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하버드서 DJ와 11년만의 재회
세상을 바꾼 사람들 10-5
 
 
한겨레  
 








 

» 1988년 5월14일 한겨레신문사를 찾아와 막 찍혀 나온 <한겨레> 창간호를 보고 있는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와 송건호 사장 사이에 필자가 서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하버드 대학의 초청장이 날아온 1983년 4월 말에서 내가 미국 땅에 발을 디딘 7월 사이에 아이들 장난 같은 숨바꼭질을 한 차례 해야 했다. 82년 말 미국에 망명 중인 후광(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호)이 내가 가기로 된 하버드의 국제문제연구센터(CFIA)에 온다는 소식을 미국에 있는 아우가 알려줬다. 80년 5월 전두환이 5·17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순의 하나로 날조한 ‘김대중 내란음모 및 과도내각’이 다시한번 악몽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판사판’이니 지레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여권을 신청하고 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뒤 전두환의 경제수석비서관인 김재익(작고)이 점심을 같이하자는 연락을 해 왔다. 80년 말 서대문구치소에서 나온 직후 내 집을 찾아와 ‘금융연구원’(KBI)에 체면이 깎이지 않을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 제의를 사양하자 그 뒤로는 전화 한통 없었다. 그는 식탁에 앉자마자 간접화법으로 “임 선배는 김대중과 아주 가까운 사이로 돼 있어요. 하버드로는 못갈 겁니다”라는 거였다. 서대문에서 나올 때 그가 보여준 호의는 잊지 않고 있으나 여권 발급만은 사정해서 될 일이 아닐 듯 싶어 정면으로 쏘아붙였다. “여보 김 수석! 당신은 미국에서 공부해 잘 알겠지만 멀쩡한 사람 경찰 감시붙이고 안기부는 신문·잡지에 글 쓰는 것을 방해하니, 이게 전체주의 국가지 어디 민주국가요. 더구나 아무 일도 못하는 판에 1년 동안 미국에 가서 책 좀 보겠다는 것마저 안 된다니 아프리카로 이민 가야겠시다”라 했다. 그는 이내 직접화법으로 바꾸어 “제가 스탠퍼드대학 박사인 건 아시죠. 가을에 거길 갈 수 있도록 책임지고 조처해 드릴 테니 하버드는 포기하세요”라는 거였다. 나는 지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버드와 스탠퍼드의 우열을 가리자는 게 아니외다. 후광과 관계없이 여러 사람이 추천해 초청을 받았는데 왜 나에게 하버드를 포기하라고 해요? 미국으로 사람을 보내 후광에게 ‘임아무개 거길 가니 스탠퍼드로 바꾸시오’라 해보시지 ….” 우리 둘 앞에 놓인 비프스테이크는 절반 이상 남았다. 그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으나 나는 헤어지면서 내친 김에 한마디 더 했다. “여권을 내주지 않으면 나는 ‘김대중씨 때문에 여권 발급 불가’라는 대한민국 정부의 방침을 하버드대 총장에게 편지하겠소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외국 신문에도 알릴 거고요”라 했다. 떠나기 보름 전쯤 비로소 여권이 나왔다. 비행기에 올라 지정된 자리에 앉고 나서도 이륙하기 직전 기관원이 나타나 ‘일이 잘못됐으니 잠깐 내립시다’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렸다.

본시 성미가 착한 김재익은 어쩌다 전두환 정권에 발탁된 유능한 문민 출신의 경제정책 입안자인데 팔자에 없이 나처럼 모진 사람과 얽혀 소관사항도 아닌 문제에 애를 먹은 것이다. 버마 랑군으로 전두환을 수행했다 참변을 당한 그에게 명복을 빈다.



 

» 임재경/언론인
 
백낙청과 허물없는 사이인 에드 베이커(하버드옌칭 연구소 부소장 역임)는케임브리지시에 도착한 나에게 여로 모로 친절을 베풀었다. 국제문제연구센터 학기가 시작되는 9월에야 숙소가 비는 까닭에 돈을 들여 호텔에 가야 할 판이었는데 후광의 거처로 예약된 가든 스트리트 29번지의 대학 소유 아파트에 한동안 그냥 들어가서 지냈던 것은 그의 배려 덕분. 기록을 위해 여기서 꼭 밝혀야 할 것은 <한겨레>의 로마자 표기(The Hankyoreh)는 에드 베이커의 작품이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 영어듣기를 공부할 속셈으로 매일 반 나절씩 하버드 야드에 있는 어학훈련소(랭귀지랩)에 가 해드폰을 쓰고 앉아 있곤 했다. 자리마다 좌우를 높은 판자로 가려 옆에 누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영물’이란 말아 맞아 어느 하루는 옆에 누군가 잘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드는 거였다. 한참 망설이다 일어나 옆 자리에 눈길을 돌렸다. 거기에 박정희 최후의 정무비서관 고건(국무총리 역임)이 앉아있는 게 아닌가. 그의 등을 살짝 건드리자 그는 반가운 표정으로 내손을 잡으며 “파계승이 되었습니다” 하는 거였다. 대학 입학이 나보다 1년 늦은 고건과 캠퍼스에서 인사를 나눈 적은 있었으나 친하게 지낸 사이는 아니다. 그를 장래의 ‘재상감’이라 생각지는 않았고 실존주의 철학 교수 고형곤의 아들이란 점이 부러웠다.

국제문제연구센터 연구원이 처음 모이던 날 하버드대 교수회관에서 후광을 11년 만에 만났다. “나 때문에 고생 많았지요” 하는 그에게 “고생이라면 후광 선생께서 저보다 몇 배 더 하셨겠지요”라 인사했다. 옆에 서 있던 에드 베이커가 “과도 정부 수반과 과도 내각의 각료가 초면인 것 같으니 제가 소개해드려야겠군요”라 해 좌중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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