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종결 이후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외국의 국제정치 관련 저술이 <문명의 충돌>이고, 그 저자 새뮤얼 헌팅턴은 하버드대학 국제문제연구센터 소장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내가 거기 갔을 때 헌팅턴 교수는 안식년을 맞아 워싱턴에 머물렀으며, 조지프 나이가 소장 대리직을 맡았다. 매년 20명 안팎의 연구원이 초청되는데, 그들의 직업은 외교관과 정부 관리(고급 장교 포함)가 주종이고, 이따금 정치인과 저널리스트가 섞인다. 1983~84년도 연구원들의 국적은 한국(후광과 나)·일본·미국이 각각 둘이고, 나머지는 중국·영국·프랑스·서독·이탈리아·스웨덴·벨기에·핀란드·캐나다·파라과이·남아연방이 하나씩인데, 나이는 40대 초에서 50대 중반. 하버드 대학의 보수적 학풍에다 국제 관련 분야를 다루는 특성상 거기는 미국의 이해관계에 민감한 연구소임은 두말할 나위 없고, 정부와 민간단체와 기업의 조사용역을 많이 따오기로 유명했다. 베트남 전쟁 종반 대학생들의 시위가 한창일 때 이 연구센터 건물 앞에서 데모 군중(학생들)이 모여 반전 구호를 외쳤다고 백낙청이 회상했다.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센터의 관심 대상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거기 있을 때는 미-소 핵무기 경쟁, 특히 그 가운데서 핵무기를 탑재한 중거리 미사일을 중유럽(서독과 폴란드)에 배치하는 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와 관련하여 소련 정권 수뇌부의 빈번한 교체와 새로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 진입한 고르바초프를 주목해야 한다는 스웨덴 연구원의 말은 거기서 얻어들은 말 가운데서는 고가품이다. 하버드 교수진과 외부(혹은 외국)에서 초빙된 전문가들이 발제한 뒤 한 시간 가량의 질의·응답을 진행하는 ‘런천 세미나’(간단한 점심을 곁들인 세미나)가 제일 중요한 토론 기회였다. 그러나 토론 주제는 대체로 미국과 유럽으로 집중되었으며, 그 다음이 중동과 중남미이고, 동아시아 문제가 어쩌다 주제가 되더라도 중국과 일본이 고작이었다. 한국 군부가 유혈을 불사하며 정권을 장악한 친미 개발도상국의 정치 현상에 대해 발제자로 나온 하버드의 사회과학 분야 교수와 연구원들은 대부분 오불관언으로 일관했다.
연구센터 소장 대리 나이(정치학 교수)가 연구원을 모두 자기 집에 부른 리셉션에서 내게 연구하려는 주제가 무엇이냐고 묻기에 한국의 인권문제라 대답했다. “한국의 인권상황이 경제성장으로 점차 개선될 것으로 ‘생각’지 않는가”라고 되물어 그렇게 ‘믿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우리의 절실한 현실 문제를 일반론으로 접근하려는 태도에 비위가 틀려 나도 어깃장을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6·15 선언이 나온 이후의 국제문제연구센터는 17년 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양이다. 2000~2001년 학기에 연구원으로 갔던 한국 최초의 여성 외신부장을 지낸 지영선(<한겨레> 편집부국장·논설위원, 보스턴 총영사 역임)의 말을 들어보면 교수들과 연구원들이 한국의 통일문제에 관하여 발제해 달라고 조르며 앞다투어 활발한 질문을 하더란다.
미국에 변치 않는 우의를 다짐하며 아무리 교역을 증진시킨다 하더라도 경제성장만을 내세우는 나라는 그들한테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가기 전전해, 즉 81~82년 학기의 연구원이었던 필리핀의 반독재 투쟁가 베니노 아키노(1932~83)가 조국에 돌아가던 날 마닐라 공항에서 마르코스의 수하들에게 피살된 사건과 전두환의 사형선고를 받은 한국의 김대중이 연구원으로 있었던 것은 국제문제연구센터가 보수적 색깔을 벗는 데 약간 도움이 되었음은 틀림없다. 그래서 그런지 서유럽 정치가 가운데서 반핵·평화 노선을 선명하게 내건 스웨덴의 사민당 출신 총리 올로프 팔메(1927~86)가 재임 중인 84년 초 이곳을 방문하여 연구원들과 토론했다.
학기의 마지막 ‘런천 세미나’는 고별 기념으로 하버드대 총장 데릭 보크를 초대했는데, 그는 이 연구센터 프로그램이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인사치레 정도로 그쳤다. 또렷이 남아 있는 기억은 후광과 보크 총장의 문답인데 요약하면 이렇다.
“민주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하버드의 교육·연구 방향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 … 그런데도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우수한 사람들이 한국의 군사독재 아래서 봉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지식인은 나약하다. 하버드대학이 독재에 항거할 만큼 용기 있는 지식인을 배출하지 못한 것은 솔직하게 유감이다.”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앉은 초기 청와대 비서실장과 두세 명의 장관은 하버드 박사 출신이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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