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교토일기] 교토의 아침 ‘까마귀와 함께 춤을’

서울에서는 까치 소리에 잠을 깼지만 교토(京都)에 와서는 까마귀 소리로 아침을 맞는다. 한국에는 까마귀가 없고, 일본에는 까치가 없다. 불과 200km도 안 되는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두 나라의 자연환경이 다르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쓰레기를 버릴 때도 일본에서는 반드시 망을 씌운다. 그렇지 않으면 까마귀 떼가 모여들어 쓰레기 봉지를 쪼아 사방으로 흩어 놓는다. 까마귀는 잡식이어서 아무것이나 먹는다. 쓰레기장은 까마귀의 파티 장소인 셈이다.

한국에서 그 흔하던 까마귀를 볼 수 없게 된 것은 공해나 생태계의 변화 때문이 아니다. 양기에 좋다고 하면 무엇이든 먹어 씨를 말리는 보신문화(補身文化)) 탓이다. 옛날부터 시체를 파먹는 불길한 새로 알려졌기에 아무리 남획해도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멸종돼 가는데도 두루미처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자고 수선을 피우는 미디어도 없고, 자연보호를 외치는 환경단체도 나서는 곳이 없다.

소설이나 영화 장면에서는 까마귀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사람이 죽는다. 우는 소리만 흉측한 것이 아니다. 눈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온몸뚱이가 까맣다. 그래서 새의 형상을 본뜬 새 ‘조’(鳥)자에서 눈동자를 빼내면 까마귀 ‘오’(烏)자가 된다. 조감도(鳥瞰圖)를 오감도(烏瞰圖)라고 고쳐 쓴 이 상(李箱)의 시는 결코 심술궂은 장난이 아니다. 감각적으로 보나 관념적으로 보나 리얼리티가 있다.

맨 처음 교토에 와서 바라본 그 조감도야말로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까마귀의 오감도 아닌가. 정말 그렇다. 교토에 오자마자 내 가난한 고향 풍경을 생각하게 된 것도 그 까마귀 탓이다. 마을 어귀에는 고목나무가 있고, 잎이 진 앙상한 가지에는 반드시 두서너 마리의 까마귀가 앉아 마을 초가지붕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서리에 덮인 겨울 들판과 그 시골 풍경에 까마귀보다 더 잘 어울리는 새가 있을 것인가.

어느새 떠난 줄도 모르게 우리 곁에서 사라진 까마귀를 교토에 와서 다시 보니 반갑다. 그렇다. 편견 없이 바라보면 까마귀는 두보(杜甫)가 비난한 것처럼 ‘생각이나 정서가 없이 시끄럽게 짖어대기만 하는 새’(野雅無意緖 鳴燥自紛紛)가 아닌 것이다. 늙은 부모를 모시는 새라고 하여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도 생기지 않았는가.

많은 조류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까마귀는 조류 가운데의 영장류라고 할 만큼 똑똑한 새다. 일본의 도시 까마귀들은 교통신호를 이용해 딱딱한 호두 껍데기를 깨뜨려 먹는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면 호두를 도로 위에 떨어뜨린다. 그러고는 신호가 바뀌어 자동차들이 지나가 그 껍데기를 깨뜨려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까마귀의 생태를 조사하기 위해 숲 속으로 들어갔던 한 조류학자의 놀라운 보고도 있다. 까마귀의 생태를 관찰하고 연구실로 돌아와 관찰 기록을 작성하는데 무엇이 창 밖에서 기웃거리더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 몇 시간 전 자기가 관찰하던 바로 그 까마귀 녀석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 역추적한 것이었다.

일본만이 아니다. 세계 도시의 제공권을 장악한 것은 까마귀들이다. 영국 웨일스 지방의 까마귀들은 눈이 쌓인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고 놀기도 한다. 심지어 나뭇가지를 이용해 구멍 속에 들어 있는 벌레들을 낚시질하는 동화같은 이야기들도 많다. 그렇지만 유독 한국의 하늘에서만은, 그 들판에서만은 정몽주의 어머니가 걱정할 것 없이 까마귀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도 야박하고, 그렇게도 옹졸하고, 그렇게도 텃세가 심하다는 일본 땅에서도 기를 펴고 살아가는 까마귀들인데 말이다.

유럽에서 늑대가 전멸한 것도 역시 늑대에 대한 인간의 편견 때문이었다. 이솝우화에서 시작해 서양의 동화나 민담에는 늑대처럼 나쁘게 그려진 짐승은 없다. 그렇지만 늑대는 다른 동물에 비해 결코 사악하거나 인간을 해치는 위험한 짐승이 아니다. 한자로 늑대를 ‘낭’(狼)이라고 적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보다시피 수·우·미·양·가라고 할 때의 ‘좋다’는 뜻의 양(良)자가 들어 있지 않은가.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영화에서는 늑대와 인간의 의미가 잘 설정되어 있다. 나야말로 ‘늑대와 함께 춤’이 아니라 ‘까마귀와 함께 춤을’ 춘다. 이렇게 시끄럽고 불길한 까마귀 소리를 까치 소리처럼 반갑게 들으면서 아침잠을 깨는 나의 기괴한 교토 생활은 시작된다.

일상의 노동과 반복­설거지하기 싫던 날에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음식을 만드는 것은 창조의 시간과도 비슷하다는 사실 말이다. 하다못해 라면 하나를 끓이더라도 거기에는 날것들이 불 속에서 서서히 변화해 가는 과정 그리고 전혀 다른 맛과 형태로 바뀌어 가는 생성의 즐거움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비등점을 향한 상승과 그 기대감은 잠시 우리를 지루한 반복의 노동에서 해방시킨다. 요리술은 불멸의 식욕을 만들어 내는 일상의 연금술인 것이다.

그러나 음식만큼 만들 때와 먹고 난 뒤가 다른 것도 없다. 포식 끝에 싸늘하게 식어 버린 음식 찌꺼기들은 더 이상 어떤 식욕의 대상도 아니고 창조의 변화도 아니다. 설거지는 단지 어두운 하수구로 흘러가는 고통의 상징, 희망 없는 노동일 뿐이다. 그래서 부엌일을 하는 사람들은 남은 음식을 먹어 치우는 방법을 택한다. 음식이 아까워서도 아니고 폐기물을 되도록 덜 내겠다는 독일 주부 같은 환경의식 때문도 아니다. 설거지의 양과 그 노동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먹어 치운다’는 말은 아마도 한국어에만 있는 표현인 것 같다. 일본말에는 설거지라는 고유어가 없이 그냥 ‘사라아라이’(접시닦이)라고 한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먹어 치운다는 말인들 있겠는가. 설거지가 귀찮아 음식을 먹어 치우는 이 기상천외한 일은 인간이 먹는 어떤 행위의 항목에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종래의 식문화로는 도저히 정의하기 힘들다.

희랍인들은 여자와 노예를 동일시했다. 그 이유는 단순한 차별이 아니라 노동을 경멸했던 희랍인들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동은 단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생물학적 신진대사) 것으로, 자연의 필연성에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여자들이 꾸려가는 가사노동이 바로 그런 것이다. 적어도 노동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영속성’ ‘명예’ 그리고 ‘탁월성’같은 시민의 자격과 조건을 갖출 수 없다. 누구든 가사노동에 얽매여 있는 한 본질적으로 노예인 것이다.

설거지는 가사노동 중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로, 그것은 소비와 부패에 관련된다. 설거지에는 아주 작은 비전이나 상상력이라는 것이 없다. 그리고 이 설거지의 노동에서 벗어나는 길은 먹어 치우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잉여를 없애기 위한 식사, 식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식사…. 어쩌면 여기에 바로 현대인의 특성이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른다.

희랍인의 분류에 의하면 이제 매일 설거지해야만 하는 나, 먹어 치우는 방법을 터득한 나, 분명히 나는 노예인 것이다.

닛폰바레­아! 이 청명한 날에

청명한 아침이다. 구름 한 점 없다. 이런 날을 일본 사람들은 ‘닛폰바레’(日本晴れ)라고 불렀다. 제국주의자들이 기승을 부리던 시대, 일본 사람들은 하늘의 기상까지 제 나라 것으로 자랑삼았다. 태풍·지진·해일­온갖 자연의 재난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그들의 자연을 자랑하고 사랑한다.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후지산(富士山)인데도 일본 사람들은 그것을 최고의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오히려 땅에 용암을 깔고 살아 왔기에 이렇게 청명한 날씨를 보며 “닛폰바레”라고 외친 것인지도 모른다.

img2R쌀쌀한 아침 공기가 하늘을 더욱 맑게 한다. 중천에 하얀 반달까지 떠 있어 하늘이 더욱 파랗게 보인다. 심호흡을 하면 기도로 흘러 들어간 공기 방울들이 허파에 와 닿는 미세한 감촉을 느낀다. 기체로 변한 청량음료다.

어젯밤 교토 콘서트홀에서 들었던 제르킨의 피아노 소리를 다시 듣는 것 같다. 브람스의 피아노 콘체르토…. 햇볕은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을 뚫고 갑자기 솟아나는 금관악기의 소리처럼 투명하고 눈부시다.

청중들은 잘 길들여진 짐승들처럼 조용히 앉아 음악을 감상하고, 연주가 끝나면 예의바르게 박수를 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박수다. 대부분의 청중들은 연금생활자 노인들이거나 무슨 봉사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비어 있는 자리가 한 구석도 보이지 않는다. 기침 소리 하나 없이 진지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사강의 소설 제목처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묻고 싶어진다.

초청자인 제르킨의 피아노 연주가 끝나고 2부의 시향 연주가 시작되었는데도 한 사람도 뜨는 사람이 없다. 이런 청중들이 있기에 인구 150만명도 안 되는 교토 시지만 10월로 제458회의 정기 연주회를 여는 대 교향악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주문한 프린터도, 은행의 캐시 카드도 1주일이 넘었는데 소식이 없다. ‘빨리 빨리’에 익숙한 생활 템포에 비해 여기는 모든 것이 너무 늦게 돌아간다. 이 맑게 갠 청명한 아침에 무엇을 서두르는가. 브람스를 듣던 청중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가.

방문을 열어 놓고 오랜만에 환기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어렸을 때 닛폰바레라고 부르던 제국주의의 하늘을 방 안에 들여놓기가 조금 민망스러워서다. 이중 감정 없이는 일본의 하늘을 보기 힘들다.

병원에서­아픔에도 국적이 있다.

불고깃집에서 나오다 다리를 다쳤다. 연구소 가까이에 있는 M정형외과. ‘수부’에서 진료 신청을 하니 카드 한 장을 준다. 병원을 찾게 된 이유와 증상 그리고 여러 가지 항목이 설문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미리 환자의 병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으면 면담 시간도 줄일 수 있고 정확한 진찰도 가능해질 것이다. 병은 의사보다 환자가 더 잘 안다는 교훈을 실제 임상에서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카드를 쓰려는 순간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발목이 삐끗한 것이다. 삔 것도 아니고 그냥 접질린 것인데, 그것을 일본말로 쓰자니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만요슈’나 ‘고킹슈’ 같은 일본의 고대 시가는 읽을 줄 알면서도 막상 자기 몸의 간단한 아픔을 표현하려고 할 때는 벙어리가 되고 만다.

우선 헛디뎠다거나 뒤틀렸다거나 뼜다거나 하는 것은 그럭저럭 일본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해도, 통증을 적으라는 항목에 이르러서는 막막하기만 하다. 화끈거리고 쑤시고 뻑적지근하고… 무엇보다 시큰거린다는 말을 어떻게 ‘왜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말이 있기는 한가.

아무리 불친절한 간호사·의사라고 해도 한국말로 실컷 아픔을 호소하던 그 때가 좋았다. 인체의 생리는 글로벌한 것이다. 중국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전 세계를 떨게 하지 않았던가. 얼굴색이 달라도 피는 똑같이 붉고 혈액형도 같아서 백인의 피를 황인종이나 흑인의 몸에 수혈할 수 있지 않은가. 인간의 몸은 누구나 같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 가도 몸은 이방인의 의사에게 맡길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유일한 것이다. 문화의 몸 유전자를 가진 그 몸은 세계 속에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문화가 다르면 같은 병, 같은 증상이라도 그 아픔이 다르다. 아픔을 표현하는 언어와 수식은 나라마다 제가끔이다. 욱신욱신 쑤시는 것을 한국말 이외의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그들은 아리고 쓰린 차이를 어떻게 표현하고, 머리가 멍한 것과 띵한 것, 배가 살살 아픈 것과 묵직한 것을 어떻게 구별해 말할까.

언어가 없으면 의식도 없다. 아픔에 관한 표현이 없다면 그 아픔의 느낌도 없다. 병은 같아도 아픔을 느끼는 감각과 마음은 정말 다른 것인가.

인간의 몸은 가장 보편적인 것 같으면서도 가장 유별난 것이라는 역설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신체성, 그것이 나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다. 하나밖에 없는 이 한국인의 몸을 지금 저 일본 사람이 손으로 촉진하고 X­레이로 투사한다. X­레이 사진에는 내 삔 다리의 관절과 그 뼈들이 무슨 화석이나 대나무 모양으로 찍혀 나올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 무슨 국적이 있고, 고유한 수사학을 허용하겠는가.

붕대로 감은 발을 겨우 구두에 구겨 넣고 병원 문을 나선다. 눈부신 토요일 10시, 절뚝거리며 택시를 잡으려고 길가에 서 있는 모습….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내 몸이며 세계의 몸이다.

축소 지향과 ‘가이세키’ 요리

도쿄(東京)에서 학생사 사장이 찾아왔다. 거의 10년 만의 재회다. TBS 방송에서 ‘축소 지향의 일본인’을 방영하는 데 필요한 저작권 동의서도 가지고 왔다. 20년 전에 간행한 책인데 그 동안 영역본, 프랑스어역 그리고 일영 대역본, 문고본, 소니의 전자출판 등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대학 입시 문제나 방송사 같은 데서 인용할 때마다 동의서다, 허락서다 하는 것들을 보내온다. 솔직히 ‘축소 지향의 일본인’ 이야기가 나오면 20년 전에 벗어 놓고 온 헌 옷을 다시 입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거북하다. 이번에는 새 옷을 만들어 입자고 다짐한다.

도쿄대 출신 학생사 사장은 일본의 전통 문화에 관심이 높은 식도락가다. 그래서 식사 대접은 으레 일본의 최고급 전통 요리점에서 한다. 이번에도 로열 호텔에 있는 깃죠(吉兆)의 ‘가이세키’(懷石) 요리다. 원래 가이세키 요리는 문자 그대로 돌을 품는다는 뜻이다. 선승(禪僧)들이 수행하다 점심 식사 때가 되면 돌을 배에 품고 끼니를 때운다는 뜻에서 비롯한 음식명이다. 그래서 양도 작고 채식이 주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렇게 검소하고 절제된 전통음식을 최고로 값비싸고 질 높은 요리문화로 승화시켰다. 우리의 궁중요리와 정반대다.

‘깃조’의 역사 하나만 봐도 교토의 음식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 이 창업자는 요리 하나로 일본에서 처음 인간문화재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 그에게 음식점을 내 요리를 만들어 판다는 것은 생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음식을 만드는 일은 노동이 아니라 예술가의 작업과 같은 것이고, 한 걸음 더 나가면 고행승의 수도와 같은 종교 행위일 수 있다.

노동이 예술로, 예술이 종교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이 바로 생계에서 벗어나고 노동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이다. 일본의 장인정신이란 바로 가난이 아니라 그 가혹한 노동에서 벗어나려는 꿈이었던 셈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돈 자체, 생계 자체에 목적을 둔 일은 노예노동과 다를 것이 없다.

가이세키 요리만이 아니라, 그가 만든 ‘쇼가도벤도’(도시락)도 유명하다. 안을 십자로 나눠 네 칸에 각기 다른 음식을 담도록 고안한 도시락인데, 가난한 서민들이 물건을 정리해 두는 상자를 보고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설명을 듣다, 한국의 구절판을 보았더라면 기절했을 것이라고 혼자 생각하며 몰래 웃었다.

일본인들은 창의력은 별로 없어도 이미 있는 것을 임기응변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응용술은 뛰어나다. 그러니 영어로 말하면 invention(발명)이 아니라 innovation(개발)에 강한 셈이다.

빨갛게 물든 감잎에 음식을 올려 놓은 것이 인상적이어서 물어보았더니 ‘오치바’(낙엽) 요리라고 한다. 계절 감각을 음식에 담는 것이 일본 요리문화의 특성이라고 자랑한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단풍의 명승지에서 그 이파리들을 따다 비닐로 포장해 파는 것을 보고 ‘대체 누가 저런 것을 사 가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그 수수께끼가 풀린다.

아름다운 요리들이 미술 전람회처럼, 혹은 조각의 숲처럼 차례차례 전개된다. 그것을 한순간에 먹어 버린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색채와 향기와 입체적인 조형미가 무너지고 사라진다. 덧없이 사라지는 아름다움. 영속하지 않기에 더욱 아름다운 무상미(이런말이 있던가), 죽음의 미학을 일본 미학의 근원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들이 벚꽃을 사랑하게 된 것도 피는 꽃보다 지는 꽃의 아름다움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가이세키 요리는 보석같이 작다. 한 젓가락도 채 안 되는 음식을 입에 물고 황홀해하는 일본인들을 보고 있자면 조금 답답해지기도 한다. 갑자기 떠들썩한 한국의 불고깃집 광경이 떠오른다. 끼니를 굶는다고 하면서도 그 음식만은 푸짐한 한국, 상추에 밥과 불고기 그리고 이것저것 반찬을 하나 가득 싸 도저히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쌈 보따리를 입 안에 집어넣고 땀방울을 뻘뻘 흘리는 놀라운 광경을 보라. 일본인은 눈으로 먹고, 한국인은 온몸으로 먹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산책길의 무서운 광경­장애자가 많은 일본

앞이 보이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걷는 것이 아니다. 미리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걸어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걷는다기보다 접근해 간다는 말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그러나 구부러진 길을 돌아서는 것, 그래서 새로운 길이 전개되는 것, 그 순간이야말로 걷는 것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을 안다. 산책 때마다, 굽은 길을 돌 때마다 어떤 두려움이나 불안을 느낀다.

예기치 못한 무엇이 불쑥 나타날 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거기에서 기다린다. 텅 빈 길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나타나는 순간은 작은 모험으로 반짝인다. ‘아방튀르’. 그렇다. 아방튀르. 이것이 보이지 않는 굽은 길을(그것을 일본 사람들은 ‘마가리도오리/曲がり通り’라고 부른다) 걸어가는 삶이다.

늘 똑같은 코스의 아침 산책길인데도 산길을 돌아설 때마다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이번에는 창문에 쇠창살을 한 검은 밴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차 앞에는 웬 남자 하나가 오줌 누는 자세로 숲을 바라보고 서 있다. 무심히 지나려는데 자동차의 경적이 울린다. 그러자 그 사내는 소리지르며 도망가려고 하고, 그를 잡으려고 차 안에서는 건장하게 생긴 사람들이 뛰어나온다. 뜻하지 않은 새벽의 경주에 혼비백산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이쪽이다. 끌려오는 그 남자의 비명은 동물의 포효에 가깝다.

그 남자는 아마도 정신박약이거나 정신질환자인 것 같고, 검은 밴은 병원이나 무슨 수용소에서 사용하는 특수차량이었던 것 같다. 그를 잠시 풀어 주어 아침 운동을 시키려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일본에는 이렇게 이상한 장애인들이 많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히키고모리’(자폐증 환자)들이 수십만 명이다.

모퉁이 길을 걸어가는 것은 늘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무엇인가,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똑바른 길로 앞만 보고 걸어가면 일본이 보이지 않는다. 돌아가는 길목에 항상 이상한 아방튀르가 있다. 일본 전체가 지금 이 마가리가도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모퉁이 길을 돌아서면 흰 길 위에 무엇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누군가가 흘린 호루라기 같은 것. 야구 글러브 같은 것. 평범한 낙엽이라고 해도 모퉁이 길을 돌아 처음 만나는 물건들은 음흉한 덫이 되기도 하고 은방울같이 진동하는 돌멩이가 되기도 한다.

모퉁이 길을 돌아서면 나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참새처럼 이야기하는 아이들이거나 개를 끌고 나온 여인들 혹은 위태롭게 보행 연습을 하는 중풍 걸린 노인들이거나 그래도 나는 처음 만난 사람들을 향해서 마음 속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내일 다시 이 모퉁이 길을 돌아서면 다른 것들이 보일 것이다. 어제 보던 것들은 다 사라지고 그 대신 그 자리에 또 다른 것들 버린 은박지와 담배꽁초와 어깨가 딱 벌어진 건장한 남자가 청바지를 입은 찰스 브론슨처럼 담배를 피우며 중풍 걸린 노인이 꺼져 가던 그 자리에 솟아 있을 것이다.

일본인들의 상혼­‘아키나이’의 의미

편지함에 오랜만에 우편물이 들어 있다. 기대와 달리 쇼핑 광고물이다. 고추와 마늘의 두 성분을 추출해 건강 미용 다이어트 약품으로 개발한 캡슐 샘플이다. 니가타(新瀉)에 있는 SMC라는 회사의 그 선전물에는 놀랍게도 ‘한국인의 힘’이라는 카피가 붙어 있다. 그리고 한국 본바탕 고추로 만들었다는 캅사이신 성분에 대해 자세히 적어 놓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추와 마늘은 모두 조센징(한국인)을 경멸하고 비하하는 상징물이었다.

NHK의 초청으로 정경화가 일본에서 처음 바이올린 연주회를 가졌을 때 일본 비평가 하나는 “드디어 베토벤이 닌니꾸 쿠사구났다”(베토벤의 음악에서 역겨운 마늘 냄새가 난다)고 해서 말썽을 빚은 일이 있다. 그런데 어느새 마늘과 고춧가루가 일본 소비자 대중을 사로잡는 광고의 카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그 선전문에는 한국인의 에너지와 건강, 아름다움의 비결은 바로 이 고추와 마늘 -김치의 주원료인 그 식문화에서 온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특히 사스 때 한국의 김치­이 살균 효과가 있다고 해서 중국과 일본에서 한류 바람이 불기도 했다. 그런 유행을 등에 업고 개발된 신제품인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작은 비닐 봉지에 캡슐을 넣어 선전지와 함께 배포하고 있다. 당장 먹으면 체온이 올라가 지방을 분해하는 효과를 느낄 수 있고, 조금 지나면 다시 체온이 떨어지고 혈압이 내려가는 작용을 체험할 수 있다는 거였다.

식문화만이 아니다. 주거문화에서는 한국의 온돌식 바닥난방(유카단보)이 최첨단 신개발품으로 선전되고 있다. 그 TV CF는 “한국에 가서 아주 놀라운 것을 보았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것을 가져다 그들은 우리보다 한 발 앞선 상품으로 개발한다는 사실이다. 상업을 일본말로 ‘아키나이’라고 하는데 ‘싫증나지 않는 것’도 그 음이 같은 ‘아키나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아키나이와 아키나이라는 말로 상업의 즐거움을 강조한다.

교토의 호시야마 김치는 유명하다. 호시야마는 한국어로 읽으면 성산 -성산이 고향인 모양이다. 일본 땅에서 담근 김치인데도 한국의 김장김치처럼 싱싱하다. 아니다, 한국의 본고장에서 만들어 내지 못하는 새로운 김치를 개발해 특허까지 신청하고 있다. 식품연구소에 의뢰해 김치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그 성분을 추출해 김치의 셀링 포인트로 개발하고 또 광고한다. 호시야마 김치는 한 종류가 아니라 ‘e-기무치’ ‘앗사리 기무치’ 그리고 우리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가바(GABA) 기무치’라는 것도 있다.

가바 기무치는 유산균의 작용으로 김치 100g 안에 발아 현미 약 800g 분의 아미노산 가바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혈압 안정 작용, 사람의 몸을 이완시키는 작용 등을 한다. e­기무치는 구루타지온 등의 성분이 있어서 활성산소 제거와 면역력 향상 그리고 해독 작용, 미용 효과, 간장 기능 강화, 암 예방 등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동포인 한국인인데 그리고 같은 김치인데 일본에 오면 이렇게 달라진다.

왜 우리는 본고장 단군신화 때부터 애용한 마늘 식품을 새로운 기능식품으로 상품화하지 못했는가. 어째서 우리는 김치냐, 기무치냐로 싸움만 하면서 현대문명에 맞도록 그것을 건강식품으로 개발해 발전시키지 못했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 그 맛있는 호시야마 김치가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정치도, 기업도, 교육도 모든 문화가 과거심리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 그것을 미래심리의 문화로 고쳐가는 것, 그것이 일본을 이기는 길이다.

일본인의 청결벽­항균제 시장

손을 씻는다. 온 종일 집에 있으면 손을 씻는다. 던컨 왕을 시해한 맥베스가 피 묻은 손을 씻는 황몽에 시달리듯 손을 씻는다. 취사 일을 하면서부터 생긴 버릇이다. 음식이 묻거나 그릇을 씻거나 욕조의 얼룩을 지우거나 무슨 일만 하면 손이 더럽혀진다. 이 손으로 나는 거의 50년 가까이 글만 써 왔는데, 이제는 이 손으로 밥도 하고 찌개도… 그리고 청소와 쓰레기 버리기에서 창을 열고 환기하는 일까지 모두 이 손으로 한다.

일할 때마다 비누로 씻고 제균제로 씻고 클리너와 타올과 내프킨 그리고 행주로 씻는다. 냄새가 조금 나도 씻고 수건으로 씻고 난 다음 그 수건이 조금 더러운 것을 알게 되면 다시 휴지를 꺼내 씻는다.

에도(江戶) 때 서양 사람들이 일본에 와서 맨 먼저 받은 인상은 청결하다는 점이다. 일본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하지 않고 ‘기레이’(깨끗하다)라고 말한다. 깨끗한 것과 아름다운 것은 사실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더러운 컵을 씻었다고 그것이 아름다운 컵이 되는 것은 아니잖은가.

일본인의 이 청결벽 때문에 일본은 세계에서 살균제가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가 되었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웬만한 물건에는 ‘제균’(除菌) ‘항균’(抗菌) ‘멸균’(滅菌) ‘살균’(殺菌) ‘소독’(消毒) ‘소취’(消臭) 같은 말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사용한 볼펜을 만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항균 볼펜이 나오고, 전동차의 손잡이 가죽을 만지지 못하는 사람들용으로 제균 티슈 페이퍼를 판매한다. 자기가 눈 변 냄새를 없애기 위해 먹는 약까지 시판하는 나라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병균에 대한 면역력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떨어진다며 ‘청결망국론’을 펴는 의사들도 있다. 일본의 청결벽은 자랑이 아니라 O-157 등 변종 바이러스 시대에는 커다란 두통거리로 떠오르기도 한다. 대장균은 인간과 수천 년 동안 서로 공생 관계를 맺고 별 탈 없이 지내 왔다. 그러나 항생제나 다른 의약품을 쓰는 바람에 장내 환경이 달라져 대장균이 이질균과 서로 결합해 특수한 신종 병원균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 바로 O-157이다. 한국인들은 이질에 걸려도 아무렇지 않지만 일본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일본에 와서 나도 이 청결벽에 걸렸는가. 아니면 제균제와 멸균제를 많이 사다 놓은 탓인가. 이렇게 손을 씻다 보니 내가 온 종일 생산하는 것은 쓰레기통에 버리는 휴지들이다.

저녁에는 무코마치(向日町) 역 근처에 있는 중국집 ‘사이’(菜)라는 곳에서 한국에서 온 연구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일본의 중국집은 한국의 중국집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역시 항균 실험실처럼 청결하고 실내장식도 일본화되어 있다. 입구에 한약의 샘플을 담은 병이 병원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이 중국음식점은 중국요리에 한약재를 넣어 만드는 것으로 유명해진 곳이라고 한다. ‘식의동원’(食醫同源)의 중국 전통을 이용한 상술이다. 누가 그랬던가. 문화는 사회의 간접자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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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계 강타한 초 베스트 셀러의 ‘대박秘話’

‘초짜’가 대박을 만든다

지금까지는 주로 밀리언셀러를 ‘만드는’ 측면에서 살펴봤다. 그렇다면 밀리언셀러를 ‘쓰는’ 작가들은 과연 누구인가.
국역본이 430권이나 되는 방대함과 기술(記述)의 엄밀성으로 인해 일반인들이 가까이 하기 어려운 “조선왕조실록”을 한 권으로 축약해 역사서로는 드물게 130만권이나 팔린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 들녘)은 비록 대학에서 독일어와 철학을 전공하고 전문 글쓰기를 위한 10여년의 노력을 거친 전문 집필가의 책이기는 하지만 역사학자가 쓴 책은 아니다. 이 책은 비전공자의 대중적 역사 쓰기라는 점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철저하게 외면받았다. “지나치게 왕조사의 관점에 치우쳐 민중사를 외면했다.” “‘실록’인지 ‘이야기책’인지 구분이 안된다.” “역사서의 기본을 저버렸다”는 등 비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대중의 역사인식 눈높이와는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이후 비전공자들에 의해 씌어진 대중역사서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계기가 됐다. 비전문가로서 더욱이 신인이 일을 낸 대표적 사례다.

‘한국 방송 최초로 해외특파원을 지낸 여기자’ 전여옥. 34세의 젊은 신인이 내뱉은 새로운 일본론인 “일본은 없다”(지식공작소)가 1993년말 서점계를 강타한다. 저자는 ‘일본은 밉지만 그들의 장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식으로 상식처럼 전개되던 일본론을 일거에 뒤집고 ‘일본은 배울 점이 하나도 없는 나라’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이후 “일본은 있다”(서현섭, 고려원)는 책이 출간되자 우리 사회에는 ‘(일본은) 있다 없다’ 논쟁까지 벌어지면서 ‘겁없는’ 신인의 책을 밀리언셀러로 밀어올렸다.

고독, 은밀함같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쉬운 시어와 잔잔한 호흡으로 노래한 “홀로서기”의 서정윤도 겁없는 신인이 일을 낸 경우. 서씨는 예기치 못한 성공으로 평단의 냉정한 질책과 사랑하던 이와의 이혼과 재결합이라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사별한 아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노래한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도 신인의 작품이 밀리언셀러에 오른 경우.

대박 등극을 돕는 수호천사들

밀리언셀러의 경우 출간 초기 의외의 독자들이 나타나 대박 등극의 1등공신 역할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는 출간 초기 피라미드 판매로 유명한 암웨이사의 사원들이 교육용 혹은 선물용으로 집중구매했다는 후문이 있다. 초기에 이들이 책을 집중구매하면서 즉시 베스트셀러에 진입했고, 그 사실은 다시 화제를 불러일으켜 그로 인해 책의 판매가 다시 증가하는 확대재생산의 길을 걸어왔다. 이같은 방식은 밀리언셀러를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다.

“좀머씨 이야기”(파트리크 쥐스킨트, 열린책들)는 출간 초기에는 평범한 수준의 판매밖에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청소년들의 출입이 많은 영풍문고에서는 유독 판매가 많아 종합 베스트 순위에서 빠지지 않았다. 그 이유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열린책들은 여중·고생들에게 구전되며 팔리는 것을 확인했다. 열린책들은 즉각 이들 핵심독자들이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 ‘별이 빛나는 밤에’에 광고를 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수천억원대에 이르는 비자금 조성으로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일반인들에게 허탈감을 안겨 주었으며 이런 사회분위기는 “좀머씨 이야기” 속의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이로 인해 “좀머씨 이야기”는 결국 밀리언셀러가 됐다.

일본에서 출간된 지 2개월만에 102만권이 판매돼 단기간에 밀리언셀러에 오른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오히라 미쓰요)는 중학생때 이지메(집단괴롭힘)를 견딜 수 없어 할복자살을 기도했다 겨우 살아난 뒤 야쿠자와의 결혼, 이혼, 술집 접대부 생활을 거쳐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한 여성의 자전적 이야기다. 이미 팔다리가 없는 한 청년의 인생 대만족 이야기인 “오체불만족”(오토다케 히로타다)을 펴내 500만권 이상 판매하면서 아이들의 생활이 중심이 된 책의 가치를 절감한 고단샤(講談社)는 오히라의 책을 아예 아동용으로 펴냈다. 이지메와 공부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아동들의 자살이 급증하는 상황도 고려됐다. 지은이에게는 이지메와 비행에 대해 그때의 기분을 떠올려 당시를 재현해 줄 것과 중학교 졸업이 전부인 학력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극명하게 써줄 것을 요구했다. 성인들이 관심있어 할 야쿠자와의 생활과 접대부 생활 이야기는 완전히 배제했다.

초판 2만권을 발행한 이 책은 아동용으로 펴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독자는 주로 40∼60대 여성이었다. 출판사에는 자식들에게도 읽어 주고 싶다는 이들이 전화가 쇄도했다. 책이 출간된 지 한달이 지나서야 10∼20대 연령층에서도 독자가 늘어 지금은 모든 세대에서 폭넓게 읽히고 있다. 아동용은 초기독자를 부모세대에 맞춰야 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해 주는 사례다. 국내 분야별 베스트셀러 목록 중 유독 아동 부문에서는 양서가 대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흔히 과거 엘리트 중심의 독서시장이 대중화 단계를 거쳐 전문화 단계로 들어섰다고 말한다. 시장성의 포인트는 전문적(special)인 영역과 일반적(general)인 영역이 절묘하게 만나는 접점이라고 한다. 전문성과 대중성의 조화, 재미와 품격의 겸비가 바로 이 시대 시장성의 키워드인 것이다.
출간 초기의 독자들 외에도 대박 등극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또 있다. “상실의 시대”의 경우를 보자.
현대전자의 ‘걸리버 네오미’라는 핸드폰 광고에는 ‘상실의 시대’(무라카미 하루키)가 등장한다. ‘지금 그녀는 어떤 책을 읽고 있을까’라는 카피와 함께 인연을 만들기 위해 그가 읽는 책을 검색하는 장면에서는 “상실의 시대”라는 책 제목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 책의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지만 국내에서는 열림원판 “노르웨이 숲”보다 문학사상사판 “상실의 시대”가 압도적으로 판매우위를 보였다. 바로 이 핸드폰 광고가 그 우열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대박과 유행어

소설가 이문열은 밀리언셀러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로 손꼽힌다. “소설 동의보감”은 출간 초기에는 판매가 저조하다 이씨가 조선일보에 “‘소설 동의보감’이 주는 감동이 이처럼 큰 까닭은 무엇일까. 권유 때문에 마지못해 잡았는데도 한번 책을 펴자 하룻밤 하루 낮을 꼬박 바쳐 세 권의 책을 내리 읽게 한 강력한 흡인력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쓰자마자 폭발적으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이씨가 ‘실로 오랜만에 나를 바로 그러한 감동과 충격으로 밤을 새우게 만든 책’이라고 신문에 서평을 쓴 “영원한 제국” 또한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는 H.O.T가 감명받았다는 한마디에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지난해 밀리언셀러에 오른 “가시고기” “해리포터” 시리즈,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는 모두 텔레비전 ‘9시뉴스’에 소개돼 판매를 크게 늘린 경우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스티븐 코비, 김영사)은 한 재벌그룹 인력개발실에만 3억원어치를 납품할 정도로 기업체의 후원을 받았다. “천년의 사랑”은 전국의 도매상 업자들이 부산에 모여 “한번 밀어보자”는 결의를 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소비는 개성화, 다양화되어 간다지만 현대인의 유행 집착병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도를 더해 가고 있다. 신드롬 문화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시대를 사는 대중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채용한 집단적 카타르시스’의 한 형식이라고 한다. 오늘날 인간은 자기의지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하면 된다’는 신화는 붕괴된 지 오래다. 그럴 때 인간은 의지할 곳조차 잃어버린 채 혼돈 속에 빠지게 된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혜성처럼 나타나는 것이 신드롬. 신드롬은 당연히 유행어를 낳는다.

“아버지”의 성공 이후 아버지 열풍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가시고기” 속의 아버지, 딸과 아내가 죽어 가는 와중에도 간이역이라는 평생직장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김없이 깃발을 흔들며 모든 것을 바치다 결국 가족과 일터를 모두 잃고 쓸쓸하게 퇴장하는 “철도원”(아사다 지로, 문학동네) 속의 아버지 등은 자식에게 정서적 차원의 애정밖에 보여주지 못하는 ‘가난한 아빠’다. 반면 IMF로 인해 돈이 없으면 가족해체뿐 아니라 ‘국가해체’까지 올수 있다는 경험을 한 대중은 ‘부자 아빠’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성공 이후 일간지들은 ‘부자 아빠 만들기’ 시리즈를 경쟁적으로 연재하고 있다. ‘고개 숙인 아버지’라는 유행어는 어느새 ‘부자 아빠’로 바뀌었다.

“소설 동의보감”의 성공 이후 출간된 “소설 토정비결”(이재운) “소설 목민심서”(황인경) 등은 모두 밀리언셀러에 올랐다. 세 소설이 강력한 인물역사소설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자 교과서에 오를 만한 역사적 인물은 모두 소설로 거듭 태어났다고 봐야 할 정도로 역사인물소설 붐이 일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의 성공 이후 “우리 문화유산답사” “한국인의 문화유산 탐방기” “나의 양반문화 탐방기” 심지어 “남의 문화유산답사기” 등 제목이 닮은 책들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대박 터뜨리면 망한다?

이토록 모든 출판인들이 찾아 헤매는 밀리언셀러는 무조건 ‘부’와 ‘영광’만을 가져다 주는가? 출판계에서는 밀리언셀러가 세번 터지면 탄탄대로이지만 단 한번의 성공은 오히려 악재가 되기 십상이라는 풍문이 정설처럼 떠돈다. 더구나 창업 초기 베스트셀러의 맛을 본 출판사치고 망하지 않은 출판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부산의 한 서적도매상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조세희)의 문학과지성사를 제외하면 문을 열자마자 베스트셀러를 낸 출판사치고 살아남은 경우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곤 한다.

중앙일보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가 1999년말 공동선정한 ‘20세기 베스트셀러 20’<표 참조>을 펴낸 출판사 가운데 고려원·행림·청하·둥지·삼진기획·다나 등이 부도라는 비운을 겪었다. 일부 출판사는 다른 사람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밖에도 밀리언셀러에까지 오르지는 못했지만 베스트셀러를 펴내던 많은 출판사들이 도산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밀리언셀러의 탄생은 계속된다

그렇지만 밀리언셀러를 향한 출판인들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특이한 것은 지난해 밀리언셀러에 오른 책들은 모두 개인이나 가족에 대한 헌신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990년대 내내 대중은 국가니 민족이니 역사니 하는 큰 이야기보다 ‘사적 일상’이라는 작은 이야기를 다룬 책을 즐겼다. 그 연장선상에 선 2000년에도 개인주의라는 ‘무의식의 너울거림’은 더욱 차고 넘친다.

독자들이 단지 사용자(user)로 전락했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이것은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통해 자아성취나 더 높은 인식의 단계를 획득하고자 하는 독자층, 즉 근대적 의미의 독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리에는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대중이 들어섰다. 그들은 밀리언셀러와 같은 메가트렌드 상품을 끊임없이 탄생시키고 있다. 소비가 개성화되면 다양한 상품의 소비가 이뤄질 것으로 말하지만 오히려 메가트렌드 상품의 등장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는 상품을 사서 쓰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지니는 ‘기호가치’를 소비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은 끊임없는 소비를 통해 욕망을 교환하고 시장확대와 광고를 통해 소비를 채찍질당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해지는 것은 대중에서 소중(小衆)의 시대로 치닫는 현대에 대중은 오히려 무언가를 공유하고 싶다는 의식을 갖게 되고, 모든 개인은 대중이 열광적으로 소비하는 메가트렌드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안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대중의 이런 유행집착병은 개성사회에서 개성의 상실을 가져오는 것이지만 이런 추세는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출판시장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메커니즘에 편입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 시스템에서는 책도 대중의 욕구에 맞기만 하면 밀리언셀러에 등극할 것이며 앞으로도 그런 추세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단지 한번 읽고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면 그만일 책일수록 크게 팔려나가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일 뿐.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한국출판계 강타한 초 베스트 셀러의 ‘대박秘話’

지난해 국내에서는 밀리언셀러가 무려 네권이나 탄생했다. 각막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구하고 자신은 간암으로 죽어 가는 눈물겨운 부성애를 다룬 소설로 모두 105만권이 판매된 “가시고기”(조창인, 밝은세상), 새로운 영어 학습법을 제시해 영어공부의 패러다임을 바꾸며 시리즈 전체로는 130만권이 판매된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정찬용, 사회평론), 돈이 부족한 것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도발적 메시지로 우리 사회의 뇌관을 건드려 ‘돈’과 ‘부자’라는 말을 공론화시키며 100만권이 판매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 외, 황금가지), 고아 소년이 마법을 배워 부모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고 마침내 마법의 영웅이 된다는 이야기로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 전세계 어린이들을 책벌레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전세계에서 6,600만권, 국내에서만 300만권이 팔린 “해리포터” 시리즈(조앤 K. 롤링, 문학수첩) 등이 바로 그것이다. 과거 몇년간 실종됐던 밀리언셀러가 한꺼번에 네권이나 탄생하면서 국내 출판계는 모처럼 활력을 얻었다.

밀리언셀러는 모든 출판인의 꿈이다. 하지만 밀리언셀러는 노력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대박’에는 천운이 작용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만큼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출판계는 IMF 이후 2년을 제외하고는 1990년대 이후 매년 밀리언셀러를 탄생시켰다.
소위 말하는 ‘대박’ 즉 밀리언셀러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이미 탄생한 밀리언셀러의 분석을 통해 밀리언셀러에 얽힌 9가지 법칙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지난해 밀리언셀러에 등극한 책들의 탄생 전말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임자는 따로 있다

“가시고기”는 한 출판사에서 원고 검토를 끝내고 출간 준비중이었다. 그 전에도 이 원고는 우리나라 유수의 출판사인 J출판사 등의 손을 거쳤으나 정작 출판은 거부당했다. 이 출판사 역시 산적한 다른 일 때문에 차일피일하는 사이 밝은세상에서 저자를 설득해 출간을 밀어붙였다. 원고를 검토하던 밝은세상의 김석원 사장은 너무나 슬퍼 마지막 장은 차마 읽지 못했다고 한다. 아빠 곁을 떠나는 아이가 아빠의 귓불을 만지는 장면에서 30분은 족히 울었다는 것이다. 태어나 그렇게 많이 울어보기는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감동한 김사장은 바로 출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저자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이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 책을 검토할 당시 김사장은 이미 펴낸 소설 “남자의 향기”(하병무)의 영화화에 손댔다가 큰 손실을 입는 바람에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 책 한 권으로 그동안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의 원고는 저자와 친분관계가 있던 지식공작소에서 1년여 정도 검토기간을 거치며 묶여 있었다. 이후 민음사·미래M&B·키출판사 등으로 원고가 넘어갔으나 그때마다 모두 외면당했다. 영어책이면서도 영어단어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이 원고를 어떻게 책으로 만들어낼 것인지 편집자들은 반신반의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은 편집자가 원고를 읽어보면 대강 책 모양이 그려지게 마련인데 이 책은 그런 상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펴낸 사회평론은 원고를 검토한 지 불과 열흘만에 저자와 출판계약을 했다. 계약 당시 사회평론은 “이런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국내에는 이런 책을 쓸 사람도, 이런 종류의 책도 없다. 원고의 내용은 그럴 듯하다. 이런 식으로 영어를 해서 된다면 나도 해보고 싶다. 이 책은 ‘도’ 아니면 ‘모’다. 완전히 실패하거나 대박을 터뜨리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사회평론은 IMF 이후 월간지 “사회평론 길”에 기약 없는 휴간의 팻말을 붙이고, 거래처의 도움을 받아 하루하루 돌아오는 어음을 막기에 급급했다. 한마디로 부도 일보 직전이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는 국내에 닷컴 열풍이 노도처럼 몰아칠 때 전세계에 온라인서점 열풍을 몰고온 아마존닷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황금가지(민음사의 계열사)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1999년 5월경이었다. 국내 베스트셀러 목록과 아마존 베스트셀러 목록이 닮아가는 추세여서 국내의 수많은 출판사들도 아마존의 베스트셀러 1위였던 “Rich Dad Poor Dad”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어드밴스’(외국서적을 번역 출간할 경우 원래의 출판사에 주는 계약 선불금)가 문제였다. 여러 출판사들이 달려들다 보니 어드밴스 오퍼 금액만 자꾸 올라갔다. 일부 출판사는 이미 번역을 끝내 놓고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무리한 액수의 어드밴스를 좀처럼 제시하지 않는 황금가지 역시 오퍼 금액을 높여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평소보다 높은 어드밴스 때문에 고민하던 황금가지의 편집자는 추석연휴를 맞아 귀성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손에 잡으니 놓을 수가 없었다. 문장이 쉽고 평이할 뿐 아니라 무척 재미있었다. 그의 기억에 외서를 출판계약하기 전에 다 읽은 책은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사실 황금가지(민음사)는 외서의 경우 출판경쟁이 붙으면 포기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사장 이하 전 편집진에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됐고, 모두 눈에 콩깍지가 씌웠나 싶을 정도로 홀려 달려들었다.
영국의 한 가난한 이혼녀가 쓴 “해리포터” 시리즈는 이미 200개 언어로 번역될 정도로 전세계에 돌풍을 몰고왔다. 문학수첩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출간하게 된 데는 기획자의 5전6기의 끈질긴 노력이 숨어 있다. 당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에는 아동용 책으로 소개된 “해리포터” 시리즈가 계속 상위에 랭크되고 있었다. 출판기획자의 눈에 이런 기이한 현상이 띄지 않을 리 없었다. 당장 원서를 주문해 꼼꼼히 살펴보니 한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문학출판의 영역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었던 문학수첩 경영진은 선뜻 아동서를 출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담당자는 기획서를 무려 다섯번이나 올리며 끈질기게 경영진을 설득했다. 좁은 아동출판시장, 아동출판 경험, 그리고 높은 어드밴스 등으로 망설이던 경영진도 기획자의 계속되는 설득에 마침내 출판을 결정하게 됐다.

“해리포터” 역시 국내의 수십여 출판사가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1권의 번역본은 이미 민음사·문예출판사 등 유명 출판사들의 손을 거친 다음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어드밴스가 문제였다. 저작권 대행사는 모두 7권으로 기획된 이 시리즈의 어드밴스로 권당 1만5,000달러를 요구하고 있었다. 국내에서의 시장성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10만달러 이상을 거는 모험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영국에서도 블룸즈베리 출판사가 출간을 결정하기 전 무려 9개 출판사를 전전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블룸즈베리 출판사 역시 이 책이 지금과 같은 성공을 거두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웃 일본에서 이 책이 출간된 배경 또한 비슷하다. 일본의 메이저 출판사들이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높은 어드밴스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아무도 오퍼를 하지 않은 채 마냥 기다리고 있을 때 시즈야마사라는 신생출판사가 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판권을 따냈다. 시즈야마사는 마츠오카 유코라는 여사장과 직원 1명의 아주 작은 신생출판사인데 동시통역사 출신인 마츠오카 사장이 영국에 있는 친구의 소개를 받은 다음날 바로 영국으로 건너가 판권을 확보했다.

현재 추세로 볼 때 “해리포터” 시리즈는 국내에서만 2,000만권의 판매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정가로 계산하면 1,400억원이나 된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건진’ 문학수첩은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은 셈이다. 책 한권의 선택으로 얼마나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지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이처럼 밀리언셀러의 원고는 여러 출판사를 전전하지만 ‘임자는 따로 있다’.

명예퇴직과 감원 열풍이 한창이던 1996년 출간돼 불과 6개월만에 200만권이나 팔린 소설 “아버지”(김정현, 문이당) 또한 같은 경우다. “아버지”는 40대 가장이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가족만큼은 지켜 주려는 애틋한 사랑을 다뤄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고개 숙인 아버지’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시켰다. 이 소설은 단순한 구성과 생경한 문체 등 소설미학 측면에서 문제점이 적지않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 출판사에서 문전박대당하다 문학전문 출판사인 문이당에 터를 잡았다.

출판사 기획자들은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반 초반의 여성들이다. 그들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많기 때문에 인생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을 뿐 인생을 정리하는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돈 안되는’ 문학출판으로 빚만 늘리고 있던 40대 중반의 문이당 임성규 사장의 눈에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다. 때문에 그는 문학적 결점보다 ‘감동’에 주목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임사장이라는 임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문학성마저 의심받던 이 소설은 일본 후타바샤 출판사와 364만엔이라는 높은 저작권료 계약으로 수출돼 1998년 7월 일본 독자들과도 만났다.

1990년대 교보문고에서 가장 많이 팔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잭 캔필드 외, 이레, 1996년)는 IMF 이후 자본주의 속도전에 멀미를 느끼면서도 한모금의 감동과 위안에 목말라하던 대중에게 ‘따뜻한 감동’을 안겨주며 350만권 이상 팔려나갔다. 원래 이 책은 푸른숲에서 “내 영혼의 닭고기 수프”란 제목으로 출간됐으나 빛을 보지 못했다. 이레에서는 류시화씨에게 번역을 맡기는 한편 내용을 보충해 세 권으로 펴냈다. 그러나 이 책이 대박을 터뜨리기까지는 광고의 힘이 컸다. ‘잘 뽑은 광고 한 카피, 열 자식 안부럽다’는 광고계의 속담처럼 이레는 책의 내용 가운데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부분을 골라 광고카피로 전재하는 전략을 썼다. 결국 이 전략이 먹혀들면서 “마음을 열어 주는 101가지 이야기”는 밀리언셀러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이에 자극받은 푸른숲은 “내 영혼의 닭고기 수프”였던 제목을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로 바꾸고 내용도 똑같이 세 권으로 늘려 ‘저가전략’으로 맞섰다. 덕분에 푸른숲 역시 이레만큼의 대박은 아니나 70만권을 판매하는 어부지리(?)를 올릴 수 있었다.

이미 출판됐던 책이 이름을 바꿔 달고 화려하게 재기한 케이스가 또 하나 있다. 핵물리학자인 이휘소 박사를 소재로 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바로 그것.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다른 출판사에서 “플루토늄의 행방”(전 2권)이란 제목으로 출간했으나 판매가 부진했다. 그러나 내용을 세 권으로 늘려 가다듬은 다음 제목을 바꿔 달고 출간돼 400만권 이상 판매됐다.

1990년대 초반 역사인물소설 붐의 서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소설 동의보감”(이은성)도 여러 출판사를 전전하기는 마찬가지. 미완성인 데다 이미 작고한 극작가가 처음 쓴 소설이고, 부산의 ‘이름 없는’ 주간지에 연재됐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땡기지’ 않는 원고였다. 결국 이 애물단지는 작고한 저자의 친구인 언론인 이진섭씨가 “세대”지 편집장 시절 인연을 맺은 백낙청 교수에게 소개함으로써 창작과비평사에서 출판해 400만권 이상 판매되는 개가를 올렸다.

출판사나 편집자 개인의 취향에 따라 작품을 선정하는 가치판단도 다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밀리언셀러들은 개인의 ‘취향’이나 ‘가치판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그래서 밀리언셀러는 ‘임자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물론 원고 검토단계에서 포기한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굴러들어온 ‘산삼’을 ‘도라지’라며 버린 꼴이니 그 쓰린 속을 능히 짐작할 만하다.


절박하게 매달려야 겨우 손짓하는 대박

그렇다고 뒷짐지고 마냥 기다린다고 해서‘대박’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시고기”와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의 탄생 뒷얘기에서 확인한 것처럼 밀리언셀러는 무엇인가 절박한 상태에서 ‘목숨 걸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어야 탄생한다.’ ‘노력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거나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아직도 경구로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들녘의 이정원 사장은 대학 강단에서 2년여 동안 정치학을 강의하다 출판계에 뛰어들었다. 초창기에는 사회과학서적을 주로 출간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적자만 늘어나고 있었다. 이사장은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문학서적 쪽으로 눈을 돌렸지만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 직원들의 월급마저 제때 지급하지 못할 정도가 되자 마음은 더욱 다급해졌다. 마침 아동용 ‘공포특급’이 폭발적 반응을 보이던 시절이어서 이사장도 비슷한 물건이나 하나 만들어 보자며 컴퓨터 통신인 하이텔에 들어가 공포물을 찾던 중 눈에 띈 것이 바로 “퇴마록”(이우혁)이었다. “퇴마록”은 당시 조회건수가 1만건을 넘을 만큼 인기절정이었다. 책 출간후 들녘이 “퇴마록”에 목숨을 걸다시피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퇴마록”은 지금까지 17권이 발행돼면서 모두 600만권 이상 판매됐다.

“소설 토정비결”(이재운)이 출간되기전 해냄의 영업부장 모씨는 종로5가의 ‘대학천’(도매상 밀집지역)에서 살다시피 하며 어음을 할인해 현금화하는 일이 주업무일 정도였다. 광고비도 적지않게 밀렸고, 용지대와 제작비도 동결되다시피 했다. “소설 동의보감”에 이어 역사인물소설의 인기 바통을 이어받기 위해 해냄은 ‘마지막 승부’를 거는 심정으로 “소설 토정비결”의 대박 만들기에 매달렸다. 해냄의 이런 ‘절박한 노력’은 이어진 밀리언셀러 “여자의 남자”(김한길),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까지 계속되었다.
다나출판사는 그동안 번역서 등 꽤 많은 책을 펴냈으나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상황이 점차 악화되어갈 즈음 “잃어버린 너”의 저자 김윤희씨를 만났다. 다나의 대표는 당시 뇌종양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저자를 병원으로 매일 찾아가다시피 하며 하루 몇장씩의 원고를 악착같이(?) 받아냈다. 저자나 출판사 모두 절박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미친 듯 일하는 사람이 없으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다행히 책은 밀리언셀러에 올라 출판사나 저자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타이밍은 필요조건

그러나 책이든 영화든, 심지어 인간의 운세에도 시운(時運)이라는 것이 있다. 때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 창작과비평)는 영화 “서편제”가 1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우리 것 찾기 붐이 일어나던 시기에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사랑과 올바른 이해, 그 속에 담긴 인간의 이야기를 특유의 문체로 맛깔스럽게 설명해 큰 인기를 누렸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성공 이후 책에서 소개한 문화유적지에는 “…답사기”를 들고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줄을 이었다. 당시는 먹고 마시는 집단여행에서 탈피해 직접 차를 몰고다니는 가족단위 테마여행이 늘어나던 시점이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가 책을 크게 띄운 것이다. 이 책 이전에도 “국토기행”(박태순, 한길사), “민요기행”(신경림, 한길사) 등 컨셉이 비슷한 책들이 출간됐지만 시운을 잘못 만나 ‘대박’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야 했다.

1993년 2월 완간된 “반갑다 논리야” 시리즈(전 3권, 위기철, 사계절)는 원래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철학적 통찰력과 논리적 사고력을 대중화하려는 의도로 출간된 책이다. 내용과 형식도 당연히 초등학생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엉뚱하게 1994년부터 수학능력시험 실시와 함께 본고사가 부활되는 등 대학입시 제도가 변화하면서 이 책은 단숨에 대박 반열에 오른다. 새 입시에 논술고사가 추가됐으나 그에 대비한 마땅한 참고서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 간파한 사계절은 여름방학을 앞두고 전국 고교 국어교사 7,000명에게 책 한질씩(2만1,000권)을 무료로 나눠 주었다. 일선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책을 적극 추천했으며 이후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결국 대학입시의 변화라는 시운을 맞아 이 책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게 된 것이다.

타이밍을 절묘하게 잘 맞추는 작가로는 양귀자가 있다. 양귀자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2) “천년의 사랑”(1995) “모순”(1998) 등 남들은 일생에 한번 터뜨리기도 힘든 ‘대박’을 정확히 3년마다 터뜨려 ‘3년마다 분출하는 활화산’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일상적 학대가 자연스럽게 은폐되고 이해되는 남성중심사회를 공격하는 테러리스트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나는 소망한다…”가 출간된 1992년은 공격적 페니미즘 소설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착한 여자’에 대한 환상과 ‘능력 있는 여자’에 대한 편견, 그리고 이율배반적인 이 두가지 가치를 동시에 요구받는 여성들의 문제를 사회문제로 부각시킨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공지영), ‘나는 더 이상 남편을 위해 밥상을 차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는 광고카피로 한동안 인구에 회자됐던 “혼자 눈뜨는 아침”(이경자) 등의 소설이 인기를 끌었던 시점이 바로 1992년 무렵이었다.

1,000년전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눴던 두 남녀가 또 다른 남녀로 환생, 연모의 정을 교환한다는 줄거리를 가진 소설 “천년의 사랑”은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자가발전이라도 해서 스스로 공주라고 칭하는 ‘공주병’이 유행하던 시절 발행됐다. 비슷한 시기에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남자가 여자를 위해 헌신하는 소설 “하얀 기억 속의 너”(김상옥) “남자의 향기”(하병무) 등이 베스트 반열에 올랐다.
양귀자는 또 IMF 직후 대중들이 인생설계를 휴지조각처럼 내던지고 가족공동체의 위기, 생존의 위기에 빠져 있던 절박한 시점에 “모순”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며 또 한번 대박을 준비한다. “모순”은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각기 판이한 삶을 살아가는 엄마와 이모가 만난 아버지와 이모부를 연상케 하는 두 남자, ‘항상 안개처럼 떠도는 남자’와 ‘항상 열차표처럼 준비된 남자’ 사이에서 고민(이것이 인생탐구다)하는 25세 여성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는데, 작가는 ‘너는 과연 어느 편이냐’는 질문으로 시대적 고민을 함께한다.

‘제목장사’가 반

하지만 아무리 내용이 재미있고 시운을 타도 우선 독자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 수많은 책들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제목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출판계에서 ‘제목장사가 반’이라는 말이 ‘금과옥조’처럼 사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박은 결국 제목싸움인 것이다.
엄마 가시고기는 알을 낳은 후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지만 아빠 가시고기는 혼자 남아 알을 먹으려고 달려드는 다른 물고기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다. 소설 “가시고기”의 줄거리는 가시고기의 이런 특성과 일맥상통한다. 이처럼 요즈음 소설의 제목은 주로 짧고 강렬하게 이미지를 주는 상징어인 명사다.

이런 경향은 최근의 소설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보면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국화꽃 향기”(김하인) “아주 오래된 농담”(박완서) “상도(商道)”(최인호) “묵향”(전동조) “돼지들”(이정규) “압록강”(김탁환) 등. 크게 될 책은 제목만 보고도 소설이 지닌 구체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
비소설은 서술형이면서 가치제안적이다. “아들아 머뭇거리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다”(강헌구) “성공한 사람은 사소한 일에도 목숨을 걸지 않는다”(리처드 칼슨)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스펜서 존슨) “내 몸은 내가 고친다”(김홍경) 등 몇 가지만 열거해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오늘날 독자들은 전통적인 ‘읽는 사람’(reader)이 아닌 ‘사용자’(user)의 모습이다. 사용자들을 염두에 둔 실용서는 심정을 자극하는 도발적 제목이어야 한다.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가 대표적 사례. “아직도 영어공부 하니”(정찬용) “365단어로 코쟁이 기죽이기”(백선엽) “두번만 읽으면 끝나는 영문법”(배진용) “나는 초단타매매로 매일 40만원 번다”(최원철) “나는 사이버 주식투자로 16억을 벌었다”(최진식) 등 제목은 갈수록 자극적으로 변해간다.

길벗의 “무작정 따라하기” 시리즈는 최근 100만권을 돌파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에 관련된 책을 연속 펴내는 이 시리즈는 상품의 정확한 컨셉, 가독성 있는 편집구성, 사용자 중심의 상품구성, 젊은 독자를 겨냥한 포장 등 장점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의 시장성을 키운 일등공신은 아무래도 제목이다. “컴퓨터 무작정 따라하기”는 컴퓨터를 전혀 모르는 네 명의 초보자를 대상으로 테스트를 거쳐 만들었다. 베타 텍스트(책 출간 이전에 독자에게 내용을 검증하는 시험)를 거쳤다는 것을 제목에서 은근히 암시하면서 ‘컴퓨터가 밥 먹는 것처럼 쉽다’는 개념을 주입시킨다. 경쟁상품인 “할 수 있다” 시리즈나 “길라잡이” 시리즈보다 소비자(독자)에게 기술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제공되는 편익이 많음을 은근히 암시해 열악한 영업력에도 불구하고 브랜드 가치를 확실하게 함으로써 이 시리즈의 ‘자발적 중독자’ 수를 늘리고 있다.

1980년대가 이념과 집단주의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실리와 개인주의·다원화 시대다. 1970년대 군사문화, 80년대 저항문화, 90년대 카오스문화를 거치며 생산시대에서 소비시대로 진입하고, 개성을 중시하고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는 패턴이 출판시장에서도 통용된다. 소비시대에 책은 더 이상 저자의 아우라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작품’이 아니다. 책도 이제 상징적 이미지에 좌우되는 상품일 뿐이다. 하지만 소비자는 상품을 사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상품이 지니는 ‘기호적 가치’를 소비할 뿐이다.

이러한 사례를 밀리언셀러가 된 책들이 원래 고려했던 제목들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는 “한 달이면 TOIEC 200점이 오르고, 6개월이면 모국어가 되는 영어학습의 대혁명”,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는 “부자들이 들려주는 돈과 투자의 비밀”, “천년의 사랑”은 “작은 배가 있었네”, “아버지”는 “사랑을 위한 사랑”,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은 “효과적인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을 각각 누르고 선택된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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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출판시장」 날개가 없다
단군 이래 최고 불황이라는데…

요즈음 일부 출판관계자들은 출판시장을 가리켜 ‘해리포터 세상’이라고 한다. 고아 소년 해리포터가 마법학교에 입학해 마법사 세계의 영웅이 되기까지의 모험과 환상을 그린 ‘해리포터’ 시리즈의 4권 “해리포터와 불의 잔”(J.K.롤링)이 미국에서 초판 380만권이라는 역사상 최대 부수가 한순간에 동나는 일이 벌어지면서 전세계에 불어닥친 돌풍은 한국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문학수첩에서 현재 3권까지만 번역 출간한 ‘해리포터’ 시리즈(한글 번역본은 6권)는 이미 100만권을 넘어섰다. 이 시리즈는 지난 7월 한달 동안에만 32만권의 판매를 기록했으며, 점차 가속을 받아 올 연말에는 300만권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세로 볼 때 출간 2∼3년만에 1,000만권을 돌파하는 최초의 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수첩의 기획자는 이 책의 기획서를 다섯번이나 고쳐 썼다고 한다. 판매 가능성보다 저작권 어드밴스(번역판 인세 선불금)가 너무 높아 출판사 대표가 계속 망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유명 출판사들이 어드밴스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문학수첩은 계약을 했고 결국 21세기 출판계 최대의 사건이라는 ‘해리포터’ 사건의 한 주역이 될 수 있었다.

‘해리포터’ 시리즈 외에도 영어 스트레스에 빠져 있는 대중에게 영어를 정복할 수 있는 특별한 노하우를 제공하는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정찬용, 사회평론) 시리즈가 95만권, 아내가 가출한 이후 각막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급성 임파구성 백혈병을 앓는 아이를 낫게 하고 자신은 가시고기처럼 자식이 아내에게로 떠난 뒤 세상을 하직하는 내용의 “가시고기”(조창인, 밝은세상)가 62만권, 돈이 부족한 것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도발적 메시지로 돈 좋아하는 것을 내색하면 안된다는 우리 사회의 오랜 허위의식을 정면으로 깼다고 평가받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 외, 황금가지)가 45만권을 기록하는 등 몇몇 대형 베스트셀러는 불황중에도 커다란 반응을 얻고 있다.

이같은 호황은 지난 2년 동안 밀리언셀러의 맛을 느껴보지 못했던 출판계에 모처럼 불어온 훈풍이다. 그러나 이런 호황은 몇몇 대형 베스트셀러들에 국한될 뿐 전체적으로는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특히 교양인문사회과학서, 문학 등 전통적으로 시장을 주도하던 분야의 침체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례를 들어 보자. 23년간 인문서 출판의 외길을 걸어온 까치 출판사는 1998년 6월 돈의 역사와 전파 과정을 통해 각 문명권의 문화적 다양성과 돈의 정치·사회적 의미를 되짚어 보는 “돈의 세계사”(조너선 윌리엄스)를 출간했다. 초판 발행부수는 2,100권. 그러나 지난 2년간 총 판매부수는 1,533권에 불과했다. 이 책의 초기 위탁배본 부수 600권은 서점 진열용으로 출고한 것이므로 아직 대부분 서점의 서가에 꽂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독자의 손에 확실하게 넘어간 것으로 볼 수 있는 부수는 900여권을 약간 상회한다고 볼 수 있다. 인문서의 경우 보통 2,000권 정도로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것을 감안하면 출혈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나마 그때는 행복한 시절이었다. 2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역시 까치에서 지난 3월 서유럽의 역사를 통해 금과 화폐의 원천 그리고 그 역할의 변화를 살펴본 책 “금과 화폐의 역사”(피에르 빌라르)를 출간했다. 초판 발행부수는 1,400권. 그러나 이 책은 696권 판매에 그쳤다. 벌써 반품이 들어오고 있어 앞으로의 판매에는 큰 기대를 걸지 못한다. 이 책의 경우 초기 배본부수가 400권이었으므로 독자의 손에 확실하게 넘어간 것으로 볼 수 있는 책은 300여권에 불과하다. 편집자 한 사람이 보통 3개월 일해야 학술서 한권이 완성된다. 정가가 12,000원인 이 책의 판매금액을 모두 합해 봐야 편집자 1명의 인건비에도 미치지 않는다. 까치는 최근 몇년 사이에 수십종의 인문서를 펴냈지만 4,000권을 넘긴 책은 단 두종에 불과하다. 380여곳의 공공도서관과 400여곳의 대학도서관이 학술서 한권씩만 구입해 준다 해도 학술 출판은 크게 활성화될 것이다.

편집자 1인 인건비에도 못미치는 판매금액

그러나 우리 도서관들은 책을 구입할 줄 모르게 된 지 오래다. 까치출판사의 박종만 사장은 “이런 풍토에서 과연 출판을 계속해야 하느냐 하는 회의가 든다”고 밝혔다. 이 사례에서만 보면 인문서 시장은 2년만에 3분의 1 정도로 축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인문서 출판사들은 적지 않게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출판사들도 인문서 출판의 간행 종수를 줄이거나 다른 분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됐는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문명에 의해 필연적으로 오는 문명사적 전환의 징조인가, 아니면 한국의 특수적 상황에 의해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가? 일시적 현상이라면 시스템의 개혁에 의해 고칠 수 있겠지만 그 반대라면 인문서 출판은 정말 희망이 사라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1980년대만 해도 인문서 시장에서는 책을 읽는다고 볼 수밖에 없는 계층, 즉 ‘리딩 퍼블릭’(reading public)이 존재했다. 대학생, 오피니언리더, 전문직 종사자 등이 바로 그들이다. 대부분의 인문서는 기본적인 수요가 보장됐다. 그때는 출판사는 단지 책을 잘 만들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됐다. 그런 영향으로 1990년대에는 무관심 상태에서 방치됐던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전 국민의 여행문화를 뒤바꿔버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 창작과비평사), 430여권에 이르는 “조선왕조실록”을 한권으로 정리해 역사교양서 읽기 붐을 일으켰던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 들녘) 같은 교양 인문서가 밀리언셀러가 됐다.

로마사의 교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안목과 손에 잡힐 듯한 세밀한 묘사가 일품인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한길사), 문화생태학적 통찰력으로 외견상 이해하기 어렵고 비합리적이며 상징적으로 보이는 현상들 뒤에 감추어진 합리성을 분석한 “문화의 수수께끼”(마빈 해리스, 한길사), 남근과 여근석·금줄·개고기·솟대 등 우리 문화에 담긴 15가지 수수께끼를 해박하게 해설한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주강현, 한겨레신문사) 등 수십만권 이상 팔린 책들이 줄을 이었다. 드디어 인문서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인문서를 읽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바로 ‘리딩 퍼블릭’이 실종된 것이다. 지금 사회의 중추세력으로 활동하는 30대 중반과 최대의 독서계층인 20대는 모두 인문서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 세대는 1980년대에는 유치원에서 초·중등학교를 다녔다. 이념의 세례를 거의 받지 않은 세대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1990년대 말의 IMF 충격이나 디지털 혁명의 자극은 강하게 받았다.

IMF로 인해 이들은 돈이 없으면 국가도 개인도 대접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IMF 직후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취직의 기회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미아 신세로 전락했다. 돈이 없으면 인생설계마저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으로 날려버려야 하는 비참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디지털 혁명 또한 이들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것을 강요했다. 이들의 머리 속에는 독재권력에 대한 두려움이나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전쟁의 공포는 느껴본 적이 없다시피 하지만 디지털 체제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두려움에서는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다. 책은 생존경쟁력을 키워주는 책과 삶의 기쁨을 안겨주는 책으로 크게 나뉜다. 독자들, 특히 대학생들은 생존경쟁력을 키워주는 책은 어떻게든 읽는다. 대표적인 책이 영어 학습서와 컴퓨터 서적이다. 이들 책시장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수도권과 위성도시에 위치한 2백∼3백평 규모의 중형서점에는 이들 책이 매장의 약 40%를 차지할 정도로 위세를 떨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즉각적인 경쟁력을 키워주는 능력에서 다소 처지는 인문서는 서점의 서가에서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생들이 삶의 기쁨을 안겨주는 엔터테인먼트성 책을 즐겨 읽는 것도 아니다. 영화·게임·비디오·레저문화 등 소비양태는 세련돼가면서 다양화된다. 인터넷의 등장은 소비문화의 생산과 공급을 증대시키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은 이같은 소비문화가 가져다주는 광범위한 감각적 쾌락시장에 크게 노출돼 있다. 인터넷·핸드폰으로 인한 통신비용 또한 대폭 늘어났다. 이들의 문화 소비력이 증대되고는 있지만 다른 분야에 쓰이는 비용이 적지 않아 책에 대한 구매력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더구나 책을 많이 소유하고 읽는 것이 품위와 교양을 나타내던 분위기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

전국의 대학 정문 앞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던 인문·사회과학 서점은 서울에 9개, 지방에 6개 정도만 남고 모두 사라졌다. 출판사들은 인문서를 읽는 독자층이 눈에 보이지 않자 일반대중(mass)을 염두에 두고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막연한 대중의 관심을 얻기 위해 만든 책들은 개성이 없이 비슷비슷하게 변해가고 있다. 그 책만이 갖는 독특한 개성은 모두 사라진 천편일률적 디자인, 별 의미 없이 연성화되는 내용, 대중서도 전문서도 아닌 어정쩡하게 퓨전화된 기획, 번역서 위주의 출판, 문화성은 도외시한 채 사업성 위주로만 만드는 책들이 늘어났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하는 법. 결국 인문서 시장은 갈수록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문학 시장은 어떤가? 올 최대 화제작 “가시고기”를 제외하고는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소설이 없다. 1980년대 이후 격동했던 한국사회와 사회주의권 붕괴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사적 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두 남녀의 곡절 많은 삶과 사랑을 그린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창작과비평사), ‘당편이’라는 정신과 육체가 모두 불완전한 인물을 통해 잊혀진 공동체의 아련한 기억을 되살려내는 이문열의 “아가”(雅歌, 민음사),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이성간, 동성간 사랑 나누기를 통해 욕망의 허망함과 혼자 남은 슬픔을 그린 표제작 “딸기밭”을 비롯한 최근작 5편을 묶은 신경숙의 네번째 창작집 “딸기밭”(문학과지성사), 문명의 이기인 인터넷을 장악하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와 그 무대의 중심에 선 한국의 미래를 그린 김진명의 “코리아닷컴”(해냄), 이혼·마약중독에다 어머니에 의한 정신병원 강제입원 등 인생의 밑바닥을 헤매던 프로기사 차민수가 최고의 승부사이자 부유한 백만장자로 일어서기까지의 역동적인 삶을 그린 실명소설 노승일의 “올인”(들녘), 말기암을 앓아가면서도 잉태한 생명을 끝끝내 지켜낸 모성애와 생명의 소중함이 직조해낸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김하인의 “국화꽃 향기”(생각의나무) 등이 10만∼20만권의 판매를 기록한 책들이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해마다 몇종의 밀리언셀러 소설이 등장하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문화권력자’들도 쇠망하기는 마찬가지

확실하게 인기를 이어가는 작가들도 사라지고 있다. 앞의 세 본격작가의 책들은 언론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 자신의 이름이 적힌 책이 2,000만권이나 팔려나가고, 1997년에 출간된 “선택”이 50만권이나 판매됐던 이문열의 올 신간 “아가”는 10만권을 겨우 넘겼다. 인기가 확실한 여성작가 트로이카 중에서도 선두주자로 꼽히던 신경숙의 “딸기밭”은 현재 12만5,000권이 판매됐다. 이 부수는 지난해 펴낸 “기차는 7시에 떠나네”(문학과지성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장편소설로는 “무기의 그늘”(창작과비평사) 이후 13년만에 출간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은 14만권이 판매됐다. 일종의 ‘문화권력’을 구가하던 이들의 신작이 이 정도의 판매에 그치자 문학 출판사들은 매우 당혹해하고 있다. 유망한 신인작가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신인의 소설로는 올해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으로 우리 사회의 ‘사랑’ 또는 ‘결혼’이라는 개념 속에 가려진 위선과 위악을 파헤친 이만교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민음사)가 4만권의 판매를 기록한 것이 최고다.

그나마 문학 출판사들도 최근에는 수만권의 판매가 보장되지 않는 소설은 출간 자체를 기피하고 있다. 따라서 소설 출간 종수는 크게 줄어들고 있다. 3,000∼5,000권밖에 판매되지 않더라도 문학성은 인정받는 작품들의 출간은 찾아보기 어렵다. 소설 부문의 확실한 시장으로 일컬어지던 고전문학시장마저 붕괴되고 있다.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읽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던 고전작품들마저 서점의 서가에서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세계문학 시리즈를 경쟁적으로 펴내던 몇몇 출판사들은 이미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최근에는 책을 사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책을 읽는 방식이 변했음을 의미한다. 우선 소설을 읽지 않는다. ‘죄와 벌’의 살인자 라스꼴리니꼬프는 세상에 흔하디 흔하고, 소설의 줄거리를 쫓는 데 지겨워졌다. 요즘은 사실(fact)이 소설보다 우월하다. 또 사실은 소설보다 훨씬 빠르고 매우 상세하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더 이상 소설이라는 형태로는 정보를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5월부터 일본의 웹진 “책과 컴퓨터”(www. honco.net)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 ‘100일 토론-인간은 왜 책을 읽지 않게 됐는가’를 읽은 한 독자가 출판사로 보낸 E메일의 한 부분이다. “데카메론”(보카치오) 이전이나 이후나 항상 현실은 소설보다 재미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현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급변하고 있다. 그 현실이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누구나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하면 하루종일 엄청난 규모의 재미있는 현실(사실)을 대할 수 있다.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실시간으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일부 계층에게는 소설은 무용지물인 것처럼 보인다.

“한국, 아시아 출판계에서 가장 뒤져 있다”

앞의 독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를 접하는 시간은 이전보다 늘어났다. 활자가 아닌 문자다. 하루 중 절반 이상의 시간을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보내고, 매일 읽는 메일, 메일매거진의 양은 엄청나다. 그러나 이것은 책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정보의 질과 책과 모니터라고 하는 미디어의 차이는 관계가 있는 걸까?”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또 “재미있게도 책은 읽지 않으면서 쓰는 일은 늘었다. 단순한 통신문을 뛰어넘어 논리정연한 문장도 쓰게 됐다. 그것은 메일과 웹사이트라고 하는 간단하면서도 가볍게 발표되고 즉각적으로 반향이 나타나는 미디어가 우리 가까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도 했다. 디지털 문명은 정보의 생산과 소비양태 자체를 바꿔놓고 있다. 모든 정보의 소비자는 바로 생산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정보의 일방적인 공급을 생각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인간이 꼭 필요로 하는 정보는 무엇이며, 그 정보를 어떤 경로로 취하려 들 것이며, 또 어떤 방법으로 소비(수용)하려 들 것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이미 독자들은 더 이상 읽는 사람들이 아니다. 독자들은 ‘읽는 사람’(reader)에서 ‘사용자’(user)로 급속도로 전환되고 있다. 그 사용자들이 찾는 정보는 무엇인가? 지난해 내한했던 일본의 가토카와쇼텐(角川書店)의 가토카와 쓰구히코 사장은 “독자들의 니즈(needs)는 실용서와 엔터테인먼트로 요약된다”고 정리했다. 엄숙주의가 크게 지배하는 우리 출판현실에서는 매우 도발적인 발언으로 비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현실로 인정해야만 할 단계에 서 있다.

가토카와 사장은 “점잔만 빼며 출판하던 시대는 지났다”며 “한국 출판계는 변화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해 아시아 출판계에서 가장 뒤떨어져 있다”고 질타했다. 그는 일본 출판이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으로 만성적 출판불황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가소프트웨어’ 전략을 도입해 1998년에 돌풍을 일으켰다. ‘메가소프트웨어’란 멀티미디어 출판을 좀더 발전시킨 개념이다. 출판사업을 핵으로 새로운 시대의 첨병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비디오·게임·음악·만화·이벤트 등의 소프트웨어를 융합시킨 사업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토카와쇼텐도 지금은 고전하고 있다. 젊은 소비층의 기호가 워낙 빠르게 바뀌다 보니 ‘메가’ 전략의 성공 확률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또 이 전략은 실패했을 때의 손실이 크며, 설사 성공했다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가 시들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아직 수용자(소비자)의 관점에서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수용(소비)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전자미디어의 등장은 인간의 독서습관을 ‘혁명적’으로 뒤바꿔 놓고 있다. 지금까지는 인터넷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보는 주식시세, 박찬호 야구 속보, 일기예보, 오늘의 운세, 물건시세 등과 같은 극도로 쪼개진 ‘파트워크(partwork)형’ 정보 혹은 포르노와 같은 쾌락용 정보다. 전세계 인터넷 이용자의 85%는 지금도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한다. 이런 경향은 앞에서 가토카와 사장이 말한 독자의 니즈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경제·경영서의 시장 확대는 대형서점 분야별 매출점유율 1위에서 확인된다. 교보문고의 경우 경제·경영서는 지난해 1위로 올라섰다. 학습 참고서는 컴퓨터 서적과 외국어 서적에도 밀려 4위로 밀려났다. 소설은 종교서적과 기술서적 다음으로 하위를 기록했다. 점유율에서 소설은 4%로 8.5%인 경제·경영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비소설에서도 경제·경영적 마인드는 도입된다. 최근에 출간되는 비소설 서적들은 ‘얼마나 가치 있게 삶을 살 것인가’라는 주제의 책들보다 ‘어떻게 좀더 실용적으로 잘 살 것인가’의 입장에서 ‘당신은 이렇게 살아라’라며 구체적 실천지침을 제시하는 책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돈에 대한 가치관을 크게 바꿔 놓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는 경제·경영서 1위를 독주하고 있다. “간절히@두려움 없이”(푸른숲)에서 저자 전여옥은 자신은 권력과 돈과 명예 중 돈에 최고의 가치를 둘 것이라고 자신있게 주장한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가장 가깝고 실질적인 수단은 돈”이기 때문이다. IMF 체제를 겪으면서 돈이 국가의 모든 이상과 현실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철저하게 경험한 그는 이런 ‘실용주의적 사고’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논지를 편다.

여성학자 오숙희의 “솔직히 말해서 돈이 좋다”(여성신문사), 방송인 백지연의 “나는 나를 경영한다”(다우) 등 여성들의 자기체험서에서도 돈과 일에 대한 솔직한 관심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시대에 실천해야 할 매뉴얼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제 ‘실용적인 제안’이 없는 책은 인기를 끌지 못한다. 그러나 ‘실용적인 제안’은 구태여 책을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출판시장은 전망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많은 출판관계자들이 이제 출판시장은 끝났다고 한숨짓는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 가능성의 하나로 아동시장을 꼽을 수 있다. 지금 아동시장은 자신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실용 개념이 강한 책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자식들에게는 상상력이 풍부한 책이나 ‘절실한 감동’을 담은 책들을 주로 선택해 읽히려는 새로운 열의 때문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오히려 활성화되고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의 집계에 따르면 올 상반기 아동서 발행부수는 지난해에 비해 44.9%나 증가했다. 이러한 열의는 1997년의 ‘IMF사태’ 이후 더욱 높아지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는 학벌과 인맥이 매우 중시되던 사회였다. 그러나 IMF 이후 벤처열풍이 불면서 인간의 창의력이나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절감하게 만들었다. 몇몇 대기업은 창의력이 뛰어난 고등학생들을 특별채용하기도 했다. 아이디어 하나로 졸지에 신흥 재벌이 됐다는 기사가 연일 언론매체에 게재되는 분위기에 힘입어 창작동화, 상상력이 넘치는 책 등이 크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민음사(계열사인 비룡소를 통해)·창작과비평사·문학동네·문학과지성사와 같은 대형 문학 출판사, 중앙M&B, 공사·김영사 같은 주요 단행본 출판사 등이 최근 일제히 아동서 시장으로의 새로운 진출 또는 대폭적인 확대를 추구하고 있다. 이밖에도 사계절·보리·보림·길벗어린이·재미마주·다섯수레·우리교육·산하·푸른나무 등 질적으로 우수한 아동서적을 펴내려는 출판사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텔레비전과 연결된 즉물적 기획물, 공포·괴기물, 유머·소화(笑話)를 주로 펴내던 출판사들마저 질 높은 출판물 출간으로 방향타를 바꾸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아직 적지않은 난관에 봉착해 있다. 아동서적은 종합예술화돼 가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상문화의 세례를 받은 아동을 대상으로 한 책은 문자와 이미지가 상생(相生)하는 책이어야 한다. 단순히 읽기만 하는 책이 아니라 읽고, 보고, 찾고, 만지고, 느끼는 책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상상력을 강하게 자극하는 창작작품의 부족, 그림작가의 한계, 제작기술의 한계, 종이의 질 저하 등으로 종합예술의 경지로까지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최근 1, 2권이 출간된 “한국생활사박물관”(사계절)은 역사학·고고학·민속학·인류학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가해 선사시대부터 20세기까지의 인간들의 생활상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하고, 중요한 생활상을 그림과 사진으로 되살리는 매우 수준 높은 대형 기획이다. 그러나 이 기획은 2002년 12월에나 완간될 예정이다. 책 속의 박물관이 제공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장치들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능력을 갖춘 인력이 국내 출판계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림작가들은 글의 종속물로서 어쩔 수 없이 책의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놓이는 그림들을 적당히 빨리 그리는 데만 익숙해져 있었다. 어느 정도 자신만의 개성 있는 작가정신을 보여주는 그림작가들에게는 출판기획자들이 일제히 달려들 정도다.

이미 가능성이 사라진 것처럼 여겨지는 인문·사회과학서 출판이 가능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세계사적 맥락이라는 큰 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어떤 독자가 성(性)에 대한 주제의 책을 인터넷을 통해 찾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아마존과 같은 온라인 서점에서 세계 각국 저자들의 무수한 신간들에 대한 정보를 곧바로 얻을 수 있다. 그 책들을 주문하기만 하면 보름 안에 안방에서 편안하게 받아볼 수 있다. 세계 출판시장은 이미 하나로 묶여지고 있는 것이다. 새물결 출판사가 올 가을 번역 출간하는 “소설”(원제 A Novel)은 전 5권의 거대한 기획서다. 각 권은 소설의 발생(역사), 형태, 차이, (사회와의)관계, 세계 고전에 대한 독후감 등을 다루고 있다. 필자는 움베르토 에코·밀란 쿤데라·피에르 부르디외·미셸 페로·노마 필드·바르가스 요사·프레드릭 제임슨 등 세계적인 학자와 작가들이다. 출판은 독일의 주어 캄프, 미국의 프린스턴대 출판부, 프랑스의 아쉐트 등 세계적인 출판사들이 거의 동시에 한다.

일본의 웹진 월간 “책과 컴퓨터”가 온라인에서 진행하는 ‘100일 토론’도 국제적이다. 미국·일본·중국·프랑스·독일·한국·태국 등 세계 각지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온라인 서점은 책의 문화를 변화시킬 것인가?’ ‘인간은 책을 읽지 않게 될 것인가?’ 등 그때마다 정한 주제에 대한 각 나라 사정에 맞는 글을 올린다. 독자들은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E메일을 통해 함께 참여할 수 있다. 이 ‘100일 토론’은 토론이 끝난 다음에는 어김없이 종이책으로도 출간된다. 하지만 이런 책은 독자는 증가할지 모르지만, 정작 구매행위 자체는 감소할 수도 있어 확실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세상의 변화를 수용할 줄 모르는 대학이나 학자들은 그 권위가 사라지는 상황이 속출하고 있다. 이럴 때 지식인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주는 나라를 찾아 글을 올릴 수 있다. 이제 국내의 인문·사회과학서도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이런 세계적 학문의 흐름을 즉각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10년만의 번역 출간’과 같은 황당한 이야기는 앞으로 결코 통하지 않을 것이다.

문학서적은 상상력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정보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키고 있다. 정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정보를 무작정 쌓아 놓기만 하는 꼴이 된다. 이제 네트워크 환경에서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소비자는 지식화된 정보의 생산자가 되어 콘텐츠를 적재적소에 분배하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현실을 뛰어넘는 ‘눈부신 상상력’이어야 하는 것이다. 독자는 바로 이런 상상력이 넘치는 책을 찾게 될 것이다.

디지털 혁명에의 적응만이 살 길

존재의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소설, 지난 시대를 도식적으로 되돌아보는 후일담 소설, 불륜을 페미니즘으로 포장한 소설, 주제와 사건이 천편일률적인 역사소설, 어른의 웅숭 깊은 내면을 유아화하는 동화 스타일의 우화소설에만 머물러 있는 국내 소설계는 변화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고사하게 될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anyone), 언제(anytime), 어디서나(anywhere), 어떤 기기(anymedium)를 통해 모든 콘텐츠(any contents)를 쉽게 이용하려 드는 ‘any’의 물결이 주도하는 시대, 즉 ‘유비쿼터스(ubiquitous) 인터넷 시대에는 인간은 구멍가게에 갈 이유조차 찾지 못하게 된다. 자기만의 밀폐된 방(이 방은 지구촌 개념을 가진 지구방으로 부를 수 있다)에서 모든 선택이 원격조작으로 가능해지기 때문에 아주 친밀한 가족간이나 연애하는 남녀간의 관계만이 살아남고, 모든 사회화 과정이 생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문화적 기반 자체가 바뀜에 따라 인간의 감동구조도 크게 바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출판계는 디지털 문명으로 인해 급속하게 변해 가는 인간의 감동구조와 욕망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앞으로 그런 감동과 욕망을 적절하게 다룬 책들은 인기를 끌 것이다.

인터넷과 같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출판사와 독자가 만나는 접점을 다각화시키고 있다. 생산시스템의 변화로 인한 e-북, 오디오북과 같은 형태의 다양한 실험에 대한 구체적 성과물이 올해 안에 선보이게 될 것이다. 2차 저작권, 출판행위에 대한 근본적 인식전환, 온라인·오프라인에 대한 다양한 시도 등 머리 속에만 맴돌던 생각들이 현실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다. 이런 성과물들이 현장에서 독자들에게 수용되는 과정을 통해 어떤 결과를 낳느냐의 여부에 따라 책 시장의 진로는 결정될 것이다.

인터넷으로 인한 유통혁명 또한 책 시장을 크게 바꿔 놓을 것이다. 영국의 그리니치천문대와 국립해양박물관이 새 밀레니엄을 맞이해 인류가 시간을 지각한 이래 문화권별로 당대 사람의 의식을 지배한 다양한 시간관과 시간의 측정, 묘사, 체험 등을 311장의 사진·그림과 함께 소개한 책 “시간박물관”(움베르토 에코 등 세계적인 학자들이 공동집필, 푸른숲)은 국내에서는 49,000원 정가의 고급서로 나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출간 한달만에 2,800여권이 팔려나갈 때까지 온라인 서점에서 선두주자인 교보문고·yes24·알라딘 등 세 군데에서만 모두 1,100권이 팔려나가는 성과를 얻었다. 이렇게 나타나는 구체적인 성과들은 구매형태의 변화를 더욱 가속화해 나갈 것이다.

새로운 실험들은 비록 당장 이익을 내지 못하더라도 계속 이뤄질 것이다. 그 중에서 일부는 독자들의 선택을 받을 것이다. 일반독자들의 의식은 단지 콘텐츠 그 자체일 뿐이다. 독자들은 비록 책이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읽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출판 기획자는 책은 콘텐츠를 어떤 형태로 포장해 제공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가를 강구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현재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책의 내용을 디지털 데이터화해 컴퓨터 기억장치에 저장해 뒀다가 독자가 인터넷을 통해 주문하면 필요한 부수만 인쇄·제본해 서점·편의점 등의 공간에서 판매하는 주문형 출판(Print On Demand)이 확실하게 자리잡을 것이라는 점이다. 주문형 출판은 대량 생산체제에서 벗어나 갈수록 개성적으로 치닫는 독자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면서 무재고 출판이 가능하기 때문에 고비용·저효율 구조에 빠져 있는 출판 시장에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내 출판시장은 이런 장기적인 변화보다 당장 일어날 것으로 보이는 대형 할인마트의 제도권 진입, 할인형 온라인 서점의 시장 확대 등과 같은 유통의 다각화로 정가제가 붕괴될 우려에 봉착해 있다. 정가제의 붕괴는 곧바로 책값의 상승을 유발하면서 급격하게 출판시장을 조정국면으로 밀어넣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출판시장에는 수많은 영세서점의 폐업, 그로 인한 도매상의 도산, 출판사의 재편과 같은 엄청난 회오리가 몰아치게 될 것이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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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도 죽고 서점도 죽고… 출판 시장 공멸 위기.

출판산업은 정보화시대 또는 탈산업사회의 전형적인 다품종 소량생산의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해마다 3만5천종 이상의 전혀 다른 상품이 생산된다. 소량 생산이라고는 하지만 한해 출시되는 제품 수가 모두 1억896만개에 이를만큼 시장은 크다. 전체 시장 규모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출판대국의 범주 안에 든다.

출판산업은 다품종 소량생산의 장단점을 그대로 따른다. 소비자들은 선택의 폭이 넓어서 좋겠지만 생산자 입장에서는 품종이 늘어날수록 생산비용이 늘어난다. 생산의 체계화가 어렵고 업체들끼리 경쟁이 심화되면서 수익이 줄어들 가능성도 크다. 시장예측의 위험 부담도 크다. 생산 중심적이기 보다는 철저하게 고객 중심적인 마케팅 전략을 세워야 한다.

출판시장이 위기냐 아니냐는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통계는 이미 위기의 징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출판시장 규모는 2조3484억원으로 추산된다. 2003년의 2조4463억원, 2002년의 2조8077억원과 비교하면 해마다 시장규모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시장이 축소되고 있는데 경쟁업체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말 기준으로 문화관광부에 등록된 출판사는 2만2498개로 2003년 2만782개에서 1년동안 1716개나 더 늘어났다. 1997년 1만2759개에서 7년만에 거의 두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출판시장의 빈익빈 부익부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먼저 대형 출판사의 등장이 두드러진 변화다. IMF 시절만 해도 매출 100억원을 넘는 출판사가 거의 없었는데 지난해에는 300억원이 넘는 출판사가 5개나 됐다. 100억원 이상의 출판사는 30개나 됐다. 이들 30개 출판사의 매출이 전체 단행본 매출 1조5천억원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전체 등록 출판사 가운데 1년에 20종 이상 신간을 내는 발간하는 출판사는 333개로 전체의 1.6% 밖에 안 된다. 반면 1년에 한권도 내지 못하는 출판사가 무려 2만783개로 92.4%에 이른다. 10개 가운데 1개꼴로 사실상 영업중지 상태라는 이야기다. 이 같은 무실적 출판사의 비율은 해마다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인쇄소나 제본소의 빚독촉을 피하기 위해 폐업신고를 하지 않고 문을 닫는 출판사가 많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출판시장의 불황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시장 규모가 작기 때문이다. 가까운 일본과 비교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딱히 책을 덜 읽는 것은 아니다. 월 평균 독서량은 1.3권으로 거의 비슷하다. 다만 한달에 3권 이상을 읽는 다독자의 비율은 일본이 조금 더 높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억2천만명의 시장과 4600만명의 시장은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는 웬만한 책이 기본 부수만큼은 나간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내는 한 출판사는 2001년 등록 이래 지난해 말까지 60종의 책을 냈지만 이 가운데 초판 1천부 이상 팔린 책은 2종 밖에 안 됐다. 책값이 1만5천원이라면 1천부가 다 팔려봐야 매출이 1500만원밖에 안 된다. 저작권료와 유통비용을 떼고 나면 제작비와 인건비, 관리비 등을 충당하기에 턱없이 적은 돈이다. 이런 책은 낼 때마다 출판사가 적자를 떠안아야 한다.

출판계에서 도서관 구매비율을 높여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전국의 도서관에서 신간 도서를 1천권씩만 사줘도 출판사들이 마음놓고 좋은 책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나라 도서관 수는 471개로 일본의 2681개의 6분의 1수준이다. 1인당 장서 수도 0.56권으로 일본의 2.19권에 턱없이 못미쳤다. 한 소장은 "공신력 있는 기구가 선정한 우수도서를 도서관이 의무적으로 구비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즘은 베스트셀러도 철저하게 상업적 논리에 따라 만들어진다. 웬만큼 잘 나간다는 저자들은 이미 대형 출판사들에 소속돼 있거나 몸값이 치솟아 있는 상황이고 새로운 저자를 찾기도 결코 쉽지 않다. 이를테면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중간에 있는 저자 계층이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다. 국내 신간은 이슈를 잘 파고든 실용서가 아니라면 초판도 다 팔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윤기나 최재천, 유홍준 같은 분들 책이 잘 나간다고는 하지만 외국에서는 그분들 필력이라면 상식 수준입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고 그 가운데 좋은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돼 들어오기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딱 저런 몇분 뿐입니다. 출판시장의 위기는 기본적으로 기획의 위기고 저자의 위기입니다."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로 대박을 터뜨린 그린비처럼 3년 이상 저자와 공동으로 기획을 해가면서 작품을 만들어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출판사들은 손쉬운 실용서에 손을 대거나 번역서로 눈을 돌린다. 그린비 유재건 사장은 "인문도서도 충분히 공을 들이면 5천부까지는 팔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린비는 그래도 저자를 잘 만난 경우에 속한다. 무엇보다도 대부분 출판사들에게는 3년씩 기다릴 여유가 없다.

기획이 어렵기는 번역서도 마찬가지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웬만큼 외국에서 잘 나갔다는 책은 저작권료가 터무니없이 치솟기 일쑤다. 잭 웰치 전 GE 회장 책의 선인세는 한때 13만달러까지 치솟기도 했다. 우리나라와 시장규모가 비슷하다는 대만에서 1만달러에 들여온 책을 13배나 비싸게 들여온 셈이다. 이 정도면 중소형 출판사들은 덤벼들 엄두도 내지 못한다.

출판계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인터넷 서점의 할인 경쟁을 가장 큰 위기 요인으로 꼽는다. 일부 인터넷 서점의 경우 요즘은 적립금이나 마일리지, 무료 배송을 포함, 최고 70% 이상 할인판매를 하는데도 있다. 문제는 이런 파격적인 할인판매의 부담이 결국 출판사들에게 돌아온다는데 있다. 장기적으로는 오프라인 서점을 죽이고 시장 전체를 죽이는 자충수가 된다. 필맥출판사 이주명 사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유통혁명으로 가격을 낮춘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출판사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서점도 출혈경쟁에 돌입했습니다. 이미 몇몇 인터넷 서점들은 대금지급조차 제때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시장 전체가 공멸할 수도 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가격파괴 경쟁은 브레이크 없는 기차처럼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갔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할인폭을 조금만 낮춰도 매출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때문에 경쟁업체들을 따라 계속 할인폭을 늘려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출혈경쟁을 감당하면서 오래 버티기를 하는 형국이다 .

요즘은 심지어 TV홈쇼핑에서도 이른바 박스 떼기로 책을 판다. 수십권짜리 도서 세트가 "딱 오늘 이 시간에만 이 가격"이라는 광고에 무더기로 헐값에 팔려나간다. 덤으로 몇권씩 더 얹어주는 행사도 있다. 홈쇼핑 업체들과 대형 출판사들도 짭짤하게 재미를 보겠지만 시장의 질서는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독자들은 베스트셀러와 할인판매에 길들여지고 동네 서점은 죽어나간다.

GS홈쇼핑과 CJ홈쇼핑은 지난해 각각 420억원과 400억원어치의 도서를 홈쇼핑으로 팔았다. 두 회사의 매출을 합치면 교보문고 광화문점 매출에 맞먹는 규모가 된다. 홈쇼핑 뿐만 아니라 이마트와 홈플러스 등 대형 할인점까지 파격적인 할인 공세에 나서면서 중소형 서점들의 목을 죄고 있다. 교보문고의 점유율이 이미 30%에 이르는 것을 비롯해 몇몇 이들 메이저 업체들이 놀라운 속도로 시장을 잠식해 가고 있다.

결국 동네 서점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1994년 기준으로 5683개에 이르렀던 전국 서점 수는 2000년 들어 3300개로 줄었다가 지난해에는 1950개 이하로 줄어들었다. 10년 사이에 무려 65% 가량의 서점이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다. 상황이 이러니 출판사들도 요즘은 지방 곳곳까지 책을 내려보낼 이유가 없다. 초판 1천부면 웬만한 서점에 다 깔고 남는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그나마 그 1천부도 제대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장은 대형 출판사와 대형 서점, 가격 파괴 할인 매장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중소형 출판사와 중소형 동네 서점은 더이상 발을 붙일 곳이 없다.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장에서 이런 빈익빈 부익부는 결국 종의 다양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 출판사들이나 서점들이나 잘 팔리는 책을 선호하게 되고 팔리지 않는 책을 만드는 출판사는 도태된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나중에는 소비자들까지 시장을 떠날 수 있다.

이정환 기자 cool@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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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자 한 명이 책의 기획·편집에서 영업까지 도맡는‘1인 출판사’가 새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출판계의 벤처기업이라 할 이들 회사는 분명한 색깔을 지닌 책으로 틈새시장을 파고들고 있다.

작지만 강한 출판사를 꿈꾸는 그들을 만나보자.

단 한 사람이 꾸려가는 출판사. 출판계에도 벤처 기업이 있다면, 1인 출판사가 그것이다. 1인 출판이라고 해서 단 한 사람이 책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사무실에 상주하는 사람은 한 명이지만 그를 뒷받침하는 외주 인력들이 존재한다.

보통 창업자 한 명이 기획과 편집, 경영과 영업을 맡는다. 책 디자인이나 조판, 배본과 같은 영역은 외주 시스템을 가동한다. 작은 규모라고 만만하게 보지는 말 것. 이들이 내놓은 책들은 색깔을 가진 책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작지만 알차게’. 1인 출판사가 지향하는 목표다.

출판사를 차린 이들 중에는 기존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던 사람들이 많다. ‘산처럼’ 윤양미 사장, ‘지오북’ 황영심 사장, ‘교양인’ 한예원 사장 등은 큰 규모의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편집자 생활을 했다. 다른 경우도 있다. ‘하이파이브’ 김현종 사장은 기존 출판사에서 6년간 영업과 마케팅을 담당했다. ‘뜰’의 이현주 사장은 ‘출판저널’ 기자로 일했다.

윤양미 사장은 한길사와 역사비평사에서 8년 동안 편집자 생활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2년 전 독립했다. ‘산처럼’이 지금까지 발간한 책은 모두 11권.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테이레시아스의 역사’ ‘만철’ 등으로 탄탄한 기획력을 보여줬다. 그는 주로 인문·역사서에 중점을 두고 있다.

‘지오북’ 황영심 사장은 문예출판사 현암사 등에서 16년 동안 편집자 생활을 했다. 지난해 말 창업한 후 첫 책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를 내놓아 주목받았다. 자연과학서는 사진이나 편집 등 신경 쓸 일이 많기에 회사에서는 쫓기듯 책을 낼 수밖에 없었다. “여유를 가지고 자연과학서를 내고 싶어 독립했다”는 설명.

한예원 사장의 ‘교양인’은 ‘헌법의 풍경’과 ‘미국을 파국으로 이끄는 세력에 대한 보고서’로 호평받았다. 지난 4월 한 명으로 시작했지만 7월부터 2인 출판사가 됐다. 한 사장은 9년간 푸른숲 편집장을 했다.

‘뜰’ 이현주 사장은 육아를 위해 4년간의 직장 생활을 접었다가 지난해 4월 창업을 통해 사회에 복귀했다. “아이 가진 아줌마를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시작했다”는 농반 진반의 얘기를 한다. 그가 찾은 틈새시장은 여성·가족·가정 분야. ‘남자의 아름다운 폐경기’ ‘가족이 있는 풍경’으로 눈길을 끌었다.

올 2월 문을 연 ‘하이파이브’는 실용서로 시작했지만 하반기부터는 인문 분야 책도 내놓을 계획이다. 김현종 사장은 기존 출판사들이 놓치고 있는 틈새를 파고들면 승산이 있다고 본다.

예전이라고 1인 출판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요즘처럼 주목받지는 못했다. 안목과 기획력을 가진 편집자들이 독립해 나오면서 1인 출판은 활기를 띠게 됐다. 출판 등록이 간편해지면서 진입 장벽이 낮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편집자의 독립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이들이 첫 번째로 꼽는 이유는 “내가 내고 싶은 책을 만들고 싶었다”는 것. 가능하면 이윤을 빨리 뽑으려는 회사와 의미 있는 책을 내겠다는 편집장들의 입장이 늘 맞아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조직 내에서 편집자로서의 비전이 한계에 부닥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예원 사장은 “편집장 생활을 계속하길 원했는데 회사에서는 관리자 역할을 원하더라”고 밝힌다. 윤양미 사장은 “3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의 편집 경력자들이 다수 형성돼 있는데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출판사가 없다”고 말한다.

사무실에 단 한 사람만 상주하더라도 책을 내는 것이 가능한 것은 외주 시스템 덕분이다. PC의 발달로 손쉽게 교정·교열을 볼 수 있게 되면서 편집자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졌다.

출판 유통이 투명해진 것도 큰 몫을 했다. 인터넷 서점이 보편화되면서 별다른 영업 활동을 하지 않아도 책과 독자가 만날 수 있는 창구가 넓어졌다. 아직도 대형 서점이나 도매상과의 거래에서는 ‘안면 영업’이 남아 있긴 하지만, 많이 합리화됐다는 평가다. 현금 결제도 자본력이 취약한 작은 출판사의 숨통을 틔웠다.

1인 출판은 책에 다양한 색깔을 입힌다. 큰 규모의 회사에서는 나오기 힘들었던 책들이 작은 출판사의 손에서 나오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내고 싶은 책을 내면서도 그동안 갈고 닦은 안목으로 시장의 틈새를 파고든다.

1인 출판사는 이것저것 손대거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편집자가 자신 있는 분야를 특화한다. 분명한 색깔은 곧 작은 출판사의 생존 비결이기도 하다. 일본 작은 출판사들의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이들은 버스만을 다루거나, 금기만을 소재로 하는 등 고유한 분야를 다짐으로써 살아 남았다.

혼자서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고정비가 적게 든다는 것도 1인 출판의 장점이다. ‘대박’이 나지는 않더라도 고정 독자를 확보한다면 저비용 구조를 바탕으로 회사를 유지할 수 있다.

김현종 사장은 “1인 출판을 생각한 것도 고정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황영심 사장은 “자연과학서는 사진이나 편집 등에서 일반 책보다 품이 다섯 배는 더 들지만 즐겁게 일할 수 있다는 이유로 노동력 소모를 비용에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1인 출판의 미래가 마냥 장밋빛인 건 아니다. 책 하나를 낼 때 비용을 생각한다면 ‘목숨을 걸고’ 출간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책이 그만한 가치를 지닐 수도 있지만, 단기간의 수익을 위해 시류에 영합하는 책을 내놓을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출판사가 내놓은 책의 종류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춰야 하는데, 혼자 해서는 꾸준히 책을 내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한다.

열림원 김이금 편집주간은 “기획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또한 중요한 부분이 영업”이라며 “1인 출판이 대안은 될 수 있어도 최선은 아니다”고 밝혔다. “앞으로 수익구조를 갖춘다면 이들도 혼자서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1인 출판이 앞으로도 계속 1인 출판사로 남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인원 2∼3명 정도의 작은 출판사를 넓은 의미의 ‘1인 출판’에 포함시킨다면 1인 출판 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트렌드다.

마음산책 정은숙 사장은 “1인 출판은 재미있고 혁명적인 것”이라며 “산업적인 차원이 아니라 문화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자”고 말한다. 그는 “일본처럼 한국에서도 ‘1인 출판 시대’가 시작된 것 같다”며 “중간 크기의 회사는 사라지고, 아주 크거나 아주 작은 출판사로 출판계가 양분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

이제 막 발걸음을 내디딘 작은 출판사들. 아직 미흡하지만 출판계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이보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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