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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가 실린 1980년 6월2일치 <전남매일> 1면. 신군부의 검열관이 빨간 사인펜으로 대부분의 내용을 ‘삭제하라’고 지시해놓았다.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신용호 전남매일 사장이 지난 5월 5·18재단에 기증했다. 사진 <전남매일>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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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18일 아침 6시가 조금 지났을까, 이호철의 부인이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 계엄사 합수부 요원이라는 사람들에게 연행되었다며 “어서 피하세요”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끊었다. 부리나케 옷을 입고 집을 나서며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인기척은 없다. 몇 사람 타지 않은 신새벽 버스 안에서도 기관원이 쫓는 것 같은 불안감에 승객마다 그 거동을 살폈다. 한적한 변두리보다는 사람이 북적대는 종로 한복판이 나을 것 같아 청진동 해장국 골목으로 갔다. 이호철이 붙들려 갔다면 ‘지식인 134인 선언’ 때문이리라 싶어 공중전화로 청암 댁에 다이얼을 돌렸다. 여러 번 신호가 울린 다음 전화를 받은 부인은 반 울부짖음이었다. 몇 사람이 들이닥쳐 옷도 변변히 입지 못한 채 이미 끌려갔다는 이야기다. ‘몇 시쯤? 어디서 온 사람들?’을 물어볼 계제가 아니었다. 술 한잔 걸친 다음 대중탕에 가 한잠 자고 나서 열시쯤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보는 게 상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프로급 활동가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겠으나 문청 기질의 저널리스트에게는 술이 약.
청진동 한 목욕탕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일어나니 10시가 넘었다. 한국일보사는 걸어서 5분 거리지만 갈 엄두가 나지 않아 교환을 통해 사회부로 전화를 연결했다. 이름을 대자 대뜸 “임재경 선배요? 아직 안 들어갔군요. 너무 많은 사람이 연행되어 지금 확인하느라 정신없습니다. 광주에서는 데모가 한창이구요”라며 다급하게 말을 맺었다. ‘호협’ 박윤배의 서소문 사무실로 갔다.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을 보듬는 데 남다른 소질을 지닌 그는 “전두환이가 정권 잡으면 너는 어차피 한번 들어가야 할 텐데 서두를 것 없어… 당분간 먹물들하고 만나지 말고 지방이나 놀러 다니지 그래”라는 거였다. 점심을 먹고 헤어질 때 차비라며 돈을 주었다.
나를 조카처럼 아끼는 <한국일보> 논설위원 이열모에게 한 1주일 쉬겠노라 전화했고, 집에는 누군가를 시켜 시골에 가 있겠다고 전갈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난다는 것은 기자가 사건 현장을 멀리하는 것이므로 아니되고 또 먹물들과 만나지 않으면 사는 재미가 없다. 더구나 광주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 확실한데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다. 검열을 거쳐 나온 신문의 보도를 뒤집어 읽으면 유혈을 포함한 큰 사달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2~3일 여관을 전전하던 끝에 광주 출신 건축가 조건영(한겨레신문사 공덕동 사옥 설계자)을 만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김태홍은 피신 중이며 박정삼(한국일보노조 사무국장)은 구속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저지른 비인간적 살육 행위를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 급선무이므로 광주 유혈현장을 포착한 보도사진을 구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제 몸뚱어리 하나 잘 간수할 요량으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내가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도울 생각으로 한국일보 사진기자 한 사람을 불러내 광주에 간 사진기자가 누구이며 유혈현장을 담은 사진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반응은 간략하고 차가워 그런 사진은 없으며 있다 해도 계엄사에서 절대 외부 유
출을 금한다고 했다. 다른 신문의 사진기자를 더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광주폭동의 진압 완료’라는 공식 발표가 나오고 며칠 뒤 공평동의 ‘창작과 비평사’에 들렀더니 편집장 이시영(시인, ‘창비’ 주간·부사장 역임, 단국대 교수)이 상기한 표정으로 <전남매일>의 1면 아랫부분 전체를 깐 김준태(시인,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역임)의 시를 나에게 내밀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 떨렸다. 시의 마지막 연을 여기에 옮긴다.
‘광주여 무등산이여/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꿈이여 십자가여/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더욱 젊어져 갈 청춘의 도시여/지금 우리들은 확실히/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6월 초순 종로 보신각 옆 신라주단 앞 큰길에서 우연히 광주 출신의 민청학련 사건 제적생 최권행(서울대 교수·프랑스문학)과 마주쳤다. 78년 초 출판사 ‘두레’가 폴 니장의 <아덴 아라비>(Aden Arabie) 번역을 그에게 맡기는 자리에서 정태기, 최갑수(서울대 교수·서양사학과)와 함께 만났다. 광주항쟁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을 처음 보는 터라 잡담 제하고 근처 생맥줏집으로 갔다. 광주의 실정을 듣고 싶어 말을 걸었으나 한참 동안 그는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일 때문에 일어서야겠다며 최권행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나직한 음성으로 부르는 거였다. 그와 나는 지금 연령의 차이를 넘어 자주 만나는 사이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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