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5월 광주’ 보도사진을 구해달라
세상을 바꾼 사람들 9-4
 
 
한겨레 윤운식 기자
 








 

»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가 실린 1980년 6월2일치 <전남매일> 1면. 신군부의 검열관이 빨간 사인펜으로 대부분의 내용을 ‘삭제하라’고 지시해놓았다.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신용호 전남매일 사장이 지난 5월 5·18재단에 기증했다. 사진 <전남매일> 제공
 
1980년 5월18일 아침 6시가 조금 지났을까, 이호철의 부인이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 계엄사 합수부 요원이라는 사람들에게 연행되었다며 “어서 피하세요”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끊었다. 부리나케 옷을 입고 집을 나서며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인기척은 없다. 몇 사람 타지 않은 신새벽 버스 안에서도 기관원이 쫓는 것 같은 불안감에 승객마다 그 거동을 살폈다. 한적한 변두리보다는 사람이 북적대는 종로 한복판이 나을 것 같아 청진동 해장국 골목으로 갔다. 이호철이 붙들려 갔다면 ‘지식인 134인 선언’ 때문이리라 싶어 공중전화로 청암 댁에 다이얼을 돌렸다. 여러 번 신호가 울린 다음 전화를 받은 부인은 반 울부짖음이었다. 몇 사람이 들이닥쳐 옷도 변변히 입지 못한 채 이미 끌려갔다는 이야기다. ‘몇 시쯤? 어디서 온 사람들?’을 물어볼 계제가 아니었다. 술 한잔 걸친 다음 대중탕에 가 한잠 자고 나서 열시쯤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보는 게 상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프로급 활동가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겠으나 문청 기질의 저널리스트에게는 술이 약.

청진동 한 목욕탕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일어나니 10시가 넘었다. 한국일보사는 걸어서 5분 거리지만 갈 엄두가 나지 않아 교환을 통해 사회부로 전화를 연결했다. 이름을 대자 대뜸 “임재경 선배요? 아직 안 들어갔군요. 너무 많은 사람이 연행되어 지금 확인하느라 정신없습니다. 광주에서는 데모가 한창이구요”라며 다급하게 말을 맺었다. ‘호협’ 박윤배의 서소문 사무실로 갔다.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을 보듬는 데 남다른 소질을 지닌 그는 “전두환이가 정권 잡으면 너는 어차피 한번 들어가야 할 텐데 서두를 것 없어… 당분간 먹물들하고 만나지 말고 지방이나 놀러 다니지 그래”라는 거였다. 점심을 먹고 헤어질 때 차비라며 돈을 주었다.

나를 조카처럼 아끼는 <한국일보> 논설위원 이열모에게 한 1주일 쉬겠노라 전화했고, 집에는 누군가를 시켜 시골에 가 있겠다고 전갈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난다는 것은 기자가 사건 현장을 멀리하는 것이므로 아니되고 또 먹물들과 만나지 않으면 사는 재미가 없다. 더구나 광주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 확실한데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다. 검열을 거쳐 나온 신문의 보도를 뒤집어 읽으면 유혈을 포함한 큰 사달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2~3일 여관을 전전하던 끝에 광주 출신 건축가 조건영(한겨레신문사 공덕동 사옥 설계자)을 만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김태홍은 피신 중이며 박정삼(한국일보노조 사무국장)은 구속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저지른 비인간적 살육 행위를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 급선무이므로 광주 유혈현장을 포착한 보도사진을 구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제 몸뚱어리 하나 잘 간수할 요량으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내가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도울 생각으로 한국일보 사진기자 한 사람을 불러내 광주에 간 사진기자가 누구이며 유혈현장을 담은 사진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반응은 간략하고 차가워 그런 사진은 없으며 있다 해도 계엄사에서 절대 외부 유


 

» 임재경/언론인
 
출을 금한다고 했다. 다른 신문의 사진기자를 더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광주폭동의 진압 완료’라는 공식 발표가 나오고 며칠 뒤 공평동의 ‘창작과 비평사’에 들렀더니 편집장 이시영(시인, ‘창비’ 주간·부사장 역임, 단국대 교수)이 상기한 표정으로 <전남매일>의 1면 아랫부분 전체를 깐 김준태(시인,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역임)의 시를 나에게 내밀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 떨렸다. 시의 마지막 연을 여기에 옮긴다.

‘광주여 무등산이여/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꿈이여 십자가여/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더욱 젊어져 갈 청춘의 도시여/지금 우리들은 확실히/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6월 초순 종로 보신각 옆 신라주단 앞 큰길에서 우연히 광주 출신의 민청학련 사건 제적생 최권행(서울대 교수·프랑스문학)과 마주쳤다. 78년 초 출판사 ‘두레’가 폴 니장의 <아덴 아라비>(Aden Arabie) 번역을 그에게 맡기는 자리에서 정태기, 최갑수(서울대 교수·서양사학과)와 함께 만났다. 광주항쟁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을 처음 보는 터라 잡담 제하고 근처 생맥줏집으로 갔다. 광주의 실정을 듣고 싶어 말을 걸었으나 한참 동안 그는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일 때문에 일어서야겠다며 최권행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나직한 음성으로 부르는 거였다. 그와 나는 지금 연령의 차이를 넘어 자주 만나는 사이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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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전두환 사령관 겨눈 ‘지식인 선언’
세상을 바꾼 사람들 9-3
 
 
한겨레  
 








 

» 1979년 11월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전모를 발표하고 있는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80년 5월12일 발표한 ‘지식인 134인 선언’은 보안사령관·합수본부장·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전권을 장악한 그의 퇴진을 요구했다.
 
1980년 5월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전두환의 2차 쿠데타가 있기까지 나는 민주정치의 앞날을 낙관했다. 12·12 이후 전두환의 사진이 뻔질나게 신문에 실리는 것이 꺼림칙하다고 할까, 수상쩍다는 느낌은 확실히 들었다. 그러나 몇 달만 지나면 개정된 헌법에 따라 보통선거 원리에 충실한 선거가 실시되어 김대중·김영삼 둘 가운데 하나가 대통령이 되리라는 데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의문을 갖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 같았다. 하기는 유신체제에 저항한 많은 시민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터인데 희망적 관측이 불현듯 확신으로 바뀌는 것이 인간 심리의 오래된 병통이니 그걸 탓해 무얼 하랴. 하지만 희망적 관측과 엄존하는 현실을 준별하지 못하는 기자는 그 직업윤리에 일단 빨간 신호가 켜졌음을 가리킨다.

그해 초봄쯤인가, <서울신문> 편집부국장 정구호(경향신문 사장·청와대 홍보 수석 역임)가 점심을 하자고 내게 전화를 했다. 같은 해 대학을 들어간 우리는 과가 달랐으나 동숭동 캠퍼스의 벤치에 앉아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분격하여 열을 올리곤 했다. 그러나 기자로서는 별로 어울릴 기회가 없었는데, 그를 만나 보니 정치 전망이 나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가 “3허(전두환의 보안사 간부 허삼수·허화평·허문도)가 앞으로 정치 향방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했을 때 나는 즉석에서 “유신이 종말을 고했는데 그 사람들이 무얼 하겠다는 건가”라고 받아쳤다. 그와 헤어진 뒤 한동안 불쾌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정구호는 현실정치 지향이 강한 사람이니 그렇게 되길 희망하는 모양이라 생각했다. 그 얼마 뒤 김대중의 비서인 한화갑(3선 국회의원, 민주당 대표 역임)이 한국일보사로 나를 찾아왔다. 용건은 “김 선생님의 정치 구상 관련 책을 내려고 하니 임 선생이 만나 경제 분야에 관해 인터뷰 형식의 대담을 해주시오”라는 거였다. “나는 신문에 실리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인터뷰는 원칙적으로 안 한다”는 말로 사절했다. 야박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으나 현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을 뜻이 없는 이상 그게 올바른 길이라 믿었다.

4월 말께 청암(송건호 선생 아호)이 유신체제에 반대했던 지식인들이 만나 시국 의견을 교환하자고 한다기에 아현동에 있는 기독교 선교교육원에 같이 갔다. 그 자리에는 학계의 유인호(중앙대 교수, 작고), 이문영(고려대 교수), 이효재(이화여대 교수), 장을병(성균관대 교수, 국회의원 역임), 한완상(서울대 교수), 법조계의 이돈명·홍성우 변호사, 문화계의 이호철(소설가), 언론계의 청암과 나 이렇게 열 안팎이 모였다. 10·26 이후의 정치·사회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내놓되 유신체제에 동조하지 않는 각계의 지식인을 망라하는 지식인 선언을 채택·발표하자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선언문 초안은 유인호·이호철·장을병이 작성하고 각계의 서명은 이날 참석했던 인사들이 분야별로 받아 오기로 했다. 서너 번 모임을 한 가운데 선언문 내용을 두고 이견이 노출되어 비교적 솔직한 토론을 벌였다. 당면 관심사는 군의 정치 개입 반대를 어느 정도 수위로 표현하느냐는 문제였다. 장을병은 군부를 자극하지 않는다는 의도라며 “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킬 것을 확신한다”는 초안을 내놓았다. 전두환이 4월 중순 보안사령관과 합수본부장, 그리고 중앙정보부장(서리)을 겸직함으로써 헌법상의 문민통솔 원칙과 중앙정보부법을 위반한 마당에 ‘군의 중립 확신’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너무나 안이한 현실인식이라고 인권변호사 홍성우가 이견을 제시했다. 나는 이견에 동조하며 그 정도라면 구태여 여러 사람 이름으로 선언문을 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최종안은 “… 국군은 정치적으로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국군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직을 겸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한 불법이므로 시정되어야 한다”로 확정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5월12일 발표된 ‘지식인 134인 선언’의 핵심 부분인데, 분명하게 전두환의 의표를 찌른 것이다.



 

» 임재경/언론인
 
5월 초부터 가열되기 시작한 ‘계엄철폐-군정종식’ 구호의 데모는 5월15일 그 절정에 이르렀다. 나는 이날 오전 수운회관에서 ‘5·22’(75년 서울대 김상진 열사 추모집회) 제적생인 김도연(문학평론가, 작고)과 이화여대 불문과 출신 나혜원의 결혼식 주례를 섰는데, 나를 식장으로 안내한 신랑의 친구 황지우(시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는 그날 데모에 신경이 팔려서인지 경황이 없었다. 식이 끝난 다음 수운회관 근방에서 민청련 회장 조성우(현 민화협 공동의장)를 마주쳤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나와 몇 마디 나누고 의기양양한 걸음걸이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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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남영동으로 끌려간 ‘언론자유’
세상을 바꾼 사람들 9-2
 
 
한겨레  
 








 

» 1980년 5월 기자협회 검열거부 운동을 빌미로 해직된 언론인들이 89년 2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강제해직 진상 규명과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맨가운데 80년 당시 기자협회장이었던 김태홍(현 국회의원)이 서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2·12 쿠데타로 이른바 ‘군부 실세’로 등장한 전두환이 언론에 폭압을 가한 것은 정권 장악을 위한 예정된 순서였다. 언론이 제 구실을 하였다면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 문자 해득 수준이 95%, 고등학교 졸업자 비율 80%의 나라에서 보안부대장이 대통령이 되려는 것은 글자 그대로 백일몽이다.

1980년 2월 <경향신문> 기자들이 “동아-조선 투위 기자들의 전원 복직”을 요구하는 성명을 낸 데 이어 3월 기자협회장에 선출된 김태홍(한겨레신문사 이사, 국회 보건복지위원장 역임)은 ‘편집권 독립과 외부의 간섭 배격’을 협회의 3대 과제의 하나로 명시했다. 박정희는 갔으나 그를 떠받드는 세력의 계엄령이 용을 쓰는 상태에서 오랜만에 듣는 자유 언론의 소리였다. 그러나 편집권 독립과 외부간섭 배격은 원론적 과제로는 나물랄 데 없는 것이지만 군부의 사전 검열이 시행되는 한에서는 염불을 외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두환은 계엄령을 빙자하여 보안사 안에 ‘언론대책반’을 만들었으며 그 책임자 육군 준위 이상재(민정당 사무차장·국회의원 역임)가 서울시청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신문·방송사의 편집부장(혹은 그 대리)이 가져오는 대장(인쇄 직전의 신문조판 형태)과 원고에 ‘가’ 또는 ‘부’를 표시하는 고무도장을 찍었다. 이를테면 수백 명의 민주인사들이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 모여 채택한 성명 내용(통일주체 국민회의를 통한 대통령 선거 반대, 거국적 과도 민주내각을 통한 민주헌정 이행)은 ‘보도 불가’였고, 단지 위장 결혼식을 열어 게엄령을 위반했다는 게엄사의 발표문만을 신문들은 실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당시의 신문철을 아무리 뒤져봐도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생각과 행동은 알 길이 없다.

4월 말인가 5월 초 기자협회가 주최한 개정 헌법의 언론 조항 삽입 문제와 관련한 공청회에 나갔다가 기자협회장 김태홍을 만났다. 술 좋아하고 입심 좋기로 소문난 기자 김태홍은 몹시 지쳐 있었다. “내 모든 것을 걸고 계엄사의 언론 사전 검열을 거부하는 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비치는 거였다. 모든 것을 걸겠다는 사람에게 ‘그것 참 잘했다’거나 아니면 ‘몸조심 해야지’, 어느 쪽도 입에 담을 수 없어 묵묵부답으로 헤어졌다. 5·18 이후 그가 구속되어 1년 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기까지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마침내 5월 중순 기자협회는 검열거부 선언문을 발표하기에 이렀으나 5·18 계엄확대 조처와 광주 민중항쟁으로 말미암아 현역기자들의 검열거부 운동은 너무나 큰 정치-사회적 변화에 추월당하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전두환 일당의 대대적인 기자 추방이 시작되었다. 일차로 경향신문 기자들, 서동구(경향신문 편집국장, 스카이라이프 사장 역임), 이경일(한겨레 창간준비위원, <문화일보> 논설위원 역임), 고영재(한겨레 편집국장, 경향신문 사장 역임), 홍수원(한겨레 창간준비위 사무국 차장, 논설위원 역임), 표완수(시민방송 상무, YTN 사장 역임), 박우정(한겨레 편집국장·논설주간 역임), 박성득(한겨레 제작국장, 경향컬처스 대표 역임)


 

» 임재경/언론인
 
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기자협회 간부 중 5·18 전부터 합수부의 검속을 예상하여 자택을 비웠던 김태홍은 일단 체포를 면했으나 감사 박우정, 이사 노향기(한겨레 편집부국장 역임)는 구속되어 속칭 ‘남영동’(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붙들려 갔다. 그들 모두 신문사에서 해직되었음은 물론 길게는 1년, 최소한 몇 달씩 옥고를 치렀다.

80년에 발생한 기자들의 대량 구속과 해직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쓰라린 경험과 고초가 많다. 하지만 추방당한 기자들을 도우려는 노고와 자기 희생도 적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서 도피 중의 김태홍과 관련된 이야기 한 가닥만은 기록 삼아 이 글에서 꼭 남겨야겠다. 내가 7월 초 남영동에 붙들려 갔을 때 느낀 것인데 전두환의 합수부는 기자들의 검열 거부 운동을 정치인 김대중과 연결시키는 계략 아래 그 고리로 광주 출신의 김태홍을 끼워넣은 거였다. 이런 사정으로 김태홍의 피신은 그만큼 어려워졌으며, 그가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동향·동창들은 예외 없이 감시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 나를 통해 그를 알게 된 ‘호협’ 박윤배다. 그는 도피자금과 외모가 비슷한 자기 동생의 주민등록증을 그에게 주었던 것인데, 그만 그가 전남에서 잡히면서 박윤배에게 불똥이 튀었다. 당당한 체구의 박윤배를 담당한 ‘남영동’ 기술자는 김근태 고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이근안이었다. 박윤배는 얼마나 당했겠는가.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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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결혼위장 집회’ 짓밟은 79년 겨울
세상을 바꾼 사람들 9-1
 
 
한겨레  
 








 

» 1979년 11월 이른바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된 윤보선 전 대통령이 80년 1월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서고 있다.
 
헤겔의 말을 다시 인용하거니와 인간의 상상력은 현실에 미치지 못한다. 헌법을 종잇장처럼 구기기를 일삼고 그의 친위 무장부대(차지철의 경호실 및 수경사)가 하늘을 찌를 듯 위세등등했던 철옹성, 청와대 안의 박정희가 그처럼 쉽게 갈 줄은 정말 몰랐다. 외근기자 시절 주변으로부터 상상이 너무 앞질러 나간다는 핀잔을 가끔 들었던 터라 공상소설 같은 10·26을 보고는 ‘기자 노릇 헛했다’는 자탄이 절로 나왔다. 시중드는 젊은 여성을 옆에 앉히고 영국산 고급 위스키(시바스 리갈)를 마시다 비밀경찰(중앙정보부)의 우두머리가 쏜 총알을 맞아 죽은 최후의 장면은 만화책의 한 폐이지나 다름없다. 하지만 크게 보면 동학 궐기에서 4·19 의거에 이르기까지 100년 동안 면면히 이어진 우리 민중의 힘을 너무나 깔본 결과로 빚어진 것이 박정희의 피살이다. 그의 대통령 재임 중 재판의 형식을 빌린 이른바 ‘사법 살인’이 심심치 않게 있었던 사례에 견준다면 살인자 김재규의 결행은 당당하다 해야 옳다. 인권 변호사 강신옥이 열렬하게 주창한 김재규 구명운동에 나도 이름을 넣었다. 인간 김재규를 의인으로 만드는 데는 생각을 조금 달리하나 유신독재를 끝내는 과정에 치러야 했을 희생을 최소화했던 김재규의 거사를 나는 평가했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자의 퇴장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인 정치 공백과 혼란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며 동시에 자연스러운 귀결. 그런데 대통령 권한대행인 국무총리 최규하는 박정희가 애용하던 계엄령으로 정치적 지도력을 유지하려 했으니 될 법이나 한 소린가? 직업 외교관 출신인데다 이심(異心)을 품지 않을 사람으로 꼽혀 국무총리 직에 임명된 됨됨이라 위기관리의 능력과는 애시당초 무관한 존재였다.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 휘하의 ‘합동수사본부장’직을 차고앉은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그의 영관급 부하들이 제3의 쿠데타 ‘12·12’를 일으킨 경과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정치 공백을 틈타 정권을 잡는 방식은 역사상 흔히 있는 일이긴 하나, 1979년 겨울의 12·12 쿠데타를 막지 못한 가장 큰 책임은 최규하에게 돌아간다. 이 글을 쓰면서 중요한 시기에, 막중한 위치에 섰던 사람들이 회고록을 남기지 않는 한국의 이상한 관습을 몹시 답답하게 느꼈다. 보복이 두려워 살아 있는 동안 발설하지 못했다면 사후 공개 조건으로라도 진실을 밝히고 자신의 잘못을 후손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 아닌가. 조선조의 당쟁-보복(삼족지멸)과 해방 후의 좌우 싸움-보복(테러) 악습이 회고록 부재의 원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긴급조치를 놔두고 계엄령을 편 상태에서 박정희 체제를 청산하는 과정을 밟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규화는 거기다 유신헌법에 따라 체육관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을 모아놓고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 달라 했으니 국민이 반대할


 

» 임재경/언론인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 존속에 거세게 도전한 것이 저 유명한 ‘YWCA 위장결혼 사건’인데 79년 11월 중순 <씨알(아래알)의 소리> 편집장 최민화(환경관리공단 감사 역임)가 전단처럼 만들어진 결혼 청첩장을 내게 주면서 꼭 참석해달라는 거였다. 신랑은 제적학생 모임인 ‘민청협’의 활동가 홍성엽(작고), 주례는 삼선개헌 반대로 이름난 박종태로 인쇄돼 있었다. 집회·시위가 금지된 상황에서 계엄 당국의 통제를 벗어나 일정한 시각 서울 도심(명동 전국YWCA 회관)에 반유신체제 인사들을 결집하는 비상수단이었던 것이다. 결혼식 아닌 이 결혼식에 나는 가지 못했으나 거기 참석했던 100여명이 보안사에 붙들려가 야만적인 구타를 당했다. 참석자 가운데 내가 잘 아는 통일운동가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74년 긴급조치 위반사건 이후 정보기관의 미움을 산 터라 기관원들로부터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의도적 가혹행위를 당해 그 후유증에 아직 시달리고 있다. 위장결혼식 사건 이후 전두환의 집권 길을 열어주는 절차 집행 담당 대통령에 최규하가 선출되었다.

그해 12월 민주화 운동 진영의 각종 연말 모임이 유난히 많았고 가는 곳마다 즐거운 분위기였다. 나는 <한국일보>에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한국’ 노동조합 송년 모임에 나갔는데 그들은 감상적인 사춘기의 젊은이들처럼 노래를 불러댔다. 해방 직후 초등학교 시절 지겹게 듣다 완전히 잊어버린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라는 노래가 나왔다. 좀처럼 공개석상에서 흥얼대지 않는 나 역시 일어나 한 곡조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기미년 3월1일…’로 시작하는 3·1절 노래였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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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박정희 살아선 청와대 안 뜰거요”
세상을 바꾼 사람들 8-8
 
 
한겨레  
 








 

» 1979년 10월 26일 밤 궁정동 안가에서 심복 김재규에게 저격당한 박정희 대통령의 유해가 청와대를 떠나고 있다. <보도사진연감>
 
긴급조치 말기 개신교 쪽의 젊은 활동가들이 왜 그렇게 나를 끌어내려고 애썼는지 기회가 닿으면 그들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 기독학생총연맹(KSCF) 총무 안재웅(실업극복국민재단 상임이사), 손학규와 그의 영국 유학으로 후임이 된 기독교교회협의회(NCC) 교사위 간사 최혁배(뉴욕에서 변호사 개업 중), ‘기사연’ 간사 이미경(3선 의원, 국회문광위원장 역임), 빈민선교 운동가 박종열(KSCF 총무 역임,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 공동대표), 기독교학생총연맹 간사 정상복(순례자교회 목사), <기독교사상> 여성기자 박영주(잠실교회 목사) 등과 여러 번 만났다. 한결같이 그들이 짜놓은 간담회, 좌담회, 강연 모임에 나와 ‘좋은 말’을 해 달라는 부탁이었는데, ‘좋은 말’이란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이고 모임은 비공개였다. 그들의 주선으로 더러는 인권 상황에 관심을 갖고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변호사와 선교사를 만난 적도 있었으므로 그때 신문 표현대로 하면 나는 어김없는 ‘반체제 활동’ 중이다. 스스로 겁이 많은 사람으로 여기는데 그 서슬 퍼런 시절 어쩌다 개신교 쪽에 겁없는 사람으로 비쳤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

솔직하게 말해서 마음 편한 사람은 역시 해직 기자, 해직 교수, 그리고 <창작과 비평> 주변에 모이는 문인들이었다. 같은 먹물이니까. ‘창비’ 사무실은 <한국일보> 뒷골목, 지금은 헐렸지만 <연합통신> 입구에 있어서 심심하면 거길 들렀다. 해직 교수 백낙청은 계간지 외에 단행본 출판을 시작한 터라 편집과 경영 업무에 시달리는 바람에 술판은 되도록 피했다.

‘창비’ 말고 근방에 내가 자주 들르던 곳은 종로 1가에 무역회사(흥국통상)를 차린 ‘파격’ 채현국-‘호협’ 박윤배의 사무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 셋, 이계익(동아일보 해직, 교통부장관 역임), 이종구(조선일보 해직, 무역협회 상임이사 역임), 황명걸(동아일보 해직, 시인)의 딱한 사정을 잘 아는 터라 해직 기자라면 누굴 만나도 으레 밥과 술을 사주었다. ‘동아’ 해직 기자 양한수는 몇 해, ‘조선’ 해직 기자 문창석은 몇 달 그 무역회사에서 일도 했다. 청진동에는 ‘동아 투위’ 사무실과 ‘자유실천 문인 협의회’ 맹렬회원인 천승세(소설가)가 연 ‘일석기원’이 있어 저녁나절이면 자연스럽게 근방(수송동과 청진동 일대) 술집으로 ‘몰지각한 지식인’(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지식인을 깎아 내리려는 의도로 박정희가 붙인 표현)이 모이는 거였다. 거기서 새로 사귄 친구들은 건축가 조건영(한겨레신문 공덕동 사옥 설계자), 미술평론가 최민(시인, 예술종합학교 교수), 미술가 김용태(민예총 회장), 민속학자 박현수(영남대 교수), 미술가 김정헌(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미술사학자 유홍준(문화재청장 역임)인데 모두 나보다 열 살쯤 아래다.

인연이란 참으로 기묘한 것이어서 광주 사람 조건영이 아니었더라면 광주 출신의 중요한 반유신 언론인 둘, 즉 김태홍(기자협회 회장, 언협 2대 사무국장, 한겨레신문사 이사, 국회의원 역임) 과 박정삼(한국일보 노조 사무국장, 국민일보 사장, 국정원 차장 역임)을 훨씬 뒤에 알게 되어 데면데면한 관계로 그쳤을지 모른다. 술자리에서 걸직한 입담으로 좌중을 웃기는 김태홍에게 “입으로


 

» 임재경/언론인
 
만 그러지 말고 기자협회 회장 같은 일을 해 보라”고 내가 호통을 쳐 얼마 뒤 기협회장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노라고 언젠가 그가 실토했다. 김태홍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공의 반은 조건영에게 돌아 가야 한다.

긴급조치 시절 나와 비슷한 나이거나 조금 위 문인들이 자주 모이던 곳이 관철동의 한국기원이다. 신동문(시인, 작고), 민병산(번역가 겸 서예가, 작고), 신경림(시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황명걸·구중서(문학평론가, 민예총 회장 역임), 방영웅(소설가)인데, 출석 성적으로 하면 민병산 개근상, 황명걸 정근상 감이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피살되던 날 오후, 거기서 해직 교수 염무웅(문학평론가)과 바둑을 한두 판을 두고 술을 마시러 막 층계를 내려가려는데 박종태(3선 국회의원 역임)와 마주쳤다. 공화당 의원으로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해 낭인 생활을 하고 있었던 그는 생맥주를 사겠다며 종각 뒤의 호프집으로 가 우리에게 회고담을 들려줬다.

“11년 전(1968년) 청와대에 불려가 ‘삼선개헌은 각하와 국민이 모두 불행해질 것이므로 거두시라’ 했더니 분김에 얼굴빛이 달라져요. 하도 분위기가 어색해 나도 모르게 탁자 위에 놓인 담뱃갑에 손이 갑디다. 대통령 앞에서는 절대 금연인데, 그는 라이터를 켜서 불을 대주며 부들부들 떨어요 …. 두고 보시오. 박정희는 절대 살아서 청와대를 떠나지 않을 테니 ….”

그 이튿날 새벽 4시 백낙청이 내 집으로 전화를 했다. 박정희에게 유고가 발생했다는 방송이 나온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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