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정론 위한 자기희생 잊지 마오
세상을 바꾼 사람들 11-5
 
 
한겨레  
 








 

» 삽화 박재동 화백
 
<한겨레>보다 늦게 창간된 어느 신문사 사람이 무슨 얘기 끝에 “한겨레는 ‘브랜드 파워’가 있다”고 한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20년이 되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때가 됐다. 브랜드라면 요샛말로 ‘명품’이라는 뜻인데, 승용차의 ‘베엠베’(BMW), 향수의 ‘샤넬’을 떠올려도 이상스러울 것이 없으며, 조악품과 싸구려의 반대말로 쓰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마음속으로 한겨레에는 일반 상품에 붙이는 ‘브랜드 파워’란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겨레는 상업재가 아니고 공공재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상법상의 주식회사, 한 부에 600원, 한 달 구독료 1만5천원, 직원은 법인 한겨레신문사의 피고용자 신분, 정년 퇴직 …, 다른 신문과 한겨레의 같은 점을 들자면 16절지 한 장을 가득 메워도 모자랄 판이다.

주관적이란 비난을 무릅쓰고 단언하건대, 한겨레는 상업적 이윤 추구를 위해 출범한 것이 아니다. 인수·합병(M&A)의 귀신이 나와 비싼 값을 주고 한겨레 주식을 몰래 사 모아 경영권을 장악하는 방법, 직업 테러 분자들을 동원하여 한겨레에 물리적 타격을 가하는 방법, 교묘한 수법을 써서 한겨레 내부 분쟁을 조장하는 방법 등 시장경제 사회에서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쓰든 일시적 훼손을 가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한겨레를 변질시키거나 말살하려는 기도는 실패할 것이다. 4·19 혁명과 6월 항쟁과 6·15 선언을 일궈낸 대한민국의 시민사회는 지금 한겨레를 지킬 만한 저력을 지녔다.

문제는 한겨레 종사자들이 어떻게 하느냐다. 열심히 성실하게 일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특히 회사 안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봉급생활자로 설정하고 안주하는 자세야말로 경계해야 한다. 성실과 근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때로는 번뜩이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고, 때로는 자기희생과 인욕(忍辱)을 감수해야 한다.

완전히 폐기된 구식 용어, ‘지사’(志士)란 말의 본디 쓰임새가 있는 곳이 바로 한겨레다. 한겨레를 영달의 발판으로 이용하고 싶은 유혹이 들거들랑 그 순간 떠나라!

한겨레 재임기간(1988~91) 나의 잘잘못을 가리는 일은 창간 동인들을 포함하여 한겨레에 애정을 지닌 모든 사람들의 몫이다. ‘편집인 겸 부사장’으로서 겪은 안팎의 인욕은 무수하지만 후진들에 참고가 될 듯하여 하나만 털어놓겠다. 인욕이란 말은 수동적 위치에서 취하는 언행을 통해 적극적 의미와 가치를 찾는 것이므로 욕된 일을 행한 자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당시 신문 발행 여부를 소관하는 부처의 장관이 나에게 “한겨레에 외국 불순자금이 유입된 사실이 포착되어 기관에서 조사 중인 모양이니 조심해야 되겠습디다”라 말하는 거였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사극에서라면 ‘어허 별 해괴한 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하며 손에 든 부채를 한번 요란하게 펼치는 것으로 장면은 바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1930~61)에게 총련의 자금으로 신문사를 차렸다는 날조된 혐의를 씌워 1961년 박정희가 교수형에 처했던 사실이 있는 터라 나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한겨레의 몇 사람을 넥타이 공장(서대문 형무소의 교수대를 가리키는 말)에 보내겠다는 수작이구나’ 하는 공포감과 ‘공갈·협박치고는 되게 유치하다’는 생각이 엇갈리는 거였다.



 

» 임재경/언론인
 
‘불순 외국자금 유입’ 첩보를 입수했다면 수사기관의 1급 기밀사항인데 소관 장관이 피의자인 한겨레 관계자에게 발설하는 것은 상식으로 불가해한 짓이다.

이 자명한 공갈·협박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것이 문제였는데, 우선 발행인 겸 대표이사인 청암(송건호의 아호)에게 보고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나는 하룻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청암 역시 십중팔구 한겨레에 겁을 주려는 협박이라 생각하겠지만 대응 방식을 회사 공식기구에서 논의해 보자고 할 때는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

적극 대응론이 고개를 들 터인즉, ‘한겨레 말살 음모를 분쇄하자’는 팻말을 들고 광화문으로 나가는 방식이다. ‘리영희 고문 방북취재 계획’ 사건과 ‘서경원 방북 자료 압수수색’ 사건으로 피가 마르는 소모전을 했는데 또다시 소모전을 치르게 되면 신문 제작에 큰 어려움을 가져올 것이 뻔하다. 더구나 저쪽에서 ‘불순자금 여부를 가리게 경리 자료와 주주 관련 자료를 내놓으라’ 하면 어떻게 할지 캄캄했다. 국가보안법 혐의는 그쪽에서 씌워 놓고 ‘네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입증하라’는 것이 무고한 사람 괴롭히는 상투 수법이다.

온건 대응은 알아서 기는 건데, 그것은 한겨레의 죽음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협박에 대한 강-온 대응 어느 쪽이거나 저들은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면 협박에 대한 최선의 대응은 묵살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 혹시 ‘외국의 불순자금’이 정말 들어왔으면 어쩌나 싶어 다음날 저녁 괜히 주주관리실에 들어갔다. 퇴근 준비 중인 여성 직원이 어쩐 일이냐고 물어 종이 상자에 쌓인 전산용지에 손을 얹으며 “요새 바쁘지?” 하고 그냥 나왔다.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협박을 묵살하자니 간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욕된 도발에 대한 묵살, 즉 ‘무대응’처럼 쉬운 것이 없는 줄 알았는데 무대응이야말로 내공이 필요한 인욕의 경지임을 이때 터득했다. 끝내 신문 발행 소관 장관의 협박을 묵살한 것은 재임 중 스스로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의 하나라 하겠다.


임재경/언론인

삽화 박재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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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광고차별, 그건 위법이오”
세상을 바꾼 사람들 11-4
 
 
한겨레  
 








 

» 1991년 11월 28일 저녁 열린 <한겨레> 공덕동 새 사옥 완공기념 축하연에서 내빈들이 축배를 들고 있다. 왼쪽부터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송건호 한겨레신문 사장,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박준규 국회의장, 김종필 민자당 최고위원, 김대중 민주당 공동대표. <한겨레> 자료사진
 
6만여 국민이 200억원의 돈을 내 좋은 신문을 만들어 보라 했을 때는 한두 해 신나게 뚱땅거려 보라는 뜻이 아님은 한겨레신문 창간 주역들이 누구보다 잘 안다. 용감하게 진실을 보도하고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나가는 일은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해 나갔으나 밑천을 축내지 않는 일은 힘에 부쳤다. 나는 광고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떠들어 댔으나 정작 광고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잘 몰랐다.

초창기 광고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고마웠던 두 사람을 빼놓을 수 없는데, 엘지(LG)그룹의 이헌조(엘지전자 회장 역임, 은퇴)와 포항제철의 박태준(포항제철 회장, 국무총리 역임). 대학 3년 위인 이헌조는 1950년대 중반 동숭동의 중국집 진아춘에서 생전 처음 내게 배갈(고량주)을 마시게 한 선배로, “아우가 신문을 만든다니 당연히 도와야지” 하며 선뜻 광고를 주었으되 기사와 관련하여 나에게 청탁을 한 적이 없었다.

박태준은 <한국일보> 논설위원인 나와 재벌의 철강업 진출 문제를 놓고 토론하던 중 ‘영리 위주의 민간 철강업은 시기상조이며, 19세기 말 독일의 경험으로 보아 재벌의 철강업은 남북관계 등 외교 분야의 위험 요인’이라고 하자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인연에다 박태준은 70년대 경제부 기자로서 정태기(한겨레 사장 역임)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들었다. 또 정태기와 고교·대학 동창인 이대공(포항제철 부사장 역임,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이 움직여 포항제철의 광고는 아주 초기부터 들어왔다. 그들 쪽에서 켕기는 구석이 있어 광고를 준 것 아니냐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대기업과 국영기업들이 왜 우리에게 그토록 매정하고 적대적이었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안기부의 노골적인 광고수주 방해 공작이 활개를 치던 때의 일임을 새겨들어야 한다.

광고담당 이사 이병주(동아투위 위원장, 한겨레 상무 역임)는 이따금 내게 와 어려움을 토로했는데, 전국 모든 일간지에 게재하는 공익광고를 유독 한겨레만 빼놓는다는 거였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저축하자”는 광고였는데, 경제기획원 소관이다. 울화가 치밀어 최학래 당시 경제부장(한겨레 사장 역임)을 앞세우고 국무회의에 참석 중인 조순(서울대 상대 학장, 한국은행 총재, 서울시장 역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만나러 광화문 종합청사로 갔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린 끝에 만난 그는 내 항의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앞으로 시정하겠다는 약속조차 하지 않는 그에게 “귀하는 지금 예산회계법의 차별 금지 조항을 위반하고 있소”라는 말을 내뱉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런 조순이 2005년엔가 한겨레 필진으로 위촉됐다는 기사를 읽고 15, 6년 전의 일이 떠올라 이번에는 한겨레의 사장, 논설주간, 편집국장과 만난 자리에서 악을 썼다. “조순은 그때의 위법 처사에 유감을 표명해야 하고 원고료는 발전기금으로 내놔야 한다”고.

자본금을 매일 까먹는 처지에 비상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엘지를 제외한 삼성·현대·대우 등은 이른바 ‘재벌 총수’와 접촉하지 않고는 광고 수주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론인데, 창간 초기 한겨레 간부들 가운데 그들과 연줄이 닿는 사람이 없었다. ‘전경련’ 회장직과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을 겸하였으며 북한을 방문해 경제교류를 타진하고 있던 현대의 정주영을 나는 타깃으로 잡았다. 여당 원내총무 이종찬(국정원장 역임)에게 전화를 걸어 정 회장의 아들 정몽준 의원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자 며칠 뒤 63빌딩의 일식집에서 만나자는 응답이 왔다. ‘한겨레는 정주영 회장의 남북교류 노력을 평가한다. 송건호 사장이 정 회장을 만나고자 하니 노력해 달라’고 하자 정몽준은 ‘그 문제는 여기서 답할 수 없고 아버지를 만나 타진해 보겠다’는 미지근한 반응. 그러나 후속 반응은 의외로 빨라 며칠 뒤 연락이 왔는데, “모레 아침 7시 계동 사옥으로 수행자 없이 사장님만 나오시되 보안을 유지해 주시오”라는 거였다. 이런 일이 처음인 청암은 떨떠름해하며 정 회장에게 무엇이라 말해야 하는지 나에게 물었다. ‘절대 광고 문제를 먼저 꺼내지 마세요. 분위기가 좋지 않으면 광고 이야기는 안 해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밝은 표정으로 돌아온 청암이 전하길, 방에 들어서자마자 정 회장이 나를 껴안으며 ‘고생이 얼마나 많으시오. 우리 함께 평양에 갑시다’라 하더란다. 송-정 회동의 공개가 한겨레의 이미지에 미칠 파장과 기자들의 사기에 끼칠 영향에 신경이 쓰여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신홍범과 성유보의 의향을 물었다. 둘 다 숨길 것 없이 공개하라고 했다. 아무튼 창간 초기 내가 해낸 최대 악역이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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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구사바나(화초를 뜻하는 일본말)’ 기자는 없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 11-3
 
 
한겨레  
 








 

» 임재경/언론인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의 인기 고정란이었던 ‘도전 인터뷰-쾌도난담’을 나는 꼭 찾아 읽곤 했다. 전세계에 명성을 드날린 이탈리아 여성 저널리스트 오리아나 팔라치(1929∼2006)의 회견기록 <역사와 인터뷰하다>에서 느낀 것, 즉 “멋있는(도전적) 질문이 멋있는(내용이 풍부한) 답변을 유도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하고자 한 때문이다. 그런데 한겨레21의 ‘도전 인터뷰’는 분량이 짧은 것이 큰 제약인데다 인터뷰 대상으로 나온 한국의 정치인, 고위 행정가, 연예-스프츠계 스타들이 유머감각과는 거리가 멀어 흥미를 잃고 말았다.

팔자 드센 나는 인터뷰 운이 없었다. 1990년 초가을 리비아 이슬람혁명 20돌 기념행사 초청을 받아 강철원(<한겨레> 기자, <와이티엔> 해설위원), 이봉수(한겨레 경제부장,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와 같이 트리폴리까지 날아가 닷새를 기다렸으나 카다피를 만나려던 기획은 불발로 그쳤다. 그 대신 귀국 비행기를 타기 2시간 전 리비아 제2인자 잘루두 소령과 30분 가량 만난 것이 고작인데, 인터뷰라 하기엔 참담한 실패작이었다.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한 기간에 내가 했던 인터뷰보다 더 많은 횟수의 인터뷰를 한겨레 창간 전후 몇 해 사이에 당했다. 우리말 번역이 아직 정착하지 않아, 영어로 하자면 인터뷰어(인터뷰하는 사람)의 대각에 선 인터뷰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외국 여성 기자들의 질문은 이따금 짜증이 날 정도로 날카로웠는데, <르 몽드>의 88년 당시 서울 주재기자 도미니크 바루슈(프랑스 방송 <앙텐2> 기자, 프리랜서)와 서독의 국영통신 <데페아>(DPA)의 여성 기자가 복장을 긁는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88년 말, 일본의 보수 성향 월간지로 300만부 넘는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문예춘추>의 자유기고가라는 40대 여성이 나를 인터뷰하겠다고 양평동 사옥으로 찾아왔다. 그는 영어가 서툰 편이어서 일본말 반, 영어 반으로 한 시간 가까이 문답을 나누더니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신문과 잡지에 이미 다 나온 것”이라며 다른 이야기를 해달라는 거였다. 하도 여러 번 인터뷰를 한 터라 ‘달달’ 외고 있는 정도여서 무엇을 더 듣고 싶은지 내 쪽에서 물어야 할 판이다.

팔라치라는 이탈리아 기자의 이름조차 못 들어본 ‘받아쓰기만 하는 글쟁이’가 확실한데 딱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편집국으로 안내했다. 한겨레 여성 기자들이 분주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저만치에 김선주(<조선일보> 해직기자, 한겨레 논설주간 역임, 칼럼니스트)가 무엇인가 편집위원장과 열띤 대화를 하고 있었으며, 생활환경부의 김미경(<허스토리> 편집장, 뉴욕 한국문화원)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기사를 쓰고 있었다. 일본 방문객을 데리고 김미경 옆으로 가 뭐든 물어보라 했다. 다음은 20대 초반의 여성 오퍼레이터들이 일하는 조판실 쪽으로 갔다.

그는 여성 기자 수가 많은 것과 그들이 편집국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 특히 여성 기자가 대선배이자 부사장 앞에서 담배를 끄지 않은 것에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한국의 기존 신문사에는 여성 기자가 많아야 네댓인데 한겨레는 20명이 넘는다는 것, 다른 신문사에서는 일본 신문을 본떠 여성 기자를 ‘구사바나’(화초라는 뜻)로 여길 뿐 당당한 일손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것, 기자는 남녀 불문 모두 단일호봉제의 적용을 받는다는 것, 남성 기자가 담배를 피우면 여성 기자도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신나게 떠들어댔다.(이후 공덕동 새 사옥으로 옮기면서 실내흡연은 금지됐다) 그 일본 자유기고가는 고개를 두세 번 조아리며 ‘잘 알겠습니다’를 연발하는 거였다.

한겨레가 이 땅에 뿌리박힌 모순과 차별의 축소판이라 하였으니 한겨레에 성(젠더) 차별이 철폐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건 강변이다. 하지만 한겨레가 나오기 전까지 기존 신문들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인습적 성차별의 일각을 한겨레는 단숨에 깼다. 이를테면 신문사의 남녀 기자가 사내결혼을 하면 둘 중 하나, 대개는 여성 쪽이 회사를 떠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사규에 없는 불문율이고 설혹 사규에 있더라도 근로기준법 위반일 그런 기본권 제한 행위에 아무도 법적 대거리를 못 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한겨레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기자 부부만 열 쌍이 훨씬 넘는다. 나만 해도 부사장으로서 조선희(한겨레 기자, <씨네21> 편집장 역임, 국립영상자료원 원장)와 박태웅(한겨레 기자, 열린사이버대학 부총장)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 여성이 대선배인데다 연상이어서 당시 한겨레는 물론 언론계 안팎에서 큰 화제가 됐던 ‘사건’이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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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자율을 찾아서 ‘한겨레 백가쟁명’
세상을 바꾼 사람들 11-2
 
 
한겨레  
 








 

» 임재경/언론인
 
창간 20돌 기획특집의 하나로 이 글을 <한겨레>에 쓰기 시작하면서 두 갈래의 상반된 주문에 시달렸다. 첫 3회분 원고를 넘기자 편집위원회의 의견이라며 담당 데스크가 전하길 “널리 알려진 창간 초기의 내부 이야기보다는 그 이전 언론운동 선배들이 살아 온 얘기를 써 달라”는 것이 하나다. 다음은 10여회 연재가 계속된 뒤 담당 편집기자가 내게 한 말로서 “재미있게 읽고 있지만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의제 설정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겨레 20년 역사가 <희망으로 가는 길>이라는 이름의 두툼한 책으로 나온 터라 첫번째 주문은 그것대로 일리가 있고, ‘우리 시대의 의제 설정’은 귀중한 지면을 소비하는 자로서 마땅히 귀담아들을 소리다. 하지만 이 글은 창간 초기의 내부 사정을 어디까지나 특정인 나의 시각에서 본 기록이다. ‘주관’, ‘객관’ 양분법으로 하면 앞의 것에 가깝다. 또 회고록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일 때 비로소 교차 확인이 가능하므로 다른 한겨레 창간 멤버들이 회고의 글을 남기길 바란다. ‘의제 설정’은 한겨레의 논평 전담 기자들과 특별히 위촉된 외부 필진이 있는 까닭에 먼저 그들에게 주문할 일이다.

내 회갑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이계익(<동아일보> 해직기자, 교통부 장관 역임), 성유보, 나 셋은 1996년 여름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열차 편으로 밀라노·베네치아·뮌헨을 거쳐 베를린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하찮은 일로 의견이 갈렸던 것이다. 저녁을 한식으로 할 거냐, 독일 맥주를 곁들인 양식으로 할 거냐를 두고 설왕설래 끝에 둘은 한국 음식집으로 가고, 나는 외톨이로 소지지를 먹었다. 배낭을 메고 이역만리 여행길에 올랐으면 의견이 다르더라도 밥은 같이 먹어야 하는데 밥이 의견차의 주제가 되었으니 기가 막힐 노릇. 두 사람은 서울을 떠난 뒤 한 차례도 우리 음식을 먹지 못했고 장차 폴란드와 러시아에 가서는 한식을 구경 못할 터이니 베를린에서 된장국과 김치를 실컷 뱃속에 채우자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모처럼 유럽까지 왔으면 가는 곳마다 그 고장 음식을 맛봐야 여행의 보람이 있지 않느냐고 맞섰던 것이다. 세 사람이 모이면 뜻이 갈린다는 세상의 원리를 확인한 셈이었다.

한겨레의 소문난 ‘인파이팅’(집안싸움)은 신문이 나오기 전 안국동 시절부터 있었다는 걸 말하려던 참이다. 한겨레 20년사에는 컴퓨터 조판시스템(CTS) 채용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으나, 창간 준비 때 일을 돕던 젊은 패들 중의 하나가 ‘머지않아 군사독재를 끝장낼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 선배들은 테크노피아에 빠져 있다’고 몰아세웠다. 테크노피아라는 말에 나는 열불이 터지는 것 같았다. 첨단 기술에 넋을 잃어 변혁의 대의를 저버렸다는 함축이다. 사실은 정반대로서 창간 준비에 여념이 없는 해직기자들은 중·노년을 가릴 것 없이 첨단 기술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고, 그중 일부는 첨단 기술의 해악을 경계하는 생태론자에 가깝다.

청암은 연로하였던 점도 있었겠지만 첨단 기술과는 도시 무관한 분이고, 리영희·최일남(소설가, 한겨레 논설고문 역임, 작가회의 의장)을 포함하여 한겨레의 논진은 한 사람만 빼고 모두 종이에다 펜으로 글을 썼다. 자동차 운전은 권근술·신홍범·성유보는 했으나 시티에스 주창자 정태기는 안 하는 주의. 한겨레의 해직기자 가운데서 자동차 운전과 컴퓨터 문서작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김종철(동아일보 해직기자, 한겨레 논설위원, 연합통신 사장 역임) 한 사람뿐이었다. 한국이 첨단 기술 상품으로 먹고살기 시작한 90년대 내내 신홍범과 나는 휴대전화를 쓰지 않았으며, 나는 95년 봄에 컴퓨터 문서작성기(워드), 그해 여름에 인터넷을 겨우 익힌 ‘테크노포비아’다.

대저 집안싸움은 형편이 어려워질수록 기승을 부리는 법. 한겨레에서는 자본 주체의 부재가 계서제(階序制)의 폐해를 제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그에 대신할 자율 기능이 생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사실 내가 한겨레 집안싸움의 여러 원인을 말하기는 매우 거북한 위치다. 한겨레는 한국의 경제·사회적 여러 모순과 차별을 타파하고자 태어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모순과 차별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인간 사회의 가장 오래된 성(젠더) 차별의 한겨레판은 없었을까?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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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검단산 등반 ‘말’지를 낳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 11-1
 
 
한겨레  
 








 

» 1985년 6월15일 발행된 <말>지 창간호 표지. <말>은 이후 한국의 언론자유와 민주주의 발전에 큰 몫을 했다. 발행인 송건호, 편집인 성유보는 이후 <한겨레> 창간에도 앞장섰다.
 
동아투위의 이부영(3선 국회의원 역임)과 성유보, ‘조선투위’의 신홍범(<한겨레> 논설주간 역임, 출판사 ‘두레’ 대표), 80년 해직기자협의회 대표 김태홍(<합동통신> 해직기자, 국회 보건복지위원장 역임), 넷이 1984년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팔당의 검단산에 오른 것이 한국 언론의 역사를 바꿀 계기가 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들의 ‘검단산 결의’는 해직기자 전체의 힘을 모으자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그해 12월 해직기자를 망라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약칭 언협)로 결실을 보았다. 의장엔 청암 송건호, 사무국장에 성유보(<동아일보> 해직기자, <한겨레> 초대·4대 편집위원장 역임), 공동대표에 최장학(<조선일보> 해직기자), 실행위원에 신홍범이 선임됐다. 언협 출범 직전 성유보가 나에게 공동대표를 수락하라기에 말미를 달라 한 뒤 백낙청과 의논한즉 그는 고개를 저었다. ‘창비에 나와 책이나 읽으라 한 것’은 몇 달 회사 돌아가는 실정을 파악하고 난 뒤 창비의 살림을 맡아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며 난색을 표하는 거였다. 내가 창비 사장으로 적격이라 믿어서가 아니라 언협에는 나 말고도 일꾼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공동대표 자리를 고사했다. 그러나 영업 취소라는 창업 이후 최악의 수난을 겪을 때 나는 창비 사장이 아니라 계속 ‘편집고문’이었고 보도지침 폭로사건으로 언협이 공황에 빠졌을 때 나는 거기 공식 직함이 없었던 까닭에 전두환의 예봉을 피했다. 운이 좋았다면 좋았고 달리 보면 한겨레를 위하여 하늘이 나를 예비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언협이 85년 6월에 선보인 지하신문 <말>의 창간호는 4×6 배대판 크기의 90여 쪽에 지나지 않는 얇은 인쇄물이었지만 겉모습이 우선 다른 간행물과 달랐다. 신홍범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표지 면부터 기사를 실었던 것인데 종이를 아낀다는 뜻 외에 ‘손에 드는 순간 읽어라’는 긴급 호소가 담겼던 것이다. 창간호 편집은 출판사 ‘공동체’를 경영하던 김도연(문학평론가, 작고)이 맡고, 원고는 홍수원(<경향신문> 해직기자, 한겨레 편집부국장·논설위원 역임)과 박우정(경향신문 해직기자, 한겨레 편집국장·논설주간 역임)이 생산했으며 인쇄소 출입-판매-배포 등의 궂은일은 20대 젊은 간사들이 해냈다. 해직기자 중심의 언협에서 시작하여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언련’으로 확대 개편되기까지 15년 동안 언협을 지킨 일꾼은 시민운동의 여장부로 성장한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역임)다. 초기의 험한 일을 도맡아 한 배시병(출판사 경영)은 보도지침이 많은 독자들 손에 들어가도록 백방으로 뛰어다닌 숨은 공로자인데 창간호 8천부가 며칠 만에 매진되었을 정도로 이목을 끌었다. 사무실이 지척이어서 나는 언협에 비교적 자주 들른 편인데 학생운동 출신 간사들과 자주 어울렸다. 초기의 간사들 정수웅(사업), 정의길(한겨레 국제부문 편집장), 권오상(한겨레 스포츠부문 부장대우), 김태광(회사원), 허정화, 후기의 정봉주(통합민주당 국회의원 역임), 한승동(한겨레 문화부문 선임기자)은 모두 가명을 썼다. 영화배우, 가수, 스포츠 스타의 이름, 이를테면 ‘권형철’, ‘백호민’, ‘박찬숙’, ‘정시진’ 같은 것이어서 “자네들의 이름은 한결같이 멋있는데” 하니 모두 와 웃는 거였다.

한국일보 기자 김주언(기자협회장 역임)이 1년 가까이 날마다 적어놓았다가 언협에 건네준 홍보정책실의 보도지침 내용을 86년 6월 <말>이 특집호로 발간하자 전두환 정권은 언협의 간부 김태홍과 신홍범, 그리고 김주언 기자를 구속해 국가보안법을 걸어 기소했다. 86년 연말께 공덕동 언협 사무실에는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농성을 일주일에 한두 번씩 벌이다시피 했다. 처음에는 해직기자 20~30명에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문협 회원들이 응원하여 꽤 성황을 이루었으나 해가 지나자 농성 참여자는 점점 줄어들어 87년 초봄에는 열을 채우기가 힘들었고, 청암마저 독감으로 눕는 바람에 언협의 연장자는 나 혼자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재판이 열릴 때 방청은 필수이며 변호사들을 만나야 하는데다 이따금 외국 기자들에게 한국의 언론현실을 설파하자니 ‘백의종군’이라는 게 때로는 등골 빠지는 일이란 걸 알았다. 그 무렵 하루는 독일교회(명함에는 EKD, 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소속이라는 백인 둘이 창비 사무실로 나를 만나러 와 곤경에 처한 언협을 돕고 싶다며 얼마나 지원하면 좋겠냐고 묻는 거였다. 언협이 <말>지 발행을 위해 세계교회협의회(WCC) 계통의 개신교 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은 짐작했으나 백의종군 처지에 금전지원 제의를 응낙한다는 것은 현명치 않을 것 같아 ‘정신적 지원(모럴 서포트)으로 충분하다’며 고사했다.

보도지침 관련 재판이 막바지에 이르자 간사 최민희는 ‘말 소식’을 찍어 널리 뿌리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나를 부추기는 거였다. 한번은 최민희의 극성에 못 이겨 간사 두셋과 함께 명동성당 입구에서 반절지 양면짜리 ‘말 소식’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말쑥한 차림의 40대 남자가 내게 다가와 지갑을 꺼내 만원짜리 여러 장을 주며 “고생하시는 분들 점심이나 같이 하세요”라는 거였다. 최민희의 반응이 걸작, “선생님이 나오시니 시민들이 감동하는 거 아니에요” 했다. 그날 점심은 명동 ‘한일관’에서 먹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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