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교토일기] 교토의 아침 ‘까마귀와 함께 춤을’

서울에서는 까치 소리에 잠을 깼지만 교토(京都)에 와서는 까마귀 소리로 아침을 맞는다. 한국에는 까마귀가 없고, 일본에는 까치가 없다. 불과 200km도 안 되는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두 나라의 자연환경이 다르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쓰레기를 버릴 때도 일본에서는 반드시 망을 씌운다. 그렇지 않으면 까마귀 떼가 모여들어 쓰레기 봉지를 쪼아 사방으로 흩어 놓는다. 까마귀는 잡식이어서 아무것이나 먹는다. 쓰레기장은 까마귀의 파티 장소인 셈이다.

한국에서 그 흔하던 까마귀를 볼 수 없게 된 것은 공해나 생태계의 변화 때문이 아니다. 양기에 좋다고 하면 무엇이든 먹어 씨를 말리는 보신문화(補身文化)) 탓이다. 옛날부터 시체를 파먹는 불길한 새로 알려졌기에 아무리 남획해도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멸종돼 가는데도 두루미처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자고 수선을 피우는 미디어도 없고, 자연보호를 외치는 환경단체도 나서는 곳이 없다.

소설이나 영화 장면에서는 까마귀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사람이 죽는다. 우는 소리만 흉측한 것이 아니다. 눈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온몸뚱이가 까맣다. 그래서 새의 형상을 본뜬 새 ‘조’(鳥)자에서 눈동자를 빼내면 까마귀 ‘오’(烏)자가 된다. 조감도(鳥瞰圖)를 오감도(烏瞰圖)라고 고쳐 쓴 이 상(李箱)의 시는 결코 심술궂은 장난이 아니다. 감각적으로 보나 관념적으로 보나 리얼리티가 있다.

맨 처음 교토에 와서 바라본 그 조감도야말로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까마귀의 오감도 아닌가. 정말 그렇다. 교토에 오자마자 내 가난한 고향 풍경을 생각하게 된 것도 그 까마귀 탓이다. 마을 어귀에는 고목나무가 있고, 잎이 진 앙상한 가지에는 반드시 두서너 마리의 까마귀가 앉아 마을 초가지붕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서리에 덮인 겨울 들판과 그 시골 풍경에 까마귀보다 더 잘 어울리는 새가 있을 것인가.

어느새 떠난 줄도 모르게 우리 곁에서 사라진 까마귀를 교토에 와서 다시 보니 반갑다. 그렇다. 편견 없이 바라보면 까마귀는 두보(杜甫)가 비난한 것처럼 ‘생각이나 정서가 없이 시끄럽게 짖어대기만 하는 새’(野雅無意緖 鳴燥自紛紛)가 아닌 것이다. 늙은 부모를 모시는 새라고 하여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도 생기지 않았는가.

많은 조류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까마귀는 조류 가운데의 영장류라고 할 만큼 똑똑한 새다. 일본의 도시 까마귀들은 교통신호를 이용해 딱딱한 호두 껍데기를 깨뜨려 먹는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면 호두를 도로 위에 떨어뜨린다. 그러고는 신호가 바뀌어 자동차들이 지나가 그 껍데기를 깨뜨려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까마귀의 생태를 조사하기 위해 숲 속으로 들어갔던 한 조류학자의 놀라운 보고도 있다. 까마귀의 생태를 관찰하고 연구실로 돌아와 관찰 기록을 작성하는데 무엇이 창 밖에서 기웃거리더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 몇 시간 전 자기가 관찰하던 바로 그 까마귀 녀석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 역추적한 것이었다.

일본만이 아니다. 세계 도시의 제공권을 장악한 것은 까마귀들이다. 영국 웨일스 지방의 까마귀들은 눈이 쌓인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고 놀기도 한다. 심지어 나뭇가지를 이용해 구멍 속에 들어 있는 벌레들을 낚시질하는 동화같은 이야기들도 많다. 그렇지만 유독 한국의 하늘에서만은, 그 들판에서만은 정몽주의 어머니가 걱정할 것 없이 까마귀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도 야박하고, 그렇게도 옹졸하고, 그렇게도 텃세가 심하다는 일본 땅에서도 기를 펴고 살아가는 까마귀들인데 말이다.

유럽에서 늑대가 전멸한 것도 역시 늑대에 대한 인간의 편견 때문이었다. 이솝우화에서 시작해 서양의 동화나 민담에는 늑대처럼 나쁘게 그려진 짐승은 없다. 그렇지만 늑대는 다른 동물에 비해 결코 사악하거나 인간을 해치는 위험한 짐승이 아니다. 한자로 늑대를 ‘낭’(狼)이라고 적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보다시피 수·우·미·양·가라고 할 때의 ‘좋다’는 뜻의 양(良)자가 들어 있지 않은가.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영화에서는 늑대와 인간의 의미가 잘 설정되어 있다. 나야말로 ‘늑대와 함께 춤’이 아니라 ‘까마귀와 함께 춤을’ 춘다. 이렇게 시끄럽고 불길한 까마귀 소리를 까치 소리처럼 반갑게 들으면서 아침잠을 깨는 나의 기괴한 교토 생활은 시작된다.

일상의 노동과 반복­설거지하기 싫던 날에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음식을 만드는 것은 창조의 시간과도 비슷하다는 사실 말이다. 하다못해 라면 하나를 끓이더라도 거기에는 날것들이 불 속에서 서서히 변화해 가는 과정 그리고 전혀 다른 맛과 형태로 바뀌어 가는 생성의 즐거움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비등점을 향한 상승과 그 기대감은 잠시 우리를 지루한 반복의 노동에서 해방시킨다. 요리술은 불멸의 식욕을 만들어 내는 일상의 연금술인 것이다.

그러나 음식만큼 만들 때와 먹고 난 뒤가 다른 것도 없다. 포식 끝에 싸늘하게 식어 버린 음식 찌꺼기들은 더 이상 어떤 식욕의 대상도 아니고 창조의 변화도 아니다. 설거지는 단지 어두운 하수구로 흘러가는 고통의 상징, 희망 없는 노동일 뿐이다. 그래서 부엌일을 하는 사람들은 남은 음식을 먹어 치우는 방법을 택한다. 음식이 아까워서도 아니고 폐기물을 되도록 덜 내겠다는 독일 주부 같은 환경의식 때문도 아니다. 설거지의 양과 그 노동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먹어 치운다’는 말은 아마도 한국어에만 있는 표현인 것 같다. 일본말에는 설거지라는 고유어가 없이 그냥 ‘사라아라이’(접시닦이)라고 한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먹어 치운다는 말인들 있겠는가. 설거지가 귀찮아 음식을 먹어 치우는 이 기상천외한 일은 인간이 먹는 어떤 행위의 항목에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종래의 식문화로는 도저히 정의하기 힘들다.

희랍인들은 여자와 노예를 동일시했다. 그 이유는 단순한 차별이 아니라 노동을 경멸했던 희랍인들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동은 단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생물학적 신진대사) 것으로, 자연의 필연성에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여자들이 꾸려가는 가사노동이 바로 그런 것이다. 적어도 노동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영속성’ ‘명예’ 그리고 ‘탁월성’같은 시민의 자격과 조건을 갖출 수 없다. 누구든 가사노동에 얽매여 있는 한 본질적으로 노예인 것이다.

설거지는 가사노동 중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로, 그것은 소비와 부패에 관련된다. 설거지에는 아주 작은 비전이나 상상력이라는 것이 없다. 그리고 이 설거지의 노동에서 벗어나는 길은 먹어 치우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잉여를 없애기 위한 식사, 식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식사…. 어쩌면 여기에 바로 현대인의 특성이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른다.

희랍인의 분류에 의하면 이제 매일 설거지해야만 하는 나, 먹어 치우는 방법을 터득한 나, 분명히 나는 노예인 것이다.

닛폰바레­아! 이 청명한 날에

청명한 아침이다. 구름 한 점 없다. 이런 날을 일본 사람들은 ‘닛폰바레’(日本晴れ)라고 불렀다. 제국주의자들이 기승을 부리던 시대, 일본 사람들은 하늘의 기상까지 제 나라 것으로 자랑삼았다. 태풍·지진·해일­온갖 자연의 재난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그들의 자연을 자랑하고 사랑한다.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후지산(富士山)인데도 일본 사람들은 그것을 최고의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오히려 땅에 용암을 깔고 살아 왔기에 이렇게 청명한 날씨를 보며 “닛폰바레”라고 외친 것인지도 모른다.

img2R쌀쌀한 아침 공기가 하늘을 더욱 맑게 한다. 중천에 하얀 반달까지 떠 있어 하늘이 더욱 파랗게 보인다. 심호흡을 하면 기도로 흘러 들어간 공기 방울들이 허파에 와 닿는 미세한 감촉을 느낀다. 기체로 변한 청량음료다.

어젯밤 교토 콘서트홀에서 들었던 제르킨의 피아노 소리를 다시 듣는 것 같다. 브람스의 피아노 콘체르토…. 햇볕은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을 뚫고 갑자기 솟아나는 금관악기의 소리처럼 투명하고 눈부시다.

청중들은 잘 길들여진 짐승들처럼 조용히 앉아 음악을 감상하고, 연주가 끝나면 예의바르게 박수를 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박수다. 대부분의 청중들은 연금생활자 노인들이거나 무슨 봉사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비어 있는 자리가 한 구석도 보이지 않는다. 기침 소리 하나 없이 진지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사강의 소설 제목처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묻고 싶어진다.

초청자인 제르킨의 피아노 연주가 끝나고 2부의 시향 연주가 시작되었는데도 한 사람도 뜨는 사람이 없다. 이런 청중들이 있기에 인구 150만명도 안 되는 교토 시지만 10월로 제458회의 정기 연주회를 여는 대 교향악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주문한 프린터도, 은행의 캐시 카드도 1주일이 넘었는데 소식이 없다. ‘빨리 빨리’에 익숙한 생활 템포에 비해 여기는 모든 것이 너무 늦게 돌아간다. 이 맑게 갠 청명한 아침에 무엇을 서두르는가. 브람스를 듣던 청중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가.

방문을 열어 놓고 오랜만에 환기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어렸을 때 닛폰바레라고 부르던 제국주의의 하늘을 방 안에 들여놓기가 조금 민망스러워서다. 이중 감정 없이는 일본의 하늘을 보기 힘들다.

병원에서­아픔에도 국적이 있다.

불고깃집에서 나오다 다리를 다쳤다. 연구소 가까이에 있는 M정형외과. ‘수부’에서 진료 신청을 하니 카드 한 장을 준다. 병원을 찾게 된 이유와 증상 그리고 여러 가지 항목이 설문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미리 환자의 병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으면 면담 시간도 줄일 수 있고 정확한 진찰도 가능해질 것이다. 병은 의사보다 환자가 더 잘 안다는 교훈을 실제 임상에서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카드를 쓰려는 순간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발목이 삐끗한 것이다. 삔 것도 아니고 그냥 접질린 것인데, 그것을 일본말로 쓰자니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만요슈’나 ‘고킹슈’ 같은 일본의 고대 시가는 읽을 줄 알면서도 막상 자기 몸의 간단한 아픔을 표현하려고 할 때는 벙어리가 되고 만다.

우선 헛디뎠다거나 뒤틀렸다거나 뼜다거나 하는 것은 그럭저럭 일본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해도, 통증을 적으라는 항목에 이르러서는 막막하기만 하다. 화끈거리고 쑤시고 뻑적지근하고… 무엇보다 시큰거린다는 말을 어떻게 ‘왜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말이 있기는 한가.

아무리 불친절한 간호사·의사라고 해도 한국말로 실컷 아픔을 호소하던 그 때가 좋았다. 인체의 생리는 글로벌한 것이다. 중국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전 세계를 떨게 하지 않았던가. 얼굴색이 달라도 피는 똑같이 붉고 혈액형도 같아서 백인의 피를 황인종이나 흑인의 몸에 수혈할 수 있지 않은가. 인간의 몸은 누구나 같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 가도 몸은 이방인의 의사에게 맡길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유일한 것이다. 문화의 몸 유전자를 가진 그 몸은 세계 속에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문화가 다르면 같은 병, 같은 증상이라도 그 아픔이 다르다. 아픔을 표현하는 언어와 수식은 나라마다 제가끔이다. 욱신욱신 쑤시는 것을 한국말 이외의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그들은 아리고 쓰린 차이를 어떻게 표현하고, 머리가 멍한 것과 띵한 것, 배가 살살 아픈 것과 묵직한 것을 어떻게 구별해 말할까.

언어가 없으면 의식도 없다. 아픔에 관한 표현이 없다면 그 아픔의 느낌도 없다. 병은 같아도 아픔을 느끼는 감각과 마음은 정말 다른 것인가.

인간의 몸은 가장 보편적인 것 같으면서도 가장 유별난 것이라는 역설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신체성, 그것이 나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다. 하나밖에 없는 이 한국인의 몸을 지금 저 일본 사람이 손으로 촉진하고 X­레이로 투사한다. X­레이 사진에는 내 삔 다리의 관절과 그 뼈들이 무슨 화석이나 대나무 모양으로 찍혀 나올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 무슨 국적이 있고, 고유한 수사학을 허용하겠는가.

붕대로 감은 발을 겨우 구두에 구겨 넣고 병원 문을 나선다. 눈부신 토요일 10시, 절뚝거리며 택시를 잡으려고 길가에 서 있는 모습….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내 몸이며 세계의 몸이다.

축소 지향과 ‘가이세키’ 요리

도쿄(東京)에서 학생사 사장이 찾아왔다. 거의 10년 만의 재회다. TBS 방송에서 ‘축소 지향의 일본인’을 방영하는 데 필요한 저작권 동의서도 가지고 왔다. 20년 전에 간행한 책인데 그 동안 영역본, 프랑스어역 그리고 일영 대역본, 문고본, 소니의 전자출판 등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대학 입시 문제나 방송사 같은 데서 인용할 때마다 동의서다, 허락서다 하는 것들을 보내온다. 솔직히 ‘축소 지향의 일본인’ 이야기가 나오면 20년 전에 벗어 놓고 온 헌 옷을 다시 입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거북하다. 이번에는 새 옷을 만들어 입자고 다짐한다.

도쿄대 출신 학생사 사장은 일본의 전통 문화에 관심이 높은 식도락가다. 그래서 식사 대접은 으레 일본의 최고급 전통 요리점에서 한다. 이번에도 로열 호텔에 있는 깃죠(吉兆)의 ‘가이세키’(懷石) 요리다. 원래 가이세키 요리는 문자 그대로 돌을 품는다는 뜻이다. 선승(禪僧)들이 수행하다 점심 식사 때가 되면 돌을 배에 품고 끼니를 때운다는 뜻에서 비롯한 음식명이다. 그래서 양도 작고 채식이 주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렇게 검소하고 절제된 전통음식을 최고로 값비싸고 질 높은 요리문화로 승화시켰다. 우리의 궁중요리와 정반대다.

‘깃조’의 역사 하나만 봐도 교토의 음식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 이 창업자는 요리 하나로 일본에서 처음 인간문화재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 그에게 음식점을 내 요리를 만들어 판다는 것은 생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음식을 만드는 일은 노동이 아니라 예술가의 작업과 같은 것이고, 한 걸음 더 나가면 고행승의 수도와 같은 종교 행위일 수 있다.

노동이 예술로, 예술이 종교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이 바로 생계에서 벗어나고 노동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이다. 일본의 장인정신이란 바로 가난이 아니라 그 가혹한 노동에서 벗어나려는 꿈이었던 셈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돈 자체, 생계 자체에 목적을 둔 일은 노예노동과 다를 것이 없다.

가이세키 요리만이 아니라, 그가 만든 ‘쇼가도벤도’(도시락)도 유명하다. 안을 십자로 나눠 네 칸에 각기 다른 음식을 담도록 고안한 도시락인데, 가난한 서민들이 물건을 정리해 두는 상자를 보고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설명을 듣다, 한국의 구절판을 보았더라면 기절했을 것이라고 혼자 생각하며 몰래 웃었다.

일본인들은 창의력은 별로 없어도 이미 있는 것을 임기응변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응용술은 뛰어나다. 그러니 영어로 말하면 invention(발명)이 아니라 innovation(개발)에 강한 셈이다.

빨갛게 물든 감잎에 음식을 올려 놓은 것이 인상적이어서 물어보았더니 ‘오치바’(낙엽) 요리라고 한다. 계절 감각을 음식에 담는 것이 일본 요리문화의 특성이라고 자랑한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단풍의 명승지에서 그 이파리들을 따다 비닐로 포장해 파는 것을 보고 ‘대체 누가 저런 것을 사 가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그 수수께끼가 풀린다.

아름다운 요리들이 미술 전람회처럼, 혹은 조각의 숲처럼 차례차례 전개된다. 그것을 한순간에 먹어 버린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색채와 향기와 입체적인 조형미가 무너지고 사라진다. 덧없이 사라지는 아름다움. 영속하지 않기에 더욱 아름다운 무상미(이런말이 있던가), 죽음의 미학을 일본 미학의 근원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들이 벚꽃을 사랑하게 된 것도 피는 꽃보다 지는 꽃의 아름다움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가이세키 요리는 보석같이 작다. 한 젓가락도 채 안 되는 음식을 입에 물고 황홀해하는 일본인들을 보고 있자면 조금 답답해지기도 한다. 갑자기 떠들썩한 한국의 불고깃집 광경이 떠오른다. 끼니를 굶는다고 하면서도 그 음식만은 푸짐한 한국, 상추에 밥과 불고기 그리고 이것저것 반찬을 하나 가득 싸 도저히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쌈 보따리를 입 안에 집어넣고 땀방울을 뻘뻘 흘리는 놀라운 광경을 보라. 일본인은 눈으로 먹고, 한국인은 온몸으로 먹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산책길의 무서운 광경­장애자가 많은 일본

앞이 보이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걷는 것이 아니다. 미리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걸어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걷는다기보다 접근해 간다는 말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그러나 구부러진 길을 돌아서는 것, 그래서 새로운 길이 전개되는 것, 그 순간이야말로 걷는 것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을 안다. 산책 때마다, 굽은 길을 돌 때마다 어떤 두려움이나 불안을 느낀다.

예기치 못한 무엇이 불쑥 나타날 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거기에서 기다린다. 텅 빈 길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나타나는 순간은 작은 모험으로 반짝인다. ‘아방튀르’. 그렇다. 아방튀르. 이것이 보이지 않는 굽은 길을(그것을 일본 사람들은 ‘마가리도오리/曲がり通り’라고 부른다) 걸어가는 삶이다.

늘 똑같은 코스의 아침 산책길인데도 산길을 돌아설 때마다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이번에는 창문에 쇠창살을 한 검은 밴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차 앞에는 웬 남자 하나가 오줌 누는 자세로 숲을 바라보고 서 있다. 무심히 지나려는데 자동차의 경적이 울린다. 그러자 그 사내는 소리지르며 도망가려고 하고, 그를 잡으려고 차 안에서는 건장하게 생긴 사람들이 뛰어나온다. 뜻하지 않은 새벽의 경주에 혼비백산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이쪽이다. 끌려오는 그 남자의 비명은 동물의 포효에 가깝다.

그 남자는 아마도 정신박약이거나 정신질환자인 것 같고, 검은 밴은 병원이나 무슨 수용소에서 사용하는 특수차량이었던 것 같다. 그를 잠시 풀어 주어 아침 운동을 시키려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일본에는 이렇게 이상한 장애인들이 많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히키고모리’(자폐증 환자)들이 수십만 명이다.

모퉁이 길을 걸어가는 것은 늘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무엇인가,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똑바른 길로 앞만 보고 걸어가면 일본이 보이지 않는다. 돌아가는 길목에 항상 이상한 아방튀르가 있다. 일본 전체가 지금 이 마가리가도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모퉁이 길을 돌아서면 흰 길 위에 무엇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누군가가 흘린 호루라기 같은 것. 야구 글러브 같은 것. 평범한 낙엽이라고 해도 모퉁이 길을 돌아 처음 만나는 물건들은 음흉한 덫이 되기도 하고 은방울같이 진동하는 돌멩이가 되기도 한다.

모퉁이 길을 돌아서면 나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참새처럼 이야기하는 아이들이거나 개를 끌고 나온 여인들 혹은 위태롭게 보행 연습을 하는 중풍 걸린 노인들이거나 그래도 나는 처음 만난 사람들을 향해서 마음 속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내일 다시 이 모퉁이 길을 돌아서면 다른 것들이 보일 것이다. 어제 보던 것들은 다 사라지고 그 대신 그 자리에 또 다른 것들 버린 은박지와 담배꽁초와 어깨가 딱 벌어진 건장한 남자가 청바지를 입은 찰스 브론슨처럼 담배를 피우며 중풍 걸린 노인이 꺼져 가던 그 자리에 솟아 있을 것이다.

일본인들의 상혼­‘아키나이’의 의미

편지함에 오랜만에 우편물이 들어 있다. 기대와 달리 쇼핑 광고물이다. 고추와 마늘의 두 성분을 추출해 건강 미용 다이어트 약품으로 개발한 캡슐 샘플이다. 니가타(新瀉)에 있는 SMC라는 회사의 그 선전물에는 놀랍게도 ‘한국인의 힘’이라는 카피가 붙어 있다. 그리고 한국 본바탕 고추로 만들었다는 캅사이신 성분에 대해 자세히 적어 놓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추와 마늘은 모두 조센징(한국인)을 경멸하고 비하하는 상징물이었다.

NHK의 초청으로 정경화가 일본에서 처음 바이올린 연주회를 가졌을 때 일본 비평가 하나는 “드디어 베토벤이 닌니꾸 쿠사구났다”(베토벤의 음악에서 역겨운 마늘 냄새가 난다)고 해서 말썽을 빚은 일이 있다. 그런데 어느새 마늘과 고춧가루가 일본 소비자 대중을 사로잡는 광고의 카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그 선전문에는 한국인의 에너지와 건강, 아름다움의 비결은 바로 이 고추와 마늘 -김치의 주원료인 그 식문화에서 온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특히 사스 때 한국의 김치­이 살균 효과가 있다고 해서 중국과 일본에서 한류 바람이 불기도 했다. 그런 유행을 등에 업고 개발된 신제품인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작은 비닐 봉지에 캡슐을 넣어 선전지와 함께 배포하고 있다. 당장 먹으면 체온이 올라가 지방을 분해하는 효과를 느낄 수 있고, 조금 지나면 다시 체온이 떨어지고 혈압이 내려가는 작용을 체험할 수 있다는 거였다.

식문화만이 아니다. 주거문화에서는 한국의 온돌식 바닥난방(유카단보)이 최첨단 신개발품으로 선전되고 있다. 그 TV CF는 “한국에 가서 아주 놀라운 것을 보았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것을 가져다 그들은 우리보다 한 발 앞선 상품으로 개발한다는 사실이다. 상업을 일본말로 ‘아키나이’라고 하는데 ‘싫증나지 않는 것’도 그 음이 같은 ‘아키나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아키나이와 아키나이라는 말로 상업의 즐거움을 강조한다.

교토의 호시야마 김치는 유명하다. 호시야마는 한국어로 읽으면 성산 -성산이 고향인 모양이다. 일본 땅에서 담근 김치인데도 한국의 김장김치처럼 싱싱하다. 아니다, 한국의 본고장에서 만들어 내지 못하는 새로운 김치를 개발해 특허까지 신청하고 있다. 식품연구소에 의뢰해 김치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그 성분을 추출해 김치의 셀링 포인트로 개발하고 또 광고한다. 호시야마 김치는 한 종류가 아니라 ‘e-기무치’ ‘앗사리 기무치’ 그리고 우리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가바(GABA) 기무치’라는 것도 있다.

가바 기무치는 유산균의 작용으로 김치 100g 안에 발아 현미 약 800g 분의 아미노산 가바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혈압 안정 작용, 사람의 몸을 이완시키는 작용 등을 한다. e­기무치는 구루타지온 등의 성분이 있어서 활성산소 제거와 면역력 향상 그리고 해독 작용, 미용 효과, 간장 기능 강화, 암 예방 등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동포인 한국인인데 그리고 같은 김치인데 일본에 오면 이렇게 달라진다.

왜 우리는 본고장 단군신화 때부터 애용한 마늘 식품을 새로운 기능식품으로 상품화하지 못했는가. 어째서 우리는 김치냐, 기무치냐로 싸움만 하면서 현대문명에 맞도록 그것을 건강식품으로 개발해 발전시키지 못했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 그 맛있는 호시야마 김치가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정치도, 기업도, 교육도 모든 문화가 과거심리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 그것을 미래심리의 문화로 고쳐가는 것, 그것이 일본을 이기는 길이다.

일본인의 청결벽­항균제 시장

손을 씻는다. 온 종일 집에 있으면 손을 씻는다. 던컨 왕을 시해한 맥베스가 피 묻은 손을 씻는 황몽에 시달리듯 손을 씻는다. 취사 일을 하면서부터 생긴 버릇이다. 음식이 묻거나 그릇을 씻거나 욕조의 얼룩을 지우거나 무슨 일만 하면 손이 더럽혀진다. 이 손으로 나는 거의 50년 가까이 글만 써 왔는데, 이제는 이 손으로 밥도 하고 찌개도… 그리고 청소와 쓰레기 버리기에서 창을 열고 환기하는 일까지 모두 이 손으로 한다.

일할 때마다 비누로 씻고 제균제로 씻고 클리너와 타올과 내프킨 그리고 행주로 씻는다. 냄새가 조금 나도 씻고 수건으로 씻고 난 다음 그 수건이 조금 더러운 것을 알게 되면 다시 휴지를 꺼내 씻는다.

에도(江戶) 때 서양 사람들이 일본에 와서 맨 먼저 받은 인상은 청결하다는 점이다. 일본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하지 않고 ‘기레이’(깨끗하다)라고 말한다. 깨끗한 것과 아름다운 것은 사실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더러운 컵을 씻었다고 그것이 아름다운 컵이 되는 것은 아니잖은가.

일본인의 이 청결벽 때문에 일본은 세계에서 살균제가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가 되었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웬만한 물건에는 ‘제균’(除菌) ‘항균’(抗菌) ‘멸균’(滅菌) ‘살균’(殺菌) ‘소독’(消毒) ‘소취’(消臭) 같은 말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사용한 볼펜을 만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항균 볼펜이 나오고, 전동차의 손잡이 가죽을 만지지 못하는 사람들용으로 제균 티슈 페이퍼를 판매한다. 자기가 눈 변 냄새를 없애기 위해 먹는 약까지 시판하는 나라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병균에 대한 면역력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떨어진다며 ‘청결망국론’을 펴는 의사들도 있다. 일본의 청결벽은 자랑이 아니라 O-157 등 변종 바이러스 시대에는 커다란 두통거리로 떠오르기도 한다. 대장균은 인간과 수천 년 동안 서로 공생 관계를 맺고 별 탈 없이 지내 왔다. 그러나 항생제나 다른 의약품을 쓰는 바람에 장내 환경이 달라져 대장균이 이질균과 서로 결합해 특수한 신종 병원균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 바로 O-157이다. 한국인들은 이질에 걸려도 아무렇지 않지만 일본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일본에 와서 나도 이 청결벽에 걸렸는가. 아니면 제균제와 멸균제를 많이 사다 놓은 탓인가. 이렇게 손을 씻다 보니 내가 온 종일 생산하는 것은 쓰레기통에 버리는 휴지들이다.

저녁에는 무코마치(向日町) 역 근처에 있는 중국집 ‘사이’(菜)라는 곳에서 한국에서 온 연구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일본의 중국집은 한국의 중국집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역시 항균 실험실처럼 청결하고 실내장식도 일본화되어 있다. 입구에 한약의 샘플을 담은 병이 병원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이 중국음식점은 중국요리에 한약재를 넣어 만드는 것으로 유명해진 곳이라고 한다. ‘식의동원’(食醫同源)의 중국 전통을 이용한 상술이다. 누가 그랬던가. 문화는 사회의 간접자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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