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갔지만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참여정부 청와대 참모들이 본 인간 노무현
정찬용.안희정 외 엮음 / 책공방 우공이산 / 2010년 3월
품절


2009년 3월 말 지인들과 대통령 사저에 나무를 심으러 갔었다. 대통령은 봄에 활짝 필 꽃들을 생각하며 권양숙 여사와 매화나무 심을 자리를 고르고 뒷마당 담벼락에 심어 두었던 사철나무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나무를 다 심고 우리는 한곳에 모여 식사를 했다. 대통령은 우리가 준비해간 생선회를 들며 "청와대 안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더 맛있네요" 하며 특유의 그 소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때가 현실 속에서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그리운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김은경-전 청와대 행사기획비서관)-58쪽

'자존심은 한없이 강하지만 너무 솔직하고 여리고 눈물 많은 남자' 라고 이광재 의원은 인간 노무현을 그렇게 표현했다.(상동)-59쪽

노 대통령은 미국의 국무 장관, 국방 장관, 의회 지도자가 방한하면, 그들을 반드시 면담하고 접견 시간을 두세 배 더 할애해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 힘썼다. 나는 그때마다 '한미 관계와 동북아질서의 미래'라는 학술세미나에 참석한 것 같았다. 대통령은 특히 "한국인의 입장에서 '안보'라는 말을 생각해보라. 삶과 죽음의 문제다"라며 역지사지를 강조했다.
통역을 두고 대화하지만 외교의 상대방들은 노 대통령의 진지한 자세와 솔직한 성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으로 느껴졌다.(김정섭-전 청와대 대변인)-79쪽

노 대통령은 2007년 12월 열린 균형발전정책보고회에서 "균형발전은 특별히 귀한 자식이다. 출세하고 힘 있어서 귀한 자식이 아니라, 재능과 의지는 있는데 빛 보지 못하고 고생하는 자식 같은 존재, 그런 심정으로 균형발전정책을 시작했다. 이제 희망은 보이는데 앞으로 계속 성장해줄지 불안하다. 어미새가 새끼를 혼자 날 수 있도록 돌봐주는 것처럼 지금껏 최고 우선순위를 둬왔지만, 앞으로 그런 대접을 받을지 걱정이다"라며 불안과 아쉬움을 토로했다.(상동)
-80쪽

그러면서 "정책은 수혜자가 그 주인이다. 정책은 주인이 잘 돌봐야 제대로 간다. 성숙한 사회라면 전 국민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 우리나라는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이 정책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균형발전정책도 지방사람들이 주인 행세를 하면 지켜 나갈 수 있다"고 당부했다.
마산 간담회에서는 "집중이 좋은가, 분산이 좋은가? 분산이 국가에 유리하고, 국민 삶의 질도 분산했을 때 높아진다. 선진국이 모두 분산과 균형정책을 택했다. 행정수도 이전은 수도권 집중 해소를 위한 것이다. 아울러 지방적 사고를 하는 정부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국가정책을 서울에서 입안하는 것과 세종시에서 하는 것은 관점 자체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상동)-이어서쪽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으로 출발하는 날(2007년 10월 2일), 본관 충무실에서 국무위원 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대통령은 "(우화 속의) 두루미와 여우처럼, 잔칫상은 잔뜩 차렸는데 서로 딴 얘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돼요. 우선 보따리만 잔뜩 가져갑니다"라고 농담했다.
남북정상회담 직후에는, 그전에 정상회담을 왜 하지 않느냐는 비판이 많았다며 "익은 감을 따야기 땡감을 따라는 말이냐. 국사에도 순서가 있다. 정상회담은 서둘렀다면 잘 안 됐을 것이다. 때가 돼서 한 것이다"라고 했다.
김정일 위원장과의 회담을 회고하면서는, "대화시간이 빠듯했다. 밑자락을 먼저 두툼하게 깔고, 또 슬그머니 끼워 넣고 하면서 해야 했다. 마치 '술이 있으면 안주가 있어야 한다' 해놓고, 그 다음에는 '이 안주에는 이 술이 좋다' 하는 식으로 대화를 풀(FULL)로 밀어붙였다. 네 시간 동안 굉장히 능률적인 회담을 했다. '됐나?' 하고 '됐다!' 하면 한 건 해치우고..."라고 회고했다. 그래도 시간이 부족해서 꺼내보지도 못한 문제가 많다고 아쉬워했다.(상동)-82쪽

노 대통령은 공사석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권력 집중과 국민들의 지나친 기대, 그로 인한 실망과 '실패한 대통령' 낙인찍기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그때마다 고 팔메 수상처럼 별다른 경호 없이 나들이도 하고 시장도 보고 언제든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친구 같고 이웃 같은 대통령'을 선망했다.(상동)-85쪽

"국민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40년 통한의 역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역사의 땅입니다. ..(중략).. 지금 일본이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의한 점령지 권리, 나아가서는 과거 식민지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중략).. 우리는 결코 이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중략).. 우리 국민에게 독도는 주권 회복의 상징입니다."(2006. 4. 25. 노무현 대통령 특별담화)(상동)
(김현-전 춘추관장 겸 보도지원비서관)-87쪽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은 피기 쉬어도 아름답긴 어려워라./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산을 잎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야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고 김광석의 노래라 더 아프다. 엉엉 울었다. 소리 내서 엉엉 울었다. 장례 기간 내내 흘러나온 이 노래, 골방에서 혼자 이 노래를 부르며 엉엉 울었다.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어지러울 만큼 많이 울었다. 답답한 가슴이 좀 뚫린 듯했지만 사무치는 그리움에 또 울지 않을 수 없었다.(서영교 - 전 춘추관장 겸 보도지원비서관)-147쪽

빌딩에 오셔서 저희를 한참 쳐다보고는 후보 방이라고 꾸며 놓은 방에 들어가서 앉더니,

"자네들 이리 와서 보세."
"왜요?"
"이거(사무실) 왜 얻었어요?"
"대선 도전하셔야죠."
그랬더니 대통령 하시는 말씀이..
"아직 마음을 못 굳혔는데."
"아! 하셔야죠. 무슨 소리입니까?"
그러자 이광재 의원과 제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들 질 때 생각은 안 하나? 싸운다는 것에는 질 수 있다는 가능성도 동시에 열려 있는 것인데, 질 때 생각 안 하나? 지면 어떡할 거야? 지면 도와야지. 그런데 도와줄 자신 있는가? 난 없어. 도울 자신도 없으면서 왜 거기 승부에 뛰어들지?"
"...."
그 순간 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심정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그 때 이인제 대세론이 판을 치고 있는데, 진다면 불공정 경선이라고 시비하면서 판을 깨버리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제 눈을 보면서 "자네들 질 때 생각 안 하는가? 질 때 이인제 후보 선거운동 할 자신 있느냐 말이야. 나는 3당 합당을 쫓아갔다가 경선에 불복하고 뛰쳐나온 그 사람, 우리 진영의 후보라고 자랑스럽게 운동할 자신이 없네."...(안희정)-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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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살리기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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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3년 당시 언론의 노무현 죽이기 실태. 이 땅의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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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살리기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8월
절판


지난(2003년 6월) 19일 한나라당 언론특위는 기자회견을 열어 올해 안에 관련법을 정비하여 KBS 2TV와 MBC의 민영화를 마무리짓겠다고 밝혔다. 또 KBS의 시청료를 폐지하고 방송과 신문의 겸영 금지를 철폐하겠으며 MBC 등 공영방송을 감사 대상에 포함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작년 대선 과정에서도 한나라당은 민영화와 국정감사를 들먹이며 공영방송을 협박하고 신보도지침으로 압력을 가하다가 여론의 집중포화 앞에서 어물쩍 물러선 적이 있다.
상업적 채널이 늘어가는 방송환경에서 공영방송을 민영화하겠다니, 무엇을 근거로 펼치는 논리인지 알 수 없다.
- 2003년 6월 25일자 사설 <부역 언론인들이 주도하는 방송정책> 일부 -225쪽

어째 조선일보가 조용하다 했더니, 신경무의 '조선만평'이 '정연주 죽이기' 역할을 떠맡고 나섰다. 정연주가 생방송 '나와주세요'의 카메라 앞에서 전두환을 가리키며 "국민 여러분, 지도층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는데 그의 등뒤엔 '3부자(父子) 병역면제'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고, 전두환은 "진짜 얼굴 두껍네!"라고 외친다. 에라 이 몹쓸 양반들아!
그러나 그건 <조선일보>의 워밍업에 불과한 것이었다. <조선일보> (2003년) 7월 4일자엔 이라는 제목의 사설과 더불어 문화부 차장 김명환이 쓴 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려 있다. 왜 또 정연주 타령인가? 김명환은 네티즌을 빙자해 칼럼을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네티즌들 중에는 '다음 번에 정연주 KBS 사장 집에 찾아가 한밤중에 카메라를 들이대보라'고 제언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왕 시작했으면 정 사장 자녀들의 병역 의혹을 잘근잘근 씹으며 캐물어 달라는 냉소적인 요청이다. 이런 네티즌들의 요청에 KBS는 뭐라고 답할 것인가."
-236쪽

<조선일보>를 씹어대는 네티즌들은 천하의 잡놈들이며 인터넷은 재앙이라는 식으로 욕할 때는 언제고, 자기 필요할 땐 그렇게 네티즌의 의견을 우대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이어서쪽

한국이 자랑하는 중앙집권주의는 우리의 모든 삶을 관통하고 있다. 비판 문화도 예외일 수는 없다. 신문에서 이뤄지는 모든 비판을 비판의 대상 중심으로 통계를 내보면 어떨까? 대부분 정부와 대통령을 향하는, 놀라운 수준의 중앙집중성을 보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런 비판의 내용을 따져보면 더욱 흥미로운 결과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상호 상충되는 비판이 너무 많다. 특히 이념적으로 그러하다. 진보주의자는 대통령이 보수적이라고 비판하고 보수주의자는 대통령이 진보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상호 논쟁을 하지 않는다. 각자 대통령과 정부를 향해서만 외칠 뿐이다.-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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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신경림 지음, 송영방 그림 / 문학의문학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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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이 책의 출간을 확인하고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간 신경림 선생은 이와 비슷한 책을 출간하지 않으셨기에, '혹여 이제 부탁받으신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2009년 신경림 선생은 우리 나이로 일흔 다섯이다) 마음이 여려지신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선생님 말씀대로 '앞서 산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공부하며 자랐는가를 알았으면 해서였고, 또 하나는 오십여 년 전 문단의 풍속도를 아는 것이 우리 문학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서였다.'는 취지로 정리하신 이 글들은 오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한국문학의 풍성한 결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채워져왔는가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조태일, 한남철, 이문구... 그리고 작고한 숱한 문인들이 선생님의 글 속에서 다시 말을 걸어오는 이 책의 의미는 단지 문학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우리 선배세대들이 살아온 삶의 풍경이라는 점에서 또 하나의 '한국문학사'가 아닌가 싶다. 

 해맑은 신경림 선생님의 미소를 오래토록 볼 수 있는 시간들이 우리 후세들에게 주어지기를... 

(서귀포 인근 밤바다에서 수평선 멀리 펼쳐진 어선들의 불빛을 보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과 함께 80년대 MT 풍경을 연출해주시던 선생님) 

(내가 읽은 책 뒤편에 남긴 메모 - '책장을 덮으며... 감사합니다. 선생님. 2009. 5. 26. 서울역 광장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조문하고 돌아온 일산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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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신경림 지음, 송영방 그림 / 문학의문학 / 2009년 5월
품절


천상병이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것도 거의 같은 무렵이었던 것 같다. 동백림 사건이란 다 알다시피 1967년 독일(통일 전 서독) 유학생들이 호기심으로 동독에 속한 동베를린을 구경하러 갔다가 간첩으로 몰린 사건이다. 이응로, 윤이상 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예술가를 포함해 많은 유학생들을 현지에 파견된 기관원들이 국제법을 무시하고 납치해 국내로 데려옴으로써 군사정권의 무뢰배적 성격을 국제적으로 드높였다. 주모자가 사형, 무기징역, 20년 징역 등 중형을 받은 이 사건에 천상병이 연루된 연유는 간단하다. 그의 서울 상대 동기에 강모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무렵 유학을 마치고 와서 모교의 전임으로 있었는데, 그 역시 천상병이 가끔 찾아가, 그의 표현에 따르건대 술을 뺏어먹는 상대였다.(결국 이로 인한 모진 고문으로 폐인이 된 천상병 시인...)-156쪽

구자운도 결국 싸구려 번역으로 밥법이를 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전화를 받고 가보면 다른 사람들 두엇과 함께 우중충한 여관방을 얻어 아예 자고 먹으면서 누렇게 뜬 얼굴로 번역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시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술을 마시면서도 그의 시가 실려 있는 문예지를 보여 주며 독후감을 듣고는 했다. <목애시편>은 그가 여러 번 낭송하던 시다. 뿐 아니라 남의 시도 열심히 읽어, 가령 내 시가 <창작과비평>에 실렸을 때는 찬탄을 아끼지 않으면서, '빨리 시집을 내라구. 내가 근사하게 발문을 한번 쓸게' 하고 재촉을 했다. 하지만 그는 내 시집에 발문을 쓰지 못하고 1972년에 타계했다. 몸을 마구 굴리는 데다 못 먹어 생긴 병으로였다. -181쪽

결국 이 시가 <창작과비평>에 실리게 되었고, 이것이 조태일의 '신경림은 내가 추천한 시인'이라는 싱거운 소리의 근거가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는 겉모습과는 달리 세심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다. 가령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아내를 잃은 뒤의 얘기다. 추석 며칠 전이었다. 같이 귀가하던 그가 함께 시장엘 들러 가자고 권했다. 무심코 따라갔더니 아이들 양말이며 내의를 한 보따리 샀다. 그가 독실한 불교신다(그의 선친은 일본 유학의 대처승이었다)임을 알고 있는 나는 그가 절에라도 가려나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헤어지면서 그는 옷 보따리를 내가 탄 택시 안으로 던져 넣었다. '애들 옷은 한꺼번에 사야지 잘 안 사게 돼요.' 덕택에 나는 아이들 속옷이며 양말 걱정을 안 하고 그해 겨울을 넘겼다.-192쪽

그(조태일)는 사람을 좋게 보고 좋게 말하는 특성이 있었다. 우리는 같은 방에 있게 되었고, 내가 첫 조사를 받고 돌아오자 그는 우리를 담당한 사람을 '참 좋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운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도 역시 그로부터 조사를 받았는데, 조금밖에 안 때리고 담배도 주더라는 것이다. 일주일 여 조사를 받고 구속되어 종로경찰서로 넘어올 때는 함께 수갑을 찼다. '이거, 고목에 매미가 붙은 거여, 코끼리하고 생쥐가 한 끄나풀에 묶인 거여!' 종로서에 가니 심심했던지 형사들이 한마디씩 했다. 조태일은 같은 수갑에 묶인 손을 크게 저어 나를 뒤뚱대게 했고, 여기가 어디라고 장난질이나며 형사들은 호통을 쳤다.-195쪽

보름 동안의 유치장 생활도 함께했고, 구치소로 넘어갈 때도 같은 수갑을 찼다. 우리보다 2,3일 늦게 잡혀온 구중서가 혼자 차도 괜찮다며 함께 차기를 양보했기 때문이다. 구속한 검찰관조차 우리가 왜 구속되었는지 몰라, 아마도 문단에서 몇 사람 뽑아서 비례대표로 구속한 것 같다고 짐작한 이 사건에서 나와 구중서는 한 달 만에 기소유예로 나왔지만, 조태일은 한 달을 더 살았다. 광주 태생인 만큼 김대중 씨와 어떤 커넥션이 없나 해서 차별을 받은 것이다. '나는 도저히 감옥하고는 체질이 안 맞는다고 했더니 그 말로 일리 있다고 내 준 거라고요.' 공소기각으로 나온 그는 이렇게 또 한번 싱거운 소리를 했다. -195쪽

마지막 시집이 되고 만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가 나온 99년 여름이었다. 시가 너무 좋아 언제 술이라도 한번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그가 병이 났다는 소식이 들리고, 이어 시골로 요양을 떠났다는 말이 들렸다.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했더니 반가워하면서 '부처님한테 몇 년 만 더 살게 해 달라고 빌었더니 십 년은 더 살게 해 주시겠데요.' 하고 남의 말 하듯 했다.
얼마 아니해서 다시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그 큰 덩치가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볼 것이 두려워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한 후배가 전화를 해왔다. 내 근황을 묻기에 연락을 할까요, 했더니 내버려 두라면서, 그 양반 겁이 많아 못 찾아 올 거야 하더라는 것이다. 내 속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찾아 갔더니 그는 팔에 링거 따위를 주렁주렁 잔뜩 달고 누워 있다가 나를 알아보고는 '참 이상한 일이지요, 지구상의 60억 인구 중 암이라는 놈이 왜 하필 나한테 달라붙었을까요.' 하고 농부터 했다.-196쪽

그 뒤로 손춘익은 상경하면 꼭 전화를 했고, 불러내었다. 스승과 선배를 존경하고 친구와의 신의를 중히 여기는 점에서 이문구와 비슷한 성향의 그는, 전화 앞에서 내가 주머니와 저울질하며 망설이면 '아우가 시골서 오랜만에 올라와서 존경하는 형님 좀 뵙고 갈라카는데 못 나오겠다믄 되겠능교. 퍼뜩 나오소!' 하고 호통을 쳤다. 나가 보면 대개 이문구가 같이 있었고, 술값은 늘 손춘익이 맡았다. '서울 오믄 서울 왔으니까 시골 사람이 내고 시골 오믄 서울 사람이 왔으니까 또 시골 사람이 내고, 다 이러는 거 아닝교.'-227쪽

그(손춘익)가 얼마나 우리를 불러 내리기를 좋아했는가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포항의 한 전문대학의 초청강연에 염무웅과 나를 초대하도록 그는 강권했다. 당시 염무웅은 해직 당해 있을 때여서 학교에서는 여간 꺼리지를 않아, 그의 강권을 거부하지 못하고 편법을 썼는데 염무웅이라는 이름 대신 안 알려져 있는 염홍경이라는 본명으로 벽보와 플래카드를 붙인 것이다.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구에서 온 시인이 바로 본인 앞에서 염홍경이라는 평론가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고 해서 모두들 실소했다.-229쪽

그(한남철)는 친한 사람이 쓴 작품이니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을 쓰니까 그 사람을 좋아했다. 가령 그와 박연희씨는 면식이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신문에 연재되고 있던 <홍길동>이 너무 좋아 그에게 편지를 썼다. 결혼이 임박했을 때로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을 쓰는 선생에게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 없어 알린다는 내용이었다. 박연희 씨는 그때까지는 생면부지였던 한남철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그 뒤 둘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가 늦은 결혼을 할 때 나는 백낙청, 이계익, 임재경 등과 함께 함을 졌다. 상처하고 있는 처지여서 고사했으나 '그러니까 나같이 되지 말라고 후생한테 본보기를 보여 줘야지!' 하며 막무가내였다.-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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