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출판사를 찾아서 (8)] 수학 전문 경문사
“난해한 기호 속에 답이 숨어있지요”

▲ 박문규 사장
서울 신촌에 위치한 경문사(京文社). 4층짜리 건물의 두 층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3층엔 편집부가 있고, 1층에는 도서전시실과 함께 한쪽에 영업·관리부원이 사용하는 사무실이 있다. 도서전시실은 아무나 와서 책을 둘러보고 즉석에서 구입해갈 수 있는 곳이다. ‘선형대수학과 응용’ ‘복소함수론 강의’ 등 책제목이 주는 위압감 때문인지 “한 권 가져다 보세요”라며 책을 빼주려는 관계자에게 강하게 양손을 내저었다. 수학책의 경우 이곳은 대형서점보다도 많은 종류의 책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경문사는 수학 서적을 전문으로 펴내는 전문출판사다. 일반인에겐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수학을 전공으로 한 사람치고 경문사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현재 수학 전공서적 시장의 60% 이상을 경문사에서 차지한다. 1979년 박문규(朴文圭·55) 사장이 창업해 1980년대 초반부터 수학의 외길을 걸어왔다.

한 해에 이곳에서 새로 출간하는 책의 종류는 100여종. 중·고등학생용 수학 문제집은 출간하지 않는다. 전체의 80% 정도가 번역서 위주의 대학 전공서적이지만 최근에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수학책의 비중을 꾸준히 늘려가고 있다. “회사설립 전에 출판영업 일을 했던 곳에서 공업·기계 쪽 도서를 주로 다뤘어요. 그러다보니 처음 회사 시작하고도 산업공학, 조선, 항공 같은 공학 쪽 책을 주로 냈죠. 당시에 카이스트(KAIST)에 책을 많이 댔는데 그쪽 사람들 하고 접촉하다보니 공학에 비해 순수 수학 책이 너무 부족하단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마침 서울대 수학과 지동표 교수가 수학책 보급에 열의를 가지고 계셔서 뜻있는 교수님들과 함께 한 권, 두 권 외국서적을 번역해 들여오기 시작했죠.” 박문규 사장의 말이다.

수학책만 팔아가지고 이익이 날까 싶은 의문이 들었다. “책이 전문적이다보니 수요가 너무 적어요. 당연히 처음엔 수지가 안 맞죠. 그런데 주위에서 ‘이런 책은 꼭 필요하니까 출간해야 한다’고 하는 책은 큰맘 먹고 출판해보면 시장조사 때하고는 다르게 책을 찾는 분이 많이 생겨요.”

경문사에서 발행하는 전공서적의 경우 1000부 정도 팔려야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다고 한다. 단행본의 경우 초판으로 3000부 정도를 찍어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전공서적의 특성상 몇백 부 정도를 찍는 것이 고작이다. 초판이 다 팔린다고 해도 수익을 낼 수 없는 구조다. 대신 ‘수학사’ ‘현대대수학’ 같은 책처럼 10여년에 걸쳐 수차례 판(版)갈이를 해가며 1만부 이상 팔린 책이 여러 권 있다. 올해 뿌린 씨앗이 5년, 10년 후에 결실을 맺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사장을 포함한 15명의 직원이 한 해 올리는 매출액이 현재 30억원 정도다.

25년 이상 출판사를 운영하다보면 우여곡절이 있을 법도 한데 큰돈을 번 적도 없지만 크게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적도 없었다고 한다. 충분한 여유자금이 확보된 다음에야 규모를 조금씩 키워나갔기 때문이다. 이 회사 편집부 박수연 실장은 “사장님이 원체 꼼꼼하시고 절대 모험을 안 하시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수학책의 경우 다른 일반 책의 출판에서 볼 수 없는 제작상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우선 고대문자를 방불케 하는 갖가지 수학기호를 저자가 요구하는 대로 채워넣는 일이 만만치 않다. “일반 조판기계에는 없는 수학기호가 사용되는 경우가 자주 있어요. 아무 데서나 인쇄할 수 없는 거죠. 개중엔 비슷한 기호로 대체하고 넘어가는 분도 있지만, 수학하는 분 중엔 꼼꼼한 사람이 많아서 자기가 원하는 기호를 그대로 찾아 써야 직성이 풀리죠. 이런 책일수록 사가는 사람은 적은데 책을 찍는 데 드는 비용은 더 많이 들죠.”

교열도 어려운 부분이다. 현재 수학과 출신 편집자가 2명 있긴 하지만 워낙 전문적인 내용이 많다보니 세세한 내용까지 잡아내는 것은 무리다. “한번은 어떤 교수님이 자신이 번역할 책의 번역을 다른 사람한테 일부 맡겼다가 책이 나온 다음에야 그 부분의 수학적 해석이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배포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해서 전부 수거했어요. 우리 쪽 교열이 이해하고 잡아내기 어려운 내용이었죠. 애초부터 제대로 번역하거나 집필할 수 있는 사람을 선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0여년 전부터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수학책도 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수학이 학문으로서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위한 교양으로까지 저변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출판업계에서는 경문사하면 수학 전공책만 취급한다는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박혀있어요. 그러다보니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단행본을 내도 서점에서 자꾸 전공서적 칸에 진열해놓는 거예요. 그래서 1998년에 일반 대중이 읽을 수 있는 단행본을 전문으로 펴내는 자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자회사의 이름은 ‘일공일공일(10101)’. 경문사보다 더 수학 냄새가 나는 이름이다. ‘10101’은 이진법 숫자로, 이를 10진법으로 바꾸면 ‘21’이 된다. 21세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지은 이름이란다. “그런데 막상 새로운 브랜드로 책을 내니까 이번에는 모르는 회사의 책이라고 해서 진열을 잘 안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경문사에서 내는 거라고 사정설명을 해주면 그제서야 믿고 진열해주더라고요. 장기적으로는 경문사라는 이름으로 다같이 안고 가야 할 것 같아요.”

홍보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광고는 거의 하지 않고 대신 각종 수학학회에 참석하고 수학 선생님, 교수님들을 만나 1 대 1 면담을 하는 식”이라고 한다. “한번은 신문에서 우리 책 소개가 한면 절반 정도로 큼지막하게 나간 적이 있어요. 야, 이거 광고효과가 꽤 있겠구나 싶었죠. 그런데 판매에는 별로 영향을 못주더라고요. 이쪽 책이 전문적이다 보니까 여러 사람에게 노출된다고 해서 매출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옆에 있던 박수연 실장이 “우리는 책 한 권, 한 권을 광고할 게 아니라, 경문사라는 기업 이미지를 광고해야 돼요”라고 거든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단행본 ‘웃기는 수학이지, 뭐야’다. 10만부 정도 팔렸다. 현재 중국과 일본에도 번역되어 수출되고 있다. 박 사장은 “이 책도 따로 홍보를 하지는 않았다”며 “운좋게도 경기도와 충청도 교육청 선정 ‘청소년이 읽어야 할 도서’에 포함되었다”고 말했다

박 사장은 “앞으로의 사업 전망은 낙관적인 편”이라고 말했다. “당장의 이익을 포기하고 국내에 필요한 책을 들여오고, 비용이 더 들더라도 저자가 요구하는 수학기호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챙겨서 책을 펴낸 것이 결국 신용을 쌓게 해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수학책 분야에서는 특별한 경쟁자가 없어요. 금방 이익을 내기 힘들다는 걸 알기 때문에 (수학책 시장에) 들어오려고 하는 사람도 없고요.” 일종의 블루오션(Blue Ocean)인 셈이다.

“수학전공자뿐 아니라 관심있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수준있는 수학교양서를 발간한다는 취지에서 1994년부터 ‘수학 산책’ 시리즈를 내놓고 있습니다. 11월에 30권이 나와요. 아직까지 외국저서를 번역해서 출간하는 데 만족하고 있지만 언젠가 국내 저자가 집필한 ‘수학 산책’을 내놓는 게 경문사 대표로서의 바람입니다.”

김재곤 주간조선 기자(trum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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