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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4월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뒷편 정원에서 <르몽드>를 들고 선 필자. 당시 <경향신문> 파리특파원인 심재훈씨가 찍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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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온 첫 두 달 알리앙스 프랑세즈(강의실 건물의 바로 옆이 기숙사)에서 프랑스말을 배웠다. 비록 단기간이긴 하지만 내 평생 초·중·고·대학 전 과정을 통해 이때처럼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었을까. 어렵사리 여기까지 와서 프랑스말을 익히는 데 긴 시간을 들이는 것은 바보라는 일념에서였다. 하루라도 빨리 입과 귀가 트여서 프랑스 지식인들과 만나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어보자는 욕구가 솟구쳤던 것이다. 말 배우기 수준은 중급으로서 내용은 문법과 말하고 듣기 중심의 하루 4시간이 전부. 1주일에 한번씩 치르는 진도 시험에 만점받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나자 벌써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네 시간을 두 시간으로 줄이고 좋아하는 문인들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누구를? 루이 아라공, 앙드레 말로, 장 폴 사르트르, 이런 순서로 만나자! 모두 노령이니 나이순으로 만나야지 그러지 않으면 영영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자 나름의 성급한 계산도 섰다.
외무성 장학 프로그램 담당자를 찾아가 의향을 말하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는 세 사람 다 불가라는 거였다. 아라공과 사르트르는 프랑스 정부가 추천할 수 없는 좌파이고 앙드레 말로는 외국인 직업훈련 장학 대상자를 만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한 달에 두 번씩 일요일 점심 혹은 저녁에 지도급 인사 가정에 초청하는 계획을 그쪽에서 짜겠다고 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드날리는 문인을 정부기관 주선으로 만나겠다는 접근 방식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소득이었다. 하지만 ‘추천 불가’라는 표현은 너무나 의외였다.
한편으로 어떤 저명인사가 나를 집으로 초청하는지 두고 보자는 비뚤어진 심보가 한구석에 도사렸던 것도 사실이다. 첫번째 초청은 1970년에 작고한 드골 전 대통령의 조카딸로부터 왔다. 어럽쇼!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에서만이 아니라 외국인 가정에 초청된 것은 그때가 난생처음이라 면도를 말끔하게 한 뒤 정장으로 갈아입고, 꽃도 한 다발 샀다. 중상류층 시민들이 많이 산다는 센강 우안의 어느 아파트로 갔다. 프랑스 사람들에게서 나폴레옹보다 더 추앙을 받는다는 드골 가문의 친척들이 사는 모습은 어떨지 매우 궁금했다. 드골의 조카딸은 30대 말의 학교 교사이고 그의 남편은 40대 중반의 은행 간부. 아파트의 거실은 서너 평 정도 크기에 지나지 않았고, 프랑스 영화에서 자주 본 샹들리에도 없었으며, 식탁에 오른 식기는 은식기가 아니라 보통 도자기류였다. 드골이 청렴하게 한평생을 지냈다는 프랑스 신문의 보도대로 그의 친척 역시 호사스러움과는 거리가 멀구나 하는 첫인상을 받았다. 밥을 먹을 때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유럽 식탁의 매너인데 거기서 기자 근성이 움직였다. 드골의 조카딸 남편에게 어느 은행에서 일하냐고 묻자 ‘앵도신 은행’(Banque de L‘Indochine)이라는 대답이 나와 김이 있는 대로 새는 것이었다. 후
진국 금융시장 진출의 첨병인 그 은행의 간부 집 초청이라는 게 왠지 기분이 상했다. 프랑스 말이 짧은 탓도 있겠으나 그날 대화는 잘 풀리지 않았고 후식을 드는 둥 마는 둥 오래 머물지 않았다. 다음번 초청은 프랑스 항공(Air France) 간부였는데 문에 들어서자마자 영어로 말을 걸어 기분이 더 잡쳤다. 세번째인가, 네번째는 초청을 받고 아예 가지 않은 세련되지 못한 실수를 범했다. 언어 장벽 때문? 아니면 나의 ‘좌편향’ 고정관념 때문? 둘 다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파리에 있을 때 동포는 150명을 넘지 못했다. 신문사 특파원으로는 <조선일보>의 신용석(인천 아시안게임유치위원장), <동아일보>의 장행운(편집국장), <한국일보>의 정종식, <중앙일보>의 장덕상이 거기 있었다. 나보다 조금 뒤에 파리에 온 <경향신문> 심재훈(<뉴욕타임스> 서울지국장)이 나처럼 홀몸 신세라 그와 자연히 친하게 어울렸다. 파리 코트라 지사장 고일남은 대학 입학 동기여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유학생 정준성(영화진흥공사 상무이사)과는 이제껏 교유하고 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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