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시대와 역사의 소산”
출판인생 31년 김언호 한길사 사장
 ◇최근 파주 헤이리에서 열린 ‘로마인 이야기’ 완간 기념파티에서 자신의 출판 철학을 밝히는 김언호 한길사 사장.
“책 만드는 일은 참으로 즐겁습니다. 더욱이 전 제가 간절히 읽고 싶은 책을 만드니까 더욱 기쁩니다.”

출판인생 31년째를 맞은 김언호(62) 한길사 사장.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번역본 15권 완간 기념파티가 열린 파주 문화예술인마을 헤이리 ‘북하우스’에서 김 사장을 만났다. 그 자신의 소회대로, 말과 행동으로 행복감을 우려내는 사람이다. 비결이 뭘까. 출판사는 단순한 책 공장이 아니라 인간정신을 일깨우는 문화 인프라라는 확신에다, 자신이 그 복판에 서 있다는 만족감까지 번져 나오기 때문일 게다.

김 사장은 자칭 낙관주의자다. 1970년대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했다가 해직기자가 됐을 때도, 자서전 대필로 겨우 종자돈을 모아 출판한 ‘우상과 이성’(리영희)이 필화사건을 유발했을 때도, ‘민족경제론’(박현채) 등이 판매금지됐을 때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낙관적인 출판 철학은 ‘책은 시대와 역사의 소산’이란 말로 집약된다. “제가 출판을 시작한 70년대와 80년대는 사회과학적 인식의 시대였습니다. 민족주의 관점에서 역사와 세상을 보려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한길사에서 나온 책들을 보면 그 시대가 읽힙니다. 요즘 일부 언론이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 신문들도 당시엔 ‘해전사’를 극찬하는 기사를 썼습니다.” 5000부 안팎 나갈 것으로 기대했던 ‘해전사’는 30만부 이상 팔렸고, 사회 인식을 바꿨다.

◇학창 시절 엄청난 독서광이자 문학도였던 김언호 한길사 사장의 뇌리엔 늘 “세계는 한 권의 아름다운 책에 이르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의 말이 박혀 있다.

한길사에서 낸 2200여권 중 가장 애착 가는 책을 묻자 김 사장은 해전사 대신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함석헌)를 꼽았다. “한국 현대사에 가장 큰 정신·사상적 영향을 미친 분이 함석헌 선생”이라는 김 사장은 “한 시대에 우뚝 선 사상가의 책을 펴낼 수 있었다는 것은 출판인으로서 행운”이라고 말했다. 김 사장의 마음은 훗날 20권짜리 함석헌 전집으로 구체화됐다.

많은 사람이 망설이던 ‘로마인 이야기’ 출판을 결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화’가 화두였던 90년대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지요. 일본인이라면 무조건 먼저 손사래를 치는 한국 독자에게 일본 여성작가의 ‘로마인 이야기’는 분명 모험이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는 후배들에게 “책을 정직하게 만들자”고 늘 당부한다. 제목부터 양장까지, 독자 눈을 현혹하기 위해 요란을 떨지 말자는 제안이다. 과도한 치장은 불신을 초래할 수 있고, 독자의 불신은 출판계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니 정직하자고 매일 마음을 가다듬는 김 사장이다. 그런 그에게 과연 책은 무엇일까.

“책의 탄생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우리들의 꿈과 정신을 담아내고 일으켜세우는 한 권의 책은 그 꿈과 정신처럼 아름답습니다. 책은 저자와 편집자, 번역자, 독자가 함께 만드는 공동 작업의 소산입니다. 책은 제 존재의 출발이자 귀결입니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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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높이 평가한 그였건만
조국에선 음악조차 '감옥' 살았다
[책 만들기 31년, 한 출판인의 비망록 2] 음악가 윤이상 ①
텍스트만보기   김언호(eounhokim) 기자   
▲ 1988년 독일 윤이상 선생 자택에서 선생과 인터뷰하고 있는 필자.
ⓒ 한길사

"정치 이데올로기란 계절에 따라 무성하다가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이지만 민족문화란 창공처럼 푸르고 엄숙하고 영원합니다."

1988년 10월 6일 베를린 자택으로 방문한 나에게 윤이상 선생은 말했다.

"나는 하루 한 시간도 내 조국 내 고향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 민족 성원들 속에 나는 서 있습니다. 짐승도 죽을 때 제 집으로 돌아가는데, 내 조상들이 살았고, 위대한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내 땅에 묻히는 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고향 땅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나의 간절한 염원입니다."

그 엄혹한 80년대에 나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음악가 윤이상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윤이상 선생과의 만남은 감동적이었고 선생의 정정한 목소리는 나의 영혼을 흔들어놓았다. 세계가 그의 음악을 연주하고 연구하는데, 막상 그의 조국에서는 연주도 되지 않고 논의하고 연구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럴 수 없다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윤이상 선생과 나, 서로에게 놀라운 제안을 하다

▲ 1988년 <윤이상-루이제 린저의 대담>에 실린 윤이상 선생의 자필편지.
ⓒ 한길사
마침 윤이상 선생은 DMZ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음악제를 열자는 안을 내놓았다. 남과 북의 음악인들이 민족과 국토의 분단과 전쟁을 상징하는 바로 그곳에서, 음악으로 평화를 노래하자고 남과 북에 제의한 것이었다.

나는 우리 출판사가 선생의 음반을 직접 출반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음악전문 출판사 또는 음반회사들이 그걸 하지 않으니 우리가 해보자는 것이었다. 한길사는 책을 만드는 출판사이지만, 음반도 사실은 또 다른 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고, 또 출판사가 음반을 기획하기도 하지 않는가.

나는 10월 6일부터 11일까지 베를린에 머물면서 윤 선생을 만나 우리 출판사가 선생의 음반을 직접 만들어 한국에 소개하겠다는 말씀을 드렸고, 선생은 흔쾌히 나의 제안에 동의했다. 실은 윤 선생도 나의 이러한 제안을 매우 놀라워하셨다. 한국의 이런저런 언론들이 선생의 동정에 대해 보도는 하고 있었지만, 그 보도들은 선생의 생각과 행동을 늘 왜곡하곤 했다. 선생은 사실은 한국의 미디어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음악전집을 펴내겠다는 나의 제안은 여러 의미에서 선생님에게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윤이상 선생을 만나러 가는 나는 다소 긴장했다. 1956년 6월 유럽으로 유학 간 지(처음에는 프랑스로 갔다) 30년 이상이 흐른 지금 작곡가 윤이상 선생은 어떤 모습일까.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세계의 음악가 윤이상 선생은 한국적인 편안한 할아버지였다. 베를린 숲 속에 있는 자택의 문 앞에서 선생은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맞아주었고, 집안의 풍경은 한국의 여느 곳과 같았다. 이웃집에 들러 즐겁게 환담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선생에겐 약간의 경상도 악센트가 남아 있었다. 선생은 나를 고향의 후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젊은 시절 통영의 풍경을 떠올리는 듯, 고향 이야기를 마구 쏟아냈다. 꿈꾸는 소년 같았다.

나는 윤이상 선생과의 첫 만남에서 또 다른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마침 10월 8일과 9일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는 연속으로 '윤이상 음악회'가 열렸는데 선생의 초대로 그 음악회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음악회가 열릴 때는 주최 측이 선생을 오게 함으로써 관객들의 열띤 갈채를 받게 되는데, 그날도 그러했다.

음악회가 끝난 후엔 연주자들과 회식을 했는데, 윤이상 선생은 나를 그들에게 소개했다. '한국에서 온 출판인인데, 나의 음악전집을 기획하기 위해 왔다'고. 나는 그때 윤이상 선생의 작품을 전문으로 연주하는 세계적인 오보에 연주자 하이츠 홀리거와 하프 연주자 우어줄라 홀리거 부부와 마주 앉아 저녁을 같이 했다.

10월 10일 나는 하루 종일 선생과 인터뷰하는 기회를 가졌다. 선생은 동베를린 사건을 비롯해 가슴에 묻어두고 있는 여러 가지를 털어놓았다. 나는 선생의 뜨거운 예술정신과 민족애에 감동했다. 선생과의 긴 인터뷰는 나의 첫 베를린 방문의 절정이었다.(인터뷰 내용은 이어지는 2편에서 자세하게 소개한다.)

<윤이상 선집>에서 <윤이상 음악전집>으로

나의 윤이상 선생 인터뷰는 막 창간된 <한겨레신문>에 게재됐다. 윤이상 선생의 예술관·민족관에 대해서 한국신문으로서는 가장 본격적으로 소개한 기사였을 것이다. 나는 이미 우리가 펴내는 월간 <사회와 사상> 88년 10월호에 윤이상·송두율 대담으로 '윤이상의 예술세계와 민족관'을 게재했다. 윤이상 선생의 음반을 내야 되겠다는 구상을 하면서 기획된 기사였다. 베를린으로 윤이상 선생을 방문하기 직전에 발행되었는데, 송두율 교수와의 대담에서 선생은 자신의 예술과 철학에 대해 깊이 있는 언급을 하고 있었다. 이 기사는 참으로 격조 있는 대담으로, 윤이상의 예술사상을 최초이자 체계적으로 국내에 소개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윤이상 선집> 정도로 구상했다. 그러나 베를린으로 가서 선생을 뵙고는 <윤이상 음악전집>을 기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단 귀국했다가 1989년 2월 구정을 할애해 다시 베를린으로 갔다. 아내 박관순도 동행했다. 우리가 베를린을 방문하는 기간에 함석헌 선생님이 서거하셨다. 그래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선생의 작품과 자료가 방대하기 때문에 본격적인 작업이 필요했다. 전문가들에 의해 진행되어야할 작품해설도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독일에 유학 중인 한정숙씨(현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최성만씨(현 이화여대 독문학 교수), 홍은미씨(음악학) 등이 윤이상 선생 댁으로 모였다. 홍은미씨는 나중에 윤이상 선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데, 1주일 동안 출근하는 것처럼 윤이상 선생 댁에 모여 구성을 짜고 어떤 해설을 어떻게 붙일까를 토론했다. 물론 윤이상 선생과 함께였다. 기왕에 발표된 '윤이상 연구'를 조사했다.

하루를 할애해 윤이상 선생의 사진들을 정리했다. 선생은 대단한 기억력과 에너지를 갖고 계셨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6시까지 사진을 살펴보고 사진설명을 붙이는 작업을 진행했는데, 선생은 50장이 넘는 오래된 사진들의 내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계셨고, 그 사진설명을 척척 해내는 문장가였다.

하루는 선생의 안내로 베를린예술대학의 윤이상 아카이브를 방문했다. 전임연구자를 두어 선생의 음악에 관한 모든 연구와 자료를 집성시키는 연구소였다. 윤이상 선생은 베를린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임했다. 베를린예술대학은 윤 선생의 아카이브를 설립해서 학교 차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진을 비롯한 이런 저런 자료들을 갖고 귀국했다. 윤 선생이 윤이상 아카이브에서 확보해준 CD도 함께였다.

▲ 1972년 오페라 <심청> 초연 후 축하연에서. 왼쪽부터 다우메 올림픽 준비위원장, 윤이상, 심청을 맡은 수키스, 바이에른 주지사.
ⓒ 한길사
윤이상 오리지널 음반 김포공항에 6개월간 억류

그러나 윤이상 선생이 확보해준 오리지널 CD 등을 김포공항에서 압수당하고 말았다. 김포공항 당국은 갖고 들어갈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였다. '허가' 없이는 그 어떤 음반도 펴낼 수 없는 시대였다. 문공부에 이야기를 해보았자 소용없었다. 결국 '윤이상음악'은 김포공항에 6개월 이상 유치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오리지널 음반은 윤이상 선생의 운명처럼 조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되돌아가야 했다. 최성만씨가 일시 귀국했다가 독일로 돌아가는 편에 그것을 찾아서 윤이상 선생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민족의 위대한 음악예술가 윤이상의 작품은 6개월 동안 '감옥'을 살았던 셈이다.

나는 정치 또는 정치상황과는 당초부터 무관했다. 어떻게 보면 무관심하다고나 할까. '공안정국'을 예측할 수 있는 정보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한 출판인으로서 내고 싶은 책, 펴내야 된다고 생각하는 책을 기획했다. 세계가 높이 평가하고 연주·연구하는 윤이상의 음악을, 다른 전문가들이 소개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나선 것이었을 뿐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당국은 나에 대해 '심각한 대책'을 준비했다고 했다. 금기시된 윤이상을 만나러 다니고 그의 사상과 예술관을 소개하고 있었으니, 공안정국을 만드는 공안당국자들로서는 내가 얼마나 비위에 거슬리는 존재였겠는가.

내가 윤이상 선생을 만나 음악전집을 준비하고 있을 그때 중앙일보사는 윤이상 선생의 귀국과 윤이상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준비해온 사진자료까지 음악회 준비를 위해 전달했다. 선생 자신도 이제는 귀국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시대가 이미 '문민' 쪽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88년 10월에 윤이상 선생을 만나고 돌아온 나는 선생의 귀국이 실현되는 것으로 보고 '윤이상선생 귀국준비위원회'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예총의 전봉초 회장과 서울대 이강숙 교수를 만나 귀국하는 윤이상 선생을 환영하는 위원회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를 의논드린 바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와 사상> 89년 4월호에 윤이상 선생의 '정중동(靜中動): 나의 음악예술의 바탕'을 실어 윤이상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도모시켰다. 이 글은 1985년 윤이상 선생이 튀빙겐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서 행한 강연이었다. 이 연설은 윤이상 선생의 음악관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내용이다.

정치상황은 공안정국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한길사의 <윤이상전집> 작업은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연주되어 녹음되어 수집 가능한 곡들을 모으면 LP판 15매 정도는 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레코드 재킷에 실릴 해설과 정보를 번역하는 작업은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있는 최성만·홍은미씨 등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 레코드 재킷의 그림은 판화가 이철수씨에 의해 시안이 제작되고 있었다. 윤이상 선생의 음악에 대한 음악적 해석과 각 곡들에 대한 전문가의 해설 그리고 윤이상 선생 자신의 해설들이 번역되거나 새로 씌어졌다. 자세한 연보작업도 진행되었다. 아직 국내에 윤이상의 음악에 대해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준비한 내용들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귀국'도 무산, '음악전집'도 무산

그러나 결국 윤이상 선생의 '음악전집'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윤이상 선생의 귀국도 무산되고 음악회도 더 시간이 흘러야 가능했다. 선생은 그때 귀국이 성사될 것으로 본다면서 흥분해 있었다. 통영 그 앞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싶다고도 했다. 자기가 태어난 지리산 산청의 그 마을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가 지리산에 와서 어머니를 만났고, 그래서 그 지리산에서 선생은 태어났다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1년 6개월 동안 출국정지당해야 했다. 왜 출국정지를 당해야 했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렇게 되었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 1991년 한길사에서 출간된 <윤이상의 음악세계>.
ⓒ 한길사
우리는 결국 레코드 출판을 위해 준비한 원고들을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1991년 2월 최성만·홍은미 편역으로 나온 <윤이상의 음악세계>가 그것이었다. 634쪽이나 되는 것이었다. 이 책은 윤이상 선생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최초의 문헌이 되었다. 나는 선생과의 인터뷰를 200자 원고지 80여 매로 정리해 이 책에 수록했다.

선생의 귀국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선생이 참석하는 음악회가 계속 시도되었지만, 한참 후에 주인공 없는 음악회가 가능했을 뿐이었다. 나는 선생과 전화는 가끔 했다. 선생은 한국에서 나온 책을 보내달라고도 했다. 우리 출판사가 펴낸 책들을 보내드렸다. 우리 책을 보면서 고향을 더 그리워했을까.

선생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다. 일본의 한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선생을 찾아뵈었다. 선생은 건강이 조금 회복되었을 때 배를 타고 대마도 쪽까지 왔다고 했다. 일본의 한 방송국 취재진들과 동행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바다에서 멀리 고향 땅을 바라보았다는 것이었다.

최고의 영예를 누렸지만 참으로 고단한 생애

베를린에서 뵈었을 때 선생은 계속 고향 이야기를 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씀을 여러 번 했다. 정말 고향에 가고 싶다고 했다. 선생의 그 간절한 염원은 이뤄지지 않았고 1995년 11월 3일 이국땅 베를린에서 서거하고 말았다. 한 음악예술가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생애였다. 세계로부터 권위 있는 상들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선생의 삶과 정신은 참으로 고단했다.

이제 윤이상에 대한 '편견'은 해소되어가고 있고 선생의 고향 통영에서는 선생을 기리는 음악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선생의 음악을 연주하는 젊은 연주자들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나는 윤이상 선생의 예술정신과 민족 사상을 기리기 위해 한 출판인으로서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일을 해보자 하고 있다. 2005년에는 윤신향 박사의 <윤이상: 경계선상의 음악>을 펴냈다. 앞으로도 윤이상 음악연구에 대한 책을 계속 기획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다른 윤이상 연구자들에게도 집필을 부탁하고 있다.

▲ 2005년 한길사에서 출간된 <윤이상 경계선상의 음악>.
ⓒ 한길사
예술마을 헤이리에서 2005년에 이어 2006년에도 윤이상평화재단에서 기획한 윤이상음악회가 열렸다. 나는 지난 1994년부터 헤이리 프로젝트를 여러 장르의 문화예술인들과 손잡고 진행하고 있는데, 이 헤이리에서 윤이상 선생의 음악회가 열리게 됨은 아마도 윤이상 선생과의 그 어떤 인연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민족분단의 그 경계지대에 존재하는 예술마을 헤이리에서 우리는 민족이 낳은 위대한 음악예술가 윤이상의 예술사상·평화사상을 더욱 소중하게 펼치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이야말로 평화를 구현하는 힘이다. 윤이상 선생은 나에게 문화와 예술의 힘을 일깨워주고 있다.

올해는 윤이상 선생의 탄생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윤이상평화재단이 중심이 되어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3월 14일에는 90주년기념사업을 후원하는 음악회모임도 있었다. 우리는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민족의 큰 음악가 윤이상을 갖고 있다. 오늘도 선생의 정정한 말씀이 나의 귓전에 쟁쟁하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다"
[책 만들기 31년, 한 출판인의 비망록 2] 음악가 윤이상 ②
텍스트만보기   김언호(eounhokim) 기자   
1988년 10월 10일 윤이상 선생과의 인터뷰는 막 창간된 <한겨레신문> 1988년 10월 27일자에 전면으로 게재됐다. 세계가 연주하고 연구하는 그의 음악예술이 막상 조국에서 왜곡되고 막혀 있는 상황에서, 그가 사랑하는 민족에게 그의 음악예술을 소개하고자 찾아간 한 출판인에게 선생은 민족과 예술에의 열정과 신념을 말씀했다. 다음은 당시 인터뷰의 주요 내용이다.

"동베를린 사건 이후 내 음악이 바뀌었다"

▲ 1967년 동베를린 사건 당시의 윤이상 선생.
ⓒ 한길사
- 1956년에 선생님이 유럽에 오신 이후 30년이 더 지났습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작곡활동을 시작해서 이제 세계정상을 지키고 계신데, 선생님의 음악이 최근에 들면서 구조가 단순해진다 할까 어떤 격렬함으로부터 조용해진다 할까, 더욱 동양적인 것으로 흐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0월 8일과 9일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연주된 작품들 가운데서도 80년대로 넘어오면서 작곡하신 작품은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이는 선생님의 음악세계 또는 사상의 어떤 변화라고 할 수 있나요?
"1968년의 동베를린사건은 나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동베를린사건을 소화시키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70년대 초반의 작품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습니다. 이 시기의 내 음악에는 격렬한 정신이 표출됐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거침으로써 나는 또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삶에 있어서 통일적인 정신과 논리가 이루어진다고나 할까요. 나이가 차차 들면서 더욱 나의 음악언어가 간소화되고 직설적으로 되고 있습니다. 이는 7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나타납니다. 80년대 중반부터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고 하겠습니다."

-동베를린사건이라는 분단 민족만이 겪을 수 있는 체험을 통해 선생님의 음악 또는 선생님의 삶에 어떤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겁니까?
"동베를린사건 이전에는 나는 동양의 음악가로 동양적 정신, 동양적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심미적 작품을 쓴 것이 사실입니다. 지식인적인 예술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나는 해방 전에도 항일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적도 있고 해방 직후에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나선 바 있습니다. 나는 민족과 나라를 위해 내 개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동베를린사건이라는 개인적·집단적 체험은 민족문제·분단문제를 더욱 구조적이고도 깊이, 온몸으로 생각하고 실천하고, 작품으로 그것을 형상화시켜야 한다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나의 음악예술이 도교사상 또는 동양정신에 토대를 둔다는 것, 동양인 또는 한국인으로서 생득적으로 갖고 있는 이런 정신적 유산 또는 토대는 오늘의 세계와 인류, 조국과 민족이 당면하는 문제와 결코 유리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한 예술가는 그가 태어나고 자라난 문화권·정치권과 운명적으로 연계되어 있겠습니다만, 동베를린사건으로 투옥되어 있는 그 극악한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작품을 쓰지 않으셨습니까?
"장자의 꿈을 소재로 한 오페라 '나비의 꿈', 클라리넷 독주곡 '율'(律)과 낙랑고분의 사신도를 주제로 한 '영상'(이마주)을 만들었지요.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물 사발이 얼어붙는 혹한 속에서 손을 불어가면서 음보를 적어나갔지요. 나의 생명을 유지하는 정신적 위안은 '음악'을 생각하고 찾는 것이었습니다. 현실로부터 해방되고 꿈과 환상으로부터 자유를 찾아내고 위안을 얻어내는 것이었지요. 나는 그곳에서 인간정신의 숭고함과 절대적 순수, 꿈과 이상의 화합을 추구했습니다."

"나의 예술 나의 삶은 정의에 바탕을 둔다"

-선생님의 음악을 창출해내는 힘이랄까 정신적 유산이 있다면?
"내 음악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내 음악은 우주의 큰 힘,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주에는 음악이 흐릅니다. 이 흐르는 우주의 음악을 내 예민한 귀를 통해 내놓을 뿐입니다. 동양의 예술가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은 작품이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술이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상에서 비롯됩니다. 서양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붙이지만, 어디 예술이 개인의 것입니까, 이 우주의 흐름이지요. 나는 우리 조상들의 이 같은 예술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내가 오늘 국제적으로 이름난 작곡가가 되었지만, 이것은 내가 민족의 뛰어난 예술적 전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은 훌륭한 예술적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동양의 그 어느 민족보다도 통할한 도교사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존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음악은 이 전통을 그대로 갖고 있고, 바로 이 전통 속에서 내가 태어나고 자라났기 때문에 오늘의 내 음악이 존재합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꿈'이 성황리에 연주가 되었고 본에서는 연주에 모여든 사람들이 연주가 끝나고 윤이상 석방하라면서 횃불행진까지 했다고 해요. 예술가의 책임이랄까 자세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내 나이 이제 일흔 하나입니다. 나는 일제를 체험하고 해방과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해외에서 30년 이상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민족의 근·현대사와 세계의 돌아감도 보고 있습니다. 또 남과 북도 잘 아는 편입니다. 유럽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이남과 이북을 똑같이 잘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북과 이남은 똑같은 나의 조국입니다. 북쪽에도 남쪽에도 똑같은 민족의 피가 흐릅니다."

-선생님의 예술은 평화의 예술, 정의의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선생님의 민족에 대한 관심, 통일운동에의 헌신도 바로 이와 같은 평화와 정의의 예술가로서의 당연한 삶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나의 삶과 정신, 나의 예술은 정의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과 인류에의 신뢰가 바로 평화이고 이 평화는 동양사상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교향곡을 다섯 개 썼는데 지난해 베를린 시 750주년기념 위촉작품인 '교향곡 5번'을 사람들이 '평화의 교향곡'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나의 작품들에서 시종 흐르는 것은 바로 정의와 평화정신입니다. 가난한 조국에서 태어난 한 예술가로서 조국의 민주화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그리고 분단된 국토와 조국을 통일하는 일에 나서는 것은 한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더 나아가 전 세계 특히 제3세계의 수난 받는 민중에 대한 관심도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예술이란 진실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실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진실한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예술만이 창조적이고 남이 모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술이란 시대정신을 간파하고 그것을 옹호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유럽의 수많은 음악예술가들이 민족과 조국을 위해 자기를 던졌습니다. 쇼팽이 그러했고 바그너와 베르디가 그러했습니다."

▲ 1974년 도쿄에서 김대중 구출운동의 일환으로 윤이상 음악회를 열 때의 기자회견 모습. 부인 이수자 여사와 함께 있다.
ⓒ 한길사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다"

- 선생님이 제안하신 남북음악제도 민족과 조국에 대한 열정,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한 예술가로서 신념의 표출이라고 생각됩니다. 최근 통일운동이 고조되고 있는 시기에 선생님의 휴전선에서의 남북음악제 제안은 참으로 신선한 지혜를 주는 것 같습니다.
"한 음악예술가로서 민족의 재통일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하다보니 바로 이 같은 구상을 하게 된 겁니다. 잠재적으로는 이와 비슷한 생각이 늘 있었겠지만, 구체적으로는 3년 전부터입니다. 휴전선은 민족분단의 실체일 뿐 아니라 분단의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정치적 대결뿐 아니라 무력대결의 첨예한 현장입니다. 바로 그 대치의 현장에서 남과 북이 만나자는 것입니다."

- 선생님의 남북음악제는 그 진전에 따라서 대단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술, 더 구체적으로는 음악과 음악가가 어떤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지 자못 궁금하기도 합니다.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흔히 정치에 비해 예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하나의 예술작품 또는 예술행위는 참으로 놀라운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민족의 혼과 양심을 불러일으키고 민중을 깨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핀란드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관현악 '핀란디아'는 핀란드 국민으로 하여금 민족독립운동의 혼을 불러일으킨 작품입니다. 체코의 스메타나가 지은 '나의 조국'은 체코 민중들을 순결한 애국심으로 불타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휴전선에서 민족의 음악, 민족의 소리를 울리게 해서 민족화해의 광장을 만들자는 것이지요. 한반도의 휴전선이란 우리 민족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는 것일 뿐 아니라 평화를 위협하는 인류공동의 문제입니다."

-잠자고 있는 민족의 영혼을 깨우치려는 이 음악제에 대비해 어떤 곡을 만드셨습니까?
"나는 이 음악제를 위해 지난해에 '나의 땅 나의 조국이여'라는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45분가량 되는 이 교성곡은 남한의 양심적인 민족시인들의 작품이 가사로 되어 있습니다. 민족과 조국의 영원함을 노래하면서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애국적인 혼이 담겨 있습니다."

- 선생님은 유럽에 계시지만 한국의 상황에 대해 늘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광주항쟁에 대해서는 작곡까지 하셨습니다.
"80년 광주민중항쟁 진압 소식을 접한 나는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도저히 상상도 못할 비극이 내 조국에서 일어나고 있음에 정신을 잃을 뻔했어요.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습니다. 민족에게 새로운 정의와 평화가 도래할 것을 기원하는 심정으로 나는 이 곡을 만들었습니다."

- 선생님은 철저한 사형폐지론자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예술사상으로 보아도 너무나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만…….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죽입니까? 지상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것은 참으로 큰 죄악입니다. 폭력범·살인범이라도 활동을 못하게 하면 되지 죽이면 안 됩니다. 고깃대가리를 자르는 것이나 황소머리에 징을 박는 것과 똑같은 짓을 어떻게 인간에게 합니까? 사형제도는 눈에는 눈 식으로 하는 야만시대의 보복행위입니다. 법과 국가는 국민들의 보호자여야 합니다. 보복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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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기 반칙 잡고야 말겁니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 김경호 기자
» 취임 한 달을 맞은 이정원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은 “더 공정하고 더 공개적이고 더 공익적인 출판인회의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사재기를 뿌리뽑고 도서정가제를 확립하겠다는 의지도 아울러 밝혔다.
커버스토리 / 한국출판인회의 회장 한달째 이정원 들녘 사장

“오늘, 출판인의 역량과 노력은 정보산업의 한 축으로서 지식축적이라는 출판의 매체적 책임을 다하는 데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산업이라는 측면에서는 출판의 생존과 연결되고, 문화와 교육이라는 측면에서는 출판의 소명과 연결됩니다.”

구제금융 한파가 한반도를 동토로 만들어 놓았던 1998년은 출판계에도 재앙의 시절이었다. 중소형 서점은 말할 것도 없고 출판 유통의 대동맥인 대형 도매상들이 썩은 고목처럼 쓰러졌다. 그해 11월 320여 국내 단행본 출판사 출판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출판인회의 창립을 선언했다. 생존의 기로에서 출구를 찾는 다급한 심정으로 이들은 선언에 동참했다.

‘사재기 적발팀’ 꾸려 검찰 고발 불사
지식산업의 공익성·공공성 살릴 것

유통대란을 막자는 것이 이들을 규합한 일차적 이유였지만, 시대가 요구하는 출판의 책임과 소명을 다하겠다는 결의도 이들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힘으로 작용했다. 한국출판인회의를 창립하는 그 자리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사람이 이정원 들녘출판사 사장이었다. 출판인회의를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그가 지난달 2년 임기의 한국출판인회의 5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22일로 회장이 된 지 만 한 달이 된 그를 만나 출판인회의 새 수장으로서 포부와 약속을 들어보았다. 신임 회장은 10년 전의 그 선언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출판인회의가 창립된 지 햇수로 10년째다. 창립시점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그땐 정말 다급했다. 보문당을 비롯해 도매업체들이 자고나면 무너졌다. 유통망이 붕괴 직전까지 갔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있었지만 전집류·학습지 출판사 중심이어서, 인문·사회·교양서 중심 단행본 출판사들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스스로 대책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먼저는 유통대란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낡은 유통구조의 도관이 터진 거였는데, 새 도관을 놓는 일에 우리가 앞장서야 했다. 이와 함께 출판문화를 되돌아보는 일이 중요했다. 출판정신을 가다듬고 바로 세우고 지식산업의 기틀로서 출판의 구실을 새롭게 다지자는 마음을 모았다.

-회장직에 나설 때 그때의 그 약속을 다시 생각해보았을 것 같다.




=그랬다. 출판인회의 출범 때부터 지금까지 지속된 목표를 두 가지로 요약한다면, 건전한 출판환경, 풍족한 출판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건전하고 풍족한 출판환경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출판인회의가 창립 정신을 잃어버리고 친목단체로 전락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그런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출판인회의가 단행본 출판사들의 대표 단체로서 공익성을 키우고 지켜나가야 하는데, 그 임무를 충실히 하지 못한 데 대한 질책이라고 생각한다. 단체 일이라는 게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해야 더 잘할 수 있고 또 일을 같이 하다보면 서로 마음이 맞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친목단체 같다는 오해 섞인 반응을 얻은 것 같다. 요점은 공익성, 공공성이다. 출판인회의가 300여 회원사를 비롯해 출판계 전체의 공익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일하느냐가 관건이다.

‘유통규약’ 맺어 자정노력
어기면 책공급 끊어 엄단

-그 점에서 보면 출판시장의 악폐인 ‘사재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공익성을 저버린 일 아닌가.

=사재기는 출판윤리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뿌리뽑아야 한다. 출판사들이 사재기에 뛰어드는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출판시장이 전반적으로 불황이고, 광고를 내도 먹히지 않고, 독자들은 베스트셀러에만 몰리고 하다 보니 사재기 유혹을 견디기기 쉽지 않다. 그러나 사정이 급하다고 책을 사들여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것은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건 반칙이고 사기다. 현행 출판진흥법상으로 사재기는 검찰에 고소·고발할 수 있는 범죄행위다. 그동안 출판인회의가 사재기를 제대로 막지 못한 건, 의지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재기 방식이 워낙 교묘하고 광범위한 탓이기도 했다. 제가 회장으로 있는 한, 사재기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 이건 유통교란의 문제이기 이전에 출판정신, 출판윤리의 문제다. 5월 안에 ‘사재기 적발팀’을 별도로 꾸려 독립적으로 운영되도록 하겠다. 필요하다면 간행물윤리위원회와 손잡고 변호사도 채용해 공신력을 갖추도록 하겠다. 적발되는 대로 검찰에 고발하겠다. 출판인들도 사재기 정보가 있으면 즉각 우리 쪽에 알려주시기 바란다.

-출판인회의가 출범 때 유통구조의 정상화를 얘기했지만, 지금 출판 유통을 보면 오히려 더 악화됐다는 말도 나올 법하다. 인터넷서점에 신간 할인 판매를 허용해준 현재의 변형 도서정가제가 사실상 정가제를 무너뜨렸다는 비판이 많다.

=맞는 말이다. 도서정가제가 무너지면 당장은 구매자에게 이익이 될 것 같지만, 길게 보면 손해다. 할인을 예상하고 출판사에서 미리 가격을 높여 놓으므로 할인이 무의미해진다. 또 값을 낮춰줄 수 있는 베스트셀러 도서들만 더 팔리고, 인문서 등 양서는 더 궁지로 몰린다. 그래서는 양서가 출간되기 어렵다. 출판의 건강성과 다양성을 위해서도 도서정가제는 지켜져야 한다. 현재 국회에 도서정가제법안이 제출돼 있다. 할인률을 5%까지로 하는 내용이다. 최적의 방안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범출판계가 합의해 도출한 안이다. 이번 봄이 가기 전에 통과될 것으로 기대한다. 법안 통과를 위해 대한출판문화협회와도 공동 투쟁하겠다. 또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시장에서 규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대형서점, 인터넷서점, 출판인회의 등 당사자들이 모여 유통협의회를 만들었다. 도서정가제뿐만 아니라 경품 문제, 1+1(책 한 권을 사면 다른 한 권을 끼워주는 것) 문제를 담은 규약을 제정하고 거기에 따라 감시하고 제재할 것이다. 유통이 바로 서지 않으면, 양서가 살아날 길이 없다는 걸 제 자신이 먼저 절감하고 있다. 규약을 어기면 책공급을 중단한다는 약속을 출판인회의 소속 180개 출판사로부터 이미 받아 놨다. 최대한 빨리 규약을 만들고, 그 규약에 따라 칼을 뽑겠다.

‘이달의 책’ 선정 부활
홍보·지원 제대로 하겠다

-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잡지 <북&이슈>를 복간하겠다는 공약도 내놨는데, 그보다는 출판인회의 선정 ‘이달의 책’을 복원하는 게 더 급하지 않나.

=그렇게 본다. <북&이슈>는 출판인회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활성화해 온라인으로 내볼 생각이다. 더 중요한 것이 ‘이달의 책’ 선정이다. 출판인회의 초기에 ‘이달의 책’ 선정이 호평을 받았는데, 나중에 힘이 떨어져서 그랬는지 결국 없어지고 말았다. ‘이달의 책’ 선정이 제대로 되려면, 책을 선정함과 동시에 선정 도서를 일부라도 출판인회의가 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겠다. 또 대형서점이나 공공도서관과 연계해 선정도서를 체계적으로 홍보해야 한다. 그 문제도 이미 협의를 마쳐 가동 준비 완료 상태다. 결국은 자금이 문제인데, 이 문제도 몇 군데 기업체에서 상당액을 지원받았다.

-공정성 확보도 중요한 일 아닌가.

=그렇다. 공정성을 지킬 수 있도록 선정위원을 모시겠다. 선정위원은 책의 내용을 잘 알 뿐만 아니라 출판 시스템도 알고 있는 분 중에서 뽑을 예정이다.

-출판미래연구소를 만든다는 계획도 밝혔는데….

=출판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이다. 책의 미래를 능동적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출판 인프라를 어떻게 하면 강화할 수 있을지도 연구해봐야 한다. 대형 출판사들이 임프린트(출판사들의 자회사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출판의 가치를 키우는 일인지 아니면 성과주의에 매몰돼 덩치 키우기만 하는 것인지도 따져볼 것이다. 뚜렷한 가치를 지닌 출판사가 살아남을 길은 뭔가 하는 문제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장인용 지호출판사 사장께 연구소를 맡아 달라고 일단 요청해 놓은 상태다.

-출판인회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사무국을 내실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사무국 직원이 현재 6명인데, 안타깝게도 그동안 사무국을 더 확장하지 못했다. 최소한 네 사람은 더 필요하다. 문제는 돈인데, 회원사를 늘리고 회비를 더 확보해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 출판사들이 들어오려면 출판인회의가 그만큼 더 신뢰를 주고 도움을 주어야 한다. 더 공정하고 더 공개적이고 더 공익적인 출판인회의로 만들어보겠다. 글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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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과의 만남] 이정원 출판인회의 회장
입력: 2007년 02월 26일 18:03:29
 
이정원 출판인회의 신임회장은 “도서정가제의 확립, 사재기 근절, 미래출판연구소의 설립 등을 통해 건전한 출판환경, 풍족한 출판환경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출판계의 사정이 좋지 않다. ‘출판의 위기’니 ‘활자의 위기’니 하는 말이 ‘관용구’가 돼버렸을 정도다. 독자 수는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지난해 ‘인문학 위기’라는 말이 여론을 잠깐 환기시켰지만, 사정이 그다지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출판계 내부에선 자본력을 앞세운 거대 출판사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할인경쟁이 과열되면서 출판계의 양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베스트셀러 순위가 책 판매에 결정적이다보니 ‘사재기’ 논란이 불거지고, 대리번역과 대필 논란 등 독자들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사건도 끊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난제들이 첩첩이 쌓여있는 형국이다. 300여 단행본 출판사들로 구성된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으로 최근 선출된 이정원 도서출판 들녘 대표(52)의 어깨가 무거운 건 이 때문이다. 이회장에게 출판 유통환경 개선과 독서진흥 등 출판계의 주요 현안과 출판산업의 미래 등에 대해 들어봤다.

-출판인회의 신임 회장으로 선출된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누가 회장이 되었어도 출판인회의의 목표는 변함 없습니다. 건전하고 풍족한 출판 환경을 만드는 것이지요. 건전한 출판 환경은 도서정가제의 확립과 출판유통을 올바르게 잡는 것, 그리고 베스트셀러 조작을 위한 사재기를 뿌리 뽑는 것입니다. 자기만 살겠다는 사다리 경쟁이 아니라 기회균등의 출판 환경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풍족한 출판 환경을 만드는 일은 출판교육전문기관인 서울북인스티튜트(SBI) 사업으로 가시화되고 있어요. 새로운 인재를 양성해 출판계에 공급하고 기존 사원의 재교육을 통해 보다 높은 가치관을 세우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독서진흥사업도 박차를 가해야 할 부문입니다.”

-1998년 출판인회의 창립 당시 큰 역할을 했습니다. 출판인회의의 설립 배경과 지난 9년간의 활동을 평가해 주십시오.

“외환위기로 인한 서점 부도 사태 때 출판인들은 사상 초유의 위기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단행본 출판사들의 위기는 특히 심각했어요. 이러한 사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다시는 그런 위기를 겪지 않으려는 마음이 하나로 모아졌고, 단행본 출판사들 스스로 주체가 되어 출판인회의가 탄생했습니다. 처음엔 푸른숲 출판사 건물 골방에서 시작했습니다만 지금은 새 건물을 지어 출판인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어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출판인들의 피와 땀, 헌신과 봉사가 어우러졌습니다. 하지만 미진했던 점도 많습니다. 출판인회의 선정 ‘오늘의 책’ 사업과 잡지 ‘북 앤 이슈’가 자금난으로 중단된 일 등은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아요. 이 사업들을 다시 복원시킬 겁니다.”

-대리번역, 대필, 사재기 등 출판계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사건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왜 근절되지 않고 반복된다고 생각합니까.

“출판계의 불황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나누어 먹을 ‘파이’가 자꾸 줄어드는 상황에서 피말리는 과당경쟁이 심화될 수밖에 없어요. 몇몇 출판사의 사재기나 대리번역, 대필 등은 모두 베스트셀러를 조작하려는 안간힘에 불과합니다. 독자들은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고 구매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출판사들은 이 위험천만한 파울 플레이의 유혹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이같은 파울 플레이는 뿌리째 뽑아야 합니다. 출판인회의는 이를 가장 중요한 사업 목표로 정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외부인사들로 구성된 사재기 감시기구도 출범시킬 계획이고요. 독자들도 스스로 책을 선택하는 성의 정도는 보여줘야 합니다. 안 그러면 늘 조작된 베스트셀러의 함정에 빠지고, 이것은 곧 악순환의 고리로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출판계의 난제로 꼽히는 전근대적 도서 유통구조와 도서정가제 등의 해결에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상황과 개선 방안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가장 어렵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도서정가제입니다. 출판계는 아직도 4개월짜리 어음을 받고 있습니다. 반품시 물류비조차 감당해야 하는 것도 뼈아픈 현실입니다. 온라인 서점의 비공식적인 할인문제는 도를 넘어선 감이 있고, 과도한 경품경쟁은 출혈이 아니라 생존권마저 위협하고 있어요. 홈쇼핑은 출판자본의 비속한 각축장으로 변한 지 오래이고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도서정가제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저희가 머리를 맞대고 합의한 도서정가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유통 구조가 어느 정도 해결되리라고 봅니다. 또한 출판유통발전위원회도 설립할 예정입니다. 온·오프라인 서점, 도매상, 서적연합회 등 여러 단체를 대표하는 15명 정도가 모여, 합리적인 유통규약을 마련하여 상시적으로 유통을 관리하고 감독할 예정입니다. 이러한 관리감시기구가 출범하여 활성화된다면 유통문제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거라고 믿습니다.”

-출판산업의 미래 비전을 연구하는 가칭 ‘미래출판연구소’ 설립안을 밝혔습니다. 이 연구소는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요.

“사회가 너무 급변하고 있는 만큼 현재의 출판시장과 출판형태를 분석해 일종의 가상모델을 만들어서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나갈 것인지 단계적으로 전략을 짜나가야 합니다. 미래출판연구소에서는 출판환경을 분석한 종합백서를 만들어 출판환경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거시적으로는 출판은행과 출판전문 방송국을 설립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출판인회의는 그간 독서진흥에도 역점을 두겠다고 밝혀 왔지만 그에 걸맞은 활동은 거의 보여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독서진흥사업은 출판인회의가 추구하는 가장 미래지향적인 사업이지만 그간의 실적은 미미합니다.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금을 출판계 내부에서 조달하려고 했으니까요. 앞으로는 보다 능동적이고 구체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할 계획입니다. 외부의 지원과 자금을 적극 유치하고자 몇몇 분들이 소리 없이 뛰고 있고, 조만간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됩니다. 그간 저희는 매년 10월 독자들을 위한 책잔치인 ‘서울와우북페스티벌’과 매년 4월 ‘세계 책의 날’ 행사를 주도했습니다. 또 저자가 학교를 방문하는 ‘저자가 학교에 간다’가 15회에 걸쳐 이뤄졌습니다. 독서진흥을 위한 작은 운동이었지만, 그 반향은 컸습니다.”

-현재 출판계의 최대 고민 중 하나는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무엇이고, 대책은 없는지요.

“가장 난감한 질문이군요. 상대적으로 낮은 보수와 복지 문제가 아닐까요. 사실 출판계 복지 부분이 많이 향상됐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출판사가 내부적인 인재를 키워서 함께 책임지는 식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단행본의 대부분이 외국 서적의 번역물입니다. 출판계가 국내 저자를 개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것 아닌가요.

“출판사들이 당장에 급급한 부분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어떻게든 돈 버는 쪽으로 가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출판계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인문학 위기’라는 말이 나오고 있듯이 국가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입니다. 어렵게 책을 써내도 먹고 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다양한 국내 저자가 나오기 힘듭니다.”

-뉴미디어의 발전 등에 따른 활자문화 위기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책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책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출판계의 활황기점이라고 할 1990년대를 거치면서 기존의 충성 독자층은 너무 나이가 들어버렸습니다. 독서시장을 주도했던 386세대도 어느덧 책 한 권을 사기보다는 가족 부양과 과도한 교육비를 충당해야 하는 세대가 된 것이지요. 잠재 독자층으로 여겨졌던 청소년과 20대도 인터넷의 무차별한 유혹에 넘어간 상황입니다. 이들 젊은 세대는 책 한 권을 사기보다는 공짜 인터넷과 영화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책을 사서 읽기는커녕 빌려서 읽는 것조차 불편해하지요. 이같은 독서인구의 감소가 출판계의 불황을 불러왔고, 소자본 출판사들은 경영난으로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일은 매우 소중한 경험입니다. 무엇이든 획일화되는 인터넷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스미스 요원처럼 판박이가 되지 않으려면 책을 통해 삶의 자양분을 흡수해 자신의 고유성을 길러야 합니다. 이것은 곧 이 혼돈의 시대에서 승리하는 방법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고유성은 바로 다양성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도 있겠지요.”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 이정원은 누구

동국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왔다. 1987년 도서출판 들녘을 설립, 20년간 출판계 밥을 먹고 있다. 출판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너무 단순하다. 지방에서 대학강사로 있던 그에게 친한 후배가 찾아와 사회참여의 한 방편으로 사회과학 출판사를 하자고 권한 것이다. 강사 생활이 따분했던 터라 즉시 후배와 의기투합했지만 “편집도, 영업도, 디자인도 모르고 저질러 놓은 일”이니 몇년 간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사회주의 이행논쟁’ ‘정치경제체제론’ 등 이른바 ‘이념서적’을 냈지만 다른 사회과학 출판사와 마찬가지로 89년 소련 붕괴와 더불어 위기를 맞았다. 그때 “보따리 싸서 고향 내려갈 생각도 여러 번 했다”고 밝힌다. 94년 전례없는 판매량을 기록한 ‘퇴마록’으로 출판사의 기반을 다졌다. 이후 인문교양서 최초의 밀리언셀러인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분야에서 독자가 신뢰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98년 한국출판인회의 창립 당시 조직위원장을 맡았고, 이후 출판정보위원장,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지난 22일 임기 2년의 5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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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 안된 신학의 가설 퍼뜨리는 건 룰 위반` [중앙일보]
차동엽 신부, 기독교 비판 도올에게 답한다
사진=양영석 인턴기자
"신약이 나왔다고 구약이 효력을 잃는 것은 아니죠."

차동엽(49.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겸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사진) 신부가 도올 김용옥(59)세명대 석좌교수의 기독교 비판에 대해 전면적인 반박에 나섰다.

논란이 됐던 '구약폐기론'에 대해 그는 "구약은 돌판에 새겨진 법과 관계가 있고, 신약은 사람의 마음에 새겨지는 법과 관계가 있다"고 했다. 율법이 사람들의 눈 앞에 있으면 거부감이 들지만, 마음속에 있으면 달라진다는 것이다.

차 신부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형식상 분명한 단절성이 있으면서, 동시에 내용상 끊을 수 없는 연속성이 있다. 그래서 구약이 효력을 잃는 것이 아니라, 신약이 나옴에 따라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용옥 교수의 기독교 비판에 반박하는 차 신부와의 일문일답.

(김 교수는 저서에서 '하나님'으로 표기했으나, 가톨릭에선 '하느님'으로 부르기에 기사에선 혼용합니다.)



-김용옥 교수의 '하나님 말씀=로고스(이성, Logos)'의 주장을 어떻게 보나.

"이런 주장은 예수를 추상화시키고 있다. 이성으로서의 로고스는 그리스 철학의 개념이다. 요한복음에 사용된 로고스의 의미는 '이성'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썼던 '지혜'다. 히브리어로 '호크마(Hokmah)'이고, 그리스어로 '소피아(Sophia)'다. 요한복음에선 이를 '로고스'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지혜'는 '이성'과 어떻게 다른가.

"성서에도 언급돼 있다.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에게 지혜의 마음을 주고 자연을 다스리며 온 세상을 창조하였다(예레 10,12)''하느님의 지혜는 사람이 알지 못하고 오직 하느님만이 아신다.(욥 28,12-13.24)' 다시 말해 순수 이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할 때 하느님의 '지혜'가 창조에 참여한 것이다. 요한복음의 로고스는 그 '지혜'를 뜻한다."

-'회개'의 의미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김 교수는 "'회개'의 원어는 '메타노이아(Metanoia)'다. '마음의 방향을 튼다'는 뜻이다. 그래서 '회개'가 아닌 '회심'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고 했다.

"크게 문제될 건 없다. 성서적으로 봐도 '회심'과 '회개'는 크게 충돌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님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어를 썼다. 그러나 당시 유행하던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 성서는 그리스어로 씌어졌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히브리어, 성서는 그리스어다. 그 사이에 언어의 전환 과정이 있다. 그리스어인 '메타노이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슈브(Shub)'다. 여기에는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마음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돌린다는 뜻이 된다. 그렇게 보면 '회개'가 더 적합한 표현이다."

-김 교수는 "'요한복음 강해'와 '기독교성서의 이해', 두 권의 책에서 나는 가톨릭을 매우 긍정적으로 봤다. 가톨릭은 결코 내 과녘이 아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지 않는 교회가 많은 개신교"라고 했다. 어떻게 보나.

"개신교계의 문제는 교의가 잘못돼서 자행되는 게 아니다. 실천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는 개신교를 비판하면서 성경 해석의 방법론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 뿌리를 따라가면 가톨릭의 신학을 함께 건드린 셈이다. 이 때문에 가톨릭은 침묵하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많은 오류를 범했다는 지적이 있다. 김 교수도 "로마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인류 역사에서 기독교가 너무나 많은 증오를 가르쳤다. 수많은 전쟁이 종교로 인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사실이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많은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기독교 전체가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 안의 일부 지도자들이 죄와 실수를 범했다는 말이다. 이에 교회는 수없이 회개하면서 쇄신해 왔다. 역사의 종말까지 이 과정은 지속될 것이다. 김 교수가 범한 실수는 한 면만 보고 침소봉대한다는 사실이다. 어둠과 빛을 동시에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양심가다."

-김 교수는 성령의 자리에 들기 위해선 이성의 극한까지 가야한다고 한다. 이성의 벼랑 끝까지 가본 자만이 안다고 한다. 어떻게 보는가.

"이성의 극한까지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제한돼 있다. 철저하게 철학적 사유를 하는 사람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그건 소수의 아주 진지한 철학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대중에게 이걸 요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예수님이 천국을 선포할 때 논쟁을 일삼는 사람들과 대화하길 싫어했다. 예수님은 논리적이 아니라, 선험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을 썼다. 가령 '하느님이 계시다'라고 했지, 그에 대한 논리적인 접근법을 보이진 않았다. 예수님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라고 했다. 이성적 접근이 가상하긴 하지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철학적인 소수의 논리에 그칠 뿐이다. 예수님은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김 교수는 "요한복음 강해를 했다고 내가 대단한 신학자라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건강한 논의를 위한 자극제를 던질 뿐이다"고 한다. 실제 그렇게 받아들일 부분이 있는가.

"먼저 전문가 집단 내에서 논의가 됐어야 했다. 검증되지 않은 의견을 방송사의 인터넷 강의란 대중 창구를 통해 일방통행으로 쏟아내는 것은 룰을 위반한 것이다. 학자의 룰, 전문가의 룰 말이다. 가설을 가지고 대중 앞에 나서서는 안 된다. 그건 위험한 일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할 때 이런 논의는 이미 있었다. 한국 신학계가 너무 상식적인 것들을 신도들에게 안 가르쳐 준다"고 김 교수는 비판한다. 수긍할 수 있나.

"이런 주장이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단에선 충분히 논의될 수 있다. 커리큘럼의 일환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 또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아직 토론 과정에 있는 커리큘럼을 대중에게 유포한다는 점이다. 대중의 이해 수준을 고려해야 한다. 때와 장소에 따라서 논의의 수위를 조절할 줄 알았던 예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

-김 교수는 종교간 소통은 경전 해석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본다.

"우주관과 세계관이 전혀 다른 여러 종교의 경전들을 비교 해석한다는 것은 아카데믹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제한된 시도다. 거기에는 많은 한계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서구 사회에선 역사적 인간으로 예수를 보기도 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예수를 보기도 한다. 김 교수는 "한국 기독교계는 예수의 권위와 신성을 건드릴 수 있는 어떠한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한국 기독교계는 절름발이인 셈"이라고 했다.

"인정한다. 역사비판학적인 관점으로 성서에 접근한다고 해서 성서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의 예수를 통해 예수님의 존재를 더욱 구체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다만 역사비판학적인 접근법에는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험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한국 기독교계에 이런 식의 접근법이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가령 '한 글자도 비판하지 말라'는 식의 문자주의적 입장은 한국적 기독교 현실의 한계이자 아쉬움이라고 할 수 있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양영석 인턴기자

◆ 차동엽 신부=세례명은 로베르토. 1981년 서울대 공대를 졸업했다. 해군에서 군 복무를 마친 후, 서울 가톨릭대학교와 미국 보스턴 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박사 학위는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취득했다.

91년에 사제로 서품 되었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또 교리 연구 및 성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미래사목연구소'소장직을 맡고 있으며, 교회 월간잡지 '참 소중한 당신'의 주간도 겸하고 있다. 평화신문에 성서를 분석한 글을 연재하고, 평화방송 강의와 전국 순회 강의 등을 통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무지개 원리'(동이)라는 자기 계발서를 썼다. 발간 100일 만에 10만 부가 넘게 팔리며 화제가 됐다. 주요 저서로는 '여기에 보물이 있다''밭에 묻힌 보물' 'Hi, 미스터 갓'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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