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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로레스 이바루리(1895~1989·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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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통드’ 같은 이름난 카페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포도주를 안 마셨을 뿐 술 좋아하는 놈이 파리에서 취하도록 마신 적이 없다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돈 덜 들이고 되도록 빨리 취하자는 것이 그때 내 술버릇이었던 터라, 포도주보다는 위스키를, 그것도 스트레이트로 홀짝홀짝했다. 한번은 정일권(국무총리·국회의장), 모윤숙(시인) 등 당시 국회의원 일행이 파리에 와 리츠호텔에서 리셉션을 여니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대사관으로부터 왔다. 훗날 영국의 다이애나 태자비가 죽기 전날 묵은 곳으로 더욱더 유명해진 리츠는 비싸고 호화로운 곳이라 기웃거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정일권·모윤숙 둘 다 내게는 내키지 않는 사람이지만 공술 마시고 리츠도 구경할 욕심으로 가 봤다. 정일권에게 인사한 다음 모윤숙 앞으로 갔다. 60대 초의 그는 몸이 난데다 약간 들떠 있어 책으로만 알던 여류시인의 모습은 이미 아니었다. 주위에 모인 한국 기자들에게 자기 자랑을 한창 하던 끝에 그는 “<렌의 애가>를 읽고 울지 않은 남자가 드물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밸이 꼴렸다. 마음속으로 ‘군사독재정권에 빌붙어 전국구 국회의원이 된 주제’를 뇌까리며 나는 돌아섰다. 웨이터에게 위스키를 한 잔 달라고 하여 그 자리에 서서 죽 들이켰다. 이것이 리츠 기억의 전부다.
파리 번화가의 하나인 ‘메트로(지하철) 오페라의 계단에서 올려다보이는 네온광고판’, ‘덜커덩거리는 자동차 바닥’, ‘컴컴한 방의 좁은 벤치’, ‘병원 수술대 같은 침대’, ‘사복 두 사람이 내 겨드랑이를 끼고 오르는 층계’ … 그 다음날 오후 간신히 떠올린 토막 난 기억의 필름인데 사고를 친 건 틀림없었다. 2~3일 뒤 어느 병원에서 200여 프랑의 응급 진료비 청구서가 날아왔다. 짚이는 데가 있어 대사관에 갔는데 중정요원으로 알려진 영사 직함의 직원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거였다. 어? 이 사람이 무얼 알지? 리츠의 리셉션이 있던 날 밤 ‘메트로 오페라’에 큰 대 자로 자빠져 있는 나를 경찰이 약물중독자로 의심하여 병원에 실어가 검사를 했다는 것과 그 사실을 파리 경시청이 즉시 전화로 통보해 주었다는 것이다. 과음으로 비롯된 추태는 지나간 일로 치자. 하지만 십만이 넘는 파리 거주 외국인의 신상정보를 교환하는 연락망이 야간에도 프랑스 경찰과 외국 공관 사이에서 가동한다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형사 자베르의 매서운 눈초리! 프랑스는 경찰국가인가. 그렇다면 7월14일 프랑스 대혁명 축제 날 레퓌블리크 광장에 가서 온종일 노닥거린 내 모습을 프랑스 경찰이 찍어 한국 대사관 중정요원에게 보냈을 수도 있다는 헛된 두려움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국제 서신 검열을 식은 죽 먹기로 하던 때라 파리~서울 편지 왕래는 가족 것을 제외하고는 전무했다. 그러던 차에 <조선일보>에
서 친히 지낸 후배 신홍범이 엽서를 띄웠다. ‘단 한순간이나마 활짝 열려 있는 프랑스 같은 자유의 공기를 마셨으면 원이 없겠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 구절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책과 함께 서울에 가서 읽은 책 이야기를 하는 게 고작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츠 추태 때문에 프랑스 사람과 사귀는 것이 도무지 꺼림칙했다. 한창 열을 올리는 마오이스트(마오쩌둥주의자)들의 집회·시위를 가 봐? 아니다. 그러다가는 정말 사진이 찍히고 만다. 프랑스에서는 기자라도 외무부 추천 내무부 발급의 ‘외국인 기자증’을 소지하지 않으면 정치행동으로 간주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 돌로레스 이바루리(1895~1989·사진)를 환영하기 위해 스페인 이민들이 ‘불로뉴 숲’에서 모인다는 기사였다. ‘정열의 꽃’(la Pasionaria)이란 애칭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이바루리는 스페인 내전(1936~39) 때 파시스트 프랑코에 항전하는 인민전선 쪽에 서서 통렬한 선동 연설로 전세계 반파쇼 투사들을 사로잡은 공산주의자다. 그가 살아 있다는 것조차 서울에서는 몰랐다. 일요일에 열린 집회는 지금 한국의 촛불시위처럼 축제적 분위기가 주조였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가 있는가 하면 아들딸을 등에 업은 중년 남자도 있었고 망명 1세대에 해당하는 60대 이상은 별로 없었다. 그때 나는 스페인 말을 전혀 몰랐지만 기자는 감각으로 연설의 ‘야마’(山의 일본 발음, ‘요점’이란 뜻, 기사의 제목이 될 만한 내용)를 안다. 저만치 단상에 오른 백발의 이바루리는 연설 말미에 “아세시노! 프랑코!”(asesino! Franco, 살인자! 프랑코!)라 소리 질렀다. 청중들은 이 말을 받아 “아세시노! 프랑코”를 연호했다. 연호는 네댓 번 반복되었다. “살인자! 프랑코!”가 “프랑코! 살인자!”로 바뀌었다. 그리고 또 연호했다.
임재경/언론인
사진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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