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출판계 강타한 초 베스트 셀러의 ‘대박秘話’
|
지난해 국내에서는 밀리언셀러가 무려 네권이나 탄생했다. 각막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구하고 자신은 간암으로 죽어 가는 눈물겨운 부성애를 다룬 소설로 모두 105만권이 판매된 “가시고기”(조창인, 밝은세상), 새로운 영어 학습법을 제시해 영어공부의 패러다임을 바꾸며 시리즈 전체로는 130만권이 판매된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정찬용, 사회평론), 돈이 부족한 것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도발적 메시지로 우리 사회의 뇌관을 건드려 ‘돈’과 ‘부자’라는 말을 공론화시키며 100만권이 판매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 외, 황금가지), 고아 소년이 마법을 배워 부모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고 마침내 마법의 영웅이 된다는 이야기로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 전세계 어린이들을 책벌레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전세계에서 6,600만권, 국내에서만 300만권이 팔린 “해리포터” 시리즈(조앤 K. 롤링, 문학수첩) 등이 바로 그것이다. 과거 몇년간 실종됐던 밀리언셀러가 한꺼번에 네권이나 탄생하면서 국내 출판계는 모처럼 활력을 얻었다.
밀리언셀러는 모든 출판인의 꿈이다. 하지만 밀리언셀러는 노력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대박’에는 천운이 작용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만큼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출판계는 IMF 이후 2년을 제외하고는 1990년대 이후 매년 밀리언셀러를 탄생시켰다. 소위 말하는 ‘대박’ 즉 밀리언셀러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이미 탄생한 밀리언셀러의 분석을 통해 밀리언셀러에 얽힌 9가지 법칙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지난해 밀리언셀러에 등극한 책들의 탄생 전말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임자는 따로 있다
“가시고기”는 한 출판사에서 원고 검토를 끝내고 출간 준비중이었다. 그 전에도 이 원고는 우리나라 유수의 출판사인 J출판사 등의 손을 거쳤으나 정작 출판은 거부당했다. 이 출판사 역시 산적한 다른 일 때문에 차일피일하는 사이 밝은세상에서 저자를 설득해 출간을 밀어붙였다. 원고를 검토하던 밝은세상의 김석원 사장은 너무나 슬퍼 마지막 장은 차마 읽지 못했다고 한다. 아빠 곁을 떠나는 아이가 아빠의 귓불을 만지는 장면에서 30분은 족히 울었다는 것이다. 태어나 그렇게 많이 울어보기는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감동한 김사장은 바로 출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저자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이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 책을 검토할 당시 김사장은 이미 펴낸 소설 “남자의 향기”(하병무)의 영화화에 손댔다가 큰 손실을 입는 바람에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 책 한 권으로 그동안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의 원고는 저자와 친분관계가 있던 지식공작소에서 1년여 정도 검토기간을 거치며 묶여 있었다. 이후 민음사·미래M&B·키출판사 등으로 원고가 넘어갔으나 그때마다 모두 외면당했다. 영어책이면서도 영어단어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이 원고를 어떻게 책으로 만들어낼 것인지 편집자들은 반신반의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은 편집자가 원고를 읽어보면 대강 책 모양이 그려지게 마련인데 이 책은 그런 상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펴낸 사회평론은 원고를 검토한 지 불과 열흘만에 저자와 출판계약을 했다. 계약 당시 사회평론은 “이런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국내에는 이런 책을 쓸 사람도, 이런 종류의 책도 없다. 원고의 내용은 그럴 듯하다. 이런 식으로 영어를 해서 된다면 나도 해보고 싶다. 이 책은 ‘도’ 아니면 ‘모’다. 완전히 실패하거나 대박을 터뜨리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사회평론은 IMF 이후 월간지 “사회평론 길”에 기약 없는 휴간의 팻말을 붙이고, 거래처의 도움을 받아 하루하루 돌아오는 어음을 막기에 급급했다. 한마디로 부도 일보 직전이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는 국내에 닷컴 열풍이 노도처럼 몰아칠 때 전세계에 온라인서점 열풍을 몰고온 아마존닷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황금가지(민음사의 계열사)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1999년 5월경이었다. 국내 베스트셀러 목록과 아마존 베스트셀러 목록이 닮아가는 추세여서 국내의 수많은 출판사들도 아마존의 베스트셀러 1위였던 “Rich Dad Poor Dad”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어드밴스’(외국서적을 번역 출간할 경우 원래의 출판사에 주는 계약 선불금)가 문제였다. 여러 출판사들이 달려들다 보니 어드밴스 오퍼 금액만 자꾸 올라갔다. 일부 출판사는 이미 번역을 끝내 놓고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무리한 액수의 어드밴스를 좀처럼 제시하지 않는 황금가지 역시 오퍼 금액을 높여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평소보다 높은 어드밴스 때문에 고민하던 황금가지의 편집자는 추석연휴를 맞아 귀성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손에 잡으니 놓을 수가 없었다. 문장이 쉽고 평이할 뿐 아니라 무척 재미있었다. 그의 기억에 외서를 출판계약하기 전에 다 읽은 책은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사실 황금가지(민음사)는 외서의 경우 출판경쟁이 붙으면 포기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사장 이하 전 편집진에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됐고, 모두 눈에 콩깍지가 씌웠나 싶을 정도로 홀려 달려들었다. 영국의 한 가난한 이혼녀가 쓴 “해리포터” 시리즈는 이미 200개 언어로 번역될 정도로 전세계에 돌풍을 몰고왔다. 문학수첩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출간하게 된 데는 기획자의 5전6기의 끈질긴 노력이 숨어 있다. 당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에는 아동용 책으로 소개된 “해리포터” 시리즈가 계속 상위에 랭크되고 있었다. 출판기획자의 눈에 이런 기이한 현상이 띄지 않을 리 없었다. 당장 원서를 주문해 꼼꼼히 살펴보니 한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문학출판의 영역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었던 문학수첩 경영진은 선뜻 아동서를 출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담당자는 기획서를 무려 다섯번이나 올리며 끈질기게 경영진을 설득했다. 좁은 아동출판시장, 아동출판 경험, 그리고 높은 어드밴스 등으로 망설이던 경영진도 기획자의 계속되는 설득에 마침내 출판을 결정하게 됐다.
“해리포터” 역시 국내의 수십여 출판사가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1권의 번역본은 이미 민음사·문예출판사 등 유명 출판사들의 손을 거친 다음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어드밴스가 문제였다. 저작권 대행사는 모두 7권으로 기획된 이 시리즈의 어드밴스로 권당 1만5,000달러를 요구하고 있었다. 국내에서의 시장성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10만달러 이상을 거는 모험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영국에서도 블룸즈베리 출판사가 출간을 결정하기 전 무려 9개 출판사를 전전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블룸즈베리 출판사 역시 이 책이 지금과 같은 성공을 거두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웃 일본에서 이 책이 출간된 배경 또한 비슷하다. 일본의 메이저 출판사들이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높은 어드밴스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아무도 오퍼를 하지 않은 채 마냥 기다리고 있을 때 시즈야마사라는 신생출판사가 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판권을 따냈다. 시즈야마사는 마츠오카 유코라는 여사장과 직원 1명의 아주 작은 신생출판사인데 동시통역사 출신인 마츠오카 사장이 영국에 있는 친구의 소개를 받은 다음날 바로 영국으로 건너가 판권을 확보했다.
현재 추세로 볼 때 “해리포터” 시리즈는 국내에서만 2,000만권의 판매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정가로 계산하면 1,400억원이나 된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건진’ 문학수첩은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은 셈이다. 책 한권의 선택으로 얼마나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지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이처럼 밀리언셀러의 원고는 여러 출판사를 전전하지만 ‘임자는 따로 있다’.
명예퇴직과 감원 열풍이 한창이던 1996년 출간돼 불과 6개월만에 200만권이나 팔린 소설 “아버지”(김정현, 문이당) 또한 같은 경우다. “아버지”는 40대 가장이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가족만큼은 지켜 주려는 애틋한 사랑을 다뤄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고개 숙인 아버지’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시켰다. 이 소설은 단순한 구성과 생경한 문체 등 소설미학 측면에서 문제점이 적지않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 출판사에서 문전박대당하다 문학전문 출판사인 문이당에 터를 잡았다.
출판사 기획자들은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반 초반의 여성들이다. 그들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많기 때문에 인생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을 뿐 인생을 정리하는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돈 안되는’ 문학출판으로 빚만 늘리고 있던 40대 중반의 문이당 임성규 사장의 눈에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다. 때문에 그는 문학적 결점보다 ‘감동’에 주목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임사장이라는 임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문학성마저 의심받던 이 소설은 일본 후타바샤 출판사와 364만엔이라는 높은 저작권료 계약으로 수출돼 1998년 7월 일본 독자들과도 만났다.
1990년대 교보문고에서 가장 많이 팔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잭 캔필드 외, 이레, 1996년)는 IMF 이후 자본주의 속도전에 멀미를 느끼면서도 한모금의 감동과 위안에 목말라하던 대중에게 ‘따뜻한 감동’을 안겨주며 350만권 이상 팔려나갔다. 원래 이 책은 푸른숲에서 “내 영혼의 닭고기 수프”란 제목으로 출간됐으나 빛을 보지 못했다. 이레에서는 류시화씨에게 번역을 맡기는 한편 내용을 보충해 세 권으로 펴냈다. 그러나 이 책이 대박을 터뜨리기까지는 광고의 힘이 컸다. ‘잘 뽑은 광고 한 카피, 열 자식 안부럽다’는 광고계의 속담처럼 이레는 책의 내용 가운데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부분을 골라 광고카피로 전재하는 전략을 썼다. 결국 이 전략이 먹혀들면서 “마음을 열어 주는 101가지 이야기”는 밀리언셀러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이에 자극받은 푸른숲은 “내 영혼의 닭고기 수프”였던 제목을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로 바꾸고 내용도 똑같이 세 권으로 늘려 ‘저가전략’으로 맞섰다. 덕분에 푸른숲 역시 이레만큼의 대박은 아니나 70만권을 판매하는 어부지리(?)를 올릴 수 있었다.
이미 출판됐던 책이 이름을 바꿔 달고 화려하게 재기한 케이스가 또 하나 있다. 핵물리학자인 이휘소 박사를 소재로 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바로 그것.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다른 출판사에서 “플루토늄의 행방”(전 2권)이란 제목으로 출간했으나 판매가 부진했다. 그러나 내용을 세 권으로 늘려 가다듬은 다음 제목을 바꿔 달고 출간돼 400만권 이상 판매됐다.
1990년대 초반 역사인물소설 붐의 서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소설 동의보감”(이은성)도 여러 출판사를 전전하기는 마찬가지. 미완성인 데다 이미 작고한 극작가가 처음 쓴 소설이고, 부산의 ‘이름 없는’ 주간지에 연재됐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땡기지’ 않는 원고였다. 결국 이 애물단지는 작고한 저자의 친구인 언론인 이진섭씨가 “세대”지 편집장 시절 인연을 맺은 백낙청 교수에게 소개함으로써 창작과비평사에서 출판해 400만권 이상 판매되는 개가를 올렸다.
출판사나 편집자 개인의 취향에 따라 작품을 선정하는 가치판단도 다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밀리언셀러들은 개인의 ‘취향’이나 ‘가치판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그래서 밀리언셀러는 ‘임자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물론 원고 검토단계에서 포기한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굴러들어온 ‘산삼’을 ‘도라지’라며 버린 꼴이니 그 쓰린 속을 능히 짐작할 만하다.
절박하게 매달려야 겨우 손짓하는 대박
그렇다고 뒷짐지고 마냥 기다린다고 해서‘대박’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시고기”와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의 탄생 뒷얘기에서 확인한 것처럼 밀리언셀러는 무엇인가 절박한 상태에서 ‘목숨 걸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어야 탄생한다.’ ‘노력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거나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아직도 경구로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들녘의 이정원 사장은 대학 강단에서 2년여 동안 정치학을 강의하다 출판계에 뛰어들었다. 초창기에는 사회과학서적을 주로 출간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적자만 늘어나고 있었다. 이사장은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문학서적 쪽으로 눈을 돌렸지만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 직원들의 월급마저 제때 지급하지 못할 정도가 되자 마음은 더욱 다급해졌다. 마침 아동용 ‘공포특급’이 폭발적 반응을 보이던 시절이어서 이사장도 비슷한 물건이나 하나 만들어 보자며 컴퓨터 통신인 하이텔에 들어가 공포물을 찾던 중 눈에 띈 것이 바로 “퇴마록”(이우혁)이었다. “퇴마록”은 당시 조회건수가 1만건을 넘을 만큼 인기절정이었다. 책 출간후 들녘이 “퇴마록”에 목숨을 걸다시피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퇴마록”은 지금까지 17권이 발행돼면서 모두 600만권 이상 판매됐다.
“소설 토정비결”(이재운)이 출간되기전 해냄의 영업부장 모씨는 종로5가의 ‘대학천’(도매상 밀집지역)에서 살다시피 하며 어음을 할인해 현금화하는 일이 주업무일 정도였다. 광고비도 적지않게 밀렸고, 용지대와 제작비도 동결되다시피 했다. “소설 동의보감”에 이어 역사인물소설의 인기 바통을 이어받기 위해 해냄은 ‘마지막 승부’를 거는 심정으로 “소설 토정비결”의 대박 만들기에 매달렸다. 해냄의 이런 ‘절박한 노력’은 이어진 밀리언셀러 “여자의 남자”(김한길),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까지 계속되었다. 다나출판사는 그동안 번역서 등 꽤 많은 책을 펴냈으나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상황이 점차 악화되어갈 즈음 “잃어버린 너”의 저자 김윤희씨를 만났다. 다나의 대표는 당시 뇌종양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저자를 병원으로 매일 찾아가다시피 하며 하루 몇장씩의 원고를 악착같이(?) 받아냈다. 저자나 출판사 모두 절박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미친 듯 일하는 사람이 없으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다행히 책은 밀리언셀러에 올라 출판사나 저자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타이밍은 필요조건
그러나 책이든 영화든, 심지어 인간의 운세에도 시운(時運)이라는 것이 있다. 때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 창작과비평)는 영화 “서편제”가 1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우리 것 찾기 붐이 일어나던 시기에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사랑과 올바른 이해, 그 속에 담긴 인간의 이야기를 특유의 문체로 맛깔스럽게 설명해 큰 인기를 누렸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성공 이후 책에서 소개한 문화유적지에는 “…답사기”를 들고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줄을 이었다. 당시는 먹고 마시는 집단여행에서 탈피해 직접 차를 몰고다니는 가족단위 테마여행이 늘어나던 시점이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가 책을 크게 띄운 것이다. 이 책 이전에도 “국토기행”(박태순, 한길사), “민요기행”(신경림, 한길사) 등 컨셉이 비슷한 책들이 출간됐지만 시운을 잘못 만나 ‘대박’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야 했다.
1993년 2월 완간된 “반갑다 논리야” 시리즈(전 3권, 위기철, 사계절)는 원래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철학적 통찰력과 논리적 사고력을 대중화하려는 의도로 출간된 책이다. 내용과 형식도 당연히 초등학생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엉뚱하게 1994년부터 수학능력시험 실시와 함께 본고사가 부활되는 등 대학입시 제도가 변화하면서 이 책은 단숨에 대박 반열에 오른다. 새 입시에 논술고사가 추가됐으나 그에 대비한 마땅한 참고서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 간파한 사계절은 여름방학을 앞두고 전국 고교 국어교사 7,000명에게 책 한질씩(2만1,000권)을 무료로 나눠 주었다. 일선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책을 적극 추천했으며 이후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결국 대학입시의 변화라는 시운을 맞아 이 책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게 된 것이다.
타이밍을 절묘하게 잘 맞추는 작가로는 양귀자가 있다. 양귀자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2) “천년의 사랑”(1995) “모순”(1998) 등 남들은 일생에 한번 터뜨리기도 힘든 ‘대박’을 정확히 3년마다 터뜨려 ‘3년마다 분출하는 활화산’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일상적 학대가 자연스럽게 은폐되고 이해되는 남성중심사회를 공격하는 테러리스트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나는 소망한다…”가 출간된 1992년은 공격적 페니미즘 소설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착한 여자’에 대한 환상과 ‘능력 있는 여자’에 대한 편견, 그리고 이율배반적인 이 두가지 가치를 동시에 요구받는 여성들의 문제를 사회문제로 부각시킨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공지영), ‘나는 더 이상 남편을 위해 밥상을 차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는 광고카피로 한동안 인구에 회자됐던 “혼자 눈뜨는 아침”(이경자) 등의 소설이 인기를 끌었던 시점이 바로 1992년 무렵이었다.
1,000년전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눴던 두 남녀가 또 다른 남녀로 환생, 연모의 정을 교환한다는 줄거리를 가진 소설 “천년의 사랑”은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자가발전이라도 해서 스스로 공주라고 칭하는 ‘공주병’이 유행하던 시절 발행됐다. 비슷한 시기에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남자가 여자를 위해 헌신하는 소설 “하얀 기억 속의 너”(김상옥) “남자의 향기”(하병무) 등이 베스트 반열에 올랐다. 양귀자는 또 IMF 직후 대중들이 인생설계를 휴지조각처럼 내던지고 가족공동체의 위기, 생존의 위기에 빠져 있던 절박한 시점에 “모순”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며 또 한번 대박을 준비한다. “모순”은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각기 판이한 삶을 살아가는 엄마와 이모가 만난 아버지와 이모부를 연상케 하는 두 남자, ‘항상 안개처럼 떠도는 남자’와 ‘항상 열차표처럼 준비된 남자’ 사이에서 고민(이것이 인생탐구다)하는 25세 여성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는데, 작가는 ‘너는 과연 어느 편이냐’는 질문으로 시대적 고민을 함께한다.
‘제목장사’가 반
하지만 아무리 내용이 재미있고 시운을 타도 우선 독자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 수많은 책들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제목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출판계에서 ‘제목장사가 반’이라는 말이 ‘금과옥조’처럼 사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박은 결국 제목싸움인 것이다. 엄마 가시고기는 알을 낳은 후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지만 아빠 가시고기는 혼자 남아 알을 먹으려고 달려드는 다른 물고기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다. 소설 “가시고기”의 줄거리는 가시고기의 이런 특성과 일맥상통한다. 이처럼 요즈음 소설의 제목은 주로 짧고 강렬하게 이미지를 주는 상징어인 명사다.
이런 경향은 최근의 소설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보면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국화꽃 향기”(김하인) “아주 오래된 농담”(박완서) “상도(商道)”(최인호) “묵향”(전동조) “돼지들”(이정규) “압록강”(김탁환) 등. 크게 될 책은 제목만 보고도 소설이 지닌 구체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 비소설은 서술형이면서 가치제안적이다. “아들아 머뭇거리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다”(강헌구) “성공한 사람은 사소한 일에도 목숨을 걸지 않는다”(리처드 칼슨)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스펜서 존슨) “내 몸은 내가 고친다”(김홍경) 등 몇 가지만 열거해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오늘날 독자들은 전통적인 ‘읽는 사람’(reader)이 아닌 ‘사용자’(user)의 모습이다. 사용자들을 염두에 둔 실용서는 심정을 자극하는 도발적 제목이어야 한다.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가 대표적 사례. “아직도 영어공부 하니”(정찬용) “365단어로 코쟁이 기죽이기”(백선엽) “두번만 읽으면 끝나는 영문법”(배진용) “나는 초단타매매로 매일 40만원 번다”(최원철) “나는 사이버 주식투자로 16억을 벌었다”(최진식) 등 제목은 갈수록 자극적으로 변해간다.
길벗의 “무작정 따라하기” 시리즈는 최근 100만권을 돌파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에 관련된 책을 연속 펴내는 이 시리즈는 상품의 정확한 컨셉, 가독성 있는 편집구성, 사용자 중심의 상품구성, 젊은 독자를 겨냥한 포장 등 장점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의 시장성을 키운 일등공신은 아무래도 제목이다. “컴퓨터 무작정 따라하기”는 컴퓨터를 전혀 모르는 네 명의 초보자를 대상으로 테스트를 거쳐 만들었다. 베타 텍스트(책 출간 이전에 독자에게 내용을 검증하는 시험)를 거쳤다는 것을 제목에서 은근히 암시하면서 ‘컴퓨터가 밥 먹는 것처럼 쉽다’는 개념을 주입시킨다. 경쟁상품인 “할 수 있다” 시리즈나 “길라잡이” 시리즈보다 소비자(독자)에게 기술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제공되는 편익이 많음을 은근히 암시해 열악한 영업력에도 불구하고 브랜드 가치를 확실하게 함으로써 이 시리즈의 ‘자발적 중독자’ 수를 늘리고 있다.
1980년대가 이념과 집단주의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실리와 개인주의·다원화 시대다. 1970년대 군사문화, 80년대 저항문화, 90년대 카오스문화를 거치며 생산시대에서 소비시대로 진입하고, 개성을 중시하고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는 패턴이 출판시장에서도 통용된다. 소비시대에 책은 더 이상 저자의 아우라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작품’이 아니다. 책도 이제 상징적 이미지에 좌우되는 상품일 뿐이다. 하지만 소비자는 상품을 사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상품이 지니는 ‘기호적 가치’를 소비할 뿐이다.
이러한 사례를 밀리언셀러가 된 책들이 원래 고려했던 제목들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는 “한 달이면 TOIEC 200점이 오르고, 6개월이면 모국어가 되는 영어학습의 대혁명”,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는 “부자들이 들려주는 돈과 투자의 비밀”, “천년의 사랑”은 “작은 배가 있었네”, “아버지”는 “사랑을 위한 사랑”,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은 “효과적인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을 각각 누르고 선택된 제목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