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창비’ 살리려면 그자를 내쫓아라
세상을 바꾼 사람들 10-9
 
 
한겨레  
 








 

» 1985년 12월 비정기 간행물로 <창비 57호>를 복간했다는 이유로 전두환 정권이 창작과비평사의 출판사 등록을 취소하자 문인과 민주 인사들이 항의 농성을 벌이고 있다. 민족사진연구소 제공
 



‘도축장의 소’란 말을 누구 앞에서도 꺼낸 적이 없으나 가까운 친구들은 내 행로를 무척 걱정했던 모양이다. 귀국 며칠 뒤인 1984년 8월 중순 백낙청이 ‘창작과 비평사’에 나와서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보내라 했다. 신문사의 내근(편집-교열) 경험이 길었으면 출판·편집 일을 도울 수 있으련만 내 맞춤법·문법 실력은 수준 이하여서 ‘일손’ 가치는 제로나 마찬가지였는데, 편집주간 이시영(시인·단국대 초빙교수)은 ‘편집고문’이란 명함을 찍어 주었다. <한겨레>가 창간될 때까지 3년 반 동안 매달 거기서 월급을 받았으니 내가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면 오로지 백낙청과 ‘창비’ 덕분이다. 출근부에 도장을 찍을 필요도 없고, 간혹 지방에 강연 가는 것은 반대하기는커녕 환영이며, ‘호협’ 박윤배를 따라 놀러 다니는 데도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도축장의 소’가 아니라 ‘하늘 소’처럼 표표히 노닐었다면 어떨는지 …. 당시 ‘창비’ 실무진은 편집차장에 고세현(창비 사장), 편집에 김이구(창비 상무이사), 하종오(시인), 고형렬(시인), 이혜경(유인태 전 국회 행자위원장 부인), 부수영(기춘 전 청와대 비서관 부인), 여균동(영화감독 겸 배우), 주은경(방송 구성작가)과 업무에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정의득(창비 영업부 차장)이다.

70년대 후반의 내 강연활동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쪽과 연관된 서울 중심이었다면 84년 가을부터 6월 항쟁이 일어나기까지는 가톨릭과 연결된 지방 강연이 훨씬 잦았다. ‘개종’(改宗) 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할뿐더러 이 역시 가톨릭 평신도 젊은 활동가들의 열성에 내가 진 결과다. 민청학련 출신의 가톨릭정의평화위원회(정평) 간사 문국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가 나를 끌어내 세상 소식에 굶주린 지방으로 보냈던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5·18 이후 정치에 큰 관심을 갖던 곳은 단연 광주인데, 광주 정평의 간사 김양래(광주가톨릭센터 사회교육부장 역임·문화관광연구원 경영관리처장)는 지칠 줄 모르고 나를 광주로 불러 10여 차례 내려갔다. 강연은 외형상으로는 경제·사회·국제 문제에 국한했으나 말을 하다 보면 국내 정치에 가 닿을 때가 빈번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가 이래서 되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펜을 빼앗긴 저널리스트가 입마저 봉하고 산다면 그건 도축장의 소나 진배없다고 생각했다. 김양래의 주선으로 광주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은퇴)를 만나 점심을 같이하며 꽤 긴 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톨릭의 전국 정평 조직이 움직였는지 강연 요청은 호남의 여러 도시들, 전주·익산·목포에서도 왔으며 강원도의 춘천, 경북 안동에 간 적도 있다. 목포에 갔을 때 맑고 푸른 영산강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치다시피 한 서한태(의사·전 법무장관 천정배의 장인) 박사를 만난 것은 지방 강연 행각의 망외 소득. 부산의 김정한(작가·한겨레신문사 초대 이사 역임·작고), 원주의 장일순(서예가·가톨릭 사회참여 운동가·작고) 선생과 함께 세 분을 각기 그들의 고장에서 만나 담소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팔자 드센 저널리스트에 대한 보상이라 믿는다.

통산 10년 가까운 강연 경험을 통해 단 한 차례도 청중을 사로잡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청중의 표정을 보면 아는데 그들은 연사에 대한 의무감으로 열심히 듣고 있는 거였다. 언젠가 전주에서 문동환 목사와 더불어 앞뒤로 강연을 했을 때 확연한 차이를 발견했다. 그는 일상 대화 할 때처럼 단문으로 강연을 하는데 나는 긴 복문체의 문장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말을 잘해 뽑혀 다닌 것이 아니라 군사독재의 억압으로 연사 공급이 부족한 나머지 빈자리를 메웠던 것이다. 어머니한테서 귀가 따갑도록 들은 이야기 중 하나가 “글 잘하는 아들보다 말 잘하는 아들을 두라”는 것.

계간 <창작과 비평>이 폐간된 지 5년 만인 85년, 백낙청은 당국의 반응을 떠보려는 듯이 ‘창비’ 통권 57호를 ‘부정기 간행물 1호’란 부제를 붙여 발행했다. 거기에 백낙청은 <민중-민족문학의 새 단계>라는 글을, 나는 <한-미 관계론의 사정(射程)>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했는데 전두환 정권은 출판사 등록 취소라는 극단적 조처를 내렸다. 문인·대학교수·예술인·종교인, 심지어 바둑의 국수와 명인인 조훈현과 서봉수 등이 참여한 2800여명의 진정에도 불구하고 등록 취소 상태는 8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당국은 그 이듬해 여름 ‘창작사’란 명칭으로 영업 재개를 허용하되 백낙청·이시영·고세현, 그리고 나를 내보낸다는 조건을 달았다. 하지만 전두환의 위세는 겉과는 달리 퇴색이 짙어지는 단계였다. 해직기자들이 ‘창비 57호’보다 한 술 더 뜬 <말>을 냈으니 하는 얘기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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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귀국 비행기에 두고온 ‘조국의 산하’
세상을 바꾼 사람들 10-8
<‘조국의 산하’=정경모의 해방전후사>
 
 
한겨레  
 








 

» 임재경/언론인
 
처자가 기다리고 있는 모국에 48살의 중년이 돌아가기 끔찍했다고 하면 십중팔구 듣는 사람이 고개를 갸웃할 일이다. 인간이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의식, 감정, 심리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전유물인 까닭에 도축장 앞의 소를 자신에 비유한다는 것은 말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논리로는 성립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1984년 7월 미국 체류 1년을 마치고 귀국할 때 나는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를 생각했다. 한국에 있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1천여 해직기자들, 수백명의 해직교수들, 수천명의 구속 대학생들이 모두 도축장에 끌려간 소란 말인가. 물론 그런 뜻은 아니다.

미국 바람을 쏘이지 않고 지긋이 서울에 앉아 썩고 있었다면 ‘도축장의 소’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생활환경의 변화를 겪은 다음에는 그것이 1년이든 한달이든 간에 ‘지금, 여기’와 ‘그때, 거기’를 아주 첨예하게 비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가출 소년이 아는 어른에게 손목을 잡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집에 갈 때처럼 단 하루라도 귀국을 늦추고 싶었다. 그래서 런던, 파리, 도쿄를 거치는 ‘팔방돌이’를 했다. 미국에 올 때는 형과 아우 덕분에 돈 걱정을 별로 안 해도 됐으나 여행길에는 빠듯한 노자 때문에 가는 곳마다 친구들 신세를 져야만 했다.

값이 비싸기로 소문난 런던 시내의 호텔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옥스퍼드대 유학 중인 왕년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간사 손학규(경기도지사, 통합민주당 대표 역임)의 집에서 나흘을 묵었다. 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던 그는 경황 없는 가운데 틈을 내 셰익스피어의 생탄지와 케임브리지대를 보여주기 위해 장시간 운전을 하는가 하면, 옥스퍼드대 경제학 박사과정의 김대환(인하대 교수, 노동부 장관 역임)을 불러내 ‘비터’란 이름의 맥주를 샀다. 하루는 옥스퍼드에서 열차편으로 런던에 가 국제사면위원회 본부의 동아시아 담당자 프랑수아즈 방달을 만났다. 뉴욕에 본부를 둔 언론인보호위원회(CPJ)와 국제사면위원회가 나를 반겨준 두 개의 국제인권단체인데, 특히 후자의 벨기에 출신 여성 방달은 한국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 그 직업적 성실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때 만남 이후 방달은 한국에 올 때마다 나에게 연락했고, 5년 뒤 당시의 <한겨레> 논설위원 박원순(희망제작소 소장)을 그에게 소개할 기회도 생겼다. 박원순이 방달의 초청으로 런던에 가 국제사면위원회 본부에서 국제 인권변호사로 활약하게 된 데 일조가 되었다면 다행이다.

파리를 12년 만에 다시 본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71년에는 사회당 소속 국회의원에 지나지 않았던 미테랑이 대통령이 된 지 3년, 프랑스 공산당은 사양길을 걷고 있었으며 파리의 서쪽 교외에 ‘라 데팡스’라는 초현대적 부도심이 새로 개발되어 낭만적 풍취는 내가 있을 때보다 못하다는 느낌. 파리의 즐거움은 호주머니 사정에 비례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터라 불안하던 차에, 뜻밖에 대한무역진흥공사(현 코트라) 파리지사장으로 있는 고교동창 김진숙(코트라 스웨덴지사장 역임)을 만났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말대로 20여년 만에 보는 나를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환대했다. 또 <한국일보>의 파리 특파원 안병찬을 만났다. 초년 시절 경찰기자를 같이 한 인연에다 내가 논설위원으로 있을 때 그는 한국일보 노조 결성을 음양으로 돕던 처지여서 마음으로 통하는 사이. 베트남 특파원으로서 미군이 호찌민(사이공) 대사관의 성조기를 허겁지겁 내리고 헬리콥터 편으로 패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현장을 지킨 기자 안병찬을 나는 높이 평가했다. 그와 비슷한 나이의 ‘중도 아니고 속한도 아닌’ 내 처지가 서글펐다. 더구나 서울에 돌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판인데….

도쿄에서는 20대 초의 술친구 윤충기(해운공사 동경지사장 역임, 작고) 집에 머물면서 며칠을 보냈다. 도쿄에 와 있던 동훈(국토통일원 차관 역임)을 만나 향후의 남북관계를 놓고 장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어질 때 그는 일본말로 된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의 저서 <찢겨진 산하>(1984년 출간·2002년 개정판 한겨레신문사)를 나에게 주면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노라 했다. 몽양 여운형, 백범 김구, 장준하 셋이 저승에서 나누는 운상정담 형식인데, 해방 전후사를 그토록 열정적으로 다룬 책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200쪽이 조금 넘는 분량이라 도쿄에 있는 동안 다 읽을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술추렴 하느라 뜻대로 안 돼 서울행 비행기에 갖고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도깨비 기왓장 넘기듯 마지막 장을 읽을 무렵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도살장의 소’가 망명객 정경모의 책을 지니고 입국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좌석 앞 포켓, 내 앞이 아니라 옆 좌석의 앞 포켓에 넣고 내렸다. 만약을 생각해서다. 나의 과민이었던가.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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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임 동지, 정치할 생각 없소?”
세상을 바꾼 사람들 10-7
 
 
한겨레  
 








 

» 1985년 2월 미국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길에 오른 김대중이 워싱턴에서 비행기 탑승 직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대중 자서전-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에서
 
후광의 대통령 재임 중은 말할 나위 없고 그 이전의 적극적 정치활동 기간 나는 국제문제연구센터(CFIA)에서의 사사로운 인연은 일절 공개석상에서 발언하거나 글로 쓴 적이 없다. 크게는 불필요한 정파적 오해를 사지 않으려는 동기가 작용했고, 다른 쪽으로는 ‘하버드 동문수학’(백낙청의 표현)을 두고두고 우려 먹는 것이 속 보이는 짓 같아서였다.

성장 배경, 취향, 기질에서 후광은 나와 전혀 다른 타입이다. 근검면학, 허황한 낭만적 감정의 배격, 실사구시의 현실주의가 그의 장점이라면 나는 어려서부터 공상(검찰 조서나 기소장에는 ‘망상’으로 표기된다)을 즐겨 하며 허영에 가까운 지적 호기심에다 낭만적 감정에 도취하는 기질. 그의 옷차림은 그때나 이제나 검은색 정장에 흰 와이셔츠인데, 미국에 왔으면 콤비나 캐주얼, 그리고 셔츠도 화사한 원색을 입어도 좋으련만…. 후광은 측근의 점퍼 차림조차도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보좌역을 지낸 최성일 박사(스미스앤호바트대학 교수 역임, 작고)가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후광의 국제문제연구센터 연구원 사무실에 들를 때면 그는 대개는 편지지에 만년필로 무얼 쓰고 있었다. 한번은 누구에게 보내는 것인가 물었더니 생면부지의 재미동포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라는 것. 격식을 갖추어야 할 편지가 아니라면 비서를 시켜서 써도 될 터인데, 정치적 지지자와 후원자들에게 들이는 그의 정성과 공은 상상을 초월한다. 또박또박 정자로 쓴 후광의 육필 편지를 받은 지지자는 틀림없이 그것을 ‘신표’(信標)처럼 평생 소중하게 간수할 것이다.

후광은 둘째 며느리가 한국에서 왔다며 간소한 피로연 형식의 저녁을 하자며 나를 워싱턴까지 초대한 적이 있다. 돈 들여 호텔에 갈 것 없이 한국식 아침밥도 먹을 겸 자기 집에 와서 자라는 거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후광의 거처는 크지 않아 손님용 방이 따로 없었던 까닭에 그는 안방으로 가고 나는 그가 사용하던 침대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객지에서 혼자 사는 나를 위해 보여준 성의는 감사할 일이나 결과적으로는 예의에 벗어난 과객 노릇을 한 셈이다. 아침 일찍 후광 거처로 출근한 당시 비서 정동채(<합동통신> 해직, <한겨레> 논설위원, 국회의원, 문화관광부 장관 역임)를 오래간만에 대면하여 한국 정세에 대한 소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워싱턴에 본부를 둔 재미 민주화운동가 조직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쪽 관련 인사들을 만난 적은 있다. 진작부터 잘 알던 문동환 목사, 한완상 교수, ‘민청협’ 회장 출신의 학생운동가 이신범(국회의원 역임)과 재미동포 가운데 열렬한 후광 지지자인 최기일(우스터대학 교수 역임, 작고), 차승만(브라운대학 물리학 교수 역임), 이재현(켄터키대학 교수, 작고), 이근팔(미주인권문제연구소장, 후광의 망명 중 비서실장 역임) 등이다.



 

» 임재경/언론인
 
2주 말미로 남편을 만나러 미국에 온 아내가 케임브리지에 머물던 83년 12월의 일. 재미 민주화운동 조직의 중요 회원들이 국제문제연구센터가 있는 케임브리지시에 모여 당면 과제를 논의한다며 후광이 직접 나에게 참석해 달라고 하였다. 어려운 이국 생활 가운데 모국의 민주화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그들이 존경스러웠으나 공식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문제가 달랐다. 저널리스트가 취재 목적이 아니면 공식 회의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긴 하지만, 그들의 신념에 공감하는 처지에서 ‘지론’을 내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고민 아닌 고민에 빠졌다. 아내는 “후광 선생에게 인사도 하고 준비한 조그만 선물(인삼)을 전하고 오면 되지 않느냐”고 하여 그러기로 하고 회의가 열리는 셰러턴커맨더 호텔로 갔다. 참석 인원은 15명 정도였는데, 후광이 좌석에 앉으라고 권하는 바람에 한쪽 구석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날의 논의 주제는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관계 설정’. 이른바 ‘선통후민’(先統後民)이냐 ‘선민후통’이냐를 두고 후광이 분명한 견해 표명을 해야 할 단계에 있었던 모양인데, 그의 재미동포 지지자 가운데 상당수가 ‘선통후민’에 기울고 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었다.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토론이 제자리걸음을 하자 후광이 참관인 자격인 나에게 돌연 의견을 말해 달라는 거였다. 토론 주제의 중요성으로 보아 도저히 ‘노 코멘트’로 발뺌을 할 수 없었다. “통일과 민주화, 둘 다 우리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목표이고 과제다. 어느 한쪽에 선순위를 고정시키면 운동의 탄력성을 잃어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대처하기 힘들다. 지금 현실에서는 통일과 민주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후광은 내 말에서 원군을 얻은 듯 통일과 민주화의 선후를 따지지 말자고 했다.

얼마 뒤 국제문제연구센터에서 단둘이 있을 때 후광은 나에게 “임 동지! 정치 해볼 생각 없습니까” 하고 물어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짤막하게 답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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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독재에 항거못한 하버드인 유감”
세상을 바꾼 사람들 10-6
 
 
한겨레  
 








 

» 임재경/언론인
 
냉전 종결 이후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외국의 국제정치 관련 저술이 <문명의 충돌>이고, 그 저자 새뮤얼 헌팅턴은 하버드대학 국제문제연구센터 소장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내가 거기 갔을 때 헌팅턴 교수는 안식년을 맞아 워싱턴에 머물렀으며, 조지프 나이가 소장 대리직을 맡았다. 매년 20명 안팎의 연구원이 초청되는데, 그들의 직업은 외교관과 정부 관리(고급 장교 포함)가 주종이고, 이따금 정치인과 저널리스트가 섞인다. 1983~84년도 연구원들의 국적은 한국(후광과 나)·일본·미국이 각각 둘이고, 나머지는 중국·영국·프랑스·서독·이탈리아·스웨덴·벨기에·핀란드·캐나다·파라과이·남아연방이 하나씩인데, 나이는 40대 초에서 50대 중반. 하버드 대학의 보수적 학풍에다 국제 관련 분야를 다루는 특성상 거기는 미국의 이해관계에 민감한 연구소임은 두말할 나위 없고, 정부와 민간단체와 기업의 조사용역을 많이 따오기로 유명했다. 베트남 전쟁 종반 대학생들의 시위가 한창일 때 이 연구센터 건물 앞에서 데모 군중(학생들)이 모여 반전 구호를 외쳤다고 백낙청이 회상했다.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센터의 관심 대상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거기 있을 때는 미-소 핵무기 경쟁, 특히 그 가운데서 핵무기를 탑재한 중거리 미사일을 중유럽(서독과 폴란드)에 배치하는 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와 관련하여 소련 정권 수뇌부의 빈번한 교체와 새로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 진입한 고르바초프를 주목해야 한다는 스웨덴 연구원의 말은 거기서 얻어들은 말 가운데서는 고가품이다. 하버드 교수진과 외부(혹은 외국)에서 초빙된 전문가들이 발제한 뒤 한 시간 가량의 질의·응답을 진행하는 ‘런천 세미나’(간단한 점심을 곁들인 세미나)가 제일 중요한 토론 기회였다. 그러나 토론 주제는 대체로 미국과 유럽으로 집중되었으며, 그 다음이 중동과 중남미이고, 동아시아 문제가 어쩌다 주제가 되더라도 중국과 일본이 고작이었다. 한국 군부가 유혈을 불사하며 정권을 장악한 친미 개발도상국의 정치 현상에 대해 발제자로 나온 하버드의 사회과학 분야 교수와 연구원들은 대부분 오불관언으로 일관했다.

연구센터 소장 대리 나이(정치학 교수)가 연구원을 모두 자기 집에 부른 리셉션에서 내게 연구하려는 주제가 무엇이냐고 묻기에 한국의 인권문제라 대답했다. “한국의 인권상황이 경제성장으로 점차 개선될 것으로 ‘생각’지 않는가”라고 되물어 그렇게 ‘믿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우리의 절실한 현실 문제를 일반론으로 접근하려는 태도에 비위가 틀려 나도 어깃장을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6·15 선언이 나온 이후의 국제문제연구센터는 17년 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양이다. 2000~2001년 학기에 연구원으로 갔던 한국 최초의 여성 외신부장을 지낸 지영선(<한겨레> 편집부국장·논설위원, 보스턴 총영사 역임)의 말을 들어보면 교수들과 연구원들이 한국의 통일문제에 관하여 발제해 달라고 조르며 앞다투어 활발한 질문을 하더란다.

미국에 변치 않는 우의를 다짐하며 아무리 교역을 증진시킨다 하더라도 경제성장만을 내세우는 나라는 그들한테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가기 전전해, 즉 81~82년 학기의 연구원이었던 필리핀의 반독재 투쟁가 베니노 아키노(1932~83)가 조국에 돌아가던 날 마닐라 공항에서 마르코스의 수하들에게 피살된 사건과 전두환의 사형선고를 받은 한국의 김대중이 연구원으로 있었던 것은 국제문제연구센터가 보수적 색깔을 벗는 데 약간 도움이 되었음은 틀림없다. 그래서 그런지 서유럽 정치가 가운데서 반핵·평화 노선을 선명하게 내건 스웨덴의 사민당 출신 총리 올로프 팔메(1927~86)가 재임 중인 84년 초 이곳을 방문하여 연구원들과 토론했다.

학기의 마지막 ‘런천 세미나’는 고별 기념으로 하버드대 총장 데릭 보크를 초대했는데, 그는 이 연구센터 프로그램이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인사치레 정도로 그쳤다. 또렷이 남아 있는 기억은 후광과 보크 총장의 문답인데 요약하면 이렇다.

“민주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하버드의 교육·연구 방향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 … 그런데도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우수한 사람들이 한국의 군사독재 아래서 봉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지식인은 나약하다. 하버드대학이 독재에 항거할 만큼 용기 있는 지식인을 배출하지 못한 것은 솔직하게 유감이다.”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앉은 초기 청와대 비서실장과 두세 명의 장관은 하버드 박사 출신이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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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하버드서 DJ와 11년만의 재회
세상을 바꾼 사람들 10-5
 
 
한겨레  
 








 

» 1988년 5월14일 한겨레신문사를 찾아와 막 찍혀 나온 <한겨레> 창간호를 보고 있는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와 송건호 사장 사이에 필자가 서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하버드 대학의 초청장이 날아온 1983년 4월 말에서 내가 미국 땅에 발을 디딘 7월 사이에 아이들 장난 같은 숨바꼭질을 한 차례 해야 했다. 82년 말 미국에 망명 중인 후광(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호)이 내가 가기로 된 하버드의 국제문제연구센터(CFIA)에 온다는 소식을 미국에 있는 아우가 알려줬다. 80년 5월 전두환이 5·17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순의 하나로 날조한 ‘김대중 내란음모 및 과도내각’이 다시한번 악몽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판사판’이니 지레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여권을 신청하고 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뒤 전두환의 경제수석비서관인 김재익(작고)이 점심을 같이하자는 연락을 해 왔다. 80년 말 서대문구치소에서 나온 직후 내 집을 찾아와 ‘금융연구원’(KBI)에 체면이 깎이지 않을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 제의를 사양하자 그 뒤로는 전화 한통 없었다. 그는 식탁에 앉자마자 간접화법으로 “임 선배는 김대중과 아주 가까운 사이로 돼 있어요. 하버드로는 못갈 겁니다”라는 거였다. 서대문에서 나올 때 그가 보여준 호의는 잊지 않고 있으나 여권 발급만은 사정해서 될 일이 아닐 듯 싶어 정면으로 쏘아붙였다. “여보 김 수석! 당신은 미국에서 공부해 잘 알겠지만 멀쩡한 사람 경찰 감시붙이고 안기부는 신문·잡지에 글 쓰는 것을 방해하니, 이게 전체주의 국가지 어디 민주국가요. 더구나 아무 일도 못하는 판에 1년 동안 미국에 가서 책 좀 보겠다는 것마저 안 된다니 아프리카로 이민 가야겠시다”라 했다. 그는 이내 직접화법으로 바꾸어 “제가 스탠퍼드대학 박사인 건 아시죠. 가을에 거길 갈 수 있도록 책임지고 조처해 드릴 테니 하버드는 포기하세요”라는 거였다. 나는 지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버드와 스탠퍼드의 우열을 가리자는 게 아니외다. 후광과 관계없이 여러 사람이 추천해 초청을 받았는데 왜 나에게 하버드를 포기하라고 해요? 미국으로 사람을 보내 후광에게 ‘임아무개 거길 가니 스탠퍼드로 바꾸시오’라 해보시지 ….” 우리 둘 앞에 놓인 비프스테이크는 절반 이상 남았다. 그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으나 나는 헤어지면서 내친 김에 한마디 더 했다. “여권을 내주지 않으면 나는 ‘김대중씨 때문에 여권 발급 불가’라는 대한민국 정부의 방침을 하버드대 총장에게 편지하겠소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외국 신문에도 알릴 거고요”라 했다. 떠나기 보름 전쯤 비로소 여권이 나왔다. 비행기에 올라 지정된 자리에 앉고 나서도 이륙하기 직전 기관원이 나타나 ‘일이 잘못됐으니 잠깐 내립시다’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렸다.

본시 성미가 착한 김재익은 어쩌다 전두환 정권에 발탁된 유능한 문민 출신의 경제정책 입안자인데 팔자에 없이 나처럼 모진 사람과 얽혀 소관사항도 아닌 문제에 애를 먹은 것이다. 버마 랑군으로 전두환을 수행했다 참변을 당한 그에게 명복을 빈다.



 

» 임재경/언론인
 
백낙청과 허물없는 사이인 에드 베이커(하버드옌칭 연구소 부소장 역임)는케임브리지시에 도착한 나에게 여로 모로 친절을 베풀었다. 국제문제연구센터 학기가 시작되는 9월에야 숙소가 비는 까닭에 돈을 들여 호텔에 가야 할 판이었는데 후광의 거처로 예약된 가든 스트리트 29번지의 대학 소유 아파트에 한동안 그냥 들어가서 지냈던 것은 그의 배려 덕분. 기록을 위해 여기서 꼭 밝혀야 할 것은 <한겨레>의 로마자 표기(The Hankyoreh)는 에드 베이커의 작품이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 영어듣기를 공부할 속셈으로 매일 반 나절씩 하버드 야드에 있는 어학훈련소(랭귀지랩)에 가 해드폰을 쓰고 앉아 있곤 했다. 자리마다 좌우를 높은 판자로 가려 옆에 누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영물’이란 말아 맞아 어느 하루는 옆에 누군가 잘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드는 거였다. 한참 망설이다 일어나 옆 자리에 눈길을 돌렸다. 거기에 박정희 최후의 정무비서관 고건(국무총리 역임)이 앉아있는 게 아닌가. 그의 등을 살짝 건드리자 그는 반가운 표정으로 내손을 잡으며 “파계승이 되었습니다” 하는 거였다. 대학 입학이 나보다 1년 늦은 고건과 캠퍼스에서 인사를 나눈 적은 있었으나 친하게 지낸 사이는 아니다. 그를 장래의 ‘재상감’이라 생각지는 않았고 실존주의 철학 교수 고형곤의 아들이란 점이 부러웠다.

국제문제연구센터 연구원이 처음 모이던 날 하버드대 교수회관에서 후광을 11년 만에 만났다. “나 때문에 고생 많았지요” 하는 그에게 “고생이라면 후광 선생께서 저보다 몇 배 더 하셨겠지요”라 인사했다. 옆에 서 있던 에드 베이커가 “과도 정부 수반과 과도 내각의 각료가 초면인 것 같으니 제가 소개해드려야겠군요”라 해 좌중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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