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바닥은 절경의 시가 된다
 
[Zoom-in] 문인수 시인
 

계간 (시인세계)
 
 
(기사제공 : 좋은 시와 시인을 섬기는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
 
(김광일=조선일보 문화부장)  문인수 시인을 만나기로 한 날은 9월 마지막 날이었다. 날씨는 화창한 것도, 꾸무룩한 것도 아니었다. 짜든지 맵든지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에 어중간한 날씨는 영 잼뱅이 같았다. 그날 약속 장소로 떠나면서 머리 속에 맴돈 생각은, 왜, 언제부턴가 문 시인이 나에겐 일종의 관문 같은 존재였는가, 하는 점이었다. 10년 저쪽 옛날에도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사이에 그를 만나야 하는 문제는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돼 있었다.
 
사진만 보면 김현승을 닮기도 하고 김수영을 닮기도 한 것 같은 그였다. 시에 대해, 문학에 대해, 아니 인간과 인생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은체를 하려면 그를 거쳐가야만 할 것 같았다. 왜 그런지 이유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를 만나거나 그를 공들여 읽지 않았다면 문학이나 인생의 어떤 미묘한 국면에서 입을 다물어야 할 것 같은 느낌!

최근 그의 시집들을 손에 쥘 때마다, 그러니까 '쉬' 나 '배꼽'을 펴들었을 때마다 탄성에 젖은 외마디 독후감을 내지르곤 했었던 기억만 있지 그와 정색을 하고 마주 앉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심 그와의 대면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 김요일 시인이 전화를 걸어 이번 겨울호에는 문인수 시인을 줌인 인터뷰에 초청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을 때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절묘함에 가볍게 몸을 떨기까지 했던 것이다.
 
서울 KTX 역사 안에 있는 한 중국 식당에서 그를 기다렸다. 하늘은 계속 희끄무레했다. 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큰길에는 날렵한 속도의 차량들이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유리창이 얼마나 깨끗한지 안과 밖이 그대로 통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서울역 광장을 이렇게 한가롭게 내려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실내는 격조 있었고, 분위기는 한산했다.
 
오후 3시였다. 조금 있으니 김요일 시인과 박후기 시인이 함께 왔다. 박 시인은 이제 고정 멤버로 사진 촬영을 담당해주고 있었다. 우리끼리 반가워하고 있을 거의 같은 시각에 문인수 시인이 도착해서 손을 내밀었다. 큰 키에 약간 헐렁한 느낌의 이 신사는 상대편을 기분 좋게 무장 해제시키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악수를 하고, 명함을 건네고, 자리를 잡았다. 동대구역에서 서울역까지 1시간 50분이 걸렸다고 했다. 손바닥이 버석하고 건강하게 말라 있었다. 한쪽에서 술과 안주를 주문하고, 한쪽에서는 이곳에서 담배 피워도 되냐고 묻고, 노트를 펼치고, 다리를 포개고, 테이블을 끌어당기고, 하는 부산함이 꺼지기를 기다렸다가 첫 질문을 던졌다.
 



문인수 시인이 도착해서 손을 내밀었다. 큰 키에 약간 헐렁한 느낌의 이 신사는 상대편을 기분 좋게 무장 해제시키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최근 그의 시집들을 손에 쥘 때마다. 그러니까 '쉬!'나 '배꼽;을 펴들었을 때마다 탄성에 젖은 외마디 독후감을 내지르곤 했었던 기억만 있지 그와 정색을 하고 마주 앉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심 그와의 대면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좌 문인수 시인, 우 김광일 필자, 사진 : 박후기 시인) ⓒ계간 시인세계

‘쉬’ 는 문상 갔다 돌아와서 쓴 시

▶ 지난 주 선운사에 다녀오셨더군요. 정현종, 김화영, 서정춘, 나희덕, 장석남, 송희 같은 분들과 함께였던데요. 선운사에서 무엇을 보고 오셨습니까.
“없는 동백을 보고 왔다고나 할까요. 시 쓰는 사람이라면 어느 계절에 가나 ‘미당조調 동백’에 끌려서 갔다고 할 것입니다. 동백을 느끼고 왔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동백은 뛰어오르듯 한 번 피고, 질 때도 전혀 시들지 않은 채, 땅에 떨어지는 그 반동으로 다시 한 번 핍니다. 동백은 사라지고 나서도 그 붉게 부릅뜬 이미지로 살아 있습니다.”

▶ 동백꽃이 그렇게 강렬합니까.
“다른 꽃들은 시들어 떨어진 상태로 망해 있는데, 동백꽃은 땅에 떨어진 다음은 물론 기억 속에서조차 그렇듯 붉게 피어 있는 것입니다.” 

▶ 선운사에서 술 좀 하셨겠습니다.
“한 잔도 안 했습니다. 사찰 체험이었죠. 저녁예불에서 이튿날 새벽예불까지……”

▶ 요즘 하루 일과가 어떻습니까. 아침엔 일찍 일어나십니까? 우선 어제부터…… 지난 며칠 동안 벌어진 일들을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늦게 자는 편입니다. 어떨 땐 새벽 4시, 5시에 자기도 하고요. 보통은 밤 12시, 1시 사이에 잡니다. 취침 시간은 불규칙하지만 수면시간은 5~6시간으로 일정한 편입니다. 바깥 스케줄이 없으면 대개 집에서 빈둥거립니다. 어제는 낮 동안 집에 있다가 오후에 대구에 있는 영화모임에 갔습니다. 《매일신문》 문화부에 있는 김중기 차장의 아이템인데, 시인·화가가 함께 모여 어떤 영화 한 편을 본 다음, 시인은 이미지 잡아서 시를 쓰고요, 화가는 또 그렇게 그림을 그립니다. 김 차장은 물론 종합적인 기사를 쓰지요. 시인 5명에 화가가 5명으로 열두어 명이 모이는 중입니다. 매월 마지막 월요일 밤으로 한 달에 한 번 영화를 봅니다. 나는 어제 그 영화모임에 갔다가 영화는 못 보고, 대구의 도광의 시인이 부친상을 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곧바로 영남의료원 영안실에 차려진 빈소엘 다녀왔습니다. 집에 오니 9시 반이더군요. 이메일 확인하고 잤습니다.” 



2005년 원주 '토지문학공원'에서, 왼쪽에서부터 고진하, 문인수, 고재종 시인 ⓒ계간 시인세계


 ▶ 상가에 가셔서 술도 한 잔 안 했습니까?
“술 한 방울도 안 마신 지 3년 됐습니다. 최근에 와서 조금씩 합니다. 한 반 병 정도.”

▶ 왜요?
“수전증 때문이에요. 수면장애 같은 것도 있었고요. 내 몸이 어떻게 되면 나 혼자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술을 끊었지요.”

▶ 증상이 심했습니까?
“뒷골 당기는 것이 꼭 블라인드 커튼 줄 잡아당기는 것 같은 찌릿찌릿한 느낌이었습니다. 내 혈관을 죽죽 잡아당겨 내리는 것 같았으니까요.”

▶ 술 끊으니 괜찮아졌습니까?
“예. 술 안 먹으니 그런 증상이 없어졌습니다. 내가 담배는 지독하게 중독돼 있으나 다행히 알코올 중독은 안 돼 있다는 걸 이번에 알았습니다. 혼자서 술맛 당기는 일 같은 것은 없으니까요. 대신 나는 대단히 자극적인 식성을 갖고 있습니다. 담배도 타르 함량이 6.5 정도 되는 에쎄 빨간 것, ‘클래식’을 피웁니다. 다른 것은 한 0.5 정도 되지요. 하루 한 갑이나 한 갑 반 피웁니다. 술은 먹고 싶다는 충동 없습니다.”

▶ 애연가들은 여행할 때 고생하시더군요.
“예. 여기 올 때 동대구에서 서울역까지 KTX 타고 1시간 50분 동안 가장 힘든 것이 바로 흡연 욕구였습니다. 해외 여행할 때도 제일 큰 문제가 담배입니다. 해외에 대한 호기심이 없어 바깥 여행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습니다만, 지난 2003년 인도를 다녀온 이후 세계의 여러 오지에 대한 관심은 많아졌습니다. 티베트, 네팔, 몽골 같은 곳에 가보고 싶은데, 인도 갈 때 비행기 속에서 담배 때문에 혼났던 기억이 자꾸 켕깁니다.”

▶ 영화모임 가고 상가에 다녀온 것이 월요일인데, 그 전날인 일요일엔 뭐 하셨습니까.
“영월 쪽으로 탐석探石 나갔습니다. 수석 찾기죠. 그러나 돌은 안 찾고, 돌밭에 길게 누워 졸거나 쉬고 왔습니다.”

▶ 아, 그렇죠. 문인수 시인하면 또 수석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지요.
“아닙니다. 탐석 안 나간 지 벌써 10년도 넘습니다.”

▶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시간도 잘 나지 않고, 이래저래 하루를 다 잡아먹어 시간도 아깝고…… 무엇보다 돌 찾는 일이 전에만큼 재미도 없고요.”

▶ 이번엔 누구와 함께 가셨습니까?       
“충주호 상류천으로 딱 한 차 갔습니다. 시인 4명이 갔지요. 시인 박진형, 시조시인 박기섭, 시조시인 이종문하고 갔습니다.”

▶ 동년배들이십니까?
“아뇨. 저는 45년생, 그네들은 54, 55년생들입니다.”

▶ 돌밭에 누워 있으면 좋습니까?
“지압 효과가 있습니다. 몸이 알아서 돌 하나 하나를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 토요일엔 뭐하셨습니까?
“경주의 ‘동리·목월문학기념관’에 가서 강연을 했습니다. ‘나는 시를 이렇게 쓴다.’ 같은 얘기를 했지요. 강연 제목은 <길 위에서 시쓰기>였습니다. 여행과 일상과의 관계, 여행에서 시를 유발시키는 요인 같은 것을 얘기했습니다. 청중은 주로 일반인들, 주부들이었습니다.”
문인수 시인은 하루하루 톺아보며 용케도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을 잘 해냈다. 스스로도 대견하다는 듯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요즘 사람들은 워낙 바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일과를 소화하면서 살기 때문에 지난 일주일은 고사하고 바로 어제 한 일도 깜박깜박할 때가 많다.

▶ 기억력이 좋으십니다.
“아닙니다. 나도 달력에 일정을 메모해 놓고 삽니다. 밖에서 무슨 볼일을 보고 있을 때 누가 전화 걸어와 언제 좀 보자고 하면 집에 가서 선약이 있는지 달력 보고 난 뒤 확답하겠다고 말하곤 합니다.”

▶ 일정 중에 하루 종일 시만 썼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더러 그럴 때도 있지요. 시는 빈둥거릴 때 많이 쓰게 됩니다. 바빠지면 못 씁니다.”

▶ 경북 성주군 초전면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돼 있는데요,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셨습니까?
“초전면 대장리(한자로는 大馬里)에서 났습니다. 아버지는 85세에 돌아가셨는데 상당히 오래됐습니다. 살아 계시면 올해 103세십니다. 어머니는 98세신데 살아 계십니다. 내년 생신 때는 백수상을 받으실 수도 있었는데…… 재작년에 그만 맏딸인 큰누나가 먼저 세상을 버렸습니다. 자식을 앞세운 어른은 백수잔치를 받을 자격을 잃는다고 합니다. 수명을 두고 장담할 일은 아닙니다만, 현재로선 어머니가 백수를 누리시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직 머리도 새하얗지 않고 희끄무레하고, 정신도 아주 좋으셔서 삐칠 것 다 삐치고, 알아차릴 것은 다 알아차립니다. 지금은 서울의 둘째형네 아파트에 사시는데 하루에 한 번 동네 뒷산을 산책합니다. 그런데 60대 도우미 아줌마가 못 따라갈 정도로 걸음이 빠르시다고 합니다. 아직 자세가 일자로 꼿꼿하십니다.”



문인수 시인이 다섯 살 무렵, 1950년 6.25전쟁 전후로 짐작되는 어느 날 고향집 앞 마당에서 큰누님(앉은 이, 당시 20세), 작은누님(당시 17세)과 함께 ⓒ계간 시인세계
▶ 어머님 함자가 어떻게 되십니까?
“풍양 조씨에 침묵할 때 묵, 붉을 단, 조묵단입니다. ‘붉은 침묵’이지요. 엄마 이름에서 노을이 한 판 시뻘겋게 걸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전형적인 농부였습니다. 농토가 가치의 전부였던 어른이셨지요. 아버지의 꿈은 한 곳에 상답 서른 마지기를 갖는 것이었는데, 40대 초반에 그 꿈을 이루셨더랬습니다. 태어나 보니 나는 이미 부농의 아들이었습니다(웃음). 말하자면 그 인간 모독적인 극빈, 보릿고개는 겪지 않았던 겁니다.”

▶ 문 선생님의 시 「쉬」를 정말 감동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시에는 친구 상가喪家를 다녀와서 쓴 시로 돼 있었는데, 혹시 본인의 아버지가 아니셨습니까?
“아닙니다. 그 시는 시인 정진규 선생의 상가를 다녀와 쓴 시입니다. 서울 아산병원으로 기억합니다. 정선생의 부친상이었고요. ‘부친을 안고 오줌을 뉘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듣던 도중에 ‘몸 갚아드리는 장면’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그 이미지를 ‘발설’하지 않고 꿀꺽 삼켰지요. 그날, 유족들은 부의금도 조화도 받지 않았는데, 나는 오히려 그 시 덕분에 차비(대구~서울)의 수십 배를 벌었습니다(웃음). 밤중에 대구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 시를 써내려갔지요. 나중에 내가 쓴 「쉬」와 관련해서 정진규 선생도 쓴 시가 있습니다. 김신용 시인이 고인의 수의를 지어드린 일과 내가 쓴 조시 아닌 조시를 한데 엮어  쓴 시이지요.” 

▶ 형제들은 많았습니까?
“오남매입니다. 위로 누님 둘, 형 둘, 그리고 제가 막냅니다. 둘째누님과 작은형이 서울 살고, 큰형은 포항에 삽니다. 고향에 있는 본가는 큰형이 관리하고 있고요. 두 누님은 전업주부로 살았습니다. 큰형은 식당업을 하다가 지금은 은퇴해서 노후를 보내고 있고, 작은형은 운수회사에 종사합니다. 서울의 관악교통 사장이고요, 현재 전국버스조합 노사정 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자기 분야에서는 크게 성공한 것이지요.”

▶ 문 시인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어디서 다니셨습니까?
“경북 성주의 초전초등학교, 성주중학교, 대구의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의 동국대 국문과 1학년을 마치는 것으로 ‘학업’은 영 끝났었지요. 그러니까 1966년에 육군에 자원입대했다가 1969년 제대하면서 복학을 하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쓴 시 ‘흰 구름’을 담임선생님이 격찬

▶ 소년 문인수는 어떤 꿈을 가진 아이였습니까?
“시인이 되는 게 꿈이었어요.”

▶ 아니, 정말로요?
“물론 1950~1960년대 농촌 어린이로서 구체적인 꿈은 못 꾸었지만, 글 쓰는 일이야말로 가장 자랑스러웠고, 재미가 있었지요. 글쓰기만이 내가 남보다 잘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결코 품행이 방정한 아이는 아니었고, 그래서 마을 어른들이나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꾸중을 많이 듣는 편이었습니다.”

▶ 말썽꾸러기였군요?
“당시 군소재지 읍동네는 어느 정도 도시화가 돼 있었는데, 내가 살던 면소재지 동네는 도시와 농촌의 경계였습니다. 초등학생 아이들에게는 면소재지에 산다는 것 자체가 내 건너 산골짜기에 사는 아이들에겐 일종의 텃세나 권력 같은 것이었어요. 내가 애들한테 공물 같은 것을 받기도 했으니까요. 이를테면 여름방학 숙제인 곤충채집용 집게벌레나 왕잠자리, 풍뎅이 같은 걸 잡아오라고 해서 받고…… 도토리나 밤, 산딸기 같은 걸 따오게 한다든지, 그랬어요. 또 내가 살던 면소재지 마을에는 나의 사촌까지, 방계 친인척이 많이 살았어요. 동갑내기에, 한두 살 터울 패거리가 한 스무 명은 됐으니까. 패거리가 모여 다니면 적수가 없었지요. 악동 노릇을 했습니다. 덩치는 작고 힘도 세지 않으면서 힘이 제일 센 것으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 결정적으로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습니까?
“웬걸요. 혼찌검도 많이 났지요. 특히, 그것이 상처인 줄도 모르고 상처로 껴안고 산 ‘꾸중’도 있습니다. 한번은 담임한테 잡혀갔는데, 이 선생님이 자기 앞에 한참을 세워 두더니, 일갈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가 봐 임마, 너는 커서 아무것도 안 되겠다’ 하고 손사래를 치는 거예요. 당시에 나는, 안 맞았다, 땡잡았다, 하고 좋아라 했는데, 자라면서, 또 다 큰 다음에도 살아가는 길목길목 뭔 일이 안 될 때마다 그때 그 선생님의 말이 주문처럼 떠오르는 겁니다.”

▶ 아니 그런 아이가 어떻게 글 쓰는 게 자랑스러운 일이 됐나요?   
“어른들로부터 칭찬 들을 일이 아무것도 없던 내가 드디어 큰 칭찬 들은 ‘사건’이 생긴 겁니다. 교육열, 이건 요즘 이야기입니다. 당시 농촌 아이들은 10명 중 8,9명이 가난했습니다. 농번기가 되면 꼴베기, 새 보기, 지심메기, 이삭줍기를 하느라 학교도 못 나오던 아이들이 수두룩했던 시절이었지요. 그때, 그런 농촌 현실 속에 웬 ‘특별활동’ 같은 것이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당시 선생님들은 전체 아이들의 개성이나 소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단지 국어책 하나는 잘 읽는다는 이유로 문예반으로 편성되었고요. 그 매주 한 번 각자 해당 교실로 흩어지는 특별활동, 문예반 첫 시간에 담당 선생님이 숙제를 하나 내주었습니다. 동시, 산문, 표어 등등 중에서 뭐든 한 편 써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내가 숙제로 써 간 게 석 줄짜리 동시였습니다. ‘김삿갓’을 소재로 한 내용이었어요. 그 무렵 나는 삼촌이 준 김삿갓 관련 전기 같은 것을 읽고 있었을 겁니다. 거기서 훔쳐낸 생각이었겠지요. 제목은 '흰 구름'이었고요, 지극히 단순하고 짧기도 하지만 딴엔 두고두고 간직하느라 지금도 전문을 외우고 있지요. ‘둥 둥 둥 흰 구름 어디로 가나/ 김삿갓 할아버지의 옷자락인가/ 둥 둥 둥 흰 구름 어디로 가나’ 당시 문예반 선생님의 키가 1미터 80센티는 족히 됐을 겁니다. 장대 같던 그분은 나름대로 아주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애초 초등학교 급사로 출발, 독학으로 초,중등학교 선생님으로 평생을 보냈지요. 말년엔 대구 시내 모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정년까지 하신 다음, 십여 년 전 고인이 되었습니다. 그분 또한 문아무개라는 아이의 이런 저런 품행을 모를 리가 없었겠지만 그런 ‘전과’ 따위 개의치 않고 내가 써 간 숙제, 「흰 구름」을 칭찬해주었습니다. 그분한테 받은 그 칭찬의 황홀함이란 내가 평생 받은 황홀함 중 아직도 단연 일등입니다. 그야말로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격정적인, 융단폭격과도 같은 칭찬이었지요. 그 ‘사건’이 바로 오늘날 이 ‘잘못된 길의 시작’이 되었습니다(웃음).”

▶ 농담이시죠? 그걸 어떻게 잘못된 길이라 하겠습니까.
“시인, 이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여러 사람 고생시켰노라고 제 어느 시집 자서에 쓴 적 있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달리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나 싶어요. 괜히 ‘역설’로 해본 소립니다. 최선의 길이었겠지요. 지금 생각해도 이걸 해보고 싶다는, 차선의 다른 길이 자신있게 떠오르지 않네요. 그러나 당시, 문학도라면 당연히 가졌어야 할 등단에의 꿈을 일찌감치 완전히 접어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거기다 글쓰기의 열정에도 군 입대를 전후해 스스로 찬물을 끼얹었다고나 할까요. ‘자해’ 같은 것이지요.” 



문인수 시인이 경기도 포천에서 군 생활을 할 당시. ⓒ계간 시인세계
▶ 아니, 왜 그렇게 되셨습니까?
“60년대, 그때는 등단 관문이라고는 《현대문학》 추천과 각 일간지의 신춘문예밖에 없었거든요. 등단, 그거 나는 도무지 자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동인활동이나 시화전, 문학의 밤 같은 문학소년, 청년시절의 그것은 그야말로 통과의례였고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20대 초반,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와 글쓰기 사이에서 고향으로, 대구로, 서울로 떠돌다 보니 거기가 어디든 문학적 객지더군요. 문학판 저변의 외톨이가 아니라 내 쪽에서 먼저 그 모든 문학환경, 문학인구들을 잊게 됩디다. 그런 판국에 등단은 아예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독학이든 수업이든 본격적이고도 체계적인 문학공부에 임했겠나요. 끝난 것이지요. 그렇게 글쓰기에 대한 욕망도 자신감도 군대에 가면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 군 생활은 어디에서 하셨습니까?
“경기도 포천에 있는 5사단 27연대였지요. 조물주가 나에게 10년 더 살고 싶은 시절을 꼽으라고 한다면 1순위가 소년기이고, 그것 말고는 군대 시절입니다.”

▶ 예? 군대 시절이요? 진정이십니까.
“군대에 있을 때가 몸이 가장 고달프긴 했어도 마음은 가장 편했던 기간이었지요. 그 군이라는 집단과 제복이 나를 잘 감추어 주었기 때문일 겁니다. 집단과 제복 속으로 나라는 개인이 숨어버릴 수 있었던 거지요. 군대 생활을 할 때는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군대라는 거대한 기계 속의 작은 부품들처럼 공으로 작동, 동작만 하면 되었지요. 전우라는 친구들을 기억해보세요, 뻥이 심했지요. 그렇게 죄 없는 하루가 갔지요. 집단이 개인의 일과를 모두 해결해주니까 실패도 절망도 없는 것처럼 살 수 있었던 시기였다는 겁니다.” 
 
 
서문시장에서 천 장사 등 다양한 경험
 
▶ 문 시인께서는 1985년 《심상》 신인상에 「능수버들」 외 4편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셨습니다. 나이 마흔에 시단에 얼굴을 내미신 셈인데 등단이 왜 늦으셨습니까.
“나는 1966년 4월 21일 입대해서 군번 11593579를 달고 35개월 15일 동안 군대생활을 하다가 1969년 4월 5일 만기제대를 했습니다(문 시인의 기억력에 인터뷰 참석자들이 모두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내가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미리 복학 등록을 해주시면 제대 날짜가 4월초이더라도 봄학기를 다닐 수 있다고 말입니다. 내가 역사 한 과목을 빼고는 모든 학점을 따 놨기 때문에 만약 그때 등록만 됐다면 다시 열심히 글도 써서 혹 재학 중에 데뷔를 했을지도 모르겠고, 졸업 후엔 또 문학인들이 흔히 갖는 직업에 종사하게 됐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등록이 안 됐습니다. 아버지는 막내 등록금 3만 원을 챙겨서 형들 손에 쥐어 올려 보냈는데, 그게 등록이 안 됐습니다. 그 돈이 공중분해됐어요. 앞에서 말씀 드렸다시피 나는 66년 입대를 전후하여 등단에 대한 꿈을 접었던 것입니다. 등단을 위해 한 번도 도전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잠시 서울의 동국대학에 학적을 두고 있을 때, 다른 친구들은 조연현, 서정주 같은 선생님을 찾아가서 말씀도 듣고 공부도 하고 했는데…… 나는 학보 지면에서 동국문학상 관련 미당 선생의 평을 받고도 단 한 번도 그러질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군 입대 후에도 하긴 그저 혼자 소모적이고도 지향 없는 글쓰기는 했습니다. ‘골방문학’ 그것은 제대 후에도, 20대와 30대를 다 보내면서도 문득 문득 계속했으나 말씀드렸다시피 본격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진지하게 문학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그때 그렇게 ‘학업’이 중단된 이후 문학은 그저 나의 한 장면 추억이요, 현재적 심심풀이일 뿐 이 길 저 길 헤맬지언정 나의 길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불혹의 나이에 불쑥, 참 느닷없이 ‘등단’을 하게 된 것이지요.

▶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여러 가지 일들을 거친 후 큰형의 사업체(자전거 대리점)에서 일을 거들다가 결혼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전정숙, 1949년생)와 중매로 맺어져 1975년 3월 23일 대구 고려예식장에서 식을 올렸습니다. 그 후로도 여러 직종과 직장을 전전했죠. 관공서의 비정규직(임시직), 폴리에틸렌 파이프 대리점, 대구의 서문시장에서의 자투리 천 장사를 하기도 했고, 친구와 오퍼상 동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버틴 기간이 길게는 1년, 짧게는 22일. 이래저래 ‘백수의 기간’이 훨씬 많았지요. 그러다 대구의 영남일보 교열부 계약직으로 들어갔습니다. 교열직으로 들어갔지만 기사도 더러 쓰곤 했어요. 한 8년 근속했습니다. 남이 보기에 문아무개로선 참 대단한 기간을 보낸 것이지요. 이때가 가정적으로 가장 안정된 기간이었고요, 아내도 기를 펴고 산 유일한 결혼 생활이었습니다. 1990년 9월에 입사했다가 1998년 5월 ‘IMF’ 구조조정 때 자진해서 나왔습니다. 각 부서별로 할당된 조정 인원수가 있었는데, 젊은 사람과 눈치 보기 싫어서 그냥 손 번쩍 들고 내 이름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자진하지 않았어도 조정 1순위였겠지요. 그때 내 나이 이미 50대 중반, 나의 ‘돌아온 백수 신분’이 별 탈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요.” 

▶ 어느 단계에 이르자 월평에 시인 문인수에 대한 얘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이전까지 비평가들이 문 시인의 작품을 이해 못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시를 만드는 뭔가가 있어서 한 꺼풀 깨치게 된 것입니까.
“1985년에 늦깎이로 데뷔한 내가 문학적으로 좀 풀린다고 느낀 것이 1992년 민음사에서 세 번째 시집 『뿔』을 내면서입니다. 글쓰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나 할까요. 80년대 후반에 썼던 작품들을 이 시집에 담았던 것입니다. 내 시에 내 목소리가 따로 있다면 이 시집이 바로 그 첫 물머리가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로써 지명도라는 것도 좀 쌓이기 시작했고요. 물론 『뿔』은 현실적으로 민음사라는 출판사의 권위가 작용한, 그런 덕을 본 부분도 있을 겁니다.”

▶ 지금까지 낸 시집으로 『늪이 늪에 젖듯이』(심상, 1986)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문학아카데미, 1990/문학의 전당, 2005) 『뿔』(민음사, 1992) 『홰치는 산』(만인사, 1999/천년의 시작, 2004) 『동강의 높은 새』(세계사, 2000) 『쉬!』(문학동네, 2006) 『배꼽』(창비, 2008) 등이 있는데요, 이 시집들을 개인사적으로, 혹은 개인의 문학사적으로 시대 구분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떤 고비들을 넘어오신 것 같습니까.
“내 개인사를 섞어 얘기하기보다는 나의 문학적 태도와 그 내용만을 결부시켜 말해보겠습니다. 시집 『뿔』까지는 내 내면의 문제에 매달렸습니다. 즉, 대상이 ‘나’이고 내가 ‘대상’인 세계를 나타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한 나 자신의 문제를 유지한 채 매 시집마다 별도의 일관된 주제를 담겠다는 욕심도 내보았습니다. 즉, 네 번째 시집 『홰치는 산』은 ‘고향’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내 몸의 근원인 땅이자 아버지와 어머니인 농촌 인구의 삶을 그려 담아보았지요. 그리고 다섯째 시집 『동강의 높은 새』는 정선이라는 특정한 장소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 문 시인께서는 특히 정선과 관련된 시를 많이 발표하고 계신데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습니까?
“1990년에 강원도 정선을 처음 가보았는데, 그만 푹 빠져버렸습니다. 그게 정선과의 인연의 전부입니다. 정선은 우리네 아리랑의 발상지라고 합니다. 정선 아리랑에서 진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 등 여러 아리랑으로 번져나갔다는 것이지요. 처음 정선을 다녀왔을 때 며칠 동안이나 나를 감싸고 돌던 그 애터지게 느린 아리랑, 아라리의 가락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정선 아라리는 한의 노래입니다. 한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홧병이라는 말처럼 다른 나라 말로는 번역이 안 된다고 합니다. 한이란 절망도 원망도 저주도 비명도 슬픔도 한탄도 자조도 아니고, 또 그 모든 것이기도 합니다. 애매하고 답답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연민일 뿐 악의 요소는 조금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그러한 정선의 한이 정선으로 나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곳의 컴컴한 산악이 나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나를 껴안아 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말해 ‘마침내 돌아왔다, 당도했다’는 심경이었습니다. 때로는 친구들이랑, 때로는 나 혼자서 참 여러 차례 정선을 드나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써온 정선 관련 시가 52~3편은 되지 않나 싶습니다. 저로선 특정지역만을 다룬 작품으로는 가장 많은 편수를 쓴 것입니다. 물론, 작품의 성과에 대한 문제는 남의 몫입니다.
 
사람의 이야기와 관련 없는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
 
▶ 어느 글을 보니까 문인수 시인께서는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방치돼 있는 것들, 사소한 것들, 겸손한 것들, 그리고 어쩌면 인간적인 것들에 더 눈길이 간다는 뜻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동안 써오신 시들도 독자들의 공감대가 유난히 컸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잘 나온 질문입니다. 거기에는 이유라기보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지난 2002년, 나는 난생 처음 해외여행으로 와이프랑 같이 중국엘 갔습니다. 1982년에 고등학교 동기생들끼리 ‘뫼얼산우회’라는 부부동반 산행회를 만들었는데, 창립 20주년을 기념해서 해외로 나간 겁니다. 그때 가본 데가 장가계, 원가계입니다. 우리나라 금강산에 해당될까요, 산이 전봇대나 나무젓가락을 세워 놓은 것 같더군요. 산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 삼각형의 그림을 깡그리 무너뜨리는 곳으로 그 기괴함에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200~300미터쯤 깎아지른 직사각형의 바위벼랑이 수백만 평에 걸쳐 숲처럼 펼쳐 있었습니다. 중국 무협지나 신선도에 묘사된 산이 중국인 특유의 과장이거나 상상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실경인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또 한 번은 2003년에 대구 문인들과 인도 여행을 했는데, 그때 크고 검고 깊은 인도 여자들의 눈을 봤습니다. 나는 누가 인도에 가서 뭘 봤느냐고 묻는다면 ‘인도의 눈’을 봤다고 할 작정입니다. 극빈의 바닥 속에서도 그들의 눈빛은 한없이 고요하고 편안한 눈빛이었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나는 중국의 절경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 할 말이 없는데, 인도 사람들의 삶의 바닥에 대해서는 지금도 할 말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사람이나 사람의 얘기가 아니고서야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기어오를 수 없는 절경은 사람이 붙어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지요. 그래서 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도의 극빈은 아직도 할 말이 많습니다. 순도 높은 사람의 냄새가 배어 있기 때문이지요. 중국의 절경과 인도의 바닥, 그것을 시쓰기와 관련시켜 효과적으로 구분시키고자 한 것이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지요. 이 말을 이런저런 술자리에서 몇 번 내뱉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2004년, 대구의 인터넷 다음 까페인 ‘목요시학회’의 오프라인에서 강연을 했는데요, 공식석상에서는 또 처음 이 말을 했지요.”

▶ 아, 이제 알겠습니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에 그런 뜻이 있군요.
“에피소드는 이제부터입니다. 그 해, 그러니까 2004년에 광주에서 강경호 시인이 하는 《시와 사람》 창간기념식에서도 강연을 하게 됐는데, 대구 목요시학회에서 한 말을 한 번 더 했습니다. 사람의 바닥은 시가 된다, 사람의 바닥이야말로 절경이다,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뒤풀이 식당에서 강경호 시인이 저보고 ‘강연 중에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는 부분이 귀에 쏙 들어옵디다’ 하고 말했습니다. 또 같이 있던 정윤천 시인도 ‘나도 참 기막히게 잘 들었는데요, 그걸로 제가 시쓰면 안되겠는지요’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정윤천 시인보고 ‘좋지, 써라. 그런데 사용료가 천 원이다.’고 했지요. 물론 사용료 받고 거래를 끝냈지요. 그랬더니 최근 정윤천 시인이 『구석』이란 시집을 내면서 참말로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는 제목으로 쓴 시를 실은 겁니다. 물론 주석을 달아서 ‘문아무개가 강연 중에 한 말’이라고 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만…… 하긴 강경호, 정윤천 시인이 ‘그런 말 들은 바 없음’으로 한다면 나는 ‘민사적’으로 아주 불리해지고 골치 아파지겠지요. 새로운 증인을 찾아 헤매야 할 테니까…… 아무튼 이 말이 광주에서는 정식으로 칭찬도 받았고, 또 ‘거금’ 1,000원씩이나 벌기까지 했는데(웃음), 내 바닥 대구에서는 잘 통하지 못했던 겁니다. 무슨 얘긴가 하면요, 그 뒤로 3년쯤 시간이 흐른 작년(2007년) 봄, 대구에서 모모 시인 2명과 평론가 1명, 그리고 나까지 네 명이 모여 무슨 얘기 끝에 내가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정식으로 어떤 지면에 쓰려고 한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이 세 사람, 표정이 말할 수 없이 뜨악한 거예요. 웃긴다는 거지요. 급기야는 한 친구가 ‘에이, 형님, 그거 문헌에 나오는 소리예요’ 하는 겁니다. 다른 두 친구도 기다렸다는 듯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치고요. 내가 만약 대학교 선생이었다면 그들이 ‘문헌’ 운운하며 고개를 주억거렸을까요? 이 이야기의 끝이 여기가 아닙니다. 그 ‘문헌의 날’ 그 자리에 있던 세 명 중 한 사람이 몇 달 후 시집을 냈는데, 자서自序 부분에다 굳이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따옴표만 하고 쓴 겁니다.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르면 따옴표 따위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현재도 그 의미가 참 애매한 따옴표지요. 그때는 정말 서운했습니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는, 별것도 아닌 이, ‘천 원짜리 말’에 내가 너무 지나친 집착을 보인다고 욕먹을 게 뻔합니다. 우스꽝스럽다는 것 잘 압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지금 집착하는 것은 지식인들의 ‘사람 차별’입니다.”

▶ 그 시인이 누굽니까?
“그건 말 못합니다.”            

▶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래서 그 다음 내 시집 『배꼽』을 내면서 <시인의 말>에 일부러 힘주어 이 말을 해놨습니다. 또 《현대시학》에 산문 쓸 일이 있어서 이 내용의 대강을 간추려 게재한 적도 있고요. 산문 제목이 「사람이 절경이다」였습니다.”

▶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 말처럼 많은 평자들은 ‘고단한 사람들의 궁핍과 소박함을 들여다보는 일이 위로의 언어로, 그리고 마치 수행승의 땀방울 같은 영롱함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문인수 시인의 시를 읽는 재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시쓰기가 계속될 것 같습니까. 최근에는 어떤 변화를 감지하고 계신지요.
“나라는 인간의 안팎이 뒤집히기 전에야 내 시의 ‘문장’도 바뀌지 않겠지요. 근간은 유지될 것 같고요. 뭐, 잘 써지는 대로 쓰겠습니다. 가까운 친구들의 조언도 있고요, 다만 좀 짧게 쓸까 합니다.”

자기 작품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은 해롭다

▶ 작년 미당문학상을 받았을 때 어떤 느낌이셨습니까?
“1차 후보가 30명이었고, 2차 후보가 다시 10명으로 압축됐습니다. 후보에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대견했습니다. 우리말에, 귀를 의심한다는 말이 있지요, 과장이나 엄살이 아니라,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참말로 짧은 시간 귀를 의심했습니다. 전혀 기대를 안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뻤지요.”



미당문학상 시상식 때 가족과 함께. ⓒ계간 시인세계

▶ 늦깎이 등단, 대학 중퇴, 지방 거주 등등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심정적으로 못 느꼈습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이만큼이라도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내 인생이 기댈 곳 없었겠다 싶습니다. 이나마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전히 내 탓으로 늦게 데뷔했고, 또 내 탓으로 가방끈도 짧기에 이 정도도 복이다 싶지요.”

▶ 이제 막 시 쓰기를 시작한 후배가 있다면 어떤 말씀을 들려주시겠습니까.
“문학판 바깥 지면에 최근 그런 이야기를 쓴 적이 있습니다. 인간적 자존감은 갖되 자기 작품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은 해롭다고 봅니다. 자기 감동, 그 또한 허방을 딛는 겁디다. 시집을 낼 때마다 그 한 권 한 권이 그 기간에 쓴 시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가려 뽑은 선집의 성격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최근에 질투를 느껴본 시인은 있습니까?
“질투는 한 번도 못 느꼈습니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 잘 쓰는 사람이 가장 두렵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들에게 질투를 느껴본 적은 없습니다. 나는 시와 논다, 사는 일 중에 시 쓰는 재미가 가장 크다고 말합니다. ‘논다’와 ‘재미’라는 말 안에 인생 전부, 전반을 우겨넣고 말하는 겁니다. 질투나 경쟁심은 재미없는 것입니다. 남의 시를 두고 절망하거나 부러워할망정 질투는 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 자제분들은 어떻게 두셨습니까?
“일남일녀입니다. 아들은 동섭, 1975년생인데, 아, 작년 11월에 결혼시켰지요. 대구산업정보대학 사서로 있습니다. 도서관학과를 나온 며느리도 직업이 같습니다. 손주는 아직 없습니다. 둘째 효원은 1978년생이고요, 지금 호주에 유학 가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 질문은 여기까지입니다, 하는 말과 함께 펜 뚜껑을 닫고 노트를 접었다. 공식적으로 받아 적고 기록하는 인터뷰는 종료하고 이제 부담 없는 대화를 하자면서 긴장 아닌 긴장의 끈을 풀었다. 문 시인은 담배 하나를 다시 맛있게 피워 물었다. 그 일련의 동작들이 잘 어울렸다. 서울역에서 만나는 인터뷰는 각별했다. 만나는 장소이자 헤어지는 곳, 술잔이 마르면 당신은 기차를 타고, 우리는 자동차나 지하철을 타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야만 하는 곳이다. 어렴풋이 시간을 정해 놓은 만남, 그리고 그날 밤 잠잘 곳을 정해 놓지 않은 흔들리는 만남, 마침내 당도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또 다른 떠남의 행장을 서둘러야 하는 만남들이 부딪치는 곳이다. 서너 계단만 발걸음을 옮기면 플랫폼이 있고, 기적 소리가 있고, 작별이 있고, 어지럽게 섞이는 무심한 발걸음들이 있을 것이다.

인터뷰는 끝났지만 여진餘震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문 시인은 “문단에 오지 않고 지냈던 세월이 나에겐 그늘이고 상처이지만 거꾸로 자양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시 쓰는 사람이 자기의 재미에 빠져야지 평가에 신경 쓰면 안 된다”는 말도 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모노톤의 어조를 유지했다. 들끓는 용광로를 가슴 속에 여럿 안쳐 놓은 사람들이 독주로 이마를 식혀가며 극도의 평온을 잃지 않을 때 마주 앉은 사람도 무거운 평화를 덤으로 받아 든다. 그렇기 때문일까. 다음에 문 시인을 만날 때는 전혀 색다른 분위기가 될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김광일   서울대 불어교육과 졸업.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 논설위원 역임. 현재 문화부장. 저서 '우리가 만난 작가들', '책을 읽은 다음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간지럽고 싶다, 한없이', '시보다 매혹적인 시인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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