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혼란 서울’…낭만 파리는 잊었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 7-1
 
 
한겨레  
 








 

»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평양을 극비방문하고 온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4 남북공동성명’을 깜짝 발표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1972년 봄, 나는 <조선일보> 경제부 기자에서 국회 담당 정치부 차장 자리로 옮겼다. 희망해서 그 자리에 간 것은 아니었지만 야심에 찬 기자들에게는 부러운 보직이었다. 정치부장은 김용태(국회의원, 내무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선임차장은 청와대를 출입하는 이종구(<조선일보> 해직기자), 여당 담당 기자는 김대중(<조선일보> 고문)과 백순기, 야당 쪽은 주돈식(문민정부 문공부 장관)과 성한표(<조선일보> 해직기자, <한겨레> 편집국장·논설주간)였다.

내가 외국에 나가 있던 기간(1971년 1월~1972년 3월)에 발생한 중요 정치·사회 분야의 중요 이슈를 몇 가지 적어보자. <다리>지 필화,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공동대표 김재준 목사·이병린 변호사·언론인 천관우), 검찰의 이범열 판사 구속(사법파동), 경기도 광주단지 입주 빈민 소요, 실미도 특수부대 난동, 칼(KAL)빌딩에서 한진 해외파견 노동자 집단 항의, 수경사 군인 고려대 난입 폭행, 서울 일원 위수령 발동. 10개 대학에 무장군인 진입, 박정희 국가비상사태 선포, 국가보위법 국회에서 변칙 통과 등이다.

신문철을 뒤져 보았으나 지면에 나타난 보도는 이런 중요 쟁점들을 단순하게 그날치 ‘사건’으로 다루었을 뿐 사건 뒤에 숨은 의미와 파장을 알리려는 노력의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 신문사 동료들에게 지난 1년 남짓한 기간에 일어난 이슈를 화제로 삼아 말을 걸어 봐? 10년간의 경험으로 편집국 안에서 기자들 사이에 진지한 토론이 벌어지는 낌새가 보이기만 하면 데스크는 “시시한 소리 그만 하고 기사나 써!” 할 게 뻔했다. 하긴 마감에 항상 쫓기는 것이 기자니까.

지방판이 나온 뒤 기자 두서넛과 어울린 술판에서 광주단지 소요에 관해 물어보았다. 그 응답이 걸작. “뻔한 건데 뭘 … 임형 파리에서 ‘백마 탄’ 이야기나 해보슈”라는 거였다. 이런 일도 있고 해서 당시 문화부장 유경환(시인, 작고)의 ‘파리 뒷골목’을 테마로 한 체류기를 쓰라는 요청을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정치부가 돌아가는 일면을 말해주는 에피소드 하나. 청와대를 출입하던 이종구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준비할 때 거들던 절친한 사이다. 한번은 무슨 일로 청와대 기자실에 전화를 걸자 “그건 내려가서 말할게”라고 대답했다. ‘내려가서’라는 표현에 울화가 치밀어, 그날 저녁 술 마시는 자리에서 “청와대가 임금님 계시는 궁궐이냐? ‘돌아가서’라고 하면 될 것을, ‘내려간다’고 하는 것은 뭐냐”며 마구 역정을 냈다. 청와대 기자들이 보통 그렇게 말해 그렇게 나왔다는 것이며 유별나게 의미 부여 한다며 도리어 내게 대들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그와 나는 약간 서먹해졌다.

내가 프랑스에 가기 전에도 중앙정보부 직원은 편집국에 무단출입했다. 그런데 귀국했을 때는 중정 직원이 편집국장 책상 바로 옆 검정 가죽소파(1인용)에 앉아 있는 거였다. 평기자는 고사하고 부장들도 여간해서는 그 소파에 앉지 않는 것이 편집국의 불문율이었다. 신문사를 예방하는 외부의 귀빈(브이아이피)이나 사장만이 앉는 자리인데 중정요원이 거기에 버젓이 앉다니 기가 막혔다. “당신 일어서! 여기가 어딘데 매일 와 앉아 있는 거야”라고 하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들었다. 만약 그랬다간 ‘임아무개 발광했다’고 하였을 거다.



 

» 임재경/언론인
 
이런 판에 72년 초여름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왔다. 독재자 박정희가 독재의 충성스러운 심복 이후락을 평양에 보내 민족의 대동단결을 국내외에 선언하였으니 경천동지할 일이다. 신문사 편집국의 첫 반응은 경악이란 한마디로 충분했다. 7월4일 오전 10시인가 중대 발표가 있다고 하여 또 무슨 간첩단 사건이 있나 보다 하며 내근 중이던 나는 편집국 한 모퉁이에 있는 텔레비전 스위치를 켰다. 어안이 벙벙하여 편집국 간부 모두가 허둥댔다.

사회부 법조 담당 기자 안병훈(<조선일보> 편집국장·편집인)이 7·4 공동성명 관련해서 법제적 차원의 해설기사를 쓰란다며 조언을 구했다. 나는 “우선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하며, 폐지되기 전까지 과도기간은 두 가지 법을 달라진 남북관계에 맞추어 탄력성 있게 운영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내 희망적인 관측과는 반대 방향으로 박정희는 치달았던 것이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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