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험한 시대’ 격랑 건너는 법
올해의 책(국내서)
 
 
한겨레 김일주 기자 이세영 기자 한승동 기자
 








 
지난 1년 출판계는 10년 전 외환위기 시절보다 더 험한 최악의 불황을 겪었다. 불황의 골이 내년에 더 깊어질 것이라는 전망으로 사람들 가슴은 더욱 시리다. 그런 역경 중에도 출판인들은 양서로써 ‘어둡고 힘겨운 시대를 건너는 법’을 이야기하려 했고, 독자들은 이 책들과 더불어 궁핍한 시기를 견디고 용기를 얻었다.

시대를 진단하는 책, 희망을 찾아가는 책, 마음을 덥혀주는 책들이 있었다. 지난 1년 독자의 사랑을 받았고 또 우리 사회에 빛과 힘을 준 책들을 선별해 국내서 10종과 번역서 10종으로 나누어 싣는다. 종수를 한정하고 장르를 안배하다보니 양서인데도 어쩔 수 없이 빠진 책들이 많아 아쉬움이 남는다.

<한겨레> ‘책과생각’에 칼럼을 쓰는 과학책 번역가 김명남씨, 도서평론가 이권우씨, 출판평론가 최성일씨,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그리고 <한겨레> 책·지성팀 한승동·최재봉·고명섭·이세영·김일주 기자가 ‘올해의 책’ 선정에 함께했다.












■ 자기 객관화, 행복하자는 수작이야

〈건투를 빈다〉
김어준 지음·현태준 일러스트/푸른숲·1만5800원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씨가 <한겨레> ‘esc’ 등 매체에 연재한 상담 기록을 묶고 중간중간 상담 주제와 관련해 쓴 에세이를 섞어 엮었다. 주제 불문, 장르 불문 고민에 ‘따뜻한 직설법’ 또는 ‘따뜻한 독설법’으로 답하며 상담자의 심리를 냉혹하게 파헤쳐, ‘찌질한’ 자신까지 객관화해 온전한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주름처럼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라 근육처럼 운동해야 생기는 자기 객관화 능력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행복할 수 있는 힘은 애초부터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거, 그러니 행복하자면 먼저 자신에 대한 공부부터 필요하다는 거, 이거 꼭 언급해두고 싶다. 세상사 결국 다 행복하자는 수작 아니더냐.” 김일주 기자




■ 유머와 위트로 읽는 진화생물학





 

» 〈다윈의 식탁〉
 
〈다윈의 식탁〉
장대익 지음/김영사·1만3000원

찰스 다윈에게서 기원하는 진화생물학의 흐름과 쟁점을 ‘가상논쟁’이라는 형식으로 풀어냈다.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제이 굴드, 리처드 르원틴, 에드워드 윌슨 등 진화생물학의 고수들이, 급서한 20세기 최고의 진화론자 윌리엄 해밀턴을 기리기 위해 영국 옥스퍼드대 뉴컬리지 예배당에 모인다는 상황 설정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굴드팀·도킨스팀으로 패를 나눠 벌이는 엿새간의 가상 논쟁은 진화생물학의 핵심 주제를 유머와 위트가 담긴 살아 있는 이야기로 전달한다. 논리와 설득력을 무기로 벌이는 학자 집단의 치열한 논전 속에서 과학적 지식 또한 끊임없이 진화해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세영 기자


■ 신자유주의 질환 ‘대중용 처방전’





 

»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장하준·아일린 그레이블 지음 이종태·황해선 옮김/부키·1만3000원

국방부가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불온도서 딱지를 붙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삽시에 그 책 판매량을 수만부나 늘려준 독서대중의 폭발적인 호응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무언의 저항처럼 읽혔다.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는 민영화 등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내세우는 갖가지 신자유주의의 장점들이 얼마나 허구인지 좀더 쉽게, 더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장하준표 신자유주의 비판의 ‘대중용 버전’이다. 쟁점 항목별로 조목조목 정리한 신자유주의 주장과 그에 대한 비판, 그리고 대안 제시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은 여전히 건재한, 역사적 사실들에서 뽑아올린 명쾌한 실증력. 장하준의 진단이 옳았다는 건 미국발 금융공황으로도 이미 입증된 셈이 아닌가. 한승동 선임기자


■ ‘민족사적 자멸극’ 바닥 치고 비상하기





 

» 〈밤은 노래한다〉
 
〈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문학과지성사·1만원

작가 김연수는 실재와 허구, 진실과 거짓, 안과 밖의 경계를 끊임없이 물고늘어진다. 오랫동안 붙들고 만져 온 끝에 책으로 내놓은 장편 <밤은 노래한다>에서 그는 낮과 밤의 경계를 문제삼는다. 주인공 김해연은 사랑했던 여인이 죽음을 앞두고 보내온 편지를 보면서 익숙하고 편안한 낮의 세계에서 낯설고 불편한 밤의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그것은 김해연 개인의 밤이자 민족사의 밤이기도 했다. 1930년대 만주의 조선인 독립투쟁가 사회를 강타한 ‘민생단 사건’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자멸극이 그 밤의 이름. 그 밤의 이야기는 해연에게나 민족에게나 몰락과 환멸의 서사이지만, 그렇게 바닥을 치고서야 비로소 비상과 희망의 꿈 역시 가능한 법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 이동파·예술세계파 등 러시아 미술 1천년사




 

» 〈러시아 미술사〉
 
〈러시아 미술사〉
이진숙 지음/민음in·2만2000원

현지 유학파가 쓴 국내 첫 러시아 미술사 책이다. 12세기 이콘화에서 발원해 이동파, 아방가르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는 러시아 미술 1000년사를 ‘예술의 사회사’라는 형식으로 풀어냈다. 작품 구석구석을 살피는 시선의 치밀함과 러시아 역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삼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누락시킨 러시아 거장들의 역작들을 21세기 한국의 독자 앞에 호출했다. 이동파·예술세계파 등 러시아 근대 미술의 정수를 풍부한 도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문학적 글쓰기를 통해 다져진 글쓴이의 필력이 책에 대한 몰입도를 배가한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 북녘 토박이말 아우른 어린이 말 사전





 

» 〈보리국어사전〉
 
〈보리국어사전〉
윤구병 감수·토박이 사전 편찬실 엮음/보리·4만5000원

초등 교과서·좋은 어린이책·학급문고에서 모은 말과 북녘 토박이말 800여개 등을 총망라해 4만개가 넘는 방대한 낱말을 두툼한 1500쪽 사전에 실었다. 책을 감수한 윤구병 전 충북대 철학과 교수는 1983년 이오덕 선생이 이끌던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국어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사전은 2001년부터 꼬박 7년에 걸친 작업 끝에 완성됐다. 조붓하다(조금 좁은 듯하다), 희붐하다(날이 새려고 빛이 희미하게 돌아 조금 밝다) 등 사라져가는 우리말을 붙잡아 모았고, 남북이 다르게 쓰는 말도 2500개나 실어 남과 북의 아이들이 함께 볼 수 있는 사전을 만들었다. 김일주 기자


■ 단 한줄 글쓰기도 나를 치유한다




 

» 〈치유하는 글쓰기〉
 
〈치유하는 글쓰기〉
박미라 지음/한겨레출판·1만2000원

“단 한 문장으로도, 서툰 글솜씨로도, 아무렇게나 끼적인 낙서로도 치유의 효과가 나타난다.”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첫 편집장을 지내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감정치유 에세이 <천만번 괜찮아> 등의 책을 쓴 지은이가 ‘치유하는 글쓰기’ 강사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글쓰기가 지닌 치유의 힘을 들려주고 글쓰기로 치유에 이르는 길을 안내한다. ‘치유’는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완전히 용서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미친년 글쓰기’, ‘셀프 인터뷰’, ‘무의식적 글쓰기’ 등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이들의 글이 “온몸으로”, “심장으로” 글을 쓰라는 지은이의 조언과 함께 실렸다. 김일주 기자


■ 사회 파행 낳는 ‘신흥 법률귀족’ 고발





 

» 〈법률사무소 김앤장〉
 
〈법률사무소 김앤장〉
임종인·장화식 지음/후마니타스·1만2000원

이른바 ‘1987년 체제’ 20여년간 진행된 민주화·자유화, 신자유주의 정책 최대의 수혜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다수 국민의 삶을 끝없는 불안과 곤궁으로 몰아가고 있는 구조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잘나가는 법률사무소의 유별난 행태를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가장 인상적으로 고발한 책. 정부 고관들과 사법 수장들, 그리고 동창과 연수원 동기들과 직장 선후배들까지 총동원해 론스타·소버린·칼라일·골드먼삭스 등의 외국 투기자본과 삼성 등 국내 부자들의 이해를 ‘합법적으로’ 대변하면서 천문학적인 돈을 버는 ‘21세기 신흥귀족’들의 특권적 철옹성 쌓기와 그로 인한 우리 사회의 파행을 충격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묻는다. 그들은 시민의 벗인가 적인가, 국가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한승동 선임기자


■ 역사에서 퍼올린 아날학파적 희망





 

» 〈대항해 시대〉
 
〈대항해 시대〉
주경철 지음/서울대학교출판부·2만3000원

1492년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 이후 유럽 문명이 전지구적 지배력을 장악한 것은 우월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공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팽창은 대부분 전쟁과 폭력, 충돌과 갈등으로 점철된 비극의 역사였다. 그럼에도 유럽의 절대 우위가 확정되는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대항해 시대>가 뛰어난 점은 그것을 추상적 언설이 아니라 방대한 사료와 이론을 구사하며 매우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그려낸다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은 일방적이었지만 역사의 진행은 일방적으로 흘러간 적이 없으며, 피해자들의 주체적 대응이야말로 세계사를 재창출한 동력이었다. 아날학파의 세례를 받은 지은이가 역사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지점이 바로 거기다. 한승동 선임기자


■ 다문화 가정 다룬 청소년판 난쏘공





 

» 〈완득이〉
 
〈완득이〉
김려령 지음/창비·9500원(양장)·8500원(반양장)

올해 출판계에 분 청소년문학 돌풍을 선두에서 이끈 화제의 성장소설이다. ‘난쏘공’의 난쟁이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카바레 ‘삐끼’ 난쟁이 아버지, 어릴 때 집을 나가 얼굴도 모르는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혼자 라면을 끓여 먹으며 자란 완득이가 괴짜 담임 똥주를 만나 세상 밖으로 나올 용기를 얻는다는 내용이다. 장애인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 다문화 가정 문제 등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행동은 괴짜여도 속 깊고 유머 넘치는 담임 똥주 캐릭터와 열일곱 살 완득이의 꾸밈없는 서술이 곳곳에서 웃음을 자아낸다. 제1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받았다.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달빛푸른고개 2008-12-21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 책은 두 권, 구입해놓은 책은 세 권이니...

소나무집 2008-12-22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은 책 두 권이네요.

달빛푸른고개 2008-12-23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쌓아놓기만하고 읽지 못한 책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닫힌 학교’ 앞 학생·교사들 눈물바다
학교쪽 봉쇄…교장, 아이들 손팻말도 찢어

장수중, 23일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 승인
 
 
한겨레 김성환 기자 정민영 기자 박임근 기자
 








 

» 일제고사 때 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파면 통보를 받은 최혜원 길동초등학교 선생님이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아이들이 보내온 사진을 들어보이며 울먹거리고 있다. 닫힌 교실문과 뜯긴 컴퓨터, 셔터가 내린 복도문 등이 담겨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일제고사 해직교사’ 출근투쟁


18일 오전 서울 강동구 길동초등학교 본관 건물 앞.

일제고사 때 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해임된 교사 최혜원(25)씨의 첫 ‘출근 투쟁’은 끝내 눈물바다로 변했다. 최씨는 이날 아침 8시께 학교 정문 앞에서 담임을 맡았던 6학년 2반 학생들과 학부모 등 20여명과 함께 ‘부당 해임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에 참석했다. 오전 8시40분께 집회를 마치고 학생 10여명과 함께 교실로 들어가려 했지만, 학교 쪽은 건물 중앙현관 출입구를 아예 걸어 잠갔다. 현관을 사이에 두고 30분 남짓 실랑이를 벌였지만, 끝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최씨와 학생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한동안 눈물을 쏟았다. 임아무개(13)양은 “아침에 가져가려고 전날부터 만들어 놓은 손팻말을 교장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이 다 찢어버렸다”며 울먹였다. 김아무개(13)양은 “교문 앞에서 다른 선생님에게 막힌 우리 선생님을 보면서 슬프고 무서웠다”고 했다. 이 학교 김태영 교장은 “새 담임교사가 배정된 상황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통제했다”고 말했다.


‘일제고사 교사 해임’ 길동초교 최혜원 교사 출근투쟁 첫날








최씨는 두 시간 남짓 만에 발길을 돌렸지만, 학생들은 교실로 돌아가지 않고 보건실에 모여 하루를 보냈다. “아이들에게 큰 상처를 줘 마음이 아프고 죄스러워요. 중징계를 내린 것에 화가 치밀고, 현관 안에서 팔짱을 낀 채 내다보던 동료 교사들의 냉정함이 더 서러웠어요.” 최씨는 “힘들고 괴롭지만 출근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학교 쪽이 연 6학년 2반 학부모 총회에서도 ‘부당 해임’에 대한 성토가 쏟아졌다. 총회에 참석한 학부모 이아무개(38)씨는 “졸업 때까지만이라도 최 교사의 징계를 미뤄달라고 요구했지만 학교 쪽은 불가능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며 “회의에 참석한 학부모와 학생들 이름을 일일이 적어 무슨 말을 하는지 감시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 교장은 “총회는 이번 일로 상처받은 학부모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쓰다듬기 위해 연 것”이라고 해명했다.

파면·해임된 교사들에 대한 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와 성명도 잇따랐다.

‘일제고사 관련 부당징계 저지 장수군대책위원회’와 학부모들은 이날 성명을 내어 김인봉 장수중학교 교장 징계 움직임에 대해 “학부모들의 선택권을 존중한 장수중 교장에 대한 부당 징계를 중단하라”고 촉구하고, 전북도교육청 앞에서 1인시위를 벌였다. 이날 장수중은 23일 일제고사를 치르지 않고 체험학습을 하는 것을 승인했다. 전교조 부산·충북·울산지부 등도 지역별로 1인시위, 농성, 모금운동 등을 벌였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이날 성명을 내어 “편지 형태로 학부모에게 선택권을 안내했던 교사들을 학교에서 몰아낸 것은 학교의 자율권과 학부모·학생의 선택권을 강조해온 시교육청의 입장에도 어긋나는 것”이라며 징계 철회를 요구했다. 대한불교청년회 등 10개 불교단체들은 “경쟁과 서열화를 부추겨 평화와 공생의 감수성을 죽이고, 작은 저항이나 반론은 힘으로 짓밟는 것이 교육당국이 할 짓이냐”며 비판했다. 김성환 정민영, 전주/박임근 기자 hwany@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박종현 기자의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들] <14> '88만원 세대' 저자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
'그들만의 경제학' 지상으로 끌어내린…'영원한 녹색당원'

관련이슈 : 박종현 기자의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들


20081217003444



  • ◇생태경제학자인 우석훈 교수는 “노동 이외의 소득을 갖는 것은 개인적 신념이나 철학에 어긋난다”며 부동산 투기나 주식투자를 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하고 있다.
    허정호 기자
    우석훈은 2008년 한국 경제를 가장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는 젊은 지성인이다. 그가 만들고 표현한 문구들은 어느새 우리 사회를 표현하는 강력한 키워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88만원 세대’, ‘생태경제학’ ‘8자 형 사회’라는 말들은 언론에서는 이제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자리했다.

    그는 ‘촌놈들의 제국주의’(개마고원)에서 “한국이 주거공간, 교육기관, 시장의 세 가지 부문에서 상류층과 하류층이 완전히 분리되는 8자 형 경제로 진입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피라미드형 경제에서 중산층이 두터운 마름모형 경제를 지나서, 중남미형 경제의 특징인 8자 형 경제로 들어가고 있다는 우려를 전한 것이다. 최근 내놓은 ‘괴물의 탄생’(개마고원)에서는 “시장 실패와 정부 실패를 인정하고 호혜성과 명예가 담보되는 3개 부문의 역할을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우석훈 교수는 지금까지 이 시리즈에서 만난 학자 중에서 가장 젊은 학자다. 1968년생으로 86학번이다. 극단의 흐름에서 이탈한 기분 좋은 학자다. 경제분야의 책들이 딱딱한 이론을 담거나 재테크의 실용 측면만 부각하는 현실을 뛰어넘었다. 나라의 경제와 정책이 개인의 실생활에 생각보다 많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한 저자이기도 하다.

    #흔치 않은 저술 예고제

    비판적 시선이 담긴 눈으로 한국 경제와 자신의 미래를 조망하려는 이들은 먼저 그의 책을 찾게 된다. 그의 다음 저작을 기대하는 ‘기다림의 고통’을 즐기는 이들도 많다. 프로야구의 선발투수 예고제처럼 다음 저작물을 미리 알리고 있기에 독자와 출판계 양쪽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저술 예고제는 다음 책을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바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거기에다 독자에 대한 책임감도 가미됐을 것이다.

    ‘저술 일정표’대로라면 그는 한국 경제와 사회를 논하는 12권의 책을 내놓게 된다. 크게 세 부분이다.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에서 시작해 ‘생태 경제학’을 거쳐 ‘국가 기본 시리즈’를 통해 마무리할 생각이다. 4권으로 완간된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가 ‘무엇’에 대한 이야기라면 ‘생태 경제학’ 시리즈는 우리 경제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탐색이다. 완결판인 국가 기본 시리즈는 드러난 문제점의 해법을 제시하는 방법론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번 겨울방학에 시리즈를 내놓는 우 교수는 되도록 많은 시간과 역량을 투입할 생각이다.

    “글을 쓸 때는 한없이 편합니다. 책을 쓰면서 다시 생각하게 돼 ‘눈’이 커지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제가 쓴 책을 읽고 연락하는 독자들을 생각하면 가능한 쉽게 써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됩니다.”

    고등학생에서부터 70대 남성 독자까지.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그의 저술 태도는 될 수 있으면 도표를 많이 넣으려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읽기 쉬우면서도 설득력 있는 글을 쓰기 위해 그는 기본서만 50종 넘게 읽고 참고한다.

    그는 전형적인 ‘올빼미 형’ 학자이며 저술가이다. 집중력 확보를 위해 그가 글을 쓰는 시간은 자정에서 이른 아침까지다. 이 시간에는 쓰는 데 온 정신을 몰입할 수 있다. 내용을 갖춘 다작을 내놓는 그가 첫 책을 세상에 선보인 것은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도 10년이 지난 뒤였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생태경제학

    첫 책 ‘아픈 아이들의 세대’(뿌리와이파리)는 그의 주된 관심과 미래의 지향점이 드러난 책이다. 한국의 어려운 상황 때문에 사회와 경제 문제에 관한 글들을 쓰고 있지만, 그는 원래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생태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는 “저술하고 있는 내용들이 녹색당의 정책 대안을 재구성해 본 것일 수도 있다”며 “이행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약하지만, 이를 적극 개진하면 현실 개입의 강도가 강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멸종 동물을 보호하는 등 다양성을 인정하는 생태계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경제학’을 논하자고 제안한다. 그는 “특정 생물이 생태계를 파괴하면 생태계의 지속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받는 것처럼 기업의 독과점은 호응받을 수 없다”며 “훌륭한 생태계는 멸망하지 않고 복원되듯이, 조화를 이룬 경제는 파탄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생태학을 경제학과 연결해 생태경제학을 다룬 우 교수는 이제 생태경제학에 인류학을 접목할 생각이다. 생태학과 인류학, 경제학이 만나는 접점을 찾겠다는 생각이다.

    “세 학문을 연결해 제대로 연구하면 한국을 바꿀 수 있습니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경제학’에 우정과 환대를 논하는 ‘생태경제학’은 결국 사람을 위하는 학문이지요. 이 과정에서 인류학이 역할을 할 수 있지요.”

    그는 국민이 경제에 관심이 없는 사회가 오히려 복지사회라고 설명한다. 유럽은 절반 가까운 국민이 경제에 관심이 없으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는 “먹고사는 문제에만 관심을 두면 선진국이 결코 될 수 없다”며 “다양한 것에 관심을 두고 ‘극우파’도 ‘변종’도 사회에 기여하는 사회가 선진국이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나라는 ‘차이’가 ‘전체’에 기여하기도 힘든 곳이고, ‘전체’가 ‘차이’에 기대하는 사회도 아니다. 한국 사회는 ‘물이 역류하는 곳’이라고도 했다.

    “한국의 속도감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어요. 역류하는 물길에서 낙오하지 않고 그나마 그 자리에서 버티려고 해도 ‘물장구’를 쳐야 하는 상황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상황에 처해 있어요”

    #“언론과 정치가 제 역할해야”

    당연히 해결책을 묻게 된다. 우 교수는 “사회와 우리 내부를 바라보는 시선에 변화를 줘야 한다”며 “그 시선을 바탕으로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설명한다.

    우리 경제가 이렇게 문제를 보이는 것은 정치가 제대로 작동을 못했고,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석가모니의 말을 인용한다.

    “부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쟁을 없애려면 어른이 말을 많이 하라고요. 또 미망인과 고아를 잘 보살피는 게 중요하다고 했어요.”

    말을 많이 하라는 이야기는 바로 대화하고 협상하라는 설명이다. 정치가 그 역할을 하고, 언론은 그 공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두 부문 모두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질타인 셈이다.

    냉철한 비평가가 보는 한국 경제의 현재 모습과 제안하고 싶은 미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지금 우리 경제의 치명적 약점은 ‘신뢰의 상실’이라고 단언한다. 불신의 위기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감지되고 있기에 더 위험하다. 그래서인지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를 활용하자고 역설한다. ‘경제 총사령탑’으로 장 교수가 제격이라고 강조한다.

    “장하준 교수는 금융계를 포함한 국제사회에서 통하는 분이지요. 국제사회의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를 한다면 오히려 쉽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합리적인 경제 마인드를 갖고 있기에 미국 금융계의 지지도 확보하는 등 확실한 ‘자산’을 갖고 있잖아요.”

    bali@segye.com



    ■우석훈 교수는…

    1968년 서울 출생. 성공회대 외래교수.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생태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엔 기후변화협약의 정책분과 의장과 기술이전분과 이사를 마지막으로 국제협상과 공직에서 은퇴했다. 원초적인 관심이 ‘생태’로 향할 만큼 ‘열렬한 녹색당원’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인문학적 여유와 상상력, 사회과학적인 통찰력이 결합하는 게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저서

    ‘아픈 아이들의 세대’, ‘음식국부론’, ‘88만원 세대’, ‘촌놈들의 제국주의’, ‘조직의 재발견’, ‘직선들의 대한민국’, ‘괴물의 탄생’ 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한 길로 뚜벅뚜벅…작은 언론들의 큰 걸음
가장 영향력 있는 분야별 매체 / <전자신문> <공간> <법률신문> <농민신문> 등 전통·전문성 강한 미디어들 ‘두각’
 

[1000호] 2008년 12월 17일 (수) 감명국 kham@sisapress.com
 


   
▲ 건축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로 선정된 <공간>의 박성태 편집장(앞줄 맨 오른쪽)을 비롯한 편집국 직원들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시사저널>이 매년 창간 기념 기획으로 실시하고 있는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전문가 설문조사는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에 대한 조사를 병행해서 실시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의 영향력과 함께 각 매체의 준엄한 평가가 된다는 점에서 해마다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이번에 본지가 지령 1,000호를 맞아 실시한 ‘가장 영향력 있는 차세대 인물’ 조사에서도 역시 30개의 각 전문 분야별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 조사를 병행해 실시했다. 이번 조사는 종합 일간지나 방송사 등을 제외한 각 분야의 전문 매체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그 성격상 정치·기업·금융 등 3개 분야는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각 분야별 전문가 50명 등 총 1천5백명을 대상으로 “해당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언론 매체를 최대 3개까지 답해달라”라고 요청했다. 전문 분야라는 특성을 감안해서 학회지나 학술지 협회지 웹사이트 등도 언론 매체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정보통신(IT) 분야에서는 ‘전자신문’이 72.0%의 압도적인 지목률을 나타냈다. 전자신문은 1982년 <전자시보>라는 제호의 주간지로 처음 창간되었다. 1989년 지금의 전자신문으로 제호가 변경되었고, 1991년부터 일간지로 전환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밖에도 IT 분야에서는 <디지털타임스>(40.0%), <아이뉴스24>(10.0%) 등이 후순위를 잇고 있다. 전자신문은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2위(20.0%)에 올랐다. 이 분야의 1위는 <과학동아> (24.0%)가 차지했다. 동아일보사에서 1985년 창간한 월간지로 현재 과학 분야에서 가장 폭넓은 인지도를 갖고 있다.

각 종교 분야, <불교신문>·CBS·PBC가 최고 영향력




   

ⓒ시사저널 유장훈


건축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한 월간지 <공간>(38.0%)은 최근 잡지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지난해부터 잡지에서 광고를 모두 빼버리는 혁신적인 조치를 단행한 것. 1966년 창간된 이후 국내 최고 건축 전문지로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해온 만큼 광고주들의 선호도 1위 매체였기에 그 궁금증은 더했다. 박성태 <공간> 편집장은 “잡지에서, 특히 대중지가 아닌 전문지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수익을 판매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분명 모험이다. 하지만 그런 재정적인 어려움보다는 상업성의 배제를 통한 전문성 확보를 더 강화한다는 차원에서 어렵게 내린 결단이었다. 다행히 이번 12월호까지 모두 24차례 광고 없는 잡지를 발행했지만, 큰 어려움 없이 가고 있다”라고 밝혔다. 광고를 전면 배제한 잡지로서 얻는 반사 이익도 뒤따르고 있다.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 해외 대형 서점에 <공간>은 항상 비치되고 있고, 또 하버드 대학 등 유명 대학의 도서관에도 어김없이 이 책이 배달된다고 한다. 박편집장은 “국내 시장 1위에 안주하는 것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 해외 건축 분야에서도 인정받는 잡지가 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건축 분야에서는 이외에도 <건축>(34.0%, 대한건축학회지), <건축사>(12.0%, 대한건축사협회 월간지), <건축문화> <플러스>(이상 10.0%) 등이 두각을 보였다.

법조 분야에서는 59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법률신문>이 84.0%로 압도적인 지목을 받았다. 지난 12월4일자 창간 58주년 기념호에서는 ‘법조인의 세컨라이프’ 설문조사와 ‘변호사 평균 수명’ 조사를 보도하는 등 법조계의 흐름과 법조인들의 경향을 잘 반영하는 심층 기획을 많이 발굴하는 매체로 평가받고 있다. 복지 분야에서는 1971년 창간된 <일간보사>가 1위(10.0%)를 차지했다. 그 뒤를 <데일리메디> <메디칼투데이> ‘한국사회복지학회’ 학술지 등이 이었다. 의료 분야에서는 <의협신문>이 18.0%로 가장 높은 지목률을 보였다. 대한의사협회에서 발행하는 신문으로 4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92년 진보적 성향의 소장파 의사들이 만든 신문인 <청년의사>도 16.0%로 2위를 차지했다. <메디게이트>와 <데일리메디>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시민운동 분야에서는 <시민사회신문>이 1위(10.0%)를 차지했다. <시민의 신문>이 지난해 폐간되면서 그 대안 매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환경 분야에서는 여러 매체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한국환경기술인연합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환경기술인>(18.0%)이 1위를 차지했다. 신문인 환경일보와 환경신문, 월간 잡지인 <환경미디어>와 <첨단환경기술> 등도 5위권 안에 포함되었다. 교육 분야에서는 <한국교육신문>(12.0%)이 1위에 올랐다. 그 뒤를 <한국교원신문>, 월간지 <새교육> <교수신문> 등이 이었다.

농업 분야와 여성 분야에서는 예상대로 가장 전통 있는 매체가 나란히 1위(58.0%)로 선정되었다. 농업 분야의 1위 <농민신문>은 처음에는 농협중앙회의 기관지로 출발했다가 1982년부터 농민신문사로 분리되었다. 현재 격일간지로 발행되고 있다. 기존 매체의 보수적 성향에 반발해서 2000년 창간된 <한국농정신문>은 날카로운 비판 의식으로 26.0%의 지목률을 보이며 2위를 차지했다. 여성 분야에서는 <여성신문>이 그동안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나, 진보적 성향의 웹사이트 ‘일다’와 2001년 창간된 <우먼타임스> 등이 서서히 인지도를 넓혀가고 있다. 관광 분야는 두드러진 전문지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가운데, 외식 전문 잡지인 <호텔&레스토랑>이 1위를, <청사초롱>(한국관광공사 발생 신문)·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사이트·한국관광공사 웹사이트 등이 공동 2위 그룹을 형성했다.

불교 분야에서는 <불교신문>(52.0%)이 BBS(42.0%)를 누르고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 1위를 차지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경우 모두 방송사가 1위에 꼽힌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이다. 1960년 창간된 전통성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현대불교신문>(18.0%), <법보신문>(14.0%), 불교TV(12.0%) 등이 3~5위를 차지했다. 개신교 분야에서는 CBS가 14.0%로 1위를 차지했지만 CTS(기독교TV)도 12.0%로 바짝 추격했다. 천주교 분야에서는 PBC(평화방송TV, 58.0%)와 <카톨릭신문>(56.0%), <평화신문>(52.0%) 등 세 매체가 단연 두드러진 가운데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문학 분야에서는 전통을 자랑하는 여러 매체들이 각축을 벌인 가운데, 계간지 <창작과 비평>이 56.0%의 지목률을 나타내며 1위를 차지했다. 염종선 편집장은 “우리 잡지는 문예 전문지라기보다는 전문지와 대중지의 혼합 성격인 종합지에 가깝다. 창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문학, 인문·사회과학 외에도 사회적인 현안과 담론들에 대해서 꾸준히 목소리를 낸 것이 독자들에게 강하게 어필된 것 같다”라고 밝혔다. 진보적 성향의 대표적 문예지로 꼽히는 <창작과 비평>은 1966년 창간했다가,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 때 폐간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 복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통 문예지인 <문학동네>(32.0%)를 비롯해 <문학사상사> <현대문학> <문학과 사회> <현대시학> <문학과 지성> <실천문학>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계간지 성격인 문학 전문지는 최근 급변하는 미디어 시장의 환경 변화에 대한 고민이 많다. <창작과 비평>도 예외는 아니다. 염편집장은 “1년에 네 번 발행되는 계간지의 성격상 독자들과 호흡을 맞추기가 어렵다. 그런 고민의 일환으로 2년 전 창간 40주년 되는 시점을 맞아서 ‘창비주간논평’을 온라인 매체로 새롭게 개설했다”라고 밝혔다.

문학 <창비>·음악 <피아노음악>·게임 <경향게임스> ‘선두’

음악 분야에서는 월간 <피아노음악>(22.0%)이 월간 <객석>(20.0%)을 간발의 차로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음악춘추> <음악저널>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객석>은 종합 예술잡지의 성격 때문에 특정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음악과 연극 분야에서 2위에, 또 무용 분야에서 4위에 각각 이름을 올렸다. 미술 분야에서는 <월간미술>이 68.0%로 1위를 차지했고 <미술세계> <아트인컬쳐> 등이 뒤를 이었다. 무용 분야에서는 월간 <춤과 사람들>(60.0%)이 1위를 차지했다. 고석린 편집장은 “과거 친분과 이해관계로 작품성과 상관없이 호의적인 기사를 그냥 써주고 하던 관행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고 출발했다. 그런 점이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은 것 같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월간지인 <댄스포럼>과 <춤>이 2~3위를 차지했다. 패션 분야에서는 대중 성향의 잡지가 상위권을 점했다. <보그>가 64.0%로 1위를 차지한 가운데, <엘르>(30.0%), <BAZAAR> (14.0%)가 그 뒤를 이었다.

영화·연극·연예 등의 대중문화 분야에서는 <씨네21>의 파워가 두드러졌다. 영화 전문 주간지로 1995년 출발한 <씨네21>은 영화 분야에서는 76.0%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고, 연예 분야에서도 22.0%로 역시 1위를, 연극 분야에서는 3위를 각각 차지했다. 영화 분야에서는 <무비위크>와 <필름2.0>이 2, 3위를 차지했고, 연예 분야에서는 스포츠조선과 일간스포츠가 공동 2위를 형성했다. 연극 분야 1위는 <월간 한국연극> (58.0%)이 차지했다.

출판 분야에서는 <기획회의>(46.0%)가 1위에 올랐다. <기획회의>는 1999년 창간된 격주간지이다. 출판계 소식뿐만 아니라 기획자들의 실무 이야기 등을 다루며 반향을 키워가고 있다. 2위는 <출판저널>(26.0%)이 차지했다. 만화 분야에서는 웹사이트가 강세를 나타냈다. ‘팝툰’(16.0%)이 1위를 차지한 가운데, <점프> <만화규장각> 등이 공동 2위를 차지했다.

스포츠 분야에서는 3대 스포츠 일간지의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일간스포츠가 간발의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그 뒤를 스포츠조선, 스포츠서울과 함께 인터넷방송인 ‘Stn’이 공동 2위로 함께 이름을 올렸다. 게임 분야에서는 타블로이드 주간 신문인 <경향게임스>(18.0%)가 1위를 차지했다. 최근 몇 년간 게임업계의 호황과 관심 속에 많은 게임 전문지들이 난립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창간 7년차의 후발 주자인 <경향게임스>가 1위를 차지한 배경에 대해 김동욱 편집장은 “그동안 게임 산업에 대해 쓴소리를 한 매체가 없었는데, 우리는 다소 네거티브한 성향으로 비칠 만큼 업계 전반에 대한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해왔다. 오히려 그런 비판 의식이 독자들에게 신뢰를 준 것 같다”라고 밝혔다.


건축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로 선정된 <공간>의 박성태 편집장(앞줄 맨 오른쪽)을 비롯한 편집국 직원들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람의 바닥은 절경의 시가 된다
 
[Zoom-in] 문인수 시인
 

계간 (시인세계)
 
 
(기사제공 : 좋은 시와 시인을 섬기는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
 
(김광일=조선일보 문화부장)  문인수 시인을 만나기로 한 날은 9월 마지막 날이었다. 날씨는 화창한 것도, 꾸무룩한 것도 아니었다. 짜든지 맵든지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에 어중간한 날씨는 영 잼뱅이 같았다. 그날 약속 장소로 떠나면서 머리 속에 맴돈 생각은, 왜, 언제부턴가 문 시인이 나에겐 일종의 관문 같은 존재였는가, 하는 점이었다. 10년 저쪽 옛날에도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사이에 그를 만나야 하는 문제는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돼 있었다.
 
사진만 보면 김현승을 닮기도 하고 김수영을 닮기도 한 것 같은 그였다. 시에 대해, 문학에 대해, 아니 인간과 인생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은체를 하려면 그를 거쳐가야만 할 것 같았다. 왜 그런지 이유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를 만나거나 그를 공들여 읽지 않았다면 문학이나 인생의 어떤 미묘한 국면에서 입을 다물어야 할 것 같은 느낌!

최근 그의 시집들을 손에 쥘 때마다, 그러니까 '쉬' 나 '배꼽'을 펴들었을 때마다 탄성에 젖은 외마디 독후감을 내지르곤 했었던 기억만 있지 그와 정색을 하고 마주 앉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심 그와의 대면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 김요일 시인이 전화를 걸어 이번 겨울호에는 문인수 시인을 줌인 인터뷰에 초청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을 때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절묘함에 가볍게 몸을 떨기까지 했던 것이다.
 
서울 KTX 역사 안에 있는 한 중국 식당에서 그를 기다렸다. 하늘은 계속 희끄무레했다. 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큰길에는 날렵한 속도의 차량들이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유리창이 얼마나 깨끗한지 안과 밖이 그대로 통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서울역 광장을 이렇게 한가롭게 내려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실내는 격조 있었고, 분위기는 한산했다.
 
오후 3시였다. 조금 있으니 김요일 시인과 박후기 시인이 함께 왔다. 박 시인은 이제 고정 멤버로 사진 촬영을 담당해주고 있었다. 우리끼리 반가워하고 있을 거의 같은 시각에 문인수 시인이 도착해서 손을 내밀었다. 큰 키에 약간 헐렁한 느낌의 이 신사는 상대편을 기분 좋게 무장 해제시키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악수를 하고, 명함을 건네고, 자리를 잡았다. 동대구역에서 서울역까지 1시간 50분이 걸렸다고 했다. 손바닥이 버석하고 건강하게 말라 있었다. 한쪽에서 술과 안주를 주문하고, 한쪽에서는 이곳에서 담배 피워도 되냐고 묻고, 노트를 펼치고, 다리를 포개고, 테이블을 끌어당기고, 하는 부산함이 꺼지기를 기다렸다가 첫 질문을 던졌다.
 



문인수 시인이 도착해서 손을 내밀었다. 큰 키에 약간 헐렁한 느낌의 이 신사는 상대편을 기분 좋게 무장 해제시키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최근 그의 시집들을 손에 쥘 때마다. 그러니까 '쉬!'나 '배꼽;을 펴들었을 때마다 탄성에 젖은 외마디 독후감을 내지르곤 했었던 기억만 있지 그와 정색을 하고 마주 앉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심 그와의 대면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좌 문인수 시인, 우 김광일 필자, 사진 : 박후기 시인) ⓒ계간 시인세계

‘쉬’ 는 문상 갔다 돌아와서 쓴 시

▶ 지난 주 선운사에 다녀오셨더군요. 정현종, 김화영, 서정춘, 나희덕, 장석남, 송희 같은 분들과 함께였던데요. 선운사에서 무엇을 보고 오셨습니까.
“없는 동백을 보고 왔다고나 할까요. 시 쓰는 사람이라면 어느 계절에 가나 ‘미당조調 동백’에 끌려서 갔다고 할 것입니다. 동백을 느끼고 왔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동백은 뛰어오르듯 한 번 피고, 질 때도 전혀 시들지 않은 채, 땅에 떨어지는 그 반동으로 다시 한 번 핍니다. 동백은 사라지고 나서도 그 붉게 부릅뜬 이미지로 살아 있습니다.”

▶ 동백꽃이 그렇게 강렬합니까.
“다른 꽃들은 시들어 떨어진 상태로 망해 있는데, 동백꽃은 땅에 떨어진 다음은 물론 기억 속에서조차 그렇듯 붉게 피어 있는 것입니다.” 

▶ 선운사에서 술 좀 하셨겠습니다.
“한 잔도 안 했습니다. 사찰 체험이었죠. 저녁예불에서 이튿날 새벽예불까지……”

▶ 요즘 하루 일과가 어떻습니까. 아침엔 일찍 일어나십니까? 우선 어제부터…… 지난 며칠 동안 벌어진 일들을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늦게 자는 편입니다. 어떨 땐 새벽 4시, 5시에 자기도 하고요. 보통은 밤 12시, 1시 사이에 잡니다. 취침 시간은 불규칙하지만 수면시간은 5~6시간으로 일정한 편입니다. 바깥 스케줄이 없으면 대개 집에서 빈둥거립니다. 어제는 낮 동안 집에 있다가 오후에 대구에 있는 영화모임에 갔습니다. 《매일신문》 문화부에 있는 김중기 차장의 아이템인데, 시인·화가가 함께 모여 어떤 영화 한 편을 본 다음, 시인은 이미지 잡아서 시를 쓰고요, 화가는 또 그렇게 그림을 그립니다. 김 차장은 물론 종합적인 기사를 쓰지요. 시인 5명에 화가가 5명으로 열두어 명이 모이는 중입니다. 매월 마지막 월요일 밤으로 한 달에 한 번 영화를 봅니다. 나는 어제 그 영화모임에 갔다가 영화는 못 보고, 대구의 도광의 시인이 부친상을 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곧바로 영남의료원 영안실에 차려진 빈소엘 다녀왔습니다. 집에 오니 9시 반이더군요. 이메일 확인하고 잤습니다.” 



2005년 원주 '토지문학공원'에서, 왼쪽에서부터 고진하, 문인수, 고재종 시인 ⓒ계간 시인세계


 ▶ 상가에 가셔서 술도 한 잔 안 했습니까?
“술 한 방울도 안 마신 지 3년 됐습니다. 최근에 와서 조금씩 합니다. 한 반 병 정도.”

▶ 왜요?
“수전증 때문이에요. 수면장애 같은 것도 있었고요. 내 몸이 어떻게 되면 나 혼자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술을 끊었지요.”

▶ 증상이 심했습니까?
“뒷골 당기는 것이 꼭 블라인드 커튼 줄 잡아당기는 것 같은 찌릿찌릿한 느낌이었습니다. 내 혈관을 죽죽 잡아당겨 내리는 것 같았으니까요.”

▶ 술 끊으니 괜찮아졌습니까?
“예. 술 안 먹으니 그런 증상이 없어졌습니다. 내가 담배는 지독하게 중독돼 있으나 다행히 알코올 중독은 안 돼 있다는 걸 이번에 알았습니다. 혼자서 술맛 당기는 일 같은 것은 없으니까요. 대신 나는 대단히 자극적인 식성을 갖고 있습니다. 담배도 타르 함량이 6.5 정도 되는 에쎄 빨간 것, ‘클래식’을 피웁니다. 다른 것은 한 0.5 정도 되지요. 하루 한 갑이나 한 갑 반 피웁니다. 술은 먹고 싶다는 충동 없습니다.”

▶ 애연가들은 여행할 때 고생하시더군요.
“예. 여기 올 때 동대구에서 서울역까지 KTX 타고 1시간 50분 동안 가장 힘든 것이 바로 흡연 욕구였습니다. 해외 여행할 때도 제일 큰 문제가 담배입니다. 해외에 대한 호기심이 없어 바깥 여행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습니다만, 지난 2003년 인도를 다녀온 이후 세계의 여러 오지에 대한 관심은 많아졌습니다. 티베트, 네팔, 몽골 같은 곳에 가보고 싶은데, 인도 갈 때 비행기 속에서 담배 때문에 혼났던 기억이 자꾸 켕깁니다.”

▶ 영화모임 가고 상가에 다녀온 것이 월요일인데, 그 전날인 일요일엔 뭐 하셨습니까.
“영월 쪽으로 탐석探石 나갔습니다. 수석 찾기죠. 그러나 돌은 안 찾고, 돌밭에 길게 누워 졸거나 쉬고 왔습니다.”

▶ 아, 그렇죠. 문인수 시인하면 또 수석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지요.
“아닙니다. 탐석 안 나간 지 벌써 10년도 넘습니다.”

▶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시간도 잘 나지 않고, 이래저래 하루를 다 잡아먹어 시간도 아깝고…… 무엇보다 돌 찾는 일이 전에만큼 재미도 없고요.”

▶ 이번엔 누구와 함께 가셨습니까?       
“충주호 상류천으로 딱 한 차 갔습니다. 시인 4명이 갔지요. 시인 박진형, 시조시인 박기섭, 시조시인 이종문하고 갔습니다.”

▶ 동년배들이십니까?
“아뇨. 저는 45년생, 그네들은 54, 55년생들입니다.”

▶ 돌밭에 누워 있으면 좋습니까?
“지압 효과가 있습니다. 몸이 알아서 돌 하나 하나를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 토요일엔 뭐하셨습니까?
“경주의 ‘동리·목월문학기념관’에 가서 강연을 했습니다. ‘나는 시를 이렇게 쓴다.’ 같은 얘기를 했지요. 강연 제목은 <길 위에서 시쓰기>였습니다. 여행과 일상과의 관계, 여행에서 시를 유발시키는 요인 같은 것을 얘기했습니다. 청중은 주로 일반인들, 주부들이었습니다.”
문인수 시인은 하루하루 톺아보며 용케도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을 잘 해냈다. 스스로도 대견하다는 듯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요즘 사람들은 워낙 바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일과를 소화하면서 살기 때문에 지난 일주일은 고사하고 바로 어제 한 일도 깜박깜박할 때가 많다.

▶ 기억력이 좋으십니다.
“아닙니다. 나도 달력에 일정을 메모해 놓고 삽니다. 밖에서 무슨 볼일을 보고 있을 때 누가 전화 걸어와 언제 좀 보자고 하면 집에 가서 선약이 있는지 달력 보고 난 뒤 확답하겠다고 말하곤 합니다.”

▶ 일정 중에 하루 종일 시만 썼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더러 그럴 때도 있지요. 시는 빈둥거릴 때 많이 쓰게 됩니다. 바빠지면 못 씁니다.”

▶ 경북 성주군 초전면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돼 있는데요,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셨습니까?
“초전면 대장리(한자로는 大馬里)에서 났습니다. 아버지는 85세에 돌아가셨는데 상당히 오래됐습니다. 살아 계시면 올해 103세십니다. 어머니는 98세신데 살아 계십니다. 내년 생신 때는 백수상을 받으실 수도 있었는데…… 재작년에 그만 맏딸인 큰누나가 먼저 세상을 버렸습니다. 자식을 앞세운 어른은 백수잔치를 받을 자격을 잃는다고 합니다. 수명을 두고 장담할 일은 아닙니다만, 현재로선 어머니가 백수를 누리시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직 머리도 새하얗지 않고 희끄무레하고, 정신도 아주 좋으셔서 삐칠 것 다 삐치고, 알아차릴 것은 다 알아차립니다. 지금은 서울의 둘째형네 아파트에 사시는데 하루에 한 번 동네 뒷산을 산책합니다. 그런데 60대 도우미 아줌마가 못 따라갈 정도로 걸음이 빠르시다고 합니다. 아직 자세가 일자로 꼿꼿하십니다.”



문인수 시인이 다섯 살 무렵, 1950년 6.25전쟁 전후로 짐작되는 어느 날 고향집 앞 마당에서 큰누님(앉은 이, 당시 20세), 작은누님(당시 17세)과 함께 ⓒ계간 시인세계
▶ 어머님 함자가 어떻게 되십니까?
“풍양 조씨에 침묵할 때 묵, 붉을 단, 조묵단입니다. ‘붉은 침묵’이지요. 엄마 이름에서 노을이 한 판 시뻘겋게 걸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전형적인 농부였습니다. 농토가 가치의 전부였던 어른이셨지요. 아버지의 꿈은 한 곳에 상답 서른 마지기를 갖는 것이었는데, 40대 초반에 그 꿈을 이루셨더랬습니다. 태어나 보니 나는 이미 부농의 아들이었습니다(웃음). 말하자면 그 인간 모독적인 극빈, 보릿고개는 겪지 않았던 겁니다.”

▶ 문 선생님의 시 「쉬」를 정말 감동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시에는 친구 상가喪家를 다녀와서 쓴 시로 돼 있었는데, 혹시 본인의 아버지가 아니셨습니까?
“아닙니다. 그 시는 시인 정진규 선생의 상가를 다녀와 쓴 시입니다. 서울 아산병원으로 기억합니다. 정선생의 부친상이었고요. ‘부친을 안고 오줌을 뉘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듣던 도중에 ‘몸 갚아드리는 장면’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그 이미지를 ‘발설’하지 않고 꿀꺽 삼켰지요. 그날, 유족들은 부의금도 조화도 받지 않았는데, 나는 오히려 그 시 덕분에 차비(대구~서울)의 수십 배를 벌었습니다(웃음). 밤중에 대구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 시를 써내려갔지요. 나중에 내가 쓴 「쉬」와 관련해서 정진규 선생도 쓴 시가 있습니다. 김신용 시인이 고인의 수의를 지어드린 일과 내가 쓴 조시 아닌 조시를 한데 엮어  쓴 시이지요.” 

▶ 형제들은 많았습니까?
“오남매입니다. 위로 누님 둘, 형 둘, 그리고 제가 막냅니다. 둘째누님과 작은형이 서울 살고, 큰형은 포항에 삽니다. 고향에 있는 본가는 큰형이 관리하고 있고요. 두 누님은 전업주부로 살았습니다. 큰형은 식당업을 하다가 지금은 은퇴해서 노후를 보내고 있고, 작은형은 운수회사에 종사합니다. 서울의 관악교통 사장이고요, 현재 전국버스조합 노사정 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자기 분야에서는 크게 성공한 것이지요.”

▶ 문 시인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어디서 다니셨습니까?
“경북 성주의 초전초등학교, 성주중학교, 대구의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의 동국대 국문과 1학년을 마치는 것으로 ‘학업’은 영 끝났었지요. 그러니까 1966년에 육군에 자원입대했다가 1969년 제대하면서 복학을 하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쓴 시 ‘흰 구름’을 담임선생님이 격찬

▶ 소년 문인수는 어떤 꿈을 가진 아이였습니까?
“시인이 되는 게 꿈이었어요.”

▶ 아니, 정말로요?
“물론 1950~1960년대 농촌 어린이로서 구체적인 꿈은 못 꾸었지만, 글 쓰는 일이야말로 가장 자랑스러웠고, 재미가 있었지요. 글쓰기만이 내가 남보다 잘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결코 품행이 방정한 아이는 아니었고, 그래서 마을 어른들이나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꾸중을 많이 듣는 편이었습니다.”

▶ 말썽꾸러기였군요?
“당시 군소재지 읍동네는 어느 정도 도시화가 돼 있었는데, 내가 살던 면소재지 동네는 도시와 농촌의 경계였습니다. 초등학생 아이들에게는 면소재지에 산다는 것 자체가 내 건너 산골짜기에 사는 아이들에겐 일종의 텃세나 권력 같은 것이었어요. 내가 애들한테 공물 같은 것을 받기도 했으니까요. 이를테면 여름방학 숙제인 곤충채집용 집게벌레나 왕잠자리, 풍뎅이 같은 걸 잡아오라고 해서 받고…… 도토리나 밤, 산딸기 같은 걸 따오게 한다든지, 그랬어요. 또 내가 살던 면소재지 마을에는 나의 사촌까지, 방계 친인척이 많이 살았어요. 동갑내기에, 한두 살 터울 패거리가 한 스무 명은 됐으니까. 패거리가 모여 다니면 적수가 없었지요. 악동 노릇을 했습니다. 덩치는 작고 힘도 세지 않으면서 힘이 제일 센 것으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 결정적으로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습니까?
“웬걸요. 혼찌검도 많이 났지요. 특히, 그것이 상처인 줄도 모르고 상처로 껴안고 산 ‘꾸중’도 있습니다. 한번은 담임한테 잡혀갔는데, 이 선생님이 자기 앞에 한참을 세워 두더니, 일갈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가 봐 임마, 너는 커서 아무것도 안 되겠다’ 하고 손사래를 치는 거예요. 당시에 나는, 안 맞았다, 땡잡았다, 하고 좋아라 했는데, 자라면서, 또 다 큰 다음에도 살아가는 길목길목 뭔 일이 안 될 때마다 그때 그 선생님의 말이 주문처럼 떠오르는 겁니다.”

▶ 아니 그런 아이가 어떻게 글 쓰는 게 자랑스러운 일이 됐나요?   
“어른들로부터 칭찬 들을 일이 아무것도 없던 내가 드디어 큰 칭찬 들은 ‘사건’이 생긴 겁니다. 교육열, 이건 요즘 이야기입니다. 당시 농촌 아이들은 10명 중 8,9명이 가난했습니다. 농번기가 되면 꼴베기, 새 보기, 지심메기, 이삭줍기를 하느라 학교도 못 나오던 아이들이 수두룩했던 시절이었지요. 그때, 그런 농촌 현실 속에 웬 ‘특별활동’ 같은 것이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당시 선생님들은 전체 아이들의 개성이나 소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단지 국어책 하나는 잘 읽는다는 이유로 문예반으로 편성되었고요. 그 매주 한 번 각자 해당 교실로 흩어지는 특별활동, 문예반 첫 시간에 담당 선생님이 숙제를 하나 내주었습니다. 동시, 산문, 표어 등등 중에서 뭐든 한 편 써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내가 숙제로 써 간 게 석 줄짜리 동시였습니다. ‘김삿갓’을 소재로 한 내용이었어요. 그 무렵 나는 삼촌이 준 김삿갓 관련 전기 같은 것을 읽고 있었을 겁니다. 거기서 훔쳐낸 생각이었겠지요. 제목은 '흰 구름'이었고요, 지극히 단순하고 짧기도 하지만 딴엔 두고두고 간직하느라 지금도 전문을 외우고 있지요. ‘둥 둥 둥 흰 구름 어디로 가나/ 김삿갓 할아버지의 옷자락인가/ 둥 둥 둥 흰 구름 어디로 가나’ 당시 문예반 선생님의 키가 1미터 80센티는 족히 됐을 겁니다. 장대 같던 그분은 나름대로 아주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애초 초등학교 급사로 출발, 독학으로 초,중등학교 선생님으로 평생을 보냈지요. 말년엔 대구 시내 모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정년까지 하신 다음, 십여 년 전 고인이 되었습니다. 그분 또한 문아무개라는 아이의 이런 저런 품행을 모를 리가 없었겠지만 그런 ‘전과’ 따위 개의치 않고 내가 써 간 숙제, 「흰 구름」을 칭찬해주었습니다. 그분한테 받은 그 칭찬의 황홀함이란 내가 평생 받은 황홀함 중 아직도 단연 일등입니다. 그야말로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격정적인, 융단폭격과도 같은 칭찬이었지요. 그 ‘사건’이 바로 오늘날 이 ‘잘못된 길의 시작’이 되었습니다(웃음).”

▶ 농담이시죠? 그걸 어떻게 잘못된 길이라 하겠습니까.
“시인, 이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여러 사람 고생시켰노라고 제 어느 시집 자서에 쓴 적 있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달리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나 싶어요. 괜히 ‘역설’로 해본 소립니다. 최선의 길이었겠지요. 지금 생각해도 이걸 해보고 싶다는, 차선의 다른 길이 자신있게 떠오르지 않네요. 그러나 당시, 문학도라면 당연히 가졌어야 할 등단에의 꿈을 일찌감치 완전히 접어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거기다 글쓰기의 열정에도 군 입대를 전후해 스스로 찬물을 끼얹었다고나 할까요. ‘자해’ 같은 것이지요.” 



문인수 시인이 경기도 포천에서 군 생활을 할 당시. ⓒ계간 시인세계
▶ 아니, 왜 그렇게 되셨습니까?
“60년대, 그때는 등단 관문이라고는 《현대문학》 추천과 각 일간지의 신춘문예밖에 없었거든요. 등단, 그거 나는 도무지 자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동인활동이나 시화전, 문학의 밤 같은 문학소년, 청년시절의 그것은 그야말로 통과의례였고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20대 초반,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와 글쓰기 사이에서 고향으로, 대구로, 서울로 떠돌다 보니 거기가 어디든 문학적 객지더군요. 문학판 저변의 외톨이가 아니라 내 쪽에서 먼저 그 모든 문학환경, 문학인구들을 잊게 됩디다. 그런 판국에 등단은 아예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독학이든 수업이든 본격적이고도 체계적인 문학공부에 임했겠나요. 끝난 것이지요. 그렇게 글쓰기에 대한 욕망도 자신감도 군대에 가면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 군 생활은 어디에서 하셨습니까?
“경기도 포천에 있는 5사단 27연대였지요. 조물주가 나에게 10년 더 살고 싶은 시절을 꼽으라고 한다면 1순위가 소년기이고, 그것 말고는 군대 시절입니다.”

▶ 예? 군대 시절이요? 진정이십니까.
“군대에 있을 때가 몸이 가장 고달프긴 했어도 마음은 가장 편했던 기간이었지요. 그 군이라는 집단과 제복이 나를 잘 감추어 주었기 때문일 겁니다. 집단과 제복 속으로 나라는 개인이 숨어버릴 수 있었던 거지요. 군대 생활을 할 때는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군대라는 거대한 기계 속의 작은 부품들처럼 공으로 작동, 동작만 하면 되었지요. 전우라는 친구들을 기억해보세요, 뻥이 심했지요. 그렇게 죄 없는 하루가 갔지요. 집단이 개인의 일과를 모두 해결해주니까 실패도 절망도 없는 것처럼 살 수 있었던 시기였다는 겁니다.” 
 
 
서문시장에서 천 장사 등 다양한 경험
 
▶ 문 시인께서는 1985년 《심상》 신인상에 「능수버들」 외 4편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셨습니다. 나이 마흔에 시단에 얼굴을 내미신 셈인데 등단이 왜 늦으셨습니까.
“나는 1966년 4월 21일 입대해서 군번 11593579를 달고 35개월 15일 동안 군대생활을 하다가 1969년 4월 5일 만기제대를 했습니다(문 시인의 기억력에 인터뷰 참석자들이 모두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내가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미리 복학 등록을 해주시면 제대 날짜가 4월초이더라도 봄학기를 다닐 수 있다고 말입니다. 내가 역사 한 과목을 빼고는 모든 학점을 따 놨기 때문에 만약 그때 등록만 됐다면 다시 열심히 글도 써서 혹 재학 중에 데뷔를 했을지도 모르겠고, 졸업 후엔 또 문학인들이 흔히 갖는 직업에 종사하게 됐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등록이 안 됐습니다. 아버지는 막내 등록금 3만 원을 챙겨서 형들 손에 쥐어 올려 보냈는데, 그게 등록이 안 됐습니다. 그 돈이 공중분해됐어요. 앞에서 말씀 드렸다시피 나는 66년 입대를 전후하여 등단에 대한 꿈을 접었던 것입니다. 등단을 위해 한 번도 도전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잠시 서울의 동국대학에 학적을 두고 있을 때, 다른 친구들은 조연현, 서정주 같은 선생님을 찾아가서 말씀도 듣고 공부도 하고 했는데…… 나는 학보 지면에서 동국문학상 관련 미당 선생의 평을 받고도 단 한 번도 그러질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군 입대 후에도 하긴 그저 혼자 소모적이고도 지향 없는 글쓰기는 했습니다. ‘골방문학’ 그것은 제대 후에도, 20대와 30대를 다 보내면서도 문득 문득 계속했으나 말씀드렸다시피 본격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진지하게 문학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그때 그렇게 ‘학업’이 중단된 이후 문학은 그저 나의 한 장면 추억이요, 현재적 심심풀이일 뿐 이 길 저 길 헤맬지언정 나의 길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불혹의 나이에 불쑥, 참 느닷없이 ‘등단’을 하게 된 것이지요.

▶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여러 가지 일들을 거친 후 큰형의 사업체(자전거 대리점)에서 일을 거들다가 결혼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전정숙, 1949년생)와 중매로 맺어져 1975년 3월 23일 대구 고려예식장에서 식을 올렸습니다. 그 후로도 여러 직종과 직장을 전전했죠. 관공서의 비정규직(임시직), 폴리에틸렌 파이프 대리점, 대구의 서문시장에서의 자투리 천 장사를 하기도 했고, 친구와 오퍼상 동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버틴 기간이 길게는 1년, 짧게는 22일. 이래저래 ‘백수의 기간’이 훨씬 많았지요. 그러다 대구의 영남일보 교열부 계약직으로 들어갔습니다. 교열직으로 들어갔지만 기사도 더러 쓰곤 했어요. 한 8년 근속했습니다. 남이 보기에 문아무개로선 참 대단한 기간을 보낸 것이지요. 이때가 가정적으로 가장 안정된 기간이었고요, 아내도 기를 펴고 산 유일한 결혼 생활이었습니다. 1990년 9월에 입사했다가 1998년 5월 ‘IMF’ 구조조정 때 자진해서 나왔습니다. 각 부서별로 할당된 조정 인원수가 있었는데, 젊은 사람과 눈치 보기 싫어서 그냥 손 번쩍 들고 내 이름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자진하지 않았어도 조정 1순위였겠지요. 그때 내 나이 이미 50대 중반, 나의 ‘돌아온 백수 신분’이 별 탈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요.” 

▶ 어느 단계에 이르자 월평에 시인 문인수에 대한 얘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이전까지 비평가들이 문 시인의 작품을 이해 못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시를 만드는 뭔가가 있어서 한 꺼풀 깨치게 된 것입니까.
“1985년에 늦깎이로 데뷔한 내가 문학적으로 좀 풀린다고 느낀 것이 1992년 민음사에서 세 번째 시집 『뿔』을 내면서입니다. 글쓰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나 할까요. 80년대 후반에 썼던 작품들을 이 시집에 담았던 것입니다. 내 시에 내 목소리가 따로 있다면 이 시집이 바로 그 첫 물머리가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로써 지명도라는 것도 좀 쌓이기 시작했고요. 물론 『뿔』은 현실적으로 민음사라는 출판사의 권위가 작용한, 그런 덕을 본 부분도 있을 겁니다.”

▶ 지금까지 낸 시집으로 『늪이 늪에 젖듯이』(심상, 1986)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문학아카데미, 1990/문학의 전당, 2005) 『뿔』(민음사, 1992) 『홰치는 산』(만인사, 1999/천년의 시작, 2004) 『동강의 높은 새』(세계사, 2000) 『쉬!』(문학동네, 2006) 『배꼽』(창비, 2008) 등이 있는데요, 이 시집들을 개인사적으로, 혹은 개인의 문학사적으로 시대 구분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떤 고비들을 넘어오신 것 같습니까.
“내 개인사를 섞어 얘기하기보다는 나의 문학적 태도와 그 내용만을 결부시켜 말해보겠습니다. 시집 『뿔』까지는 내 내면의 문제에 매달렸습니다. 즉, 대상이 ‘나’이고 내가 ‘대상’인 세계를 나타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한 나 자신의 문제를 유지한 채 매 시집마다 별도의 일관된 주제를 담겠다는 욕심도 내보았습니다. 즉, 네 번째 시집 『홰치는 산』은 ‘고향’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내 몸의 근원인 땅이자 아버지와 어머니인 농촌 인구의 삶을 그려 담아보았지요. 그리고 다섯째 시집 『동강의 높은 새』는 정선이라는 특정한 장소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 문 시인께서는 특히 정선과 관련된 시를 많이 발표하고 계신데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습니까?
“1990년에 강원도 정선을 처음 가보았는데, 그만 푹 빠져버렸습니다. 그게 정선과의 인연의 전부입니다. 정선은 우리네 아리랑의 발상지라고 합니다. 정선 아리랑에서 진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 등 여러 아리랑으로 번져나갔다는 것이지요. 처음 정선을 다녀왔을 때 며칠 동안이나 나를 감싸고 돌던 그 애터지게 느린 아리랑, 아라리의 가락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정선 아라리는 한의 노래입니다. 한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홧병이라는 말처럼 다른 나라 말로는 번역이 안 된다고 합니다. 한이란 절망도 원망도 저주도 비명도 슬픔도 한탄도 자조도 아니고, 또 그 모든 것이기도 합니다. 애매하고 답답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연민일 뿐 악의 요소는 조금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그러한 정선의 한이 정선으로 나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곳의 컴컴한 산악이 나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나를 껴안아 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말해 ‘마침내 돌아왔다, 당도했다’는 심경이었습니다. 때로는 친구들이랑, 때로는 나 혼자서 참 여러 차례 정선을 드나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써온 정선 관련 시가 52~3편은 되지 않나 싶습니다. 저로선 특정지역만을 다룬 작품으로는 가장 많은 편수를 쓴 것입니다. 물론, 작품의 성과에 대한 문제는 남의 몫입니다.
 
사람의 이야기와 관련 없는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
 
▶ 어느 글을 보니까 문인수 시인께서는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방치돼 있는 것들, 사소한 것들, 겸손한 것들, 그리고 어쩌면 인간적인 것들에 더 눈길이 간다는 뜻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동안 써오신 시들도 독자들의 공감대가 유난히 컸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잘 나온 질문입니다. 거기에는 이유라기보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지난 2002년, 나는 난생 처음 해외여행으로 와이프랑 같이 중국엘 갔습니다. 1982년에 고등학교 동기생들끼리 ‘뫼얼산우회’라는 부부동반 산행회를 만들었는데, 창립 20주년을 기념해서 해외로 나간 겁니다. 그때 가본 데가 장가계, 원가계입니다. 우리나라 금강산에 해당될까요, 산이 전봇대나 나무젓가락을 세워 놓은 것 같더군요. 산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 삼각형의 그림을 깡그리 무너뜨리는 곳으로 그 기괴함에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200~300미터쯤 깎아지른 직사각형의 바위벼랑이 수백만 평에 걸쳐 숲처럼 펼쳐 있었습니다. 중국 무협지나 신선도에 묘사된 산이 중국인 특유의 과장이거나 상상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실경인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또 한 번은 2003년에 대구 문인들과 인도 여행을 했는데, 그때 크고 검고 깊은 인도 여자들의 눈을 봤습니다. 나는 누가 인도에 가서 뭘 봤느냐고 묻는다면 ‘인도의 눈’을 봤다고 할 작정입니다. 극빈의 바닥 속에서도 그들의 눈빛은 한없이 고요하고 편안한 눈빛이었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나는 중국의 절경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 할 말이 없는데, 인도 사람들의 삶의 바닥에 대해서는 지금도 할 말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사람이나 사람의 얘기가 아니고서야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기어오를 수 없는 절경은 사람이 붙어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지요. 그래서 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도의 극빈은 아직도 할 말이 많습니다. 순도 높은 사람의 냄새가 배어 있기 때문이지요. 중국의 절경과 인도의 바닥, 그것을 시쓰기와 관련시켜 효과적으로 구분시키고자 한 것이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지요. 이 말을 이런저런 술자리에서 몇 번 내뱉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2004년, 대구의 인터넷 다음 까페인 ‘목요시학회’의 오프라인에서 강연을 했는데요, 공식석상에서는 또 처음 이 말을 했지요.”

▶ 아, 이제 알겠습니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에 그런 뜻이 있군요.
“에피소드는 이제부터입니다. 그 해, 그러니까 2004년에 광주에서 강경호 시인이 하는 《시와 사람》 창간기념식에서도 강연을 하게 됐는데, 대구 목요시학회에서 한 말을 한 번 더 했습니다. 사람의 바닥은 시가 된다, 사람의 바닥이야말로 절경이다,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뒤풀이 식당에서 강경호 시인이 저보고 ‘강연 중에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는 부분이 귀에 쏙 들어옵디다’ 하고 말했습니다. 또 같이 있던 정윤천 시인도 ‘나도 참 기막히게 잘 들었는데요, 그걸로 제가 시쓰면 안되겠는지요’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정윤천 시인보고 ‘좋지, 써라. 그런데 사용료가 천 원이다.’고 했지요. 물론 사용료 받고 거래를 끝냈지요. 그랬더니 최근 정윤천 시인이 『구석』이란 시집을 내면서 참말로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는 제목으로 쓴 시를 실은 겁니다. 물론 주석을 달아서 ‘문아무개가 강연 중에 한 말’이라고 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만…… 하긴 강경호, 정윤천 시인이 ‘그런 말 들은 바 없음’으로 한다면 나는 ‘민사적’으로 아주 불리해지고 골치 아파지겠지요. 새로운 증인을 찾아 헤매야 할 테니까…… 아무튼 이 말이 광주에서는 정식으로 칭찬도 받았고, 또 ‘거금’ 1,000원씩이나 벌기까지 했는데(웃음), 내 바닥 대구에서는 잘 통하지 못했던 겁니다. 무슨 얘긴가 하면요, 그 뒤로 3년쯤 시간이 흐른 작년(2007년) 봄, 대구에서 모모 시인 2명과 평론가 1명, 그리고 나까지 네 명이 모여 무슨 얘기 끝에 내가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정식으로 어떤 지면에 쓰려고 한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이 세 사람, 표정이 말할 수 없이 뜨악한 거예요. 웃긴다는 거지요. 급기야는 한 친구가 ‘에이, 형님, 그거 문헌에 나오는 소리예요’ 하는 겁니다. 다른 두 친구도 기다렸다는 듯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치고요. 내가 만약 대학교 선생이었다면 그들이 ‘문헌’ 운운하며 고개를 주억거렸을까요? 이 이야기의 끝이 여기가 아닙니다. 그 ‘문헌의 날’ 그 자리에 있던 세 명 중 한 사람이 몇 달 후 시집을 냈는데, 자서自序 부분에다 굳이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따옴표만 하고 쓴 겁니다.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르면 따옴표 따위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현재도 그 의미가 참 애매한 따옴표지요. 그때는 정말 서운했습니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는, 별것도 아닌 이, ‘천 원짜리 말’에 내가 너무 지나친 집착을 보인다고 욕먹을 게 뻔합니다. 우스꽝스럽다는 것 잘 압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지금 집착하는 것은 지식인들의 ‘사람 차별’입니다.”

▶ 그 시인이 누굽니까?
“그건 말 못합니다.”            

▶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래서 그 다음 내 시집 『배꼽』을 내면서 <시인의 말>에 일부러 힘주어 이 말을 해놨습니다. 또 《현대시학》에 산문 쓸 일이 있어서 이 내용의 대강을 간추려 게재한 적도 있고요. 산문 제목이 「사람이 절경이다」였습니다.”

▶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 말처럼 많은 평자들은 ‘고단한 사람들의 궁핍과 소박함을 들여다보는 일이 위로의 언어로, 그리고 마치 수행승의 땀방울 같은 영롱함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문인수 시인의 시를 읽는 재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시쓰기가 계속될 것 같습니까. 최근에는 어떤 변화를 감지하고 계신지요.
“나라는 인간의 안팎이 뒤집히기 전에야 내 시의 ‘문장’도 바뀌지 않겠지요. 근간은 유지될 것 같고요. 뭐, 잘 써지는 대로 쓰겠습니다. 가까운 친구들의 조언도 있고요, 다만 좀 짧게 쓸까 합니다.”

자기 작품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은 해롭다

▶ 작년 미당문학상을 받았을 때 어떤 느낌이셨습니까?
“1차 후보가 30명이었고, 2차 후보가 다시 10명으로 압축됐습니다. 후보에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대견했습니다. 우리말에, 귀를 의심한다는 말이 있지요, 과장이나 엄살이 아니라,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참말로 짧은 시간 귀를 의심했습니다. 전혀 기대를 안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뻤지요.”



미당문학상 시상식 때 가족과 함께. ⓒ계간 시인세계

▶ 늦깎이 등단, 대학 중퇴, 지방 거주 등등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심정적으로 못 느꼈습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이만큼이라도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내 인생이 기댈 곳 없었겠다 싶습니다. 이나마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전히 내 탓으로 늦게 데뷔했고, 또 내 탓으로 가방끈도 짧기에 이 정도도 복이다 싶지요.”

▶ 이제 막 시 쓰기를 시작한 후배가 있다면 어떤 말씀을 들려주시겠습니까.
“문학판 바깥 지면에 최근 그런 이야기를 쓴 적이 있습니다. 인간적 자존감은 갖되 자기 작품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은 해롭다고 봅니다. 자기 감동, 그 또한 허방을 딛는 겁디다. 시집을 낼 때마다 그 한 권 한 권이 그 기간에 쓴 시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가려 뽑은 선집의 성격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최근에 질투를 느껴본 시인은 있습니까?
“질투는 한 번도 못 느꼈습니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 잘 쓰는 사람이 가장 두렵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들에게 질투를 느껴본 적은 없습니다. 나는 시와 논다, 사는 일 중에 시 쓰는 재미가 가장 크다고 말합니다. ‘논다’와 ‘재미’라는 말 안에 인생 전부, 전반을 우겨넣고 말하는 겁니다. 질투나 경쟁심은 재미없는 것입니다. 남의 시를 두고 절망하거나 부러워할망정 질투는 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 자제분들은 어떻게 두셨습니까?
“일남일녀입니다. 아들은 동섭, 1975년생인데, 아, 작년 11월에 결혼시켰지요. 대구산업정보대학 사서로 있습니다. 도서관학과를 나온 며느리도 직업이 같습니다. 손주는 아직 없습니다. 둘째 효원은 1978년생이고요, 지금 호주에 유학 가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 질문은 여기까지입니다, 하는 말과 함께 펜 뚜껑을 닫고 노트를 접었다. 공식적으로 받아 적고 기록하는 인터뷰는 종료하고 이제 부담 없는 대화를 하자면서 긴장 아닌 긴장의 끈을 풀었다. 문 시인은 담배 하나를 다시 맛있게 피워 물었다. 그 일련의 동작들이 잘 어울렸다. 서울역에서 만나는 인터뷰는 각별했다. 만나는 장소이자 헤어지는 곳, 술잔이 마르면 당신은 기차를 타고, 우리는 자동차나 지하철을 타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야만 하는 곳이다. 어렴풋이 시간을 정해 놓은 만남, 그리고 그날 밤 잠잘 곳을 정해 놓지 않은 흔들리는 만남, 마침내 당도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또 다른 떠남의 행장을 서둘러야 하는 만남들이 부딪치는 곳이다. 서너 계단만 발걸음을 옮기면 플랫폼이 있고, 기적 소리가 있고, 작별이 있고, 어지럽게 섞이는 무심한 발걸음들이 있을 것이다.

인터뷰는 끝났지만 여진餘震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문 시인은 “문단에 오지 않고 지냈던 세월이 나에겐 그늘이고 상처이지만 거꾸로 자양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시 쓰는 사람이 자기의 재미에 빠져야지 평가에 신경 쓰면 안 된다”는 말도 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모노톤의 어조를 유지했다. 들끓는 용광로를 가슴 속에 여럿 안쳐 놓은 사람들이 독주로 이마를 식혀가며 극도의 평온을 잃지 않을 때 마주 앉은 사람도 무거운 평화를 덤으로 받아 든다. 그렇기 때문일까. 다음에 문 시인을 만날 때는 전혀 색다른 분위기가 될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김광일   서울대 불어교육과 졸업.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 논설위원 역임. 현재 문화부장. 저서 '우리가 만난 작가들', '책을 읽은 다음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간지럽고 싶다, 한없이', '시보다 매혹적인 시인들'이 있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