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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원 출판인회의 신임회장은 “도서정가제의 확립, 사재기 근절, 미래출판연구소의 설립 등을 통해 건전한 출판환경, 풍족한 출판환경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 출판계의 사정이 좋지 않다. ‘출판의 위기’니 ‘활자의 위기’니 하는 말이 ‘관용구’가 돼버렸을 정도다. 독자 수는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지난해 ‘인문학 위기’라는 말이 여론을 잠깐 환기시켰지만, 사정이 그다지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출판계 내부에선 자본력을 앞세운 거대 출판사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할인경쟁이 과열되면서 출판계의 양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베스트셀러 순위가 책 판매에 결정적이다보니 ‘사재기’ 논란이 불거지고, 대리번역과 대필 논란 등 독자들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사건도 끊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난제들이 첩첩이 쌓여있는 형국이다. 300여 단행본 출판사들로 구성된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으로 최근 선출된 이정원 도서출판 들녘 대표(52)의 어깨가 무거운 건 이 때문이다. 이회장에게 출판 유통환경 개선과 독서진흥 등 출판계의 주요 현안과 출판산업의 미래 등에 대해 들어봤다.
-출판인회의 신임 회장으로 선출된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누가 회장이 되었어도 출판인회의의 목표는 변함 없습니다. 건전하고 풍족한 출판 환경을 만드는 것이지요. 건전한 출판 환경은 도서정가제의 확립과 출판유통을 올바르게 잡는 것, 그리고 베스트셀러 조작을 위한 사재기를 뿌리 뽑는 것입니다. 자기만 살겠다는 사다리 경쟁이 아니라 기회균등의 출판 환경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풍족한 출판 환경을 만드는 일은 출판교육전문기관인 서울북인스티튜트(SBI) 사업으로 가시화되고 있어요. 새로운 인재를 양성해 출판계에 공급하고 기존 사원의 재교육을 통해 보다 높은 가치관을 세우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독서진흥사업도 박차를 가해야 할 부문입니다.”
-1998년 출판인회의 창립 당시 큰 역할을 했습니다. 출판인회의의 설립 배경과 지난 9년간의 활동을 평가해 주십시오.
“외환위기로 인한 서점 부도 사태 때 출판인들은 사상 초유의 위기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단행본 출판사들의 위기는 특히 심각했어요. 이러한 사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다시는 그런 위기를 겪지 않으려는 마음이 하나로 모아졌고, 단행본 출판사들 스스로 주체가 되어 출판인회의가 탄생했습니다. 처음엔 푸른숲 출판사 건물 골방에서 시작했습니다만 지금은 새 건물을 지어 출판인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어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출판인들의 피와 땀, 헌신과 봉사가 어우러졌습니다. 하지만 미진했던 점도 많습니다. 출판인회의 선정 ‘오늘의 책’ 사업과 잡지 ‘북 앤 이슈’가 자금난으로 중단된 일 등은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아요. 이 사업들을 다시 복원시킬 겁니다.”
-대리번역, 대필, 사재기 등 출판계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사건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왜 근절되지 않고 반복된다고 생각합니까.
“출판계의 불황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나누어 먹을 ‘파이’가 자꾸 줄어드는 상황에서 피말리는 과당경쟁이 심화될 수밖에 없어요. 몇몇 출판사의 사재기나 대리번역, 대필 등은 모두 베스트셀러를 조작하려는 안간힘에 불과합니다. 독자들은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고 구매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출판사들은 이 위험천만한 파울 플레이의 유혹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이같은 파울 플레이는 뿌리째 뽑아야 합니다. 출판인회의는 이를 가장 중요한 사업 목표로 정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외부인사들로 구성된 사재기 감시기구도 출범시킬 계획이고요. 독자들도 스스로 책을 선택하는 성의 정도는 보여줘야 합니다. 안 그러면 늘 조작된 베스트셀러의 함정에 빠지고, 이것은 곧 악순환의 고리로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출판계의 난제로 꼽히는 전근대적 도서 유통구조와 도서정가제 등의 해결에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상황과 개선 방안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가장 어렵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도서정가제입니다. 출판계는 아직도 4개월짜리 어음을 받고 있습니다. 반품시 물류비조차 감당해야 하는 것도 뼈아픈 현실입니다. 온라인 서점의 비공식적인 할인문제는 도를 넘어선 감이 있고, 과도한 경품경쟁은 출혈이 아니라 생존권마저 위협하고 있어요. 홈쇼핑은 출판자본의 비속한 각축장으로 변한 지 오래이고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도서정가제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저희가 머리를 맞대고 합의한 도서정가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유통 구조가 어느 정도 해결되리라고 봅니다. 또한 출판유통발전위원회도 설립할 예정입니다. 온·오프라인 서점, 도매상, 서적연합회 등 여러 단체를 대표하는 15명 정도가 모여, 합리적인 유통규약을 마련하여 상시적으로 유통을 관리하고 감독할 예정입니다. 이러한 관리감시기구가 출범하여 활성화된다면 유통문제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거라고 믿습니다.”
-출판산업의 미래 비전을 연구하는 가칭 ‘미래출판연구소’ 설립안을 밝혔습니다. 이 연구소는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요.
“사회가 너무 급변하고 있는 만큼 현재의 출판시장과 출판형태를 분석해 일종의 가상모델을 만들어서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나갈 것인지 단계적으로 전략을 짜나가야 합니다. 미래출판연구소에서는 출판환경을 분석한 종합백서를 만들어 출판환경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거시적으로는 출판은행과 출판전문 방송국을 설립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출판인회의는 그간 독서진흥에도 역점을 두겠다고 밝혀 왔지만 그에 걸맞은 활동은 거의 보여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독서진흥사업은 출판인회의가 추구하는 가장 미래지향적인 사업이지만 그간의 실적은 미미합니다.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금을 출판계 내부에서 조달하려고 했으니까요. 앞으로는 보다 능동적이고 구체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할 계획입니다. 외부의 지원과 자금을 적극 유치하고자 몇몇 분들이 소리 없이 뛰고 있고, 조만간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됩니다. 그간 저희는 매년 10월 독자들을 위한 책잔치인 ‘서울와우북페스티벌’과 매년 4월 ‘세계 책의 날’ 행사를 주도했습니다. 또 저자가 학교를 방문하는 ‘저자가 학교에 간다’가 15회에 걸쳐 이뤄졌습니다. 독서진흥을 위한 작은 운동이었지만, 그 반향은 컸습니다.”
-현재 출판계의 최대 고민 중 하나는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무엇이고, 대책은 없는지요.
“가장 난감한 질문이군요. 상대적으로 낮은 보수와 복지 문제가 아닐까요. 사실 출판계 복지 부분이 많이 향상됐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출판사가 내부적인 인재를 키워서 함께 책임지는 식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단행본의 대부분이 외국 서적의 번역물입니다. 출판계가 국내 저자를 개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것 아닌가요.
“출판사들이 당장에 급급한 부분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어떻게든 돈 버는 쪽으로 가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출판계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인문학 위기’라는 말이 나오고 있듯이 국가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입니다. 어렵게 책을 써내도 먹고 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다양한 국내 저자가 나오기 힘듭니다.”
-뉴미디어의 발전 등에 따른 활자문화 위기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책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책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출판계의 활황기점이라고 할 1990년대를 거치면서 기존의 충성 독자층은 너무 나이가 들어버렸습니다. 독서시장을 주도했던 386세대도 어느덧 책 한 권을 사기보다는 가족 부양과 과도한 교육비를 충당해야 하는 세대가 된 것이지요. 잠재 독자층으로 여겨졌던 청소년과 20대도 인터넷의 무차별한 유혹에 넘어간 상황입니다. 이들 젊은 세대는 책 한 권을 사기보다는 공짜 인터넷과 영화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책을 사서 읽기는커녕 빌려서 읽는 것조차 불편해하지요. 이같은 독서인구의 감소가 출판계의 불황을 불러왔고, 소자본 출판사들은 경영난으로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일은 매우 소중한 경험입니다. 무엇이든 획일화되는 인터넷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스미스 요원처럼 판박이가 되지 않으려면 책을 통해 삶의 자양분을 흡수해 자신의 고유성을 길러야 합니다. 이것은 곧 이 혼돈의 시대에서 승리하는 방법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고유성은 바로 다양성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도 있겠지요.”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 이정원은 누구
동국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왔다. 1987년 도서출판 들녘을 설립, 20년간 출판계 밥을 먹고 있다. 출판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너무 단순하다. 지방에서 대학강사로 있던 그에게 친한 후배가 찾아와 사회참여의 한 방편으로 사회과학 출판사를 하자고 권한 것이다. 강사 생활이 따분했던 터라 즉시 후배와 의기투합했지만 “편집도, 영업도, 디자인도 모르고 저질러 놓은 일”이니 몇년 간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사회주의 이행논쟁’ ‘정치경제체제론’ 등 이른바 ‘이념서적’을 냈지만 다른 사회과학 출판사와 마찬가지로 89년 소련 붕괴와 더불어 위기를 맞았다. 그때 “보따리 싸서 고향 내려갈 생각도 여러 번 했다”고 밝힌다. 94년 전례없는 판매량을 기록한 ‘퇴마록’으로 출판사의 기반을 다졌다. 이후 인문교양서 최초의 밀리언셀러인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분야에서 독자가 신뢰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98년 한국출판인회의 창립 당시 조직위원장을 맡았고, 이후 출판정보위원장,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지난 22일 임기 2년의 5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