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전문출판사 ‘성하’.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서울 을지로 3가의 사무실엔 사장이 마침 전화를 하고 있었다. 사무실을 쭉 훑어봤다. 열 평이 안돼 보이는 공간에 책꽂이 가득 ‘○○여행’이라고 적힌 책이 늘어서 있는 것을 제외하면 딱히 여행과 관련된 단서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던 찰나, 창가 쪽 책꽂이 위에 놓여 있는 술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인삼 두 뿌리가 통째로 든 인삼주, 러시아산 보드카, 조롱박 모양의 나무로 된 술병 하나는 취권(醉拳)을 구사하는 소림사의 노승(老僧)이 옆구리에 차고 다닐 것만 같았다. “사장님이 술을 꽤나 좋아하시나 봐요”라고 말하자 막 통화를 끝낸 김창년(金昌年·55) 사장이 “여행작가들이 여행 다녀올 때 한 병씩 사다준 것을 모아놓은 겁니다”라고 받았다.
성하출판사는 지금까지 여행 관련 서적만 80여종을 펴낸 여행 전문출판사다. 출판하는 책의 종류를 나누자면 크게 두 가지다. 흔히 모르는 곳을 여행할 때면 불안한 마음에 한 권씩 들고 가는 가이드북과 작가가 여행을 하며 보고 느낀 바를 사진과 함께 담은 여행 에세이가 그것이다. 국내여행과 해외여행의 비율은 최근 1~2년 사이 해외여행 쪽 비중이 크게 늘어 70% 정도를 차지한다. 한 해에 출간하는 책의 종류는 10~15권 정도.
1997년 처음으로 여행 가이드북이란 것을 출간하고 여행관련 서적만 전문으로 내자고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여행에 관한 콘텐츠가 없었다. “당시엔 여행 관련 정보래봐야 잡지에서 여름특집 부록으로 내는 책자나 신문에 1주일에 한 번 실리는 여행기사 정도가 전부였어요. 물론 지금처럼 여행작가라는 것도 없었죠. 원고를 구할 수가 없어서 신문사 레저 기자들을 쫓아다니는 게 일이었습니다.”
처음엔 1년에 2~3권 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고 걱정은 없다. “여행 전문 출판사라는 명성이 쌓인 덕분인지 2~3년 전부터 원고를 보내오는 사람이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한 달에 보통 20건 이상 들어오고 특히 사람들이 여행을 제일 많이 다녀오는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엔 아마추어까지 가세해서 하루에 2~3명씩 원고를 보내옵니다.”
이제는 발품을 팔며 여행작가를 따라다니는 대신 사무실에 앉아 들어온 원고를 검토하고 기획을 하는 일이 주가 되었다. 국내 여행에 대한 기획은 김창년 사장이 맡고 해외 여행에 대해서는 이상희(38) 기획팀장이 담당하고 있다. 특히 이 팀장은 최신 여행 트렌드를 발빠르게 포착해 ‘성하’가 새로운 감각을 유지해 나가도록 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어디에 가면 무엇이 있다를 알려주는 가이드북이 중심추 구실을 하지만 여행책 시장에도 흐름이란 게 있어요. 얼마 전까지는 여행 에세이가 강세를 보이다가 요즘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심도있게 파고드는 스타일이 어필하는 추세예요. ‘중국 무림기행’ ‘파리 예술 까페기행’ 같은 책이 그런 경우죠.” “여행도 좋고, 책도 좋지만 글쓰기가 싫어서 여행작가가 아닌 여행서적 기획자가 되었다”는 이 팀장의 분석이다.
성하가 처음부터 여행 관련 서적만 취급했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시집(詩集) 중심의 문학작품을 출판하던 것을 1994년 당시 인쇄기획 일을 하던 지금의 김창년 사장이 인수했다. 처음 3년 동안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신인작가의 소설을 발간하거나 외국의 문학 작품을 번역해 출간했다.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김 사장이 말을 이었다.
“회사 사정이 나아지지 않아서 4~5년 내로 회사를 정리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주변에서 누가 여행 관련 책을 내보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여행 문화랄 게 없었지만 선진국 사람은 여행할 때 책 한 권씩 들고 다닌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곧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작비 부담이 컸지만 한번 승부를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여행서적은 컬러사진과 종이질 때문에 인쇄비가 소설에 비하면 3배 가까이 든다. 보통 재판(再版) 6000부 정도는 팔려야 현상유지를 할 수 있다. 노심초사(勞心焦思),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1997년에 펴낸 ‘주제가 있는 여행’이란 첫 번째 여행 가이드북이 1만5000부 가까이 팔려나가면서 김 사장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처음엔 그저 자구책 마련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출판업계에 발을 들인 이래 처음 맛본 성취감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또 흑백의 활자로 된 책만 내다가 생생한 컬러 사진이 담긴 책을 받아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내친김에 여행 전문으로 한우물을 파기로 했다.
“원래 ‘성하’라는 출판사 이름은 먼저 회사를 경영하던 분의 따님 이름이었어요. 여행 전문출판사로 거듭나면서 나름대로 ‘무성한 여름’이라는 의미에서 ‘盛夏(성하)’란 뜻을 담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하기 전에는 여행하면 여름휴가 다니는 거였잖아요. 여름이 무성해지면 사람들이 여행도 많이 가고 여행책도 많이 팔리지 않겠습니까.”
여행 전문출판사로 전업, 외길을 걸어온 지 10년이 다되어가는 동안 굴곡이 없었을 리 없다. “한동안 현상유지 수준을 맴돌다가 은행권을 중심으로 주5일 근무제가 처음으로 실시된 2003년엔 매출액이 전년의 두 배 수준인 6억원 정도로 뛰었습니다.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사람들이 주말을 이용해 평소 잘 모르던 전국 곳곳으로 여행을 다니려다보니 자연히 여행 가이드북을 찾게 된 거죠. 정말 그때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주5일 근무제 특수도 잠시, 작년부터 상황이 반전되었다. “성하에서 10년 가까이 여행서적만 내니까 주위에서 ‘저게 돈이 되는구나’하고 생각했는지 1~2년 사이에 여행책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어요. 그런데 이쪽은 시장이 작아서 제일 많이 팔린 책이래봐야 전체 책 순위 50위 안에 명함도 못 내밉니다. 2001년 발간돼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제주 토박이의 발로 쓴 제주여행’이 4만부 정도 나갔을 겁니다. 또 가뜩이나 불황인 데다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여행 정보를 얻는 게 일상화되다 보니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매출이 2003년의 절반 수준인 3억원 정도로 떨어졌다고 한다. 사장을 포함한 전 직원이 5명. 보통 출판사라면 그리 나쁜 실적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김 사장은 “제작 단가가 높은 여행책의 특성상 이 정도 매출로는 적자를 면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지만 ‘성하’는 외국의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과 같은 제대로 된 여행 가이드북 전집을 내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다음달 중국, 일본, 러시아 등에 이은 6번째 작품, ‘유럽편’을 출간하는 ‘알짜배기 세계여행’ 시리즈는 그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내딛는 또 한걸음이다.
“지금은 여행서적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일종의 과도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양질의 서적만 살아남는 식으로 시장이 정리될 것으로 봅니다. 또 인터넷이 아무리 최신 정보를 금방금방 날라준다고 해도 여행하는 사람들은 여행책 한 권씩 옆구리에 끼고 가지 않으면 불안해 하지 않습니까? 지금 어려운 시기에 꾸준히 여행 전문출판사로서 역량을 키워놓으면 언젠가 독자들이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김재곤 주간조선 기자(trum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