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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11월 28일 저녁 열린 <한겨레> 공덕동 새 사옥 완공기념 축하연에서 내빈들이 축배를 들고 있다. 왼쪽부터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송건호 한겨레신문 사장,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박준규 국회의장, 김종필 민자당 최고위원, 김대중 민주당 공동대표. <한겨레>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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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만여 국민이 200억원의 돈을 내 좋은 신문을 만들어 보라 했을 때는 한두 해 신나게 뚱땅거려 보라는 뜻이 아님은 한겨레신문 창간 주역들이 누구보다 잘 안다. 용감하게 진실을 보도하고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나가는 일은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해 나갔으나 밑천을 축내지 않는 일은 힘에 부쳤다. 나는 광고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떠들어 댔으나 정작 광고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잘 몰랐다.
초창기 광고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고마웠던 두 사람을 빼놓을 수 없는데, 엘지(LG)그룹의 이헌조(엘지전자 회장 역임, 은퇴)와 포항제철의 박태준(포항제철 회장, 국무총리 역임). 대학 3년 위인 이헌조는 1950년대 중반 동숭동의 중국집 진아춘에서 생전 처음 내게 배갈(고량주)을 마시게 한 선배로, “아우가 신문을 만든다니 당연히 도와야지” 하며 선뜻 광고를 주었으되 기사와 관련하여 나에게 청탁을 한 적이 없었다.
박태준은 <한국일보> 논설위원인 나와 재벌의 철강업 진출 문제를 놓고 토론하던 중 ‘영리 위주의 민간 철강업은 시기상조이며, 19세기 말 독일의 경험으로 보아 재벌의 철강업은 남북관계 등 외교 분야의 위험 요인’이라고 하자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인연에다 박태준은 70년대 경제부 기자로서 정태기(한겨레 사장 역임)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들었다. 또 정태기와 고교·대학 동창인 이대공(포항제철 부사장 역임,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이 움직여 포항제철의 광고는 아주 초기부터 들어왔다. 그들 쪽에서 켕기는 구석이 있어 광고를 준 것 아니냐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대기업과 국영기업들이 왜 우리에게 그토록 매정하고 적대적이었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안기부의 노골적인 광고수주 방해 공작이 활개를 치던 때의 일임을 새겨들어야 한다.
광고담당 이사 이병주(동아투위 위원장, 한겨레 상무 역임)는 이따금 내게 와 어려움을 토로했는데, 전국 모든 일간지에 게재하는 공익광고를 유독 한겨레만 빼놓는다는 거였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저축하자”는 광고였는데, 경제기획원 소관이다. 울화가 치밀어 최학래 당시 경제부장(한겨레 사장 역임)을 앞세우고 국무회의에 참석 중인 조순(서울대 상대 학장, 한국은행 총재, 서울시장 역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만나러 광화문 종합청사로 갔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린 끝에 만난 그는 내 항의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앞으로 시정하겠다는 약속조차 하지 않는 그에게 “귀하는 지금 예산회계법의 차별 금지 조항을 위반하고 있소”라는 말을 내뱉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런 조순이 2005년엔가 한겨레 필진으로 위촉됐다는 기사를 읽고 15, 6년 전의 일이 떠올라 이번에는 한겨레의 사장, 논설주간, 편집국장과 만난 자리에서 악을 썼다. “조순은 그때의 위법 처사에 유감을 표명해야 하고 원고료는 발전기금으로 내놔야 한다”고.
자본금을 매일 까먹는 처지에 비상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엘지를 제외한 삼성·현대·대우 등은 이른바 ‘재벌 총수’와 접촉하지 않고는 광고 수주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론인데, 창간 초기 한겨레 간부들 가운데 그들과 연줄이 닿는 사람이 없었다. ‘전경련’ 회장직과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을 겸하였으며 북한을 방문해 경제교류를 타진하고 있던 현대의 정주영을 나는 타깃으로 잡았다. 여당 원내총무 이종찬(국정원장 역임)에게 전화를 걸어 정 회장의 아들 정몽준 의원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자 며칠 뒤 63빌딩의 일식집에서 만나자는 응답이 왔다. ‘한겨레는 정주영 회장의 남북교류 노력을 평가한다. 송건호 사장이 정 회장을 만나고자 하니 노력해 달라’고 하자 정몽준은 ‘그 문제는 여기서 답할 수 없고 아버지를 만나 타진해 보겠다’는 미지근한 반응. 그러나 후속 반응은 의외로 빨라 며칠 뒤 연락이 왔는데, “모레 아침 7시 계동 사옥으로 수행자 없이 사장님만 나오시되 보안을 유지해 주시오”라는 거였다. 이런 일이 처음인 청암은 떨떠름해하며 정 회장에게 무엇이라 말해야 하는지 나에게 물었다. ‘절대 광고 문제를 먼저 꺼내지 마세요. 분위기가 좋지 않으면 광고 이야기는 안 해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밝은 표정으로 돌아온 청암이 전하길, 방에 들어서자마자 정 회장이 나를 껴안으며 ‘고생이 얼마나 많으시오. 우리 함께 평양에 갑시다’라 하더란다. 송-정 회동의 공개가 한겨레의 이미지에 미칠 파장과 기자들의 사기에 끼칠 영향에 신경이 쓰여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신홍범과 성유보의 의향을 물었다. 둘 다 숨길 것 없이 공개하라고 했다. 아무튼 창간 초기 내가 해낸 최대 악역이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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