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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중앙청 앞에 탱크와 장갑차들이 출동했다. 이른바 ‘10월유신’이라 하는 박정희 정권의 장기독재 서막이 오른 순간이었으나 당시 시민들의 표정은 무심해보인다. <보도사진연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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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사 안에서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선배가 없는 것이 못 견디게 답답했다. 저널리즘을 ‘지적 생산’이라 하면 격을 너무 높이는 것이고 ‘지식 노동’이라 부르면 ‘언론’이란 우리말의 어감으로부터 멀어진다. 자기비하라는 비난이 따르더라도 나는 후자(지식 노동)를 택하겠다. 일반적으로 지적 생산은 창조적 활동을 가리키지만 저널리즘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한 작업이다. 물리 현상으로는 종이에 잉크를 묻혀 나온 것이 신문인데 신문의 내용은 기자(논설기자 포함)의 지적 노동을 기초로 한 것이다. 하지만 기자의 취재와 기사(논설) 작성은 단순 반복노동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왜? 현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변화는 자연계의 유장한 진화나 퇴화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권력을 장악한 자와 권력을 쥐려는 자, 큰돈을 가진 자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확천금을 하겠다는 자들이 때로는 변화를 조성·촉진하고 때로는 변화를 가로막는다. 변화의 표피만을 전달하는 데 그치는 기자는 대서방의 서기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알찬 경험과 공부가 필요한데 그날그날 일에 쫓기는 기자로는 매우 힘든 부담이다. 이럴 때 부담을 덜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선배다.
리영희는 한양대학 교수로 이미 전직했으며, 남재희는 <서울신문> 편집국장으로 갔다. 귀국한 지 며칠 안 돼 남재희로부터 저녁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술 몇 잔 마시고 바로 나는 그에게 “어떻게 서울신문에 갈수 있소. 당장 그만두시오”라 했다. 이런 말이 나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그는 농조로 “지금 그만두면 실업자인데”라는 거였다. 이 말을 받아 “실업자로 있는 동안은 내 집을 팔아서라도 한 달에 쌀 한 가마씩은 보내 주리다”라 했다. 난 진심으로 그럴 각오였다. 언론 자유가 압살된 상황에서는 ‘서울’이나 ‘조선’이나 실은 그게 그건데 ‘썩어도 준치’라는 속담대로 ‘서울’을 정부 기관지로 내려다보는 꼴 같지 않은 ‘일류신문 의식’이 내 심층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정치부에서 일하던 기간의 소득이라면 정치인을 가까이서 대면할 수 있었던 것, 이 때가 처음이다. 야당 담당기자가 앞장서 안내해주는 대로 김대중·김영삼·유진산 등을 각기 사무실에 찾아가 만났다. 나는 김대중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가 1971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의 온갖 불법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예상 밖의 높은 득표를 한 것은, 파리에서 저 멀리 한 줄 희망의 불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72년 그와 내가 단 둘이 만난 적은 없고 기억에 남는 것은 광주에서 ‘신민당 전남도당 위원장’을 선출하던 때다. 그가 밀던 조연하(국회의원, 작고)가 위원장에 선출되자 근방 찻집에 기자들이 모였다. 한 구석에서 무엇인가 쓰고 있던 그는 기자들 쪽으로 메모한 종이를 들고 와 “특별히 잘 써 줄 것은 없고 제가 말씀한 대로만 써 주시오”라 하는 거였다. 36년 전 일이라 성명 내용은 되살릴 길이 없으나 그의 특출한 언어감각은 동시대의 어느 정치인도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을 거기서 느꼈다. 언어감각이라면 그와 김영삼이 아주 대조적이다.
정치인 김대중과 저널리스트인 나는 그로부터 30여 년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그를 보도·논평 대상으로 삼은 것은 72년과 89년(<한겨레> 논설주간 시절)의 몇차례뿐이다. 그 이외에는 박해를 받거나 외로운 처지에서 마주쳤던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불가불 장을 달리하여 별도로 다뤄야겠다.
경천동지할 ‘7·4 남북 공동선명’이 있은 지 100여일이 지난 72년 10월17일, 민주공화국이 까무러칠 일이 생겼다. 대통령(박정희)이 헌법을 뭉개버리는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오후 늦게 국회를 해산하며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발표가 나왔는데 ‘방성대곡’(放聲大哭)은 기대할 수 없더라도 입 험한 기자들인데 “개새끼들!” 하는 소리 하나 듣지 못할 정도로 편집국은 교교했다. 밖에서 사복의 험상궂은 사나이 둘이 편집국에 들어와 야당 담당 기자 주돈식(문민정부 문화체육부 장관, 정무장관)에게 나가자고 했다. 편집국 간부와 기자들의 시선이 모두 그리로 집중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내가 나서 “당신들 누구인데 기사 쓰는 중에 가자느냐”고 하자 “계엄사에서 잠깐 알아 볼 일이 있어 같이 가야 한다”는 거다. 나는 목청을 더 높여 “당신들 영장 갖고 왔소? 기사 쓰는 중이니 밖에 나가 기다리시오!” 했다. 둘 중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보이는 사복이 내 아래 위를 훑어보며 하는 소리, “계엄령 하에서는 영장 없이 연행하는 거요”라며 밖으로 나갔다. 그때 어느 구석에 있었던지 회사의 고위 간부가 나에게 와서 하는 말, “당신 너무 나서지 마!”라는 거였다. 내 안위를 걱정해 주는 걸까.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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