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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11월27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민주회복 국민선언대회’. 맨 앞줄에 이인·양일동·김영삼, 한 사람 건너 이희호·김대중씨 부부가 앉았고, 뒷줄에 유진오·함석헌·정일형씨 등도 보인다. 점선 안이 필자 임재경 당시 <한국일보> 논설위원. 사진 <보도사진연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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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초 긴급조치 1, 2, 3, 4호로 시작된 박정희의 철권 폭압통치가 계속된 5년 동안 나는 여러 고비 우여곡절을 겪긴 했으나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먹고 살았다. 그러면서 하늘의 시험을 여러 번 치렀다. <민족경제론>으로 당대에 큰 영향을 끼친 박현채(조선대 교수 역임, 작고)가 70년대 중반 어느 자리에선가 “임형은 재주가 메준인갑네 … 다 목이 잘리는데 잘도 견디니 말이여”라 했다. 뼈가 들어 있는 이 농담에 마음이 몹시 착잡했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뜻이긴 한 모양인데 신문사를 박차고 나가면 뱃속은 편할지 몰라도 그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몸은 제도권 안에 두고 있었으나 마음은 이미 제도권 밖으로 나돈 지 오래다. 굳이 내가 나서서 할 일을 찾을 것까지 없었다.
첫번째 시험은 74년 11월의 ‘민주회복 국민선언’이다. 민주회복 국민선언을 구상하고 조직한 사람은 김정남(<평화신문> 편집국장,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 역임)인데 6·3세대인 그와는 60년대 후반부터 안면이 있었으나 술자리를 같이한 것은 백낙청이 미국에 갔다 돌아온 뒤 72년 겨울 <창작과 비평> 사무실 주변이 처음이다.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하라는 그의 제의를 응낙하면서 선언문을 보자고 하지는 않았으나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냐고 물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리영희와 백낙청이 한다면 좋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민주회복 국민선언 대회가 열리는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갔다. 거기서 나누어 주는 선언문 내용을 보니 ‘유신헌법은 최단시일 안에 합리적 절차를 거쳐 민주헌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구절이 있어 조금 놀라긴 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날 오후 <서울신문> 편집국장 남재희가 전화를 걸어 “이제 발벗고 나섰군. 최초의 현실 참여를 축하하는 뜻에서 기념될 만한 사진 한 장을 주지” 하는 거였다. 그 사진은 앞자리의 저명인사들이 아니라 뒷줄에 앉아 있었던 함세웅(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민주화기념사업회 이사장), 홍성우(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표 역임), 김윤수(영남대 명예교수, 국립현대미술관장), 그리고 내 얼굴이 담긴 것이다. 기자가 찍은 그 보도용 사진을 잘 간직한답시고 어떤 책갈피에 끼워놓았다가 안타깝게도 못 찾고 있다.
민주회복 국민선언이 유신헌법의 비판은 물론이고 헌법에 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한 긴급조치 1호(74년 1월)에 도전하였으니 박정희가 가만 있었을 리 없다. 선언이 나간 며칠 뒤 장기영이 자기 방으로 나를 불렀다. “정치활동을 하는 모양인데 신문사에 있는 사람은 그러면 안 돼요. 앞으로 그런 것 안 하겠다는 각서를 써요”라 했다. 사주의 요구에 비굴하게 응하면 끝장이란 판단이 서 민주회복 국민선언은 언론 자유 보장을 중요 내용으로 담고 있으며 한 달 전에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 선언’을 낼 정도로 언론 상황이 긴박하다는 일반론을 폈다. 어안이 벙벙한지 그는 육중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임재경씨!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요. 거기 이름이 들어 있는 <중앙일보> 홍사중(<중앙일보>·<조선일보> 논설위원 역임)이란 사람은 이미 각서를 썼어요. 중정에서는 당신을 내보내라는 건데 내가 책임지고 타일러 다시는 그런 짓 안 하겠다는 각서를 받겠다고 약속했어요”라 하였다.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사표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각서는 쓸 수 없습니다. 논설위원 주제에 언론 자유를 주장하고 나서 다시 그런 짓 안 하
겠다는 각서를 쓰면 어떻게 정론을 펼 수 있나요. 그리고 장 사주가 저를 어떻게 보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뒷짐을 짓고 뱉듯이 “집에 가 부인하고 의논을 해보고 내일 다시 오세요” 하고는 말을 맺었다. 아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밖에서 벌어지는 험한 일들을 일절 집에서 안 꺼내는 주의다.
다음날 장 사주 방에 다시 가니 그는 전날보다 다소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 나는 거짓말을 했다. “제 처도 저와 같은 생각입니다. 사표를 써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손을 저으며 “사표를 내라는 뜻이 아니에요”라 했다. 자유당 정권 말기 회사 경영이 어려울 때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의 안희경 비서관이 단둘이만 알기로 하고 수천만환을 지원하겠다는 제의를 했으나 세상에 비밀이란 것은 없다고 생각하여 그 제의를 사절했다는 의외의 과거사를 꺼내는 거였다. “임재경씨의 각서를 받아 금고에 보관하였다고 중정에 말할 테니 그리 아세요”라며 거짓말을 하겠다는 그에게 나는 “감사합니다”라 답했다. 그해 12월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했던 백낙청은 ‘교육공무원법 위반’이란 구실로 서울대 교수직에서 파면되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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