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유신정권 ‘아첨명단’ 작성합니까?
세상을 바꾼 사람들 8-7
 
 
한겨레  
 








 

» 임재경/언론인
 
긴급조치 시대에 언론매체 종사자들은 숨을 죽이긴 했으나 다른 마음만 먹지 않으면 큰 불편 없이 살았다. 주말마다 푸른 잔디밭에 나가 골프채를 휘두르는 언론 종사자가 훨씬 많아졌다. 유력 신문의 편집 간부들이 요정과 살롱에서 비싼 술을 얻어 마시는 풍조는 60년 중반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아진 것이 없었다. 1978년 6월에는 현대건설이 관계와 언론계 유력자 수십명에게 환심을 사고자 아파트 분양권(입주권)을 나누어 준 사실이 밝혀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리영희가 투옥되고 박정희가 피살되는 79년 10·26 때까지 2년 동안 다른 매체는 고사하고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실 동료들과도 별반 어울리지 않았다. 그럴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보다 10년 이상 나이 많은 여성 논설위원 조경희는 한국일보사 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이런 농담을 던지는 거였다. “임 선생은 도무지 말이 없어… 명단 작성하는 거 아냐?” ‘당신이 박정희의 종말을 손꼽아 기다리며 누가 박정희 체제에 아첨하는가를 살피는 것을 나는 알지’ 하는 거라고 나는 풀이했다. 그는 6·25 전에 언론에 발을 디딘 고참 중의 고참이다.

계간 <창작과 비평>(78년 겨울호)에 발표한 긴 글 ‘한국 경제의 독점적 성격’이 제적생뿐만 아니라 그 윗세대의 ‘반체제’ 인사들에게서 호평을 받는 것이 기쁨과 동시에 부담으로 이어졌다. 60년대에 혁신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박중기(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장)로부터 “임형의 <창비> 글은 현채의 글보다 이해하기 쉬워 좋더라”는 말을 듣고 내가 앞으로 그런 기대를 계속 충족시킬 수 있을는지 마음이 무거웠다. 안평수(한국은행 재직·<한국일보> 80년 해직기자 신연숙의 남편)는 아예 “한국의 독점기업과 군수산업의 연관에 대해서는 언제 본격적인 글을 쓰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즈음 초면인 한국노총의 조직부장 천영세(국회의원, 민노당 대표)가 위스키 두 병을 사 들고 한국일보사로 나를 찾아왔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폭행(똥물 투척 사건)을 비롯하여 노동운동 전반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한 실정을 토로하며 각계의 의견을 듣고자 하니 언론계를 대표하여 꼭 참석해 달라는 주문이다. 경제 기사와 논평을 비교적 오래 쓰긴 했지만 노동운동가들을 마주 대하여 노동자의 현실적 과제를 논의하는 것이 처음일뿐더러 내 체질상 ‘노조 문제는 아닌데’ 하는 망설임이 앞섰다. 그러나 현역 언론인 가운데서 나 말고 나갈 사람이 없다면 할 수 없지 하며 여의도 노총회관에 갔다. 그 자리에 나온 사람들, 김윤환(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소장), 신인령(이화여대 총장 역임), 조화순(목사,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총무 역임, 현 남북평화재단 이사)은 입을 모아 박정희 정권의 노동자 권익 침해를 규탄했다. 현실 비판과 대안 제시에 앞장서야 할 언론인이 정보 부족에다 노동문제 고민을 많이 안 한 탓으로 이날 모임에서는 죽을 쑤었다는 기억만 남아 있다. 아무튼 노총 토론회 이후 화학노련 대의원 총회 등 여러 곳에 나가 시국강연 비슷한 것을 여러 번 했는데, 이로써 중정의 ‘반체제 점수’는 착실하게 올랐을 것이다.

다음은 개신교 진보 쪽의 접근이다. 어머니가 평안북도 영변의 미션계 ‘숭덕학교’에서 세례를 받은 기독교 신자인 터라 나는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 몇 해 다닌 적은 있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교회에 나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기독교 신자들의 위선적 언행을 싫어하다 못해 증오했다. 문청 시절에는 기독교 하면 무조건 고개를 흔들어 실존주의 철학자 가운데서 유독 사르트르를 좋아했던 것은, 그가 무신론으로 분류되었던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70년대 중반 이후 간간이 만난 ‘반박정희 크리스천’은 내가 생각했던 위선적인 면이 안 보여 ‘저런 모습 자체가 위선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의 간사 손학규(현 통합민주당 대표)가 79년 초 종로 서울와이엠시에이 강당에서 교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 20명을 상대로 한국 경제의 실정에 관한 강연을 해 달라고 하여 쾌히 응했다. 그 자리에는 김관석(목사·기독교방송 사장 역임·작고), 박형규(목사), 강문규(한국와이엠시에이전국연맹 사무총장 역임·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한완상(서울대 명예교수·한적 총재 역임) 등이 나와 있었는데 두 시간으로 잡았던 강연은 질문이 하도 많이 쏟아져 다섯 시간으로 길어졌다. 그 모임 이후 강연 주문은 ‘크리스찬아카데미’,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기독자교수협의회’ 등으로 번져 나갔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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