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전두환 사령관 겨눈 ‘지식인 선언’
세상을 바꾼 사람들 9-3
 
 
한겨레  
 








 

» 1979년 11월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전모를 발표하고 있는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80년 5월12일 발표한 ‘지식인 134인 선언’은 보안사령관·합수본부장·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전권을 장악한 그의 퇴진을 요구했다.
 
1980년 5월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전두환의 2차 쿠데타가 있기까지 나는 민주정치의 앞날을 낙관했다. 12·12 이후 전두환의 사진이 뻔질나게 신문에 실리는 것이 꺼림칙하다고 할까, 수상쩍다는 느낌은 확실히 들었다. 그러나 몇 달만 지나면 개정된 헌법에 따라 보통선거 원리에 충실한 선거가 실시되어 김대중·김영삼 둘 가운데 하나가 대통령이 되리라는 데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의문을 갖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 같았다. 하기는 유신체제에 저항한 많은 시민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터인데 희망적 관측이 불현듯 확신으로 바뀌는 것이 인간 심리의 오래된 병통이니 그걸 탓해 무얼 하랴. 하지만 희망적 관측과 엄존하는 현실을 준별하지 못하는 기자는 그 직업윤리에 일단 빨간 신호가 켜졌음을 가리킨다.

그해 초봄쯤인가, <서울신문> 편집부국장 정구호(경향신문 사장·청와대 홍보 수석 역임)가 점심을 하자고 내게 전화를 했다. 같은 해 대학을 들어간 우리는 과가 달랐으나 동숭동 캠퍼스의 벤치에 앉아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분격하여 열을 올리곤 했다. 그러나 기자로서는 별로 어울릴 기회가 없었는데, 그를 만나 보니 정치 전망이 나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가 “3허(전두환의 보안사 간부 허삼수·허화평·허문도)가 앞으로 정치 향방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했을 때 나는 즉석에서 “유신이 종말을 고했는데 그 사람들이 무얼 하겠다는 건가”라고 받아쳤다. 그와 헤어진 뒤 한동안 불쾌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정구호는 현실정치 지향이 강한 사람이니 그렇게 되길 희망하는 모양이라 생각했다. 그 얼마 뒤 김대중의 비서인 한화갑(3선 국회의원, 민주당 대표 역임)이 한국일보사로 나를 찾아왔다. 용건은 “김 선생님의 정치 구상 관련 책을 내려고 하니 임 선생이 만나 경제 분야에 관해 인터뷰 형식의 대담을 해주시오”라는 거였다. “나는 신문에 실리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인터뷰는 원칙적으로 안 한다”는 말로 사절했다. 야박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으나 현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을 뜻이 없는 이상 그게 올바른 길이라 믿었다.

4월 말께 청암(송건호 선생 아호)이 유신체제에 반대했던 지식인들이 만나 시국 의견을 교환하자고 한다기에 아현동에 있는 기독교 선교교육원에 같이 갔다. 그 자리에는 학계의 유인호(중앙대 교수, 작고), 이문영(고려대 교수), 이효재(이화여대 교수), 장을병(성균관대 교수, 국회의원 역임), 한완상(서울대 교수), 법조계의 이돈명·홍성우 변호사, 문화계의 이호철(소설가), 언론계의 청암과 나 이렇게 열 안팎이 모였다. 10·26 이후의 정치·사회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내놓되 유신체제에 동조하지 않는 각계의 지식인을 망라하는 지식인 선언을 채택·발표하자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선언문 초안은 유인호·이호철·장을병이 작성하고 각계의 서명은 이날 참석했던 인사들이 분야별로 받아 오기로 했다. 서너 번 모임을 한 가운데 선언문 내용을 두고 이견이 노출되어 비교적 솔직한 토론을 벌였다. 당면 관심사는 군의 정치 개입 반대를 어느 정도 수위로 표현하느냐는 문제였다. 장을병은 군부를 자극하지 않는다는 의도라며 “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킬 것을 확신한다”는 초안을 내놓았다. 전두환이 4월 중순 보안사령관과 합수본부장, 그리고 중앙정보부장(서리)을 겸직함으로써 헌법상의 문민통솔 원칙과 중앙정보부법을 위반한 마당에 ‘군의 중립 확신’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너무나 안이한 현실인식이라고 인권변호사 홍성우가 이견을 제시했다. 나는 이견에 동조하며 그 정도라면 구태여 여러 사람 이름으로 선언문을 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최종안은 “… 국군은 정치적으로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국군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직을 겸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한 불법이므로 시정되어야 한다”로 확정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5월12일 발표된 ‘지식인 134인 선언’의 핵심 부분인데, 분명하게 전두환의 의표를 찌른 것이다.



 

» 임재경/언론인
 
5월 초부터 가열되기 시작한 ‘계엄철폐-군정종식’ 구호의 데모는 5월15일 그 절정에 이르렀다. 나는 이날 오전 수운회관에서 ‘5·22’(75년 서울대 김상진 열사 추모집회) 제적생인 김도연(문학평론가, 작고)과 이화여대 불문과 출신 나혜원의 결혼식 주례를 섰는데, 나를 식장으로 안내한 신랑의 친구 황지우(시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는 그날 데모에 신경이 팔려서인지 경황이 없었다. 식이 끝난 다음 수운회관 근방에서 민청련 회장 조성우(현 민화협 공동의장)를 마주쳤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나와 몇 마디 나누고 의기양양한 걸음걸이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임재경/언론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