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출판시장」 날개가 없다
단군 이래 최고 불황이라는데…

요즈음 일부 출판관계자들은 출판시장을 가리켜 ‘해리포터 세상’이라고 한다. 고아 소년 해리포터가 마법학교에 입학해 마법사 세계의 영웅이 되기까지의 모험과 환상을 그린 ‘해리포터’ 시리즈의 4권 “해리포터와 불의 잔”(J.K.롤링)이 미국에서 초판 380만권이라는 역사상 최대 부수가 한순간에 동나는 일이 벌어지면서 전세계에 불어닥친 돌풍은 한국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문학수첩에서 현재 3권까지만 번역 출간한 ‘해리포터’ 시리즈(한글 번역본은 6권)는 이미 100만권을 넘어섰다. 이 시리즈는 지난 7월 한달 동안에만 32만권의 판매를 기록했으며, 점차 가속을 받아 올 연말에는 300만권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세로 볼 때 출간 2∼3년만에 1,000만권을 돌파하는 최초의 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수첩의 기획자는 이 책의 기획서를 다섯번이나 고쳐 썼다고 한다. 판매 가능성보다 저작권 어드밴스(번역판 인세 선불금)가 너무 높아 출판사 대표가 계속 망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유명 출판사들이 어드밴스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문학수첩은 계약을 했고 결국 21세기 출판계 최대의 사건이라는 ‘해리포터’ 사건의 한 주역이 될 수 있었다.

‘해리포터’ 시리즈 외에도 영어 스트레스에 빠져 있는 대중에게 영어를 정복할 수 있는 특별한 노하우를 제공하는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정찬용, 사회평론) 시리즈가 95만권, 아내가 가출한 이후 각막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급성 임파구성 백혈병을 앓는 아이를 낫게 하고 자신은 가시고기처럼 자식이 아내에게로 떠난 뒤 세상을 하직하는 내용의 “가시고기”(조창인, 밝은세상)가 62만권, 돈이 부족한 것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도발적 메시지로 돈 좋아하는 것을 내색하면 안된다는 우리 사회의 오랜 허위의식을 정면으로 깼다고 평가받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 외, 황금가지)가 45만권을 기록하는 등 몇몇 대형 베스트셀러는 불황중에도 커다란 반응을 얻고 있다.

이같은 호황은 지난 2년 동안 밀리언셀러의 맛을 느껴보지 못했던 출판계에 모처럼 불어온 훈풍이다. 그러나 이런 호황은 몇몇 대형 베스트셀러들에 국한될 뿐 전체적으로는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특히 교양인문사회과학서, 문학 등 전통적으로 시장을 주도하던 분야의 침체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례를 들어 보자. 23년간 인문서 출판의 외길을 걸어온 까치 출판사는 1998년 6월 돈의 역사와 전파 과정을 통해 각 문명권의 문화적 다양성과 돈의 정치·사회적 의미를 되짚어 보는 “돈의 세계사”(조너선 윌리엄스)를 출간했다. 초판 발행부수는 2,100권. 그러나 지난 2년간 총 판매부수는 1,533권에 불과했다. 이 책의 초기 위탁배본 부수 600권은 서점 진열용으로 출고한 것이므로 아직 대부분 서점의 서가에 꽂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독자의 손에 확실하게 넘어간 것으로 볼 수 있는 부수는 900여권을 약간 상회한다고 볼 수 있다. 인문서의 경우 보통 2,000권 정도로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것을 감안하면 출혈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나마 그때는 행복한 시절이었다. 2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역시 까치에서 지난 3월 서유럽의 역사를 통해 금과 화폐의 원천 그리고 그 역할의 변화를 살펴본 책 “금과 화폐의 역사”(피에르 빌라르)를 출간했다. 초판 발행부수는 1,400권. 그러나 이 책은 696권 판매에 그쳤다. 벌써 반품이 들어오고 있어 앞으로의 판매에는 큰 기대를 걸지 못한다. 이 책의 경우 초기 배본부수가 400권이었으므로 독자의 손에 확실하게 넘어간 것으로 볼 수 있는 책은 300여권에 불과하다. 편집자 한 사람이 보통 3개월 일해야 학술서 한권이 완성된다. 정가가 12,000원인 이 책의 판매금액을 모두 합해 봐야 편집자 1명의 인건비에도 미치지 않는다. 까치는 최근 몇년 사이에 수십종의 인문서를 펴냈지만 4,000권을 넘긴 책은 단 두종에 불과하다. 380여곳의 공공도서관과 400여곳의 대학도서관이 학술서 한권씩만 구입해 준다 해도 학술 출판은 크게 활성화될 것이다.

편집자 1인 인건비에도 못미치는 판매금액

그러나 우리 도서관들은 책을 구입할 줄 모르게 된 지 오래다. 까치출판사의 박종만 사장은 “이런 풍토에서 과연 출판을 계속해야 하느냐 하는 회의가 든다”고 밝혔다. 이 사례에서만 보면 인문서 시장은 2년만에 3분의 1 정도로 축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인문서 출판사들은 적지 않게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출판사들도 인문서 출판의 간행 종수를 줄이거나 다른 분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됐는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문명에 의해 필연적으로 오는 문명사적 전환의 징조인가, 아니면 한국의 특수적 상황에 의해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가? 일시적 현상이라면 시스템의 개혁에 의해 고칠 수 있겠지만 그 반대라면 인문서 출판은 정말 희망이 사라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1980년대만 해도 인문서 시장에서는 책을 읽는다고 볼 수밖에 없는 계층, 즉 ‘리딩 퍼블릭’(reading public)이 존재했다. 대학생, 오피니언리더, 전문직 종사자 등이 바로 그들이다. 대부분의 인문서는 기본적인 수요가 보장됐다. 그때는 출판사는 단지 책을 잘 만들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됐다. 그런 영향으로 1990년대에는 무관심 상태에서 방치됐던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전 국민의 여행문화를 뒤바꿔버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 창작과비평사), 430여권에 이르는 “조선왕조실록”을 한권으로 정리해 역사교양서 읽기 붐을 일으켰던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 들녘) 같은 교양 인문서가 밀리언셀러가 됐다.

로마사의 교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안목과 손에 잡힐 듯한 세밀한 묘사가 일품인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한길사), 문화생태학적 통찰력으로 외견상 이해하기 어렵고 비합리적이며 상징적으로 보이는 현상들 뒤에 감추어진 합리성을 분석한 “문화의 수수께끼”(마빈 해리스, 한길사), 남근과 여근석·금줄·개고기·솟대 등 우리 문화에 담긴 15가지 수수께끼를 해박하게 해설한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주강현, 한겨레신문사) 등 수십만권 이상 팔린 책들이 줄을 이었다. 드디어 인문서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인문서를 읽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바로 ‘리딩 퍼블릭’이 실종된 것이다. 지금 사회의 중추세력으로 활동하는 30대 중반과 최대의 독서계층인 20대는 모두 인문서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 세대는 1980년대에는 유치원에서 초·중등학교를 다녔다. 이념의 세례를 거의 받지 않은 세대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1990년대 말의 IMF 충격이나 디지털 혁명의 자극은 강하게 받았다.

IMF로 인해 이들은 돈이 없으면 국가도 개인도 대접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IMF 직후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취직의 기회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미아 신세로 전락했다. 돈이 없으면 인생설계마저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으로 날려버려야 하는 비참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디지털 혁명 또한 이들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것을 강요했다. 이들의 머리 속에는 독재권력에 대한 두려움이나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전쟁의 공포는 느껴본 적이 없다시피 하지만 디지털 체제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두려움에서는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다. 책은 생존경쟁력을 키워주는 책과 삶의 기쁨을 안겨주는 책으로 크게 나뉜다. 독자들, 특히 대학생들은 생존경쟁력을 키워주는 책은 어떻게든 읽는다. 대표적인 책이 영어 학습서와 컴퓨터 서적이다. 이들 책시장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수도권과 위성도시에 위치한 2백∼3백평 규모의 중형서점에는 이들 책이 매장의 약 40%를 차지할 정도로 위세를 떨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즉각적인 경쟁력을 키워주는 능력에서 다소 처지는 인문서는 서점의 서가에서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생들이 삶의 기쁨을 안겨주는 엔터테인먼트성 책을 즐겨 읽는 것도 아니다. 영화·게임·비디오·레저문화 등 소비양태는 세련돼가면서 다양화된다. 인터넷의 등장은 소비문화의 생산과 공급을 증대시키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은 이같은 소비문화가 가져다주는 광범위한 감각적 쾌락시장에 크게 노출돼 있다. 인터넷·핸드폰으로 인한 통신비용 또한 대폭 늘어났다. 이들의 문화 소비력이 증대되고는 있지만 다른 분야에 쓰이는 비용이 적지 않아 책에 대한 구매력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더구나 책을 많이 소유하고 읽는 것이 품위와 교양을 나타내던 분위기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

전국의 대학 정문 앞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던 인문·사회과학 서점은 서울에 9개, 지방에 6개 정도만 남고 모두 사라졌다. 출판사들은 인문서를 읽는 독자층이 눈에 보이지 않자 일반대중(mass)을 염두에 두고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막연한 대중의 관심을 얻기 위해 만든 책들은 개성이 없이 비슷비슷하게 변해가고 있다. 그 책만이 갖는 독특한 개성은 모두 사라진 천편일률적 디자인, 별 의미 없이 연성화되는 내용, 대중서도 전문서도 아닌 어정쩡하게 퓨전화된 기획, 번역서 위주의 출판, 문화성은 도외시한 채 사업성 위주로만 만드는 책들이 늘어났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하는 법. 결국 인문서 시장은 갈수록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문학 시장은 어떤가? 올 최대 화제작 “가시고기”를 제외하고는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소설이 없다. 1980년대 이후 격동했던 한국사회와 사회주의권 붕괴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사적 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두 남녀의 곡절 많은 삶과 사랑을 그린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창작과비평사), ‘당편이’라는 정신과 육체가 모두 불완전한 인물을 통해 잊혀진 공동체의 아련한 기억을 되살려내는 이문열의 “아가”(雅歌, 민음사),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이성간, 동성간 사랑 나누기를 통해 욕망의 허망함과 혼자 남은 슬픔을 그린 표제작 “딸기밭”을 비롯한 최근작 5편을 묶은 신경숙의 네번째 창작집 “딸기밭”(문학과지성사), 문명의 이기인 인터넷을 장악하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와 그 무대의 중심에 선 한국의 미래를 그린 김진명의 “코리아닷컴”(해냄), 이혼·마약중독에다 어머니에 의한 정신병원 강제입원 등 인생의 밑바닥을 헤매던 프로기사 차민수가 최고의 승부사이자 부유한 백만장자로 일어서기까지의 역동적인 삶을 그린 실명소설 노승일의 “올인”(들녘), 말기암을 앓아가면서도 잉태한 생명을 끝끝내 지켜낸 모성애와 생명의 소중함이 직조해낸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김하인의 “국화꽃 향기”(생각의나무) 등이 10만∼20만권의 판매를 기록한 책들이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해마다 몇종의 밀리언셀러 소설이 등장하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문화권력자’들도 쇠망하기는 마찬가지

확실하게 인기를 이어가는 작가들도 사라지고 있다. 앞의 세 본격작가의 책들은 언론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 자신의 이름이 적힌 책이 2,000만권이나 팔려나가고, 1997년에 출간된 “선택”이 50만권이나 판매됐던 이문열의 올 신간 “아가”는 10만권을 겨우 넘겼다. 인기가 확실한 여성작가 트로이카 중에서도 선두주자로 꼽히던 신경숙의 “딸기밭”은 현재 12만5,000권이 판매됐다. 이 부수는 지난해 펴낸 “기차는 7시에 떠나네”(문학과지성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장편소설로는 “무기의 그늘”(창작과비평사) 이후 13년만에 출간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은 14만권이 판매됐다. 일종의 ‘문화권력’을 구가하던 이들의 신작이 이 정도의 판매에 그치자 문학 출판사들은 매우 당혹해하고 있다. 유망한 신인작가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신인의 소설로는 올해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으로 우리 사회의 ‘사랑’ 또는 ‘결혼’이라는 개념 속에 가려진 위선과 위악을 파헤친 이만교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민음사)가 4만권의 판매를 기록한 것이 최고다.

그나마 문학 출판사들도 최근에는 수만권의 판매가 보장되지 않는 소설은 출간 자체를 기피하고 있다. 따라서 소설 출간 종수는 크게 줄어들고 있다. 3,000∼5,000권밖에 판매되지 않더라도 문학성은 인정받는 작품들의 출간은 찾아보기 어렵다. 소설 부문의 확실한 시장으로 일컬어지던 고전문학시장마저 붕괴되고 있다.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읽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던 고전작품들마저 서점의 서가에서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세계문학 시리즈를 경쟁적으로 펴내던 몇몇 출판사들은 이미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최근에는 책을 사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책을 읽는 방식이 변했음을 의미한다. 우선 소설을 읽지 않는다. ‘죄와 벌’의 살인자 라스꼴리니꼬프는 세상에 흔하디 흔하고, 소설의 줄거리를 쫓는 데 지겨워졌다. 요즘은 사실(fact)이 소설보다 우월하다. 또 사실은 소설보다 훨씬 빠르고 매우 상세하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더 이상 소설이라는 형태로는 정보를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5월부터 일본의 웹진 “책과 컴퓨터”(www. honco.net)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 ‘100일 토론-인간은 왜 책을 읽지 않게 됐는가’를 읽은 한 독자가 출판사로 보낸 E메일의 한 부분이다. “데카메론”(보카치오) 이전이나 이후나 항상 현실은 소설보다 재미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현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급변하고 있다. 그 현실이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누구나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하면 하루종일 엄청난 규모의 재미있는 현실(사실)을 대할 수 있다.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실시간으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일부 계층에게는 소설은 무용지물인 것처럼 보인다.

“한국, 아시아 출판계에서 가장 뒤져 있다”

앞의 독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를 접하는 시간은 이전보다 늘어났다. 활자가 아닌 문자다. 하루 중 절반 이상의 시간을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보내고, 매일 읽는 메일, 메일매거진의 양은 엄청나다. 그러나 이것은 책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정보의 질과 책과 모니터라고 하는 미디어의 차이는 관계가 있는 걸까?”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또 “재미있게도 책은 읽지 않으면서 쓰는 일은 늘었다. 단순한 통신문을 뛰어넘어 논리정연한 문장도 쓰게 됐다. 그것은 메일과 웹사이트라고 하는 간단하면서도 가볍게 발표되고 즉각적으로 반향이 나타나는 미디어가 우리 가까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도 했다. 디지털 문명은 정보의 생산과 소비양태 자체를 바꿔놓고 있다. 모든 정보의 소비자는 바로 생산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정보의 일방적인 공급을 생각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인간이 꼭 필요로 하는 정보는 무엇이며, 그 정보를 어떤 경로로 취하려 들 것이며, 또 어떤 방법으로 소비(수용)하려 들 것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이미 독자들은 더 이상 읽는 사람들이 아니다. 독자들은 ‘읽는 사람’(reader)에서 ‘사용자’(user)로 급속도로 전환되고 있다. 그 사용자들이 찾는 정보는 무엇인가? 지난해 내한했던 일본의 가토카와쇼텐(角川書店)의 가토카와 쓰구히코 사장은 “독자들의 니즈(needs)는 실용서와 엔터테인먼트로 요약된다”고 정리했다. 엄숙주의가 크게 지배하는 우리 출판현실에서는 매우 도발적인 발언으로 비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현실로 인정해야만 할 단계에 서 있다.

가토카와 사장은 “점잔만 빼며 출판하던 시대는 지났다”며 “한국 출판계는 변화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해 아시아 출판계에서 가장 뒤떨어져 있다”고 질타했다. 그는 일본 출판이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으로 만성적 출판불황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가소프트웨어’ 전략을 도입해 1998년에 돌풍을 일으켰다. ‘메가소프트웨어’란 멀티미디어 출판을 좀더 발전시킨 개념이다. 출판사업을 핵으로 새로운 시대의 첨병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비디오·게임·음악·만화·이벤트 등의 소프트웨어를 융합시킨 사업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토카와쇼텐도 지금은 고전하고 있다. 젊은 소비층의 기호가 워낙 빠르게 바뀌다 보니 ‘메가’ 전략의 성공 확률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또 이 전략은 실패했을 때의 손실이 크며, 설사 성공했다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가 시들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아직 수용자(소비자)의 관점에서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수용(소비)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전자미디어의 등장은 인간의 독서습관을 ‘혁명적’으로 뒤바꿔 놓고 있다. 지금까지는 인터넷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보는 주식시세, 박찬호 야구 속보, 일기예보, 오늘의 운세, 물건시세 등과 같은 극도로 쪼개진 ‘파트워크(partwork)형’ 정보 혹은 포르노와 같은 쾌락용 정보다. 전세계 인터넷 이용자의 85%는 지금도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한다. 이런 경향은 앞에서 가토카와 사장이 말한 독자의 니즈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경제·경영서의 시장 확대는 대형서점 분야별 매출점유율 1위에서 확인된다. 교보문고의 경우 경제·경영서는 지난해 1위로 올라섰다. 학습 참고서는 컴퓨터 서적과 외국어 서적에도 밀려 4위로 밀려났다. 소설은 종교서적과 기술서적 다음으로 하위를 기록했다. 점유율에서 소설은 4%로 8.5%인 경제·경영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비소설에서도 경제·경영적 마인드는 도입된다. 최근에 출간되는 비소설 서적들은 ‘얼마나 가치 있게 삶을 살 것인가’라는 주제의 책들보다 ‘어떻게 좀더 실용적으로 잘 살 것인가’의 입장에서 ‘당신은 이렇게 살아라’라며 구체적 실천지침을 제시하는 책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돈에 대한 가치관을 크게 바꿔 놓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는 경제·경영서 1위를 독주하고 있다. “간절히@두려움 없이”(푸른숲)에서 저자 전여옥은 자신은 권력과 돈과 명예 중 돈에 최고의 가치를 둘 것이라고 자신있게 주장한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가장 가깝고 실질적인 수단은 돈”이기 때문이다. IMF 체제를 겪으면서 돈이 국가의 모든 이상과 현실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철저하게 경험한 그는 이런 ‘실용주의적 사고’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논지를 편다.

여성학자 오숙희의 “솔직히 말해서 돈이 좋다”(여성신문사), 방송인 백지연의 “나는 나를 경영한다”(다우) 등 여성들의 자기체험서에서도 돈과 일에 대한 솔직한 관심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시대에 실천해야 할 매뉴얼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제 ‘실용적인 제안’이 없는 책은 인기를 끌지 못한다. 그러나 ‘실용적인 제안’은 구태여 책을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출판시장은 전망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많은 출판관계자들이 이제 출판시장은 끝났다고 한숨짓는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 가능성의 하나로 아동시장을 꼽을 수 있다. 지금 아동시장은 자신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실용 개념이 강한 책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자식들에게는 상상력이 풍부한 책이나 ‘절실한 감동’을 담은 책들을 주로 선택해 읽히려는 새로운 열의 때문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오히려 활성화되고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의 집계에 따르면 올 상반기 아동서 발행부수는 지난해에 비해 44.9%나 증가했다. 이러한 열의는 1997년의 ‘IMF사태’ 이후 더욱 높아지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는 학벌과 인맥이 매우 중시되던 사회였다. 그러나 IMF 이후 벤처열풍이 불면서 인간의 창의력이나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절감하게 만들었다. 몇몇 대기업은 창의력이 뛰어난 고등학생들을 특별채용하기도 했다. 아이디어 하나로 졸지에 신흥 재벌이 됐다는 기사가 연일 언론매체에 게재되는 분위기에 힘입어 창작동화, 상상력이 넘치는 책 등이 크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민음사(계열사인 비룡소를 통해)·창작과비평사·문학동네·문학과지성사와 같은 대형 문학 출판사, 중앙M&B, 공사·김영사 같은 주요 단행본 출판사 등이 최근 일제히 아동서 시장으로의 새로운 진출 또는 대폭적인 확대를 추구하고 있다. 이밖에도 사계절·보리·보림·길벗어린이·재미마주·다섯수레·우리교육·산하·푸른나무 등 질적으로 우수한 아동서적을 펴내려는 출판사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텔레비전과 연결된 즉물적 기획물, 공포·괴기물, 유머·소화(笑話)를 주로 펴내던 출판사들마저 질 높은 출판물 출간으로 방향타를 바꾸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아직 적지않은 난관에 봉착해 있다. 아동서적은 종합예술화돼 가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상문화의 세례를 받은 아동을 대상으로 한 책은 문자와 이미지가 상생(相生)하는 책이어야 한다. 단순히 읽기만 하는 책이 아니라 읽고, 보고, 찾고, 만지고, 느끼는 책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상상력을 강하게 자극하는 창작작품의 부족, 그림작가의 한계, 제작기술의 한계, 종이의 질 저하 등으로 종합예술의 경지로까지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최근 1, 2권이 출간된 “한국생활사박물관”(사계절)은 역사학·고고학·민속학·인류학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가해 선사시대부터 20세기까지의 인간들의 생활상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하고, 중요한 생활상을 그림과 사진으로 되살리는 매우 수준 높은 대형 기획이다. 그러나 이 기획은 2002년 12월에나 완간될 예정이다. 책 속의 박물관이 제공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장치들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능력을 갖춘 인력이 국내 출판계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림작가들은 글의 종속물로서 어쩔 수 없이 책의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놓이는 그림들을 적당히 빨리 그리는 데만 익숙해져 있었다. 어느 정도 자신만의 개성 있는 작가정신을 보여주는 그림작가들에게는 출판기획자들이 일제히 달려들 정도다.

이미 가능성이 사라진 것처럼 여겨지는 인문·사회과학서 출판이 가능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세계사적 맥락이라는 큰 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어떤 독자가 성(性)에 대한 주제의 책을 인터넷을 통해 찾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아마존과 같은 온라인 서점에서 세계 각국 저자들의 무수한 신간들에 대한 정보를 곧바로 얻을 수 있다. 그 책들을 주문하기만 하면 보름 안에 안방에서 편안하게 받아볼 수 있다. 세계 출판시장은 이미 하나로 묶여지고 있는 것이다. 새물결 출판사가 올 가을 번역 출간하는 “소설”(원제 A Novel)은 전 5권의 거대한 기획서다. 각 권은 소설의 발생(역사), 형태, 차이, (사회와의)관계, 세계 고전에 대한 독후감 등을 다루고 있다. 필자는 움베르토 에코·밀란 쿤데라·피에르 부르디외·미셸 페로·노마 필드·바르가스 요사·프레드릭 제임슨 등 세계적인 학자와 작가들이다. 출판은 독일의 주어 캄프, 미국의 프린스턴대 출판부, 프랑스의 아쉐트 등 세계적인 출판사들이 거의 동시에 한다.

일본의 웹진 월간 “책과 컴퓨터”가 온라인에서 진행하는 ‘100일 토론’도 국제적이다. 미국·일본·중국·프랑스·독일·한국·태국 등 세계 각지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온라인 서점은 책의 문화를 변화시킬 것인가?’ ‘인간은 책을 읽지 않게 될 것인가?’ 등 그때마다 정한 주제에 대한 각 나라 사정에 맞는 글을 올린다. 독자들은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E메일을 통해 함께 참여할 수 있다. 이 ‘100일 토론’은 토론이 끝난 다음에는 어김없이 종이책으로도 출간된다. 하지만 이런 책은 독자는 증가할지 모르지만, 정작 구매행위 자체는 감소할 수도 있어 확실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세상의 변화를 수용할 줄 모르는 대학이나 학자들은 그 권위가 사라지는 상황이 속출하고 있다. 이럴 때 지식인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주는 나라를 찾아 글을 올릴 수 있다. 이제 국내의 인문·사회과학서도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이런 세계적 학문의 흐름을 즉각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10년만의 번역 출간’과 같은 황당한 이야기는 앞으로 결코 통하지 않을 것이다.

문학서적은 상상력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정보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키고 있다. 정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정보를 무작정 쌓아 놓기만 하는 꼴이 된다. 이제 네트워크 환경에서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소비자는 지식화된 정보의 생산자가 되어 콘텐츠를 적재적소에 분배하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현실을 뛰어넘는 ‘눈부신 상상력’이어야 하는 것이다. 독자는 바로 이런 상상력이 넘치는 책을 찾게 될 것이다.

디지털 혁명에의 적응만이 살 길

존재의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소설, 지난 시대를 도식적으로 되돌아보는 후일담 소설, 불륜을 페미니즘으로 포장한 소설, 주제와 사건이 천편일률적인 역사소설, 어른의 웅숭 깊은 내면을 유아화하는 동화 스타일의 우화소설에만 머물러 있는 국내 소설계는 변화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고사하게 될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anyone), 언제(anytime), 어디서나(anywhere), 어떤 기기(anymedium)를 통해 모든 콘텐츠(any contents)를 쉽게 이용하려 드는 ‘any’의 물결이 주도하는 시대, 즉 ‘유비쿼터스(ubiquitous) 인터넷 시대에는 인간은 구멍가게에 갈 이유조차 찾지 못하게 된다. 자기만의 밀폐된 방(이 방은 지구촌 개념을 가진 지구방으로 부를 수 있다)에서 모든 선택이 원격조작으로 가능해지기 때문에 아주 친밀한 가족간이나 연애하는 남녀간의 관계만이 살아남고, 모든 사회화 과정이 생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문화적 기반 자체가 바뀜에 따라 인간의 감동구조도 크게 바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출판계는 디지털 문명으로 인해 급속하게 변해 가는 인간의 감동구조와 욕망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앞으로 그런 감동과 욕망을 적절하게 다룬 책들은 인기를 끌 것이다.

인터넷과 같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출판사와 독자가 만나는 접점을 다각화시키고 있다. 생산시스템의 변화로 인한 e-북, 오디오북과 같은 형태의 다양한 실험에 대한 구체적 성과물이 올해 안에 선보이게 될 것이다. 2차 저작권, 출판행위에 대한 근본적 인식전환, 온라인·오프라인에 대한 다양한 시도 등 머리 속에만 맴돌던 생각들이 현실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다. 이런 성과물들이 현장에서 독자들에게 수용되는 과정을 통해 어떤 결과를 낳느냐의 여부에 따라 책 시장의 진로는 결정될 것이다.

인터넷으로 인한 유통혁명 또한 책 시장을 크게 바꿔 놓을 것이다. 영국의 그리니치천문대와 국립해양박물관이 새 밀레니엄을 맞이해 인류가 시간을 지각한 이래 문화권별로 당대 사람의 의식을 지배한 다양한 시간관과 시간의 측정, 묘사, 체험 등을 311장의 사진·그림과 함께 소개한 책 “시간박물관”(움베르토 에코 등 세계적인 학자들이 공동집필, 푸른숲)은 국내에서는 49,000원 정가의 고급서로 나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출간 한달만에 2,800여권이 팔려나갈 때까지 온라인 서점에서 선두주자인 교보문고·yes24·알라딘 등 세 군데에서만 모두 1,100권이 팔려나가는 성과를 얻었다. 이렇게 나타나는 구체적인 성과들은 구매형태의 변화를 더욱 가속화해 나갈 것이다.

새로운 실험들은 비록 당장 이익을 내지 못하더라도 계속 이뤄질 것이다. 그 중에서 일부는 독자들의 선택을 받을 것이다. 일반독자들의 의식은 단지 콘텐츠 그 자체일 뿐이다. 독자들은 비록 책이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읽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출판 기획자는 책은 콘텐츠를 어떤 형태로 포장해 제공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가를 강구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현재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책의 내용을 디지털 데이터화해 컴퓨터 기억장치에 저장해 뒀다가 독자가 인터넷을 통해 주문하면 필요한 부수만 인쇄·제본해 서점·편의점 등의 공간에서 판매하는 주문형 출판(Print On Demand)이 확실하게 자리잡을 것이라는 점이다. 주문형 출판은 대량 생산체제에서 벗어나 갈수록 개성적으로 치닫는 독자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면서 무재고 출판이 가능하기 때문에 고비용·저효율 구조에 빠져 있는 출판 시장에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내 출판시장은 이런 장기적인 변화보다 당장 일어날 것으로 보이는 대형 할인마트의 제도권 진입, 할인형 온라인 서점의 시장 확대 등과 같은 유통의 다각화로 정가제가 붕괴될 우려에 봉착해 있다. 정가제의 붕괴는 곧바로 책값의 상승을 유발하면서 급격하게 출판시장을 조정국면으로 밀어넣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출판시장에는 수많은 영세서점의 폐업, 그로 인한 도매상의 도산, 출판사의 재편과 같은 엄청난 회오리가 몰아치게 될 것이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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