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리영희 석방서명 거부한 ‘기자들’
세상을 바꾼 사람들 8-6
 
 
한겨레  
 








 

» 1989년 8월 <한겨레> 방북 취재 계획 사건으로 다섯번째 옥고를 치른 리영희(왼쪽) 고문이 집행유예로 출감하는 날 부인 윤영자(오른쪽)씨가 주는 두부를 먹고 있다.
 
언론인이자 교수인 리영희가 구치소와 교도소에 갇혀 2년 3개월 동안 겪은 정신적·육체적 고초를 밖에 있었던 사람이 필설로써 재현하려 덤빈다면 그건 섣부른 짓이다. 일찍이 독일의 철인 헤겔이 갈파했듯이,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이라도 현실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수형자의 처지와 아주 잘 들어맞는다. 정론 활동을 삶의 의미로 여기는 리영희 같은 수형자에게서 펜과 종이를 빼앗는 것은 보통 수형자와는 전혀 다른 보복적 징벌을 가하는 것이다. 서양 극영화에 자주 나오는 캄캄한 징벌방을 그려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터인데, 거기 갇힌 사람은 고독, 소외, 굴욕, 자살충동에 시달릴 것이다. 정상적인 서신교환 행위를 금했던 군사독재 치하의 교도행정이 근대사회의 보편적 인권과 담을 쌓았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래도 양심수 몇몇 사람들에게는 ‘제비’란 이름의 소통 루트가 있었으니 그것만도 다행이다. 재소 중인 리영희가 부인을 통해 넣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프랑스어판인데, 3년 뒤 나 자신이 구치소에 있을 때 같은 책을 읽어보려 했으나 심란하여 한 자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주변에서 편지와 엽서를 쉽게 잘 쓰는 사람을 꼽자면 단연 리영희다. 만약 그에게 옥중 생활 동안 집필의 자유가 허용되었다면 우리에게도 로자 룩셈부르크나 안토니오 그람시가 남긴 것 같은 불후의 옥중서한집이 나오는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한겨레> 창간 직후 1989년 4월 ‘방북 취재 기획’ 사건으로 다시 옥중에 갇혔을 때 리영희가 나에게 보낸 것과 ‘전민련 조직 및 문 목사 방북사건’으로 투옥된 이부영이 신홍범 논설주간에게 보낸 것, 두 개의 사신을 우리는 <한겨레>에 실었다. 비록 사신이긴 하나 떳떳한 신념으로 말미암아 투옥된 지식인이 신문 편집 간부에게 보낸 서신은 보도 가치가 있다고 믿어서였다. 다른 신문이 흉내 내지 못하는 한겨레신문만의 새로운 경지라 자랑하고 싶다.

1978년 초 리영희 재판이 진행되던 기간에 그를 아끼는 해직 교수, 문인, 언론인들이 ‘리영희를 석방하라’는 의견서를 검찰총장에게 보낸 데 얽힌 이야기를 해야겠다. 정치적 선언 행위가 아니라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이 의견서는 내가 초안을 작성하고 <한국일보> 논설위원 김용구와 청암(송건호의 아호)이 다듬었다. 의견서에 중정과 검찰을 비난하는 문구는 없었지만, 내가 맡은 현역 언론인의 서명은 긴급조치가 판을 치는 엄혹한 세월이었던 터라 수월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서울신문> 주필 남재희의 서명을 먼저 받으면 리영희와 개인적으로 아는 현역 언론인들이 서명에 응할 것 아닌가 꿍꿍이셈을 품었는데 적중했다. 남재희를 찾아가 의견서를 내민즉 한번 읽어보고는 두말 없이 이름 석 자를 썼다. 남재희의 이름이 오른 서명지를 리영희의 <조선일보> 정


 

» 임재경/언론인
 
치부 기자 시절 부장이었던 조용중(<경향신문> 전무, 언론연구원 이사장 역임), 정치부 기자 김동익(<중앙일보> 편집국장·주필·사장 역임)에게 내미니 그들도 두말 않고 서명했다. <한국일보>에서는 김용구, 예용해, 이열모, 이형, 정경희 등 여럿이 서명에 응해주어 현역 언론인 10여명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쪽은 가나 마나일 것 같아 아예 포기했다.

30년 전의 일로 당사자들은 십중팔구 기억하지 못한다고 발뺌을 할지 모르나 그때 리영희 석방 요구서에 서명을 받으러 다니던 내게는 어저께 겪은 일 같다. 두 사람이 서명을 거절했다. 한 사람은 조선일보 수습기자 출신으로 리영희가 외신부장 시절 외신부 기자였던 김학준(<동아일보> 사장·회장)이다. 그와는 남재희를 만나러 서울신문에 찾아갔을 때 논설위원실에서 마주쳐 ‘잘되었다’ 싶어 서명지를 꺼내들자 ‘오늘 바쁘니 내일 보자’는 거였다. 서명을 거절한다고 느꼈으나 다음 날 김학준에게 다시 전화했다. 신문사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신문사에 나오지 않았다. 다른 한 사람은 당시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었고 뒷날 큰 정당의 대표를 지낸 조세형(주일대사 역임)이다. 그의 서명 거절 이유가 걸작이다. “리영희는 정부에 미운털이 박힌 사람 아닙니까. 나는 붓을 꺾고 싶지 않아요”라 했던 그가 그 이듬해인가 국회의원이 되었다. 속된 말로 하면 두 사람은 영달의 길을 걸었다. 그것이 리영희 석방 요구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덕분인지 어떤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임재경/언론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