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유신정권 ‘아첨명단’ 작성합니까?
세상을 바꾼 사람들 8-7
 
 
한겨레  
 








 

» 임재경/언론인
 
긴급조치 시대에 언론매체 종사자들은 숨을 죽이긴 했으나 다른 마음만 먹지 않으면 큰 불편 없이 살았다. 주말마다 푸른 잔디밭에 나가 골프채를 휘두르는 언론 종사자가 훨씬 많아졌다. 유력 신문의 편집 간부들이 요정과 살롱에서 비싼 술을 얻어 마시는 풍조는 60년 중반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아진 것이 없었다. 1978년 6월에는 현대건설이 관계와 언론계 유력자 수십명에게 환심을 사고자 아파트 분양권(입주권)을 나누어 준 사실이 밝혀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리영희가 투옥되고 박정희가 피살되는 79년 10·26 때까지 2년 동안 다른 매체는 고사하고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실 동료들과도 별반 어울리지 않았다. 그럴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보다 10년 이상 나이 많은 여성 논설위원 조경희는 한국일보사 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이런 농담을 던지는 거였다. “임 선생은 도무지 말이 없어… 명단 작성하는 거 아냐?” ‘당신이 박정희의 종말을 손꼽아 기다리며 누가 박정희 체제에 아첨하는가를 살피는 것을 나는 알지’ 하는 거라고 나는 풀이했다. 그는 6·25 전에 언론에 발을 디딘 고참 중의 고참이다.

계간 <창작과 비평>(78년 겨울호)에 발표한 긴 글 ‘한국 경제의 독점적 성격’이 제적생뿐만 아니라 그 윗세대의 ‘반체제’ 인사들에게서 호평을 받는 것이 기쁨과 동시에 부담으로 이어졌다. 60년대에 혁신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박중기(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장)로부터 “임형의 <창비> 글은 현채의 글보다 이해하기 쉬워 좋더라”는 말을 듣고 내가 앞으로 그런 기대를 계속 충족시킬 수 있을는지 마음이 무거웠다. 안평수(한국은행 재직·<한국일보> 80년 해직기자 신연숙의 남편)는 아예 “한국의 독점기업과 군수산업의 연관에 대해서는 언제 본격적인 글을 쓰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즈음 초면인 한국노총의 조직부장 천영세(국회의원, 민노당 대표)가 위스키 두 병을 사 들고 한국일보사로 나를 찾아왔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폭행(똥물 투척 사건)을 비롯하여 노동운동 전반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한 실정을 토로하며 각계의 의견을 듣고자 하니 언론계를 대표하여 꼭 참석해 달라는 주문이다. 경제 기사와 논평을 비교적 오래 쓰긴 했지만 노동운동가들을 마주 대하여 노동자의 현실적 과제를 논의하는 것이 처음일뿐더러 내 체질상 ‘노조 문제는 아닌데’ 하는 망설임이 앞섰다. 그러나 현역 언론인 가운데서 나 말고 나갈 사람이 없다면 할 수 없지 하며 여의도 노총회관에 갔다. 그 자리에 나온 사람들, 김윤환(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소장), 신인령(이화여대 총장 역임), 조화순(목사,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총무 역임, 현 남북평화재단 이사)은 입을 모아 박정희 정권의 노동자 권익 침해를 규탄했다. 현실 비판과 대안 제시에 앞장서야 할 언론인이 정보 부족에다 노동문제 고민을 많이 안 한 탓으로 이날 모임에서는 죽을 쑤었다는 기억만 남아 있다. 아무튼 노총 토론회 이후 화학노련 대의원 총회 등 여러 곳에 나가 시국강연 비슷한 것을 여러 번 했는데, 이로써 중정의 ‘반체제 점수’는 착실하게 올랐을 것이다.

다음은 개신교 진보 쪽의 접근이다. 어머니가 평안북도 영변의 미션계 ‘숭덕학교’에서 세례를 받은 기독교 신자인 터라 나는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 몇 해 다닌 적은 있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교회에 나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기독교 신자들의 위선적 언행을 싫어하다 못해 증오했다. 문청 시절에는 기독교 하면 무조건 고개를 흔들어 실존주의 철학자 가운데서 유독 사르트르를 좋아했던 것은, 그가 무신론으로 분류되었던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70년대 중반 이후 간간이 만난 ‘반박정희 크리스천’은 내가 생각했던 위선적인 면이 안 보여 ‘저런 모습 자체가 위선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의 간사 손학규(현 통합민주당 대표)가 79년 초 종로 서울와이엠시에이 강당에서 교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 20명을 상대로 한국 경제의 실정에 관한 강연을 해 달라고 하여 쾌히 응했다. 그 자리에는 김관석(목사·기독교방송 사장 역임·작고), 박형규(목사), 강문규(한국와이엠시에이전국연맹 사무총장 역임·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한완상(서울대 명예교수·한적 총재 역임) 등이 나와 있었는데 두 시간으로 잡았던 강연은 질문이 하도 많이 쏟아져 다섯 시간으로 길어졌다. 그 모임 이후 강연 주문은 ‘크리스찬아카데미’,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기독자교수협의회’ 등으로 번져 나갔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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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리영희 석방서명 거부한 ‘기자들’
세상을 바꾼 사람들 8-6
 
 
한겨레  
 








 

» 1989년 8월 <한겨레> 방북 취재 계획 사건으로 다섯번째 옥고를 치른 리영희(왼쪽) 고문이 집행유예로 출감하는 날 부인 윤영자(오른쪽)씨가 주는 두부를 먹고 있다.
 
언론인이자 교수인 리영희가 구치소와 교도소에 갇혀 2년 3개월 동안 겪은 정신적·육체적 고초를 밖에 있었던 사람이 필설로써 재현하려 덤빈다면 그건 섣부른 짓이다. 일찍이 독일의 철인 헤겔이 갈파했듯이,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이라도 현실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수형자의 처지와 아주 잘 들어맞는다. 정론 활동을 삶의 의미로 여기는 리영희 같은 수형자에게서 펜과 종이를 빼앗는 것은 보통 수형자와는 전혀 다른 보복적 징벌을 가하는 것이다. 서양 극영화에 자주 나오는 캄캄한 징벌방을 그려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터인데, 거기 갇힌 사람은 고독, 소외, 굴욕, 자살충동에 시달릴 것이다. 정상적인 서신교환 행위를 금했던 군사독재 치하의 교도행정이 근대사회의 보편적 인권과 담을 쌓았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래도 양심수 몇몇 사람들에게는 ‘제비’란 이름의 소통 루트가 있었으니 그것만도 다행이다. 재소 중인 리영희가 부인을 통해 넣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프랑스어판인데, 3년 뒤 나 자신이 구치소에 있을 때 같은 책을 읽어보려 했으나 심란하여 한 자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주변에서 편지와 엽서를 쉽게 잘 쓰는 사람을 꼽자면 단연 리영희다. 만약 그에게 옥중 생활 동안 집필의 자유가 허용되었다면 우리에게도 로자 룩셈부르크나 안토니오 그람시가 남긴 것 같은 불후의 옥중서한집이 나오는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한겨레> 창간 직후 1989년 4월 ‘방북 취재 기획’ 사건으로 다시 옥중에 갇혔을 때 리영희가 나에게 보낸 것과 ‘전민련 조직 및 문 목사 방북사건’으로 투옥된 이부영이 신홍범 논설주간에게 보낸 것, 두 개의 사신을 우리는 <한겨레>에 실었다. 비록 사신이긴 하나 떳떳한 신념으로 말미암아 투옥된 지식인이 신문 편집 간부에게 보낸 서신은 보도 가치가 있다고 믿어서였다. 다른 신문이 흉내 내지 못하는 한겨레신문만의 새로운 경지라 자랑하고 싶다.

1978년 초 리영희 재판이 진행되던 기간에 그를 아끼는 해직 교수, 문인, 언론인들이 ‘리영희를 석방하라’는 의견서를 검찰총장에게 보낸 데 얽힌 이야기를 해야겠다. 정치적 선언 행위가 아니라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이 의견서는 내가 초안을 작성하고 <한국일보> 논설위원 김용구와 청암(송건호의 아호)이 다듬었다. 의견서에 중정과 검찰을 비난하는 문구는 없었지만, 내가 맡은 현역 언론인의 서명은 긴급조치가 판을 치는 엄혹한 세월이었던 터라 수월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서울신문> 주필 남재희의 서명을 먼저 받으면 리영희와 개인적으로 아는 현역 언론인들이 서명에 응할 것 아닌가 꿍꿍이셈을 품었는데 적중했다. 남재희를 찾아가 의견서를 내민즉 한번 읽어보고는 두말 없이 이름 석 자를 썼다. 남재희의 이름이 오른 서명지를 리영희의 <조선일보> 정


 

» 임재경/언론인
 
치부 기자 시절 부장이었던 조용중(<경향신문> 전무, 언론연구원 이사장 역임), 정치부 기자 김동익(<중앙일보> 편집국장·주필·사장 역임)에게 내미니 그들도 두말 않고 서명했다. <한국일보>에서는 김용구, 예용해, 이열모, 이형, 정경희 등 여럿이 서명에 응해주어 현역 언론인 10여명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쪽은 가나 마나일 것 같아 아예 포기했다.

30년 전의 일로 당사자들은 십중팔구 기억하지 못한다고 발뺌을 할지 모르나 그때 리영희 석방 요구서에 서명을 받으러 다니던 내게는 어저께 겪은 일 같다. 두 사람이 서명을 거절했다. 한 사람은 조선일보 수습기자 출신으로 리영희가 외신부장 시절 외신부 기자였던 김학준(<동아일보> 사장·회장)이다. 그와는 남재희를 만나러 서울신문에 찾아갔을 때 논설위원실에서 마주쳐 ‘잘되었다’ 싶어 서명지를 꺼내들자 ‘오늘 바쁘니 내일 보자’는 거였다. 서명을 거절한다고 느꼈으나 다음 날 김학준에게 다시 전화했다. 신문사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신문사에 나오지 않았다. 다른 한 사람은 당시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었고 뒷날 큰 정당의 대표를 지낸 조세형(주일대사 역임)이다. 그의 서명 거절 이유가 걸작이다. “리영희는 정부에 미운털이 박힌 사람 아닙니까. 나는 붓을 꺾고 싶지 않아요”라 했던 그가 그 이듬해인가 국회의원이 되었다. 속된 말로 하면 두 사람은 영달의 길을 걸었다. 그것이 리영희 석방 요구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덕분인지 어떤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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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민주인사 ‘집회장’ 된 리영희 재판
세상을 바꾼 사람들 8-5
 
 
한겨레  
 








 

» 1977년 11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리영희 교수가 80년 1월 2년형을 살고 만기 출옥해 기자들과 만나고 있다.
 
1974년 ‘10월 유신’ 쿠데타에서 5년 뒤인 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 피살되기까지 문인·언론인·대학교수·성직자·노동자·농민·대학생들이 겪은 수난의 실상들은 김정남의 책 <진실, 광장에 서다>(2005년 창비)에 아주 감동적으로, 그리고 소상하게 서술돼 있다. 그러므로 후세의 사가들이 이 기간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김정남의 책은 빼놓을 수 없는 길잡이 될 것이다. 일제하의 한국현대사를 다루면서 국사학계의 주류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조선총독부 경무부의 첩보 문건, 검찰 취조기록, 그리고 신문철을 중요 사료(史料)로 삼는 오류를 범했다. 통탄스러운 일은 주권을 되찾은 이 나라에서조차 형사 공문서와 신문들은 이 기간의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터무니없는 왜곡·날조를 일삼았던 터라 자칫하면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기자들을 추방한 다음에는 그 죄업이 두고두고 남아 역사를 기록하는 데까지 미친다.

막 가정을 꾸렸거나 결혼을 목전에 둔 20대 말에서 30대 중반 해직기자들은 생계가 당장 큰 문제였다. 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자 동분서주했고, 출판사(창작과 비평) 번역 일을 주선한 적이 있으나 안정적인 직업이 아닌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주말을 이용하여 해직기자들과 산에 올라가 큰소리로 떠드는 것이 낙이라면 낙이었는데, 학생시절부터 등산가로 소문난 ‘조투’의 백기범이 늘 앞장섰다. 75년 8월 중순 더위가 한창일 때 리영희·이호철(소설가)·나 셋이 원주 치악산 정상에 오른 적이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날 박정희의 눈엣가시였던 장준하(<사상계> 발행인, 국회의원 역임, 작고)가 산행 중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날 밤 서울에 돌아와 그를 기리며 술을 퍼마셨다.

원주는 70년대 민주화운동의 메카로 일컬어지던 곳으로, 리영희는 나를 이끌고 여러 번 거길 갔다. 청아한 인품에다 짓밟히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지니고 고향을 지키던 장일순(一粟子, ‘조한알’이란 낙관으로 알려진 서예가, 작고)과 가톨릭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작고)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또 옥중의 김지하 아버지가 살고 있던 원주 거처를 찾아가 술대접을 한 때도 있었다.

그런 리영희가 77년 11월 그의 저서 <8억인과의 대화>와 <우상과 이성>에서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구속되고 발행자 백낙청이 불구속 기소되었으니 나도 머지 않았다는 느낌이 번뜩 들었다. 리영희가 구속된 지 며칠 뒤 <한국일보>를 담당한다는 중정 요원이 나를 찾아와 리영희와의 교분관계를 물어 “당신은 신문사에 출입하며 ‘협조’를 요망하는 사람 아니냐”며 역정을 냈다. 리영


 

» 임재경/언론인
 
희의 재판에는 법정대리인으로 이돈명(한겨레신문 초대 이사), 조준희(민변 회장, 한겨레신문 자문위원장 역임), 홍성우, 황인철(한겨레신문 초대 감사, 작고) 등 제1세대 인권변호사들을 망라함으로써 법정을 압도하는 장관을 이뤘다. 그뿐 아니라 재판이 있을 때마다 방청석에는 재야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들이 운집했는데, 지금 선명하게 떠오르는 여성의 얼굴은 박형규 목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역임, 현 남북평화재단 이사장)의 부인과 투옥 중이던 김지하 시인의 모친, 그리고 이대 교수 이효재(한겨레신문 초대 이사)다. 재판 방청인들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민청학련 사건과 5·22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통칭 제적생들이며, 그때 거기서 알게 된 후 지금껏 반갑게 만나는 사람이 이명준(6월항쟁계승사업회 상임이사), 임진택(연출가), 김정환(시인)이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란 넉 자 고사대로 리영희가 구속된 지 한달쯤 뒤 모친상을 당했다. 외아들인 그인지라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도록 며칠 동안의 가출소를 변호인들이 검찰에 간청했으나 끝내 묵살되어 결국 상주 없는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상주 없는 영구가 출상하던 겨울날 아침, 화양동 그의 집에는 200명 가까운 조문객들이 모였던 것이다. 덕불고(德不孤)란 말에 ‘의불고’(義不孤, 의로운 사람은 외롭지 않다)를 보태야 옳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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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긴급조치가 부른 ‘노장청 결합’
세상을 바꾼 사람들 8-4
 
 
한겨레  
 








 

» 1975년 3월 <조선일보>에서 해직당한 ‘조선투위’ 기자들이 태평로 사옥 앞에서 ‘언론 자유와 복직’을 외치고 있다.
 
1975년 3월 <조선일보> 자유언론 투쟁과 이를 주도한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한 ‘3·6 사태’가 내게 걸렸던 두 번째 시험이다. ‘조선투위’의 주동 인물로 꼽히는 박범진·백기범·신홍범·정태기·성한표(<한겨레> 편집국장·논설주간 역임) 등은 나이와 언론계 입문이 나보다 4~5년 늦다. 하지만 그들은 6·3 세대인 터라 현실인식과 실천 면에서는 문청 출신인 나보다 앞서면 앞섰지 결코 뒤지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이들과 조선일보 재직 중 가깝게 지낸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일보가 3·6 사태 직후 그 지면을 통해 ‘외부인들의 사주·선동’ 운운한 것은 70년대의 자유언론 운동 전체에 대한 모독이며 나아가 조선일보 전 역사를 통해 간간이나마 분출된 진실보도 노력에 침을 뱉는 자해행위나 마찬가지다. 반세기 가까운 언론 경험을 되돌아볼 때 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기사를 쓰지 않거나 왜곡하는 사례들은 눈에 띄었어도 기자들이 다른 사람의 꼬임이나 선동에 넘어가 언론자유를 주장하는 예는 본 적이 없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 60년대에 영향력 있던 신문에 발은 디딘 기자들은 지적 수준이 높은 편이며 사리 판단에 어수룩하기보다는 영악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외부는 고사하고 다른 매체 종사자의 장단에 놀아났다는 것은 어림없는 소리.

‘선동’인지 ‘압력’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짓을 나는 딱 한 번 했다. 조선일보에서 1파, 2파, 3파로 대량해고가 진행되는 중에 신문 제작에 참여하던 정치부 차장(청와대 출입) 이종구에게 전화를 걸어 “너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소리를 지른 것이 그거다. 그러나 대학 시절부터 절친했던 이종구가 내 전화를 선동으로 받아들였다고는 절대 믿지 않는다. 압력? 언짢은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이 진짜 우정 아닌가. 그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어도 해직기자 그룹에 틀림없이 합류했을 터이다.

조선투위의 자유언론 활동을 이야기할 때 안줏감으로 자주 오르는 것이 이른바 ‘한성여관’ 사건이다. 해직기자들이 밤샘농성을 하던 곳으로 조선일보 사옥 뒷골목에 있던 여관이다. 그 어름 저녁나절 소주 한 상자를 들고 시인 김지하와 같이 거길 갔다가 때마침 조선일보 방우영 사장(조선일보 회장)과 맞닥뜨렸다. 그날 한성여관의 나는 관극자가 아니라 무대에 오른 배우와 비슷한 행위자(액터)였다. 거기서 벌어진 장면은 무대에 섰던 쪽이 아닌 관찰자들이 말해야 신빙성이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쓰지 않겠다.

긴급조치 시대 민주화 운동의 핵심과 주축이 어느 분야였나를 가리는 것은 생각처럼 그리 쉽지 않다. 주축과 핵심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분야, 다양한 직종, 다양한 연령층이 어울렸다고 해야 옳다. 안온한 세월이었으면 일생을 두고 서로 마주치지 못했을 사람들, 이를테면 변호사·목사·신부·여성운동가·노동운동가·농민운동가·대학교수·해직언론인들이 서로 사귈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보다 스무 살 연장인 변호사와 목사가 있는가 하면, 스무살 연하 제적학생도 있었으니 중국 문혁(문화대혁명) 시대 구호의 하


 

» 임재경/언론인
 
나인 ‘노장청(老壯靑) 결합’을 긴급조치가 유도한 이상한 꼴이 되었다. ‘민청학련’, ‘5·22 사건’을 비롯한 각종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20대 초의 젊은이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는 것을 박정희의 중앙정보부가 기를 쓰고 방해했던 까닭에 ‘초록은 동색’이라 그들이 직장을 잃은 조선투위-동아투위(이하 ‘조투’ ‘동투’로 약칭) 형님들과 인연을 맺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 할 것이다.

인연의 매개물은 책을 만드는 일. ‘창작과 비평사’를 해직교수 백낙청이 손수 경영하면서 동투의 이종욱(한겨레 문화부장·논설위원 역임)에게 편집 일을 맡긴 이후 ‘75년’ 해직기자들 자신이 직접 출판사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동투의 김언호가 만든 ‘한길사’에 민청련 출신의 김학민(사학재단 이사장 역임) 편집부장, 조투의 정태기·신홍범이 차린 ‘두레’의 편집기자 정성현(출판사 청년사 사장), 동투 권근술(한겨레 편집위원장·논설주간·대표이사 역임)과 조투 최병진이 함께 만든 ‘청남’의 백영서(연세대 교수, 계간 창비 주간)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다가 이제는 통칭 제적학생들이 출판에 손을 댔는데 이를테면 ‘풀빛’의 나병식(민청학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무이사 역임), ‘형성’의 이호웅(5·22 사건, 재선의원·국회 교체위원장 역임), ‘동녘’의 이태복(보건사회부 장관 역임)이 곧 그들이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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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민주회복선언’ 하자 “반성각서 쓰라”
세상을 바꾼 사람들 8-3
 
 
한겨레  
 








 

» 1974년 11월27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민주회복 국민선언대회’. 맨 앞줄에 이인·양일동·김영삼, 한 사람 건너 이희호·김대중씨 부부가 앉았고, 뒷줄에 유진오·함석헌·정일형씨 등도 보인다. 점선 안이 필자 임재경 당시 <한국일보> 논설위원. 사진 <보도사진연감>
 
1974년 초 긴급조치 1, 2, 3, 4호로 시작된 박정희의 철권 폭압통치가 계속된 5년 동안 나는 여러 고비 우여곡절을 겪긴 했으나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먹고 살았다. 그러면서 하늘의 시험을 여러 번 치렀다. <민족경제론>으로 당대에 큰 영향을 끼친 박현채(조선대 교수 역임, 작고)가 70년대 중반 어느 자리에선가 “임형은 재주가 메준인갑네 … 다 목이 잘리는데 잘도 견디니 말이여”라 했다. 뼈가 들어 있는 이 농담에 마음이 몹시 착잡했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뜻이긴 한 모양인데 신문사를 박차고 나가면 뱃속은 편할지 몰라도 그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몸은 제도권 안에 두고 있었으나 마음은 이미 제도권 밖으로 나돈 지 오래다. 굳이 내가 나서서 할 일을 찾을 것까지 없었다.

첫번째 시험은 74년 11월의 ‘민주회복 국민선언’이다. 민주회복 국민선언을 구상하고 조직한 사람은 김정남(<평화신문> 편집국장,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 역임)인데 6·3세대인 그와는 60년대 후반부터 안면이 있었으나 술자리를 같이한 것은 백낙청이 미국에 갔다 돌아온 뒤 72년 겨울 <창작과 비평> 사무실 주변이 처음이다.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하라는 그의 제의를 응낙하면서 선언문을 보자고 하지는 않았으나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냐고 물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리영희와 백낙청이 한다면 좋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민주회복 국민선언 대회가 열리는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갔다. 거기서 나누어 주는 선언문 내용을 보니 ‘유신헌법은 최단시일 안에 합리적 절차를 거쳐 민주헌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구절이 있어 조금 놀라긴 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날 오후 <서울신문> 편집국장 남재희가 전화를 걸어 “이제 발벗고 나섰군. 최초의 현실 참여를 축하하는 뜻에서 기념될 만한 사진 한 장을 주지” 하는 거였다. 그 사진은 앞자리의 저명인사들이 아니라 뒷줄에 앉아 있었던 함세웅(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민주화기념사업회 이사장), 홍성우(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표 역임), 김윤수(영남대 명예교수, 국립현대미술관장), 그리고 내 얼굴이 담긴 것이다. 기자가 찍은 그 보도용 사진을 잘 간직한답시고 어떤 책갈피에 끼워놓았다가 안타깝게도 못 찾고 있다.

민주회복 국민선언이 유신헌법의 비판은 물론이고 헌법에 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한 긴급조치 1호(74년 1월)에 도전하였으니 박정희가 가만 있었을 리 없다. 선언이 나간 며칠 뒤 장기영이 자기 방으로 나를 불렀다. “정치활동을 하는 모양인데 신문사에 있는 사람은 그러면 안 돼요. 앞으로 그런 것 안 하겠다는 각서를 써요”라 했다. 사주의 요구에 비굴하게 응하면 끝장이란 판단이 서 민주회복 국민선언은 언론 자유 보장을 중요 내용으로 담고 있으며 한 달 전에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 선언’을 낼 정도로 언론 상황이 긴박하다는 일반론을 폈다. 어안이 벙벙한지 그는 육중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임재경씨!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요. 거기 이름이 들어 있는 <중앙일보> 홍사중(<중앙일보>·<조선일보> 논설위원 역임)이란 사람은 이미 각서를 썼어요. 중정에서는 당신을 내보내라는 건데 내가 책임지고 타일러 다시는 그런 짓 안 하겠다는 각서를 받겠다고 약속했어요”라 하였다.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사표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각서는 쓸 수 없습니다. 논설위원 주제에 언론 자유를 주장하고 나서 다시 그런 짓 안 하


 

» 임재경/언론인
 
겠다는 각서를 쓰면 어떻게 정론을 펼 수 있나요. 그리고 장 사주가 저를 어떻게 보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뒷짐을 짓고 뱉듯이 “집에 가 부인하고 의논을 해보고 내일 다시 오세요” 하고는 말을 맺었다. 아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밖에서 벌어지는 험한 일들을 일절 집에서 안 꺼내는 주의다.

다음날 장 사주 방에 다시 가니 그는 전날보다 다소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 나는 거짓말을 했다. “제 처도 저와 같은 생각입니다. 사표를 써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손을 저으며 “사표를 내라는 뜻이 아니에요”라 했다. 자유당 정권 말기 회사 경영이 어려울 때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의 안희경 비서관이 단둘이만 알기로 하고 수천만환을 지원하겠다는 제의를 했으나 세상에 비밀이란 것은 없다고 생각하여 그 제의를 사절했다는 의외의 과거사를 꺼내는 거였다. “임재경씨의 각서를 받아 금고에 보관하였다고 중정에 말할 테니 그리 아세요”라며 거짓말을 하겠다는 그에게 나는 “감사합니다”라 답했다. 그해 12월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했던 백낙청은 ‘교육공무원법 위반’이란 구실로 서울대 교수직에서 파면되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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