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민주인사 ‘집회장’ 된 리영희 재판
세상을 바꾼 사람들 8-5
 
 
한겨레  
 








 

» 1977년 11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리영희 교수가 80년 1월 2년형을 살고 만기 출옥해 기자들과 만나고 있다.
 
1974년 ‘10월 유신’ 쿠데타에서 5년 뒤인 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 피살되기까지 문인·언론인·대학교수·성직자·노동자·농민·대학생들이 겪은 수난의 실상들은 김정남의 책 <진실, 광장에 서다>(2005년 창비)에 아주 감동적으로, 그리고 소상하게 서술돼 있다. 그러므로 후세의 사가들이 이 기간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김정남의 책은 빼놓을 수 없는 길잡이 될 것이다. 일제하의 한국현대사를 다루면서 국사학계의 주류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조선총독부 경무부의 첩보 문건, 검찰 취조기록, 그리고 신문철을 중요 사료(史料)로 삼는 오류를 범했다. 통탄스러운 일은 주권을 되찾은 이 나라에서조차 형사 공문서와 신문들은 이 기간의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터무니없는 왜곡·날조를 일삼았던 터라 자칫하면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기자들을 추방한 다음에는 그 죄업이 두고두고 남아 역사를 기록하는 데까지 미친다.

막 가정을 꾸렸거나 결혼을 목전에 둔 20대 말에서 30대 중반 해직기자들은 생계가 당장 큰 문제였다. 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자 동분서주했고, 출판사(창작과 비평) 번역 일을 주선한 적이 있으나 안정적인 직업이 아닌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주말을 이용하여 해직기자들과 산에 올라가 큰소리로 떠드는 것이 낙이라면 낙이었는데, 학생시절부터 등산가로 소문난 ‘조투’의 백기범이 늘 앞장섰다. 75년 8월 중순 더위가 한창일 때 리영희·이호철(소설가)·나 셋이 원주 치악산 정상에 오른 적이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날 박정희의 눈엣가시였던 장준하(<사상계> 발행인, 국회의원 역임, 작고)가 산행 중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날 밤 서울에 돌아와 그를 기리며 술을 퍼마셨다.

원주는 70년대 민주화운동의 메카로 일컬어지던 곳으로, 리영희는 나를 이끌고 여러 번 거길 갔다. 청아한 인품에다 짓밟히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지니고 고향을 지키던 장일순(一粟子, ‘조한알’이란 낙관으로 알려진 서예가, 작고)과 가톨릭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작고)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또 옥중의 김지하 아버지가 살고 있던 원주 거처를 찾아가 술대접을 한 때도 있었다.

그런 리영희가 77년 11월 그의 저서 <8억인과의 대화>와 <우상과 이성>에서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구속되고 발행자 백낙청이 불구속 기소되었으니 나도 머지 않았다는 느낌이 번뜩 들었다. 리영희가 구속된 지 며칠 뒤 <한국일보>를 담당한다는 중정 요원이 나를 찾아와 리영희와의 교분관계를 물어 “당신은 신문사에 출입하며 ‘협조’를 요망하는 사람 아니냐”며 역정을 냈다. 리영


 

» 임재경/언론인
 
희의 재판에는 법정대리인으로 이돈명(한겨레신문 초대 이사), 조준희(민변 회장, 한겨레신문 자문위원장 역임), 홍성우, 황인철(한겨레신문 초대 감사, 작고) 등 제1세대 인권변호사들을 망라함으로써 법정을 압도하는 장관을 이뤘다. 그뿐 아니라 재판이 있을 때마다 방청석에는 재야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들이 운집했는데, 지금 선명하게 떠오르는 여성의 얼굴은 박형규 목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역임, 현 남북평화재단 이사장)의 부인과 투옥 중이던 김지하 시인의 모친, 그리고 이대 교수 이효재(한겨레신문 초대 이사)다. 재판 방청인들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민청학련 사건과 5·22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통칭 제적생들이며, 그때 거기서 알게 된 후 지금껏 반갑게 만나는 사람이 이명준(6월항쟁계승사업회 상임이사), 임진택(연출가), 김정환(시인)이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란 넉 자 고사대로 리영희가 구속된 지 한달쯤 뒤 모친상을 당했다. 외아들인 그인지라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도록 며칠 동안의 가출소를 변호인들이 검찰에 간청했으나 끝내 묵살되어 결국 상주 없는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상주 없는 영구가 출상하던 겨울날 아침, 화양동 그의 집에는 200명 가까운 조문객들이 모였던 것이다. 덕불고(德不孤)란 말에 ‘의불고’(義不孤, 의로운 사람은 외롭지 않다)를 보태야 옳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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