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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11월 이른바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된 윤보선 전 대통령이 80년 1월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서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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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말을 다시 인용하거니와 인간의 상상력은 현실에 미치지 못한다. 헌법을 종잇장처럼 구기기를 일삼고 그의 친위 무장부대(차지철의 경호실 및 수경사)가 하늘을 찌를 듯 위세등등했던 철옹성, 청와대 안의 박정희가 그처럼 쉽게 갈 줄은 정말 몰랐다. 외근기자 시절 주변으로부터 상상이 너무 앞질러 나간다는 핀잔을 가끔 들었던 터라 공상소설 같은 10·26을 보고는 ‘기자 노릇 헛했다’는 자탄이 절로 나왔다. 시중드는 젊은 여성을 옆에 앉히고 영국산 고급 위스키(시바스 리갈)를 마시다 비밀경찰(중앙정보부)의 우두머리가 쏜 총알을 맞아 죽은 최후의 장면은 만화책의 한 폐이지나 다름없다. 하지만 크게 보면 동학 궐기에서 4·19 의거에 이르기까지 100년 동안 면면히 이어진 우리 민중의 힘을 너무나 깔본 결과로 빚어진 것이 박정희의 피살이다. 그의 대통령 재임 중 재판의 형식을 빌린 이른바 ‘사법 살인’이 심심치 않게 있었던 사례에 견준다면 살인자 김재규의 결행은 당당하다 해야 옳다. 인권 변호사 강신옥이 열렬하게 주창한 김재규 구명운동에 나도 이름을 넣었다. 인간 김재규를 의인으로 만드는 데는 생각을 조금 달리하나 유신독재를 끝내는 과정에 치러야 했을 희생을 최소화했던 김재규의 거사를 나는 평가했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자의 퇴장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인 정치 공백과 혼란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며 동시에 자연스러운 귀결. 그런데 대통령 권한대행인 국무총리 최규하는 박정희가 애용하던 계엄령으로 정치적 지도력을 유지하려 했으니 될 법이나 한 소린가? 직업 외교관 출신인데다 이심(異心)을 품지 않을 사람으로 꼽혀 국무총리 직에 임명된 됨됨이라 위기관리의 능력과는 애시당초 무관한 존재였다.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 휘하의 ‘합동수사본부장’직을 차고앉은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그의 영관급 부하들이 제3의 쿠데타 ‘12·12’를 일으킨 경과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정치 공백을 틈타 정권을 잡는 방식은 역사상 흔히 있는 일이긴 하나, 1979년 겨울의 12·12 쿠데타를 막지 못한 가장 큰 책임은 최규하에게 돌아간다. 이 글을 쓰면서 중요한 시기에, 막중한 위치에 섰던 사람들이 회고록을 남기지 않는 한국의 이상한 관습을 몹시 답답하게 느꼈다. 보복이 두려워 살아 있는 동안 발설하지 못했다면 사후 공개 조건으로라도 진실을 밝히고 자신의 잘못을 후손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 아닌가. 조선조의 당쟁-보복(삼족지멸)과 해방 후의 좌우 싸움-보복(테러) 악습이 회고록 부재의 원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긴급조치를 놔두고 계엄령을 편 상태에서 박정희 체제를 청산하는 과정을 밟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규화는 거기다 유신헌법에 따라 체육관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을 모아놓고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 달라 했으니 국민이 반대할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 존속에 거세게 도전한 것이 저 유명한 ‘YWCA 위장결혼 사건’인데 79년 11월 중순 <씨알(아래알)의 소리> 편집장 최민화(환경관리공단 감사 역임)가 전단처럼 만들어진 결혼 청첩장을 내게 주면서 꼭 참석해달라는 거였다. 신랑은 제적학생 모임인 ‘민청협’의 활동가 홍성엽(작고), 주례는 삼선개헌 반대로 이름난 박종태로 인쇄돼 있었다. 집회·시위가 금지된 상황에서 계엄 당국의 통제를 벗어나 일정한 시각 서울 도심(명동 전국YWCA 회관)에 반유신체제 인사들을 결집하는 비상수단이었던 것이다. 결혼식 아닌 이 결혼식에 나는 가지 못했으나 거기 참석했던 100여명이 보안사에 붙들려가 야만적인 구타를 당했다. 참석자 가운데 내가 잘 아는 통일운동가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74년 긴급조치 위반사건 이후 정보기관의 미움을 산 터라 기관원들로부터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의도적 가혹행위를 당해 그 후유증에 아직 시달리고 있다. 위장결혼식 사건 이후 전두환의 집권 길을 열어주는 절차 집행 담당 대통령에 최규하가 선출되었다.
그해 12월 민주화 운동 진영의 각종 연말 모임이 유난히 많았고 가는 곳마다 즐거운 분위기였다. 나는 <한국일보>에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한국’ 노동조합 송년 모임에 나갔는데 그들은 감상적인 사춘기의 젊은이들처럼 노래를 불러댔다. 해방 직후 초등학교 시절 지겹게 듣다 완전히 잊어버린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라는 노래가 나왔다. 좀처럼 공개석상에서 흥얼대지 않는 나 역시 일어나 한 곡조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기미년 3월1일…’로 시작하는 3·1절 노래였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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