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남영동으로 끌려간 ‘언론자유’
세상을 바꾼 사람들 9-2
 
 
한겨레  
 








 

» 1980년 5월 기자협회 검열거부 운동을 빌미로 해직된 언론인들이 89년 2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강제해직 진상 규명과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맨가운데 80년 당시 기자협회장이었던 김태홍(현 국회의원)이 서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2·12 쿠데타로 이른바 ‘군부 실세’로 등장한 전두환이 언론에 폭압을 가한 것은 정권 장악을 위한 예정된 순서였다. 언론이 제 구실을 하였다면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 문자 해득 수준이 95%, 고등학교 졸업자 비율 80%의 나라에서 보안부대장이 대통령이 되려는 것은 글자 그대로 백일몽이다.

1980년 2월 <경향신문> 기자들이 “동아-조선 투위 기자들의 전원 복직”을 요구하는 성명을 낸 데 이어 3월 기자협회장에 선출된 김태홍(한겨레신문사 이사, 국회 보건복지위원장 역임)은 ‘편집권 독립과 외부의 간섭 배격’을 협회의 3대 과제의 하나로 명시했다. 박정희는 갔으나 그를 떠받드는 세력의 계엄령이 용을 쓰는 상태에서 오랜만에 듣는 자유 언론의 소리였다. 그러나 편집권 독립과 외부간섭 배격은 원론적 과제로는 나물랄 데 없는 것이지만 군부의 사전 검열이 시행되는 한에서는 염불을 외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두환은 계엄령을 빙자하여 보안사 안에 ‘언론대책반’을 만들었으며 그 책임자 육군 준위 이상재(민정당 사무차장·국회의원 역임)가 서울시청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신문·방송사의 편집부장(혹은 그 대리)이 가져오는 대장(인쇄 직전의 신문조판 형태)과 원고에 ‘가’ 또는 ‘부’를 표시하는 고무도장을 찍었다. 이를테면 수백 명의 민주인사들이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 모여 채택한 성명 내용(통일주체 국민회의를 통한 대통령 선거 반대, 거국적 과도 민주내각을 통한 민주헌정 이행)은 ‘보도 불가’였고, 단지 위장 결혼식을 열어 게엄령을 위반했다는 게엄사의 발표문만을 신문들은 실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당시의 신문철을 아무리 뒤져봐도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생각과 행동은 알 길이 없다.

4월 말인가 5월 초 기자협회가 주최한 개정 헌법의 언론 조항 삽입 문제와 관련한 공청회에 나갔다가 기자협회장 김태홍을 만났다. 술 좋아하고 입심 좋기로 소문난 기자 김태홍은 몹시 지쳐 있었다. “내 모든 것을 걸고 계엄사의 언론 사전 검열을 거부하는 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비치는 거였다. 모든 것을 걸겠다는 사람에게 ‘그것 참 잘했다’거나 아니면 ‘몸조심 해야지’, 어느 쪽도 입에 담을 수 없어 묵묵부답으로 헤어졌다. 5·18 이후 그가 구속되어 1년 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기까지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마침내 5월 중순 기자협회는 검열거부 선언문을 발표하기에 이렀으나 5·18 계엄확대 조처와 광주 민중항쟁으로 말미암아 현역기자들의 검열거부 운동은 너무나 큰 정치-사회적 변화에 추월당하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전두환 일당의 대대적인 기자 추방이 시작되었다. 일차로 경향신문 기자들, 서동구(경향신문 편집국장, 스카이라이프 사장 역임), 이경일(한겨레 창간준비위원, <문화일보> 논설위원 역임), 고영재(한겨레 편집국장, 경향신문 사장 역임), 홍수원(한겨레 창간준비위 사무국 차장, 논설위원 역임), 표완수(시민방송 상무, YTN 사장 역임), 박우정(한겨레 편집국장·논설주간 역임), 박성득(한겨레 제작국장, 경향컬처스 대표 역임)


 

» 임재경/언론인
 
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기자협회 간부 중 5·18 전부터 합수부의 검속을 예상하여 자택을 비웠던 김태홍은 일단 체포를 면했으나 감사 박우정, 이사 노향기(한겨레 편집부국장 역임)는 구속되어 속칭 ‘남영동’(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붙들려 갔다. 그들 모두 신문사에서 해직되었음은 물론 길게는 1년, 최소한 몇 달씩 옥고를 치렀다.

80년에 발생한 기자들의 대량 구속과 해직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쓰라린 경험과 고초가 많다. 하지만 추방당한 기자들을 도우려는 노고와 자기 희생도 적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서 도피 중의 김태홍과 관련된 이야기 한 가닥만은 기록 삼아 이 글에서 꼭 남겨야겠다. 내가 7월 초 남영동에 붙들려 갔을 때 느낀 것인데 전두환의 합수부는 기자들의 검열 거부 운동을 정치인 김대중과 연결시키는 계략 아래 그 고리로 광주 출신의 김태홍을 끼워넣은 거였다. 이런 사정으로 김태홍의 피신은 그만큼 어려워졌으며, 그가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동향·동창들은 예외 없이 감시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 나를 통해 그를 알게 된 ‘호협’ 박윤배다. 그는 도피자금과 외모가 비슷한 자기 동생의 주민등록증을 그에게 주었던 것인데, 그만 그가 전남에서 잡히면서 박윤배에게 불똥이 튀었다. 당당한 체구의 박윤배를 담당한 ‘남영동’ 기술자는 김근태 고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이근안이었다. 박윤배는 얼마나 당했겠는가.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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