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검단산 등반 ‘말’지를 낳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 11-1
 
 
한겨레  
 








 

» 1985년 6월15일 발행된 <말>지 창간호 표지. <말>은 이후 한국의 언론자유와 민주주의 발전에 큰 몫을 했다. 발행인 송건호, 편집인 성유보는 이후 <한겨레> 창간에도 앞장섰다.
 
동아투위의 이부영(3선 국회의원 역임)과 성유보, ‘조선투위’의 신홍범(<한겨레> 논설주간 역임, 출판사 ‘두레’ 대표), 80년 해직기자협의회 대표 김태홍(<합동통신> 해직기자, 국회 보건복지위원장 역임), 넷이 1984년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팔당의 검단산에 오른 것이 한국 언론의 역사를 바꿀 계기가 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들의 ‘검단산 결의’는 해직기자 전체의 힘을 모으자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그해 12월 해직기자를 망라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약칭 언협)로 결실을 보았다. 의장엔 청암 송건호, 사무국장에 성유보(<동아일보> 해직기자, <한겨레> 초대·4대 편집위원장 역임), 공동대표에 최장학(<조선일보> 해직기자), 실행위원에 신홍범이 선임됐다. 언협 출범 직전 성유보가 나에게 공동대표를 수락하라기에 말미를 달라 한 뒤 백낙청과 의논한즉 그는 고개를 저었다. ‘창비에 나와 책이나 읽으라 한 것’은 몇 달 회사 돌아가는 실정을 파악하고 난 뒤 창비의 살림을 맡아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며 난색을 표하는 거였다. 내가 창비 사장으로 적격이라 믿어서가 아니라 언협에는 나 말고도 일꾼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공동대표 자리를 고사했다. 그러나 영업 취소라는 창업 이후 최악의 수난을 겪을 때 나는 창비 사장이 아니라 계속 ‘편집고문’이었고 보도지침 폭로사건으로 언협이 공황에 빠졌을 때 나는 거기 공식 직함이 없었던 까닭에 전두환의 예봉을 피했다. 운이 좋았다면 좋았고 달리 보면 한겨레를 위하여 하늘이 나를 예비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언협이 85년 6월에 선보인 지하신문 <말>의 창간호는 4×6 배대판 크기의 90여 쪽에 지나지 않는 얇은 인쇄물이었지만 겉모습이 우선 다른 간행물과 달랐다. 신홍범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표지 면부터 기사를 실었던 것인데 종이를 아낀다는 뜻 외에 ‘손에 드는 순간 읽어라’는 긴급 호소가 담겼던 것이다. 창간호 편집은 출판사 ‘공동체’를 경영하던 김도연(문학평론가, 작고)이 맡고, 원고는 홍수원(<경향신문> 해직기자, 한겨레 편집부국장·논설위원 역임)과 박우정(경향신문 해직기자, 한겨레 편집국장·논설주간 역임)이 생산했으며 인쇄소 출입-판매-배포 등의 궂은일은 20대 젊은 간사들이 해냈다. 해직기자 중심의 언협에서 시작하여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언련’으로 확대 개편되기까지 15년 동안 언협을 지킨 일꾼은 시민운동의 여장부로 성장한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역임)다. 초기의 험한 일을 도맡아 한 배시병(출판사 경영)은 보도지침이 많은 독자들 손에 들어가도록 백방으로 뛰어다닌 숨은 공로자인데 창간호 8천부가 며칠 만에 매진되었을 정도로 이목을 끌었다. 사무실이 지척이어서 나는 언협에 비교적 자주 들른 편인데 학생운동 출신 간사들과 자주 어울렸다. 초기의 간사들 정수웅(사업), 정의길(한겨레 국제부문 편집장), 권오상(한겨레 스포츠부문 부장대우), 김태광(회사원), 허정화, 후기의 정봉주(통합민주당 국회의원 역임), 한승동(한겨레 문화부문 선임기자)은 모두 가명을 썼다. 영화배우, 가수, 스포츠 스타의 이름, 이를테면 ‘권형철’, ‘백호민’, ‘박찬숙’, ‘정시진’ 같은 것이어서 “자네들의 이름은 한결같이 멋있는데” 하니 모두 와 웃는 거였다.

한국일보 기자 김주언(기자협회장 역임)이 1년 가까이 날마다 적어놓았다가 언협에 건네준 홍보정책실의 보도지침 내용을 86년 6월 <말>이 특집호로 발간하자 전두환 정권은 언협의 간부 김태홍과 신홍범, 그리고 김주언 기자를 구속해 국가보안법을 걸어 기소했다. 86년 연말께 공덕동 언협 사무실에는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농성을 일주일에 한두 번씩 벌이다시피 했다. 처음에는 해직기자 20~30명에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문협 회원들이 응원하여 꽤 성황을 이루었으나 해가 지나자 농성 참여자는 점점 줄어들어 87년 초봄에는 열을 채우기가 힘들었고, 청암마저 독감으로 눕는 바람에 언협의 연장자는 나 혼자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재판이 열릴 때 방청은 필수이며 변호사들을 만나야 하는데다 이따금 외국 기자들에게 한국의 언론현실을 설파하자니 ‘백의종군’이라는 게 때로는 등골 빠지는 일이란 걸 알았다. 그 무렵 하루는 독일교회(명함에는 EKD, 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소속이라는 백인 둘이 창비 사무실로 나를 만나러 와 곤경에 처한 언협을 돕고 싶다며 얼마나 지원하면 좋겠냐고 묻는 거였다. 언협이 <말>지 발행을 위해 세계교회협의회(WCC) 계통의 개신교 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은 짐작했으나 백의종군 처지에 금전지원 제의를 응낙한다는 것은 현명치 않을 것 같아 ‘정신적 지원(모럴 서포트)으로 충분하다’며 고사했다.

보도지침 관련 재판이 막바지에 이르자 간사 최민희는 ‘말 소식’을 찍어 널리 뿌리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나를 부추기는 거였다. 한번은 최민희의 극성에 못 이겨 간사 두셋과 함께 명동성당 입구에서 반절지 양면짜리 ‘말 소식’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말쑥한 차림의 40대 남자가 내게 다가와 지갑을 꺼내 만원짜리 여러 장을 주며 “고생하시는 분들 점심이나 같이 하세요”라는 거였다. 최민희의 반응이 걸작, “선생님이 나오시니 시민들이 감동하는 거 아니에요” 했다. 그날 점심은 명동 ‘한일관’에서 먹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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