미 전직했으며, 남재희는 <서울신문> 편집국장으로 갔다. 귀국한 지 며칠 안 돼 남재희로부터 저녁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술 몇 잔 마시고 바로 나는 그에게 “어떻게 서울신문에 갈수 있소. 당장 그만두시오”라 했다. 이런 말이 나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그는 농조로 “지금 그만두면 실업자인데”라는 거였다. 이 말을 받아 “실업자로 있는 동안은 내 집을 팔아서라도 한 달에 쌀 한 가마씩은 보내 주리다”라 했다. 난 진심으로 그럴 각오였다. 언론 자유가 압살된 상황에서는 ‘서울’이나 ‘조선’이나 실은 그게 그건데 ‘썩어도 준치’라는 속담대로 ‘서울’을 정부 기관지로 내려다보는 꼴 같지 않은 ‘일류신문 의식’이 내 심층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정치부에서 일하던 기간의 소득이라면 정치인을 가까이서 대면할 수 있었던 것, 이 때가 처음이다. 야당 담당기자가 앞장서 안내해주는 대로 김대중·김영삼·유진산 등을 각기 사무실에 찾아가 만났다. 나는 김대중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가 1971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의 온갖 불법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예상 밖의 높은 득표를 한 것은, 파리에서 저 멀리 한 줄 희망의 불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72년 그와 내가 단 둘이 만난 적은 없고 기억에 남는 것은 광주에서 ‘신민당 전남도당 위원장’을 선출하던 때다. 그가 밀던 조연하(국회의원, 작고)가 위원장에 선출되자 근방 찻집에 기자들이 모였다. 한 구석에서 무엇인가 쓰고 있던 그는 기자들 쪽으로 메모한 종이를 들고 와 “특별히 잘 써 줄 것은 없고 제가 말씀한 대로만 써 주시오”라 하는 거였다. 36년 전 일이라 성명 내용은 되살릴 길이 없으나 그의 특출한 언어감각은 동시대의 어느 정치인도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을 거기서 느꼈다. 언어감각이라면 그와 김영삼이 아주 대조적이다.

 정치인 김대중과 저널리스트인 나는 그로부터 30여 년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그를 보도·논평 대상으로 삼은 것은 72년과 89년(<한겨레> 논설주간 시절)의 몇차례뿐이다. 그 이외에는 박해를 받거나 외로운 처지에서 마주쳤던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불가불 장을 달리하여 별도로 다뤄야겠다.

 경천동지할 ‘7·4 남북 공동선명’이 있은 지 100여일이 지난 72년 10월17일, 민주공화국이 까무러칠 일이 생겼다. 대통령(박정희)이 헌법을 뭉개버리는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오후 늦게 국회를 해산하며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발표가 나왔는데 ‘방성대곡’(放聲大哭)은 기대할 수 없더라도 입 험한 기자들인데 “개새끼들!” 하는 소리 하나 듣지 못할 정도로 편집국은 교교했다. 밖에서 사복의 험상궂은 사나이 둘이 편집국에 들어와 야당 담당 기자 주돈식(문민정부 문화체육부 장관, 정무장관)에게 나가자고 했다. 편집국 간부와 기자들의 시선이 모두 그리로 집중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내가 나서 “당신들 누구인데 기사 쓰는 중에 가자느냐”고 하자 “계엄사에서 잠깐 알아 볼 일이 있어 같이 가야 한다”는 거다. 나는 목청을 더 높여 “당신들 영장 갖고 왔소? 기사 쓰는 중이니 밖에 나가 기다리시오!” 했다. 둘 중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보이는 사복이 내 아래 위를 훑어보며 하는 소리, “계엄령 하에서는 영장 없이 연행하는 거요”라며 밖으로 나갔다. 그때 어느 구석에 있었던지 회사의 고위 간부가 나에게 와서 하는 말, “당신 너무 나서지 마!”라는 거였다. 내 안위를 걱정해 주는 걸까.

임재경/언론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길을찾아서] ‘혼란 서울’…낭만 파리는 잊었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 7-1
 
 
한겨레  
 








 

»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평양을 극비방문하고 온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4 남북공동성명’을 깜짝 발표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1972년 봄, 나는 <조선일보> 경제부 기자에서 국회 담당 정치부 차장 자리로 옮겼다. 희망해서 그 자리에 간 것은 아니었지만 야심에 찬 기자들에게는 부러운 보직이었다. 정치부장은 김용태(국회의원, 내무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선임차장은 청와대를 출입하는 이종구(<조선일보> 해직기자), 여당 담당 기자는 김대중(<조선일보> 고문)과 백순기, 야당 쪽은 주돈식(문민정부 문공부 장관)과 성한표(<조선일보> 해직기자, <한겨레> 편집국장·논설주간)였다.

내가 외국에 나가 있던 기간(1971년 1월~1972년 3월)에 발생한 중요 정치·사회 분야의 중요 이슈를 몇 가지 적어보자. <다리>지 필화,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공동대표 김재준 목사·이병린 변호사·언론인 천관우), 검찰의 이범열 판사 구속(사법파동), 경기도 광주단지 입주 빈민 소요, 실미도 특수부대 난동, 칼(KAL)빌딩에서 한진 해외파견 노동자 집단 항의, 수경사 군인 고려대 난입 폭행, 서울 일원 위수령 발동. 10개 대학에 무장군인 진입, 박정희 국가비상사태 선포, 국가보위법 국회에서 변칙 통과 등이다.

신문철을 뒤져 보았으나 지면에 나타난 보도는 이런 중요 쟁점들을 단순하게 그날치 ‘사건’으로 다루었을 뿐 사건 뒤에 숨은 의미와 파장을 알리려는 노력의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 신문사 동료들에게 지난 1년 남짓한 기간에 일어난 이슈를 화제로 삼아 말을 걸어 봐? 10년간의 경험으로 편집국 안에서 기자들 사이에 진지한 토론이 벌어지는 낌새가 보이기만 하면 데스크는 “시시한 소리 그만 하고 기사나 써!” 할 게 뻔했다. 하긴 마감에 항상 쫓기는 것이 기자니까.

지방판이 나온 뒤 기자 두서넛과 어울린 술판에서 광주단지 소요에 관해 물어보았다. 그 응답이 걸작. “뻔한 건데 뭘 … 임형 파리에서 ‘백마 탄’ 이야기나 해보슈”라는 거였다. 이런 일도 있고 해서 당시 문화부장 유경환(시인, 작고)의 ‘파리 뒷골목’을 테마로 한 체류기를 쓰라는 요청을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정치부가 돌아가는 일면을 말해주는 에피소드 하나. 청와대를 출입하던 이종구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준비할 때 거들던 절친한 사이다. 한번은 무슨 일로 청와대 기자실에 전화를 걸자 “그건 내려가서 말할게”라고 대답했다. ‘내려가서’라는 표현에 울화가 치밀어, 그날 저녁 술 마시는 자리에서 “청와대가 임금님 계시는 궁궐이냐? ‘돌아가서’라고 하면 될 것을, ‘내려간다’고 하는 것은 뭐냐”며 마구 역정을 냈다. 청와대 기자들이 보통 그렇게 말해 그렇게 나왔다는 것이며 유별나게 의미 부여 한다며 도리어 내게 대들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그와 나는 약간 서먹해졌다.

내가 프랑스에 가기 전에도 중앙정보부 직원은 편집국에 무단출입했다. 그런데 귀국했을 때는 중정 직원이 편집국장 책상 바로 옆 검정 가죽소파(1인용)에 앉아 있는 거였다. 평기자는 고사하고 부장들도 여간해서는 그 소파에 앉지 않는 것이 편집국의 불문율이었다. 신문사를 예방하는 외부의 귀빈(브이아이피)이나 사장만이 앉는 자리인데 중정요원이 거기에 버젓이 앉다니 기가 막혔다. “당신 일어서! 여기가 어딘데 매일 와 앉아 있는 거야”라고 하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들었다. 만약 그랬다간 ‘임아무개 발광했다’고 하였을 거다.



 

» 임재경/언론인
 
이런 판에 72년 초여름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왔다. 독재자 박정희가 독재의 충성스러운 심복 이후락을 평양에 보내 민족의 대동단결을 국내외에 선언하였으니 경천동지할 일이다. 신문사 편집국의 첫 반응은 경악이란 한마디로 충분했다. 7월4일 오전 10시인가 중대 발표가 있다고 하여 또 무슨 간첩단 사건이 있나 보다 하며 내근 중이던 나는 편집국 한 모퉁이에 있는 텔레비전 스위치를 켰다. 어안이 벙벙하여 편집국 간부 모두가 허둥댔다.

사회부 법조 담당 기자 안병훈(<조선일보> 편집국장·편집인)이 7·4 공동성명 관련해서 법제적 차원의 해설기사를 쓰란다며 조언을 구했다. 나는 “우선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하며, 폐지되기 전까지 과도기간은 두 가지 법을 달라진 남북관계에 맞추어 탄력성 있게 운영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내 희망적인 관측과는 반대 방향으로 박정희는 치달았던 것이다.




임재경/언론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길을찾아서] ‘살인자 프랑코!’ 시위는 축제였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 6-4
 
 
한겨레  
 








 

» 돌로레스 이바루리(1895~1989·사진)
 
‘로통드’ 같은 이름난 카페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포도주를 안 마셨을 뿐 술 좋아하는 놈이 파리에서 취하도록 마신 적이 없다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돈 덜 들이고 되도록 빨리 취하자는 것이 그때 내 술버릇이었던 터라, 포도주보다는 위스키를, 그것도 스트레이트로 홀짝홀짝했다. 한번은 정일권(국무총리·국회의장), 모윤숙(시인) 등 당시 국회의원 일행이 파리에 와 리츠호텔에서 리셉션을 여니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대사관으로부터 왔다. 훗날 영국의 다이애나 태자비가 죽기 전날 묵은 곳으로 더욱더 유명해진 리츠는 비싸고 호화로운 곳이라 기웃거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정일권·모윤숙 둘 다 내게는 내키지 않는 사람이지만 공술 마시고 리츠도 구경할 욕심으로 가 봤다. 정일권에게 인사한 다음 모윤숙 앞으로 갔다. 60대 초의 그는 몸이 난데다 약간 들떠 있어 책으로만 알던 여류시인의 모습은 이미 아니었다. 주위에 모인 한국 기자들에게 자기 자랑을 한창 하던 끝에 그는 “<렌의 애가>를 읽고 울지 않은 남자가 드물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밸이 꼴렸다. 마음속으로 ‘군사독재정권에 빌붙어 전국구 국회의원이 된 주제’를 뇌까리며 나는 돌아섰다. 웨이터에게 위스키를 한 잔 달라고 하여 그 자리에 서서 죽 들이켰다. 이것이 리츠 기억의 전부다.

파리 번화가의 하나인 ‘메트로(지하철) 오페라의 계단에서 올려다보이는 네온광고판’, ‘덜커덩거리는 자동차 바닥’, ‘컴컴한 방의 좁은 벤치’, ‘병원 수술대 같은 침대’, ‘사복 두 사람이 내 겨드랑이를 끼고 오르는 층계’ … 그 다음날 오후 간신히 떠올린 토막 난 기억의 필름인데 사고를 친 건 틀림없었다. 2~3일 뒤 어느 병원에서 200여 프랑의 응급 진료비 청구서가 날아왔다. 짚이는 데가 있어 대사관에 갔는데 중정요원으로 알려진 영사 직함의 직원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거였다. 어? 이 사람이 무얼 알지? 리츠의 리셉션이 있던 날 밤 ‘메트로 오페라’에 큰 대 자로 자빠져 있는 나를 경찰이 약물중독자로 의심하여 병원에 실어가 검사를 했다는 것과 그 사실을 파리 경시청이 즉시 전화로 통보해 주었다는 것이다. 과음으로 비롯된 추태는 지나간 일로 치자. 하지만 십만이 넘는 파리 거주 외국인의 신상정보를 교환하는 연락망이 야간에도 프랑스 경찰과 외국 공관 사이에서 가동한다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형사 자베르의 매서운 눈초리! 프랑스는 경찰국가인가. 그렇다면 7월14일 프랑스 대혁명 축제 날 레퓌블리크 광장에 가서 온종일 노닥거린 내 모습을 프랑스 경찰이 찍어 한국 대사관 중정요원에게 보냈을 수도 있다는 헛된 두려움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국제 서신 검열을 식은 죽 먹기로 하던 때라 파리~서울 편지 왕래는 가족 것을 제외하고는 전무했다. 그러던 차에 <조선일보>에


 

» 임재경/언론인
 
서 친히 지낸 후배 신홍범이 엽서를 띄웠다. ‘단 한순간이나마 활짝 열려 있는 프랑스 같은 자유의 공기를 마셨으면 원이 없겠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 구절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책과 함께 서울에 가서 읽은 책 이야기를 하는 게 고작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츠 추태 때문에 프랑스 사람과 사귀는 것이 도무지 꺼림칙했다. 한창 열을 올리는 마오이스트(마오쩌둥주의자)들의 집회·시위를 가 봐? 아니다. 그러다가는 정말 사진이 찍히고 만다. 프랑스에서는 기자라도 외무부 추천 내무부 발급의 ‘외국인 기자증’을 소지하지 않으면 정치행동으로 간주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 돌로레스 이바루리(1895~1989·사진)를 환영하기 위해 스페인 이민들이 ‘불로뉴 숲’에서 모인다는 기사였다. ‘정열의 꽃’(la Pasionaria)이란 애칭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이바루리는 스페인 내전(1936~39) 때 파시스트 프랑코에 항전하는 인민전선 쪽에 서서 통렬한 선동 연설로 전세계 반파쇼 투사들을 사로잡은 공산주의자다. 그가 살아 있다는 것조차 서울에서는 몰랐다. 일요일에 열린 집회는 지금 한국의 촛불시위처럼 축제적 분위기가 주조였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가 있는가 하면 아들딸을 등에 업은 중년 남자도 있었고 망명 1세대에 해당하는 60대 이상은 별로 없었다. 그때 나는 스페인 말을 전혀 몰랐지만 기자는 감각으로 연설의 ‘야마’(山의 일본 발음, ‘요점’이란 뜻, 기사의 제목이 될 만한 내용)를 안다. 저만치 단상에 오른 백발의 이바루리는 연설 말미에 “아세시노! 프랑코!”(asesino! Franco, 살인자! 프랑코!)라 소리 질렀다. 청중들은 이 말을 받아 “아세시노! 프랑코”를 연호했다. 연호는 네댓 번 반복되었다. “살인자! 프랑코!”가 “프랑코! 살인자!”로 바뀌었다. 그리고 또 연호했다.


임재경/언론인

사진 <아이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길을찾아서] 피끓는 ‘68세대’에게 박수를 받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 6-3
 
 
한겨레 윤운식 기자
 








 

» 2005년 11월 파리 시내 거리에서 <한겨레21> 취재진을 만난 정성배 파리 사회과학대학원 명예교수.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내 힘으로 프랑스 지식인들을 만나겠다고 결심했다. 파리에 도착한 지 석 달째 되는 4월 초, 나는 생 미셸가 소르본 건물을 찾아갔다. 서울서 읽은 <프랑스 혁명사>의 저자 알베르 소불(1914~82)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반원형 계단식의 ‘튀르고 강의실’에 들어가 앞자리에 앉았다. 조금 뒤 들어온 소불 교수에게 ‘한국의 기자이며 당신의 저술을 읽고 감명받아 강의를 듣고자 한다’고 하니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끝난 뒤 카페에서 한잔 나누자고 했다.

알베르 마티에, 조르주 르페브르에 이어 프랑스 혁명사의 대가로 손꼽히는 소불의 강의는 놀라울 정도의 웅변조였다. 간간이 탁자를 손바닥으로 치며 조는 학생들의 이목을 끌려는 노력은 흥분 잘하는 우리나라 중·고교 역사 선생과 비슷했다.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 같은 열혈투사들의 행적을 말하려니 자연히 저렇게 톤이 높아지는구나 싶었다. 파리 하층민의 ‘생 탕투안 거리의 과격파’(les sans-culottes de Saint-Antoine)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는 한 여학생에게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를 읽었느냐고 물었다. 학생이 고개를 젓자 돌연 소불은 나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네, 물론이지요’라 대답하니 그는 나를 일어서게 해 소개하고는 손뼉을 치는 거였다. 학생들도 소불을 따라 손뼉을 쳤다. 미지의 프랑스 젊은이들로부터 박수를 받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박수 친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는 ‘68년 학생혁명’이 한창일 적 파리의 시가지에서 돌을 던진 패들이겠지 ….

학기가 끝나는 6월 중순까지 소불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난 틈만 나면 서점에 들러 프랑스와 유럽 근대사 관련 책을 샀다. <르 몽드> 신문사에서 10월 한 달 동안 하게 될 직업훈련 프로그램 이전까지 유럽 근대사의 큰 줄거리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프랑스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르 몽드>를 사서 스포츠와 증권면만 빼고, 깡그리 읽는 것은 큰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르 몽드>에서의 한 달 경험은 17년 뒤 <한겨레>의 창간을 준비할 때 많은 참고 자료가 됐다. ‘제목을 선정적으로 달지 말자’, ‘1면에 사진을 쓰지 말고 시사만화로 대체하자’, ‘마지막 면이 1면 다음으로 주목도가 높으므로 전면 광고는 절대 금지! 마감 임박해 들어온 기사를 싣자’는 것이 내 의견이었다. 창간 준비위 동료들의 호응은 제법 높았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한국의 신문지면 구성 모델은 예나 지금이나 일본 신문이다.

<르 몽드> 연수 기간쯤인가, 정성배(프랑스 국가박사, 국립사회과학대학원 명예교수)를 만났는데 그것은 나의 행운이다. 목포 출신의 정성배는 나보다 대학 입학이 4년 앞선 터라 20대 초에 만난 적은 없으나 동베를린 사건으로 서울에 끌려와 옥살이를 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파리에 되돌아온 그는 프랑스 총리실 직속 자료수집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외교관을 포함해 당시 파리


 

» 임재경/언론인
 
에 있던 한국인 누구보다도 프랑스 사정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음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도 파리 장기체류자들의 몸에 밴 프랑스 제일주의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것이 이채로웠다. 4~5년 전까지만 해도 <한겨레>에 자주 기고한 터라 그의 사상을 여기서 되뇔 필요는 없겠다.

여기서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인간 정성배에 얽힌 시대의 한 아름다운 정경이다. 정성배는 동베를린 사건 전 파리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대생과 열애 중이었다. 서울로 끌려간 무고한 한국 남성을 석방시키고자 파란 눈의 여인은 박정희 정권의 야만적 행위를 규탄하는 전단을 만들어 가르티에 라탱(대학가)에 뿌리는 한편, 그의 지도교수들을 찾아가 석방운동에 도움을 청했다. 그 정성에 감복했던지 정당론의 세계적 권위자인 모리스 뒤베르제 교수는 프랑스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발송하기에 이르렀다.

사랑하는 한국 청년을 감옥에서 빼낸 스코틀랜드 여인은 유럽의회 사무국 직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 순애보의 주인공은 백혈병에 걸렸다. 정성배는 20년 넘게 주말마다 유럽의회가 있는 스트라스부르에 가서 간병하다 지금은 아예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이제 70대 중반이다.





임재경/언론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길을찾아서] ‘좌파’ 사르트르는 ‘면담 불가’
세상을 바꾼 사람들 6-2
 
 
한겨레  
 








 

» 1971년 4월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뒷편 정원에서 <르몽드>를 들고 선 필자. 당시 <경향신문> 파리특파원인 심재훈씨가 찍었다.
 
파리에 온 첫 두 달 알리앙스 프랑세즈(강의실 건물의 바로 옆이 기숙사)에서 프랑스말을 배웠다. 비록 단기간이긴 하지만 내 평생 초·중·고·대학 전 과정을 통해 이때처럼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었을까. 어렵사리 여기까지 와서 프랑스말을 익히는 데 긴 시간을 들이는 것은 바보라는 일념에서였다. 하루라도 빨리 입과 귀가 트여서 프랑스 지식인들과 만나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어보자는 욕구가 솟구쳤던 것이다. 말 배우기 수준은 중급으로서 내용은 문법과 말하고 듣기 중심의 하루 4시간이 전부. 1주일에 한번씩 치르는 진도 시험에 만점받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나자 벌써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네 시간을 두 시간으로 줄이고 좋아하는 문인들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누구를? 루이 아라공, 앙드레 말로, 장 폴 사르트르, 이런 순서로 만나자! 모두 노령이니 나이순으로 만나야지 그러지 않으면 영영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자 나름의 성급한 계산도 섰다.

외무성 장학 프로그램 담당자를 찾아가 의향을 말하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는 세 사람 다 불가라는 거였다. 아라공과 사르트르는 프랑스 정부가 추천할 수 없는 좌파이고 앙드레 말로는 외국인 직업훈련 장학 대상자를 만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한 달에 두 번씩 일요일 점심 혹은 저녁에 지도급 인사 가정에 초청하는 계획을 그쪽에서 짜겠다고 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드날리는 문인을 정부기관 주선으로 만나겠다는 접근 방식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소득이었다. 하지만 ‘추천 불가’라는 표현은 너무나 의외였다.

한편으로 어떤 저명인사가 나를 집으로 초청하는지 두고 보자는 비뚤어진 심보가 한구석에 도사렸던 것도 사실이다. 첫번째 초청은 1970년에 작고한 드골 전 대통령의 조카딸로부터 왔다. 어럽쇼!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에서만이 아니라 외국인 가정에 초청된 것은 그때가 난생처음이라 면도를 말끔하게 한 뒤 정장으로 갈아입고, 꽃도 한 다발 샀다. 중상류층 시민들이 많이 산다는 센강 우안의 어느 아파트로 갔다. 프랑스 사람들에게서 나폴레옹보다 더 추앙을 받는다는 드골 가문의 친척들이 사는 모습은 어떨지 매우 궁금했다. 드골의 조카딸은 30대 말의 학교 교사이고 그의 남편은 40대 중반의 은행 간부. 아파트의 거실은 서너 평 정도 크기에 지나지 않았고, 프랑스 영화에서 자주 본 샹들리에도 없었으며, 식탁에 오른 식기는 은식기가 아니라 보통 도자기류였다. 드골이 청렴하게 한평생을 지냈다는 프랑스 신문의 보도대로 그의 친척 역시 호사스러움과는 거리가 멀구나 하는 첫인상을 받았다. 밥을 먹을 때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유럽 식탁의 매너인데 거기서 기자 근성이 움직였다. 드골의 조카딸 남편에게 어느 은행에서 일하냐고 묻자 ‘앵도신 은행’(Banque de L‘Indochine)이라는 대답이 나와 김이 있는 대로 새는 것이었다. 후


 

» 임재경/언론인
 
진국 금융시장 진출의 첨병인 그 은행의 간부 집 초청이라는 게 왠지 기분이 상했다. 프랑스 말이 짧은 탓도 있겠으나 그날 대화는 잘 풀리지 않았고 후식을 드는 둥 마는 둥 오래 머물지 않았다. 다음번 초청은 프랑스 항공(Air France) 간부였는데 문에 들어서자마자 영어로 말을 걸어 기분이 더 잡쳤다. 세번째인가, 네번째는 초청을 받고 아예 가지 않은 세련되지 못한 실수를 범했다. 언어 장벽 때문? 아니면 나의 ‘좌편향’ 고정관념 때문? 둘 다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파리에 있을 때 동포는 150명을 넘지 못했다. 신문사 특파원으로는 <조선일보>의 신용석(인천 아시안게임유치위원장), <동아일보>의 장행운(편집국장), <한국일보>의 정종식, <중앙일보>의 장덕상이 거기 있었다. 나보다 조금 뒤에 파리에 온 <경향신문> 심재훈(<뉴욕타임스> 서울지국장)이 나처럼 홀몸 신세라 그와 자연히 친하게 어울렸다. 파리 코트라 지사장 고일남은 대학 입학 동기여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유학생 정준성(영화진흥공사 상무이사)과는 이제껏 교유하고 있다.


임재경/언론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