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85년 12월 비정기 간행물로 <창비 57호>를 복간했다는 이유로 전두환 정권이 창작과비평사의 출판사 등록을 취소하자 문인과 민주 인사들이 항의 농성을 벌이고 있다. 민족사진연구소 제공 |
|
|
|
|
‘도축장의 소’란 말을 누구 앞에서도 꺼낸 적이 없으나 가까운 친구들은 내 행로를 무척 걱정했던 모양이다. 귀국 며칠 뒤인 1984년 8월 중순 백낙청이 ‘창작과 비평사’에 나와서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보내라 했다. 신문사의 내근(편집-교열) 경험이 길었으면 출판·편집 일을 도울 수 있으련만 내 맞춤법·문법 실력은 수준 이하여서 ‘일손’ 가치는 제로나 마찬가지였는데, 편집주간 이시영(시인·단국대 초빙교수)은 ‘편집고문’이란 명함을 찍어 주었다. <한겨레>가 창간될 때까지 3년 반 동안 매달 거기서 월급을 받았으니 내가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면 오로지 백낙청과 ‘창비’ 덕분이다. 출근부에 도장을 찍을 필요도 없고, 간혹 지방에 강연 가는 것은 반대하기는커녕 환영이며, ‘호협’ 박윤배를 따라 놀러 다니는 데도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도축장의 소’가 아니라 ‘하늘 소’처럼 표표히 노닐었다면 어떨는지 …. 당시 ‘창비’ 실무진은 편집차장에 고세현(창비 사장), 편집에 김이구(창비 상무이사), 하종오(시인), 고형렬(시인), 이혜경(유인태 전 국회 행자위원장 부인), 부수영(기춘 전 청와대 비서관 부인), 여균동(영화감독 겸 배우), 주은경(방송 구성작가)과 업무에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정의득(창비 영업부 차장)이다.
70년대 후반의 내 강연활동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쪽과 연관된 서울 중심이었다면 84년 가을부터 6월 항쟁이 일어나기까지는 가톨릭과 연결된 지방 강연이 훨씬 잦았다. ‘개종’(改宗) 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할뿐더러 이 역시 가톨릭 평신도 젊은 활동가들의 열성에 내가 진 결과다. 민청학련 출신의 가톨릭정의평화위원회(정평) 간사 문국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가 나를 끌어내 세상 소식에 굶주린 지방으로 보냈던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5·18 이후 정치에 큰 관심을 갖던 곳은 단연 광주인데, 광주 정평의 간사 김양래(광주가톨릭센터 사회교육부장 역임·문화관광연구원 경영관리처장)는 지칠 줄 모르고 나를 광주로 불러 10여 차례 내려갔다. 강연은 외형상으로는 경제·사회·국제 문제에 국한했으나 말을 하다 보면 국내 정치에 가 닿을 때가 빈번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가 이래서 되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펜을 빼앗긴 저널리스트가 입마저 봉하고 산다면 그건 도축장의 소나 진배없다고 생각했다. 김양래의 주선으로 광주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은퇴)를 만나 점심을 같이하며 꽤 긴 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톨릭의 전국 정평 조직이 움직였는지 강연 요청은 호남의 여러 도시들, 전주·익산·목포에서도 왔으며 강원도의 춘천, 경북 안동에 간 적도 있다. 목포에 갔을 때 맑고 푸른 영산강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치다시피 한 서한태(의사·전 법무장관 천정배의 장인) 박사를 만난 것은 지방 강연 행각의 망외 소득. 부산의 김정한(작가·한겨레신문사 초대 이사 역임·작고), 원주의 장일순(서예가·가톨릭 사회참여 운동가·작고) 선생과 함께 세 분을 각기 그들의 고장에서 만나 담소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팔자 드센 저널리스트에 대한 보상이라 믿는다.
통산 10년 가까운 강연 경험을 통해 단 한 차례도 청중을 사로잡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청중의 표정을 보면 아는데 그들은 연사에 대한 의무감으로 열심히 듣고 있는 거였다. 언젠가 전주에서 문동환 목사와 더불어 앞뒤로 강연을 했을 때 확연한 차이를 발견했다. 그는 일상 대화 할 때처럼 단문으로 강연을 하는데 나는 긴 복문체의 문장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말을 잘해 뽑혀 다닌 것이 아니라 군사독재의 억압으로 연사 공급이 부족한 나머지 빈자리를 메웠던 것이다. 어머니한테서 귀가 따갑도록 들은 이야기 중 하나가 “글 잘하는 아들보다 말 잘하는 아들을 두라”는 것.
계간 <창작과 비평>이 폐간된 지 5년 만인 85년, 백낙청은 당국의 반응을 떠보려는 듯이 ‘창비’ 통권 57호를 ‘부정기 간행물 1호’란 부제를 붙여 발행했다. 거기에 백낙청은 <민중-민족문학의 새 단계>라는 글을, 나는 <한-미 관계론의 사정(射程)>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했는데 전두환 정권은 출판사 등록 취소라는 극단적 조처를 내렸다. 문인·대학교수·예술인·종교인, 심지어 바둑의 국수와 명인인 조훈현과 서봉수 등이 참여한 2800여명의 진정에도 불구하고 등록 취소 상태는 8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당국은 그 이듬해 여름 ‘창작사’란 명칭으로 영업 재개를 허용하되 백낙청·이시영·고세현, 그리고 나를 내보낸다는 조건을 달았다. 하지만 전두환의 위세는 겉과는 달리 퇴색이 짙어지는 단계였다. 해직기자들이 ‘창비 57호’보다 한 술 더 뜬 <말>을 냈으니 하는 얘기다. 임재경/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