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한 명이 책의 기획·편집에서 영업까지 도맡는‘1인 출판사’가 새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출판계의 벤처기업이라 할 이들 회사는 분명한 색깔을 지닌 책으로 틈새시장을 파고들고 있다.
작지만 강한 출판사를 꿈꾸는 그들을 만나보자.
단 한 사람이 꾸려가는 출판사. 출판계에도 벤처 기업이 있다면, 1인 출판사가 그것이다. 1인 출판이라고 해서 단 한 사람이 책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사무실에 상주하는 사람은 한 명이지만 그를 뒷받침하는 외주 인력들이 존재한다.
보통 창업자 한 명이 기획과 편집, 경영과 영업을 맡는다. 책 디자인이나 조판, 배본과 같은 영역은 외주 시스템을 가동한다. 작은 규모라고 만만하게 보지는 말 것. 이들이 내놓은 책들은 색깔을 가진 책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작지만 알차게’. 1인 출판사가 지향하는 목표다.
출판사를 차린 이들 중에는 기존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던 사람들이 많다. ‘산처럼’ 윤양미 사장, ‘지오북’ 황영심 사장, ‘교양인’ 한예원 사장 등은 큰 규모의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편집자 생활을 했다. 다른 경우도 있다. ‘하이파이브’ 김현종 사장은 기존 출판사에서 6년간 영업과 마케팅을 담당했다. ‘뜰’의 이현주 사장은 ‘출판저널’ 기자로 일했다.
윤양미 사장은 한길사와 역사비평사에서 8년 동안 편집자 생활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2년 전 독립했다. ‘산처럼’이 지금까지 발간한 책은 모두 11권.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테이레시아스의 역사’ ‘만철’ 등으로 탄탄한 기획력을 보여줬다. 그는 주로 인문·역사서에 중점을 두고 있다.
‘지오북’ 황영심 사장은 문예출판사 현암사 등에서 16년 동안 편집자 생활을 했다. 지난해 말 창업한 후 첫 책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를 내놓아 주목받았다. 자연과학서는 사진이나 편집 등 신경 쓸 일이 많기에 회사에서는 쫓기듯 책을 낼 수밖에 없었다. “여유를 가지고 자연과학서를 내고 싶어 독립했다”는 설명.
한예원 사장의 ‘교양인’은 ‘헌법의 풍경’과 ‘미국을 파국으로 이끄는 세력에 대한 보고서’로 호평받았다. 지난 4월 한 명으로 시작했지만 7월부터 2인 출판사가 됐다. 한 사장은 9년간 푸른숲 편집장을 했다.
‘뜰’ 이현주 사장은 육아를 위해 4년간의 직장 생활을 접었다가 지난해 4월 창업을 통해 사회에 복귀했다. “아이 가진 아줌마를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시작했다”는 농반 진반의 얘기를 한다. 그가 찾은 틈새시장은 여성·가족·가정 분야. ‘남자의 아름다운 폐경기’ ‘가족이 있는 풍경’으로 눈길을 끌었다.
올 2월 문을 연 ‘하이파이브’는 실용서로 시작했지만 하반기부터는 인문 분야 책도 내놓을 계획이다. 김현종 사장은 기존 출판사들이 놓치고 있는 틈새를 파고들면 승산이 있다고 본다.
예전이라고 1인 출판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요즘처럼 주목받지는 못했다. 안목과 기획력을 가진 편집자들이 독립해 나오면서 1인 출판은 활기를 띠게 됐다. 출판 등록이 간편해지면서 진입 장벽이 낮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편집자의 독립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이들이 첫 번째로 꼽는 이유는 “내가 내고 싶은 책을 만들고 싶었다”는 것. 가능하면 이윤을 빨리 뽑으려는 회사와 의미 있는 책을 내겠다는 편집장들의 입장이 늘 맞아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조직 내에서 편집자로서의 비전이 한계에 부닥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예원 사장은 “편집장 생활을 계속하길 원했는데 회사에서는 관리자 역할을 원하더라”고 밝힌다. 윤양미 사장은 “3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의 편집 경력자들이 다수 형성돼 있는데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출판사가 없다”고 말한다.
사무실에 단 한 사람만 상주하더라도 책을 내는 것이 가능한 것은 외주 시스템 덕분이다. PC의 발달로 손쉽게 교정·교열을 볼 수 있게 되면서 편집자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졌다.
출판 유통이 투명해진 것도 큰 몫을 했다. 인터넷 서점이 보편화되면서 별다른 영업 활동을 하지 않아도 책과 독자가 만날 수 있는 창구가 넓어졌다. 아직도 대형 서점이나 도매상과의 거래에서는 ‘안면 영업’이 남아 있긴 하지만, 많이 합리화됐다는 평가다. 현금 결제도 자본력이 취약한 작은 출판사의 숨통을 틔웠다.
1인 출판은 책에 다양한 색깔을 입힌다. 큰 규모의 회사에서는 나오기 힘들었던 책들이 작은 출판사의 손에서 나오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내고 싶은 책을 내면서도 그동안 갈고 닦은 안목으로 시장의 틈새를 파고든다.
1인 출판사는 이것저것 손대거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편집자가 자신 있는 분야를 특화한다. 분명한 색깔은 곧 작은 출판사의 생존 비결이기도 하다. 일본 작은 출판사들의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이들은 버스만을 다루거나, 금기만을 소재로 하는 등 고유한 분야를 다짐으로써 살아 남았다.
혼자서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고정비가 적게 든다는 것도 1인 출판의 장점이다. ‘대박’이 나지는 않더라도 고정 독자를 확보한다면 저비용 구조를 바탕으로 회사를 유지할 수 있다.
김현종 사장은 “1인 출판을 생각한 것도 고정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황영심 사장은 “자연과학서는 사진이나 편집 등에서 일반 책보다 품이 다섯 배는 더 들지만 즐겁게 일할 수 있다는 이유로 노동력 소모를 비용에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1인 출판의 미래가 마냥 장밋빛인 건 아니다. 책 하나를 낼 때 비용을 생각한다면 ‘목숨을 걸고’ 출간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책이 그만한 가치를 지닐 수도 있지만, 단기간의 수익을 위해 시류에 영합하는 책을 내놓을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출판사가 내놓은 책의 종류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춰야 하는데, 혼자 해서는 꾸준히 책을 내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한다.
열림원 김이금 편집주간은 “기획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또한 중요한 부분이 영업”이라며 “1인 출판이 대안은 될 수 있어도 최선은 아니다”고 밝혔다. “앞으로 수익구조를 갖춘다면 이들도 혼자서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1인 출판이 앞으로도 계속 1인 출판사로 남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인원 2∼3명 정도의 작은 출판사를 넓은 의미의 ‘1인 출판’에 포함시킨다면 1인 출판 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트렌드다.
마음산책 정은숙 사장은 “1인 출판은 재미있고 혁명적인 것”이라며 “산업적인 차원이 아니라 문화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자”고 말한다. 그는 “일본처럼 한국에서도 ‘1인 출판 시대’가 시작된 것 같다”며 “중간 크기의 회사는 사라지고, 아주 크거나 아주 작은 출판사로 출판계가 양분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
이제 막 발걸음을 내디딘 작은 출판사들. 아직 미흡하지만 출판계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이보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